◈ 201화. 다만 그 전에 (1)
드높은 제로 산맥.
그럼에도 산이기에 산답게 오르겠노라.
다짐한 내게 필요한 건 준비였다.
철저하게 해야지, 등산 준비.
“산이라, 그저 계단처럼 오르면 되는 것을.”
이봐요, 그랑펠 씨.
참 나, 누가 보면 내가 잘못된 건 줄 알겠네.
누가 봐도 그쪽이 이상한 거라니까?
‘내가 마탑 계단에서부터 알아봤다.’
세상에 어떤 사람이 또각─
거리는 구두를 신고 산을 오르냐고.
그리고 복장도 말이야.
기능성 등산복까진 바라지도 않아, 내가.
아무리 [온기]와 [첫 세계수의 축복] 버프가 있다고 하더라도.
어디 뒷산도 아니고 제로 산맥에서까지 정장은 좀 아니지 않냐?
그런 의미에서 확인해 두자.
드워프들이 나를 위해 제련 중이라는 새로운 방어구 말이야.
까다로운 심미안이 퇴짜를 놓지 않을까, 걱정은 한시름 덜어놓은 상태였다.
다른 이도 아니고 하이엘이 살폈다면 착용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겠지.
귀철의 제련도 끝난 참이었으니까.
슬슬 방어구도 막바지 작업에 한창이지 않을까.
그나저나 귀철하니까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귀철의 난해한 아이템 정보창.
[?]
[등급 : 전설]
[제한 : 알려지지 않음]
[효과 : 알려지지 않음]
[설명 : 고귀한 자아를 가진 에고 소드.]
그 이름이 물음표인 이유는.
주인인 내가 아직 이름을 붙이지 않은 덕분이겠지.
“작명인가.”
……제발, 의미심장하게 읊조리지 말아 주라, 그랑펠.
귀철에다가는 또 어떤 이름을 붙일까, 심히 걱정된다는 말이다.
‘제한이 알려지지 않은 이유도 뭐, 짐작이 되고.’
귀하신 [에픽] 아이템보다도 귀한 [전설] 아이템이다.
나야 [업적 : ‘전설’을 써내려가는 자]의 효과 덕분에.
전설급 아이템을 사용하기 위해선 친화력이 필요하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다른 이들은 사용 제한을 짐작할 수 없겠지. 적혀있는 것처럼 알려지지 않았다고 여길 만큼.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효과는…….’
문득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귀철의 말.
-애송이가 감히 이 몸을 가늠하려 들지 마라.
걔, 분명 셰그윈에게 그렇게 말했었지.
‘그 힘을 가늠할 수 없기에 알려지지 않았다…….’
당장 생각할 수 있는 건 그것밖에 없겠구나.
뭐, 실제로도.
귀철의 성능은 나도 가늠할 수 없을 정도였다.
‘셰그윈을 압도하게 만들어 줬으니까.’
그것도 검 대 검으로.
[천적관계]가 발동된 상태이긴 했다만.
귀철이 아니었다면, 나는 셰그윈에게 언제 숨통이 끊겼어도 이상하지 않았겠지. 그 쾌속의 움직임은 눈으로 따라기도 벅찼으니까.
냉정하게 따지자면.
나는 셰그윈에게 천적빨도 모자라서 템빨까지 끌고 온 다음에야 승리할 수 있었단 말이었다.
심지어 셰그윈은 검기조차 발산하지 못한 상태였고.
또 한 번 깨닫게 된다, 나의 나약함을.
그러나 한탄하지 않겠다.
제로 산맥이라는 판이 펼쳐진 지금.
레벨은 쟁취하는 것.
실제로 제로 산맥이 업데이트된 이후.
최상위권 플레이어들의 레벨은 가파르게 상승 중이었다.
그중에서도 삼인방.
──────
스칼 : 525레벨
록스 : 524레벨
류오쥔춘 : 523레벨
──────
각각 1레벨의 격차라니.
그건 셋과는 큰 접점이 없는 나조차도.
약간은 흥미진진해질 정도의 라이벌 구도였다.
하지만 조금은 의외인걸.
-근데……. 스칼은 이제 뭐함?
-ㅇㅇ?
-아니;; 다른 플레이어들은 제로 산맥에서 하루종일 사냥만 하는데 스칼은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임? 자기 혼자만 제자리걸음 중이지 않음??
-ㄹㅇ 이러다가 록스한테 역전되는 거 아님?
-왜 록스임? 류오쥔춘한테 따일 수도 있지
-ㅋㅋ말이 되는 소리를 하셈
미국과 중국.
샤이닝과 천하통일.
록스와 류오쥔춘이 끼어있는 탓일까.
커뮤티니, 곳곳에선 키보드 배틀이 끊이질 않았다.
평소 같았으면 나랑 별 관련도 없는 이야기.
궁금해도 쏟아지는 업무에 관심을 가질 수 없었겠지.
그러나.
‘확실히 스칼의 활동이 뜸해졌지?’
[월드 퀘스트 : 악룡(惡龍) 사냥꾼].
퀘스트를 위해서도.
또 아주 작은 가능성을 위해서라도.
스칼과는 대화를 나눠보겠다고 계획했던 바였다.
이 또한 업무의 연장선이라고 봐도 무관하단 말씀.
나는 이내 읊조렸다.
“숫자에 연연하는 것은 좋지 않은 법이거늘.”
하여튼 그놈의 고집.
귀철이 어디서 그런 말을 배웠나 했더니만.
다 너한테 배운 거였구나, 그랑펠.
그래도 어느 정도는 공감할 수 있다.
‘이제부턴 레벨에 연연할 때가 아니야.’
아르카나 시스템에서 레벨?
레벨 업마다 주어지는 포인트는 하나.
1레벨은 1스탯 포인트의 가치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것이 아르카나에서 스탯이 달린 아이템이 천문학적인 가격에 거래되는 이유였으니까.
하지만 겪어보니까 알게 됐다.
체력 단련 보상이라든가. 비약초의 효과라든가. 스탯은 다른 방식으로도 성장시킬 수 있다는 걸. 물론, 나에게만 해당하는 말일 수도 있겠지.
그럼에도 생각에 변함은 없다.
이제부터는 레벨보다 근본적인 능력을, 그릇을 성장시켜야 하니까. 사실 진작부터 느끼고 있었다.
꼭 깨닫는 게 아니더라도, 악마족 몬스터만 봐도 알 수 있었거든.
“격은 숫자 따위로 극복할 수 없는 것.”
같은 레벨의 일반몹과 보스몹이 다르듯.
일반적인 악마와 마왕은 그 무게감부터가 달랐으니.
그런 의미에선 우려가 될 수밖에 없다.
거악(巨惡).
그 녀석들은 대체 어떤 강함을 가지고 있는 걸까.
그렇게 생각하니 상당히 찝찝해지는군.
‘확실히 마왕들과는 다르다.’
데카라비아부터 시작해서 시무아르드 가문을 좀먹었던 율라까지. 마왕들은 제각각 움직임을 보였다.
그랑펠의 관점으로 말하자면 지나치게 나댔다고나 할까?
‘다시 태어난 탐욕을 제외하면…….’
그에 반에 거악은 지나치게 조용했다.
상위 마왕, 가미긴이 지옥에 처박혔든 말든.
처음부터 지금까지 계속.
그렇다.
그게 내가 언제까지고.
신세를 한탄할 수 없는 이유였다.
만약 지금의 평화가 폭풍전야라면…….
나에게는.
아니, 인류와 아르카나 대륙에 시간은 많지 않을 테니까.
뭐, 그런 면에선 레벨 시스템이 무의미하다고 볼 수는 또 없겠군.
보다시피 플레이어들에겐 경쟁이라는, 동기부여가 될 수 있을 테니까.
나는 입을 열었다.
“레이먼 션.”
그게 레이먼 션.
그쪽이 플레이어들에게 아르카나 시스템을 덧입힌 이유일까.
지금의 나, 이호열로서는 알 수가 없는 일이다.
하지만.
“내게 안배 따윈 필요 없다.”
말했던 것처럼 그쪽은 그랑펠한테 제대로 찍혔다니까.
“감히 나를 숫자로 가늠하려 들지 마라.”
물론, 그건 그랑펠의 사정이고.
나는 주어진 시스템을 전적으로 활용해야 한다.
최소한의 투자로, 최대의 효율을 뽑아낼 필요가 있다는 거다.
그런 의미에선 우선, 1레벨이라도 올려보자.
[집념 : 정신력을 능력치로 환산한다. 집념이 상승할 때마다 환산되는 능력치가 추가로 상승.]
집념의 효율을 계산하기 위해서라도 말이지.
‘내 팔자야.’
그런 의미에서는 참 인생사 새옹지마다.
직장인 시절.
부장님한테 깨져가면서도.
끌려가지 않았던 주말 등산을 다 가보게 생겼구나, 호열아…….
*
아이언 캐슬 호.
드레드센 마을 생존자들은 무사히 안토니움에 정착했다.
덕분에 북적거리던 아이언 캐슬 호도 잠잠해졌다.
흐르는 정적─
드워프가 원래부터 과묵한 종족이라서?
그럴 리가 있나.
드워프가 금속만큼이나 달고 사는 것이 술이었다.
술이 들어가면 빠지지 않는 것이 바로 호탕한 웃음소리고. 정리하자면 지금의 침묵에는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벌컥!
“……뭔가 자네들?”
귀철과의 자존심 한판 대결.
그 승부를 마친 드워프 최고의 대장장이.
월스와일은 며칠 동안 앓아누웠었다.
비록 짧더라도 굵은 강골을 자랑하는 게 드워프들.
그것도 모자라 숨을 쉬는 것만큼 익숙한 제련이 아니던가?
월스와일, 자신도 얼마나 제련에 심혈을 기울였기에 이런 피로가 쏟아지는 것인가. 새삼스럽게 놀라울 정도였다.
그런데.
“아니, 왜 다들 그렇게 널브러져 있는 겐가?”
체인워커를 비롯한 모든 드워프가 아이언 캐슬 호의 차디찬 바닥에 쓰러져 있는 것이 아닌가? 그나마 반응할 힘이 남아있던 젊은 드워프 하나가 고개를 들고 말했다.
“……월스와일 님, 깨어나셨습니까?”
“그렇다네. 그보다 이게 무슨 일인가, 자네들?”
“그게……. 하얗게 불태웠습니다.”
“하얗게 불태워? 뭘?”
“휴식하시는 동안 제련을 끝냈거든요.”
그렇다.
탈진한 월스와일이 휴식을 취하는 동안.
드워프들은 호열의 방어 장비 제작에 모든 힘을 쏟아부었다. 쉴 새 없이 망치를 두들기고 보석을 세공하고 심지어는 바느질까지 해가면서.
“뭐?”
그러니까 월스와일은 흠칫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제련한 귀철이야, 그 재료가 워낙 희귀하고 또 지랄……. 아니, 유별났기에 그렇다고 치더라도. 방어구엔 귀철에 비할 정도로 심혈을 기울일 요소가 없지 않았던가?
물론, 재료의 질이 떨어진다는 뜻은 아니다.
마력의 백금.
고순도 마력석.
남색 나비 실타래…….
드래곤에 맞서는 호열을 위한 장비였다.
과거, 아르카나 대륙이 온전하던 시절. 저 재료 중 하나라도 대륙에 풀리게 된다면 그 가치는 웬만한 영지와 맞먹을 정도였으니.
그 말인즉.
“자네들, 대체 얼마나 무리를 한 게야?”
그저 탈진할 정도로 전력을 기울였다는 소리겠지.
월스와일은 당장 그 결과물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체인워커!”
“……음? 깨어난 건가?”
“어디 있나? 자네들이 제련했다는 장비!”
“아, 그거라면 이미 하이엘께서 호열 경에게 전달하러 간 참이네.”
“뭣? 벌써?!”
흔들흔들!
궁금증을 해결하지 못하다니.
월스와일은 안타까운 마음을 체인워커의 멱살을 잡고 흔드는 것으로 표출했다. 그의 손아귀에서 간신히 빠져나온 체인워커가 웃었다.
“으하하. 걱정할 것 없네.”
“……?”
“자네가 제련한 에고 소드에 손색없는 방어구를 제련해 냈다고. 내가 장담하겠네. 우리가 자네의 손재주를 따라갈 수는 없겠지만…….”
체인워커의 눈매가 결연히 반짝였다.
“정말 최선을 다했으니 말일세. 믿어주게.”
“…….”
“게다가 우리도 호열 경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으니.”
“……!”
드워프, 최고의 대장장이라는 칭호가 괜히 뒤따른 게 아니다.
귀철과 수십 일 동안 한 치의 양보 없는 신경전을 벌인 것도 괜한 자존심을 부린 게 아니란 뜻이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월스와일이 고집을 꺾었다.
“그런가. 자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그런 거겠지.”
체인워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거, 자네에게도 한소릴 들으면 어쩌나 싶었네.”
“자네에게도? 왜, 또 누가 뭐라고 하던가?”
“정말 기절하듯 잠들었던 모양이군.”
“?”
체인워커가 속삭였다.
“귀철을 보는 줄 알았네.”
“……그게 무슨 소리야?”
“두 정령님들을 말하는 것이네.”
체인워커는 다시금 떠올리고 말았다.
귓가에 맴도는 하이엘과 디엔드.
귀철을 뺨치는 두 정령의 까다로운 요구사항들을.
-“한없이 깊은 어둠을 표현하기엔 부족하군.”
-“조금 더 화려한 세공이 필요해 보입니다.”
-“그렇다면 한없이 화려할 필요가 있겠군.”
-“저 또한 같은 의견입니다.”
하얗게 불태웠다는 말이 거짓이 아니다.
증명하듯 하얗게 질린 체인워커의 얼굴.
그 반응에 월스와일의 가슴 속에서.
간신히 잠재웠던 궁금증이 다시금 샘솟았다.
투박한 손아귀가 또 한 번 체인워커의 멱살을 붙잡았다.
흔들흔들!
“대체 뭘 어떻게 만든 게야, 자네들!”
“부탁인데, 그만 흔들면 안 되겠나?”
“설명하게! 당장 말해주게!”
“……진심으로 멀미가. 우욱!”
과연, 드워프는 흥이 넘치는 종족이다.
.
.
.
십만 동굴.
십만 개나 있다고 제로 산맥에 널려있을 거로 생각하면 오산이다.
면적은 호주에 맞먹을 정도. 그 높이는 성층권을 가뿐하게 돌파할 정도의 웅장함이시다.
‘위치를 알고 있지 않는다면 찾기 어렵단 거지.’
그 증거로 플레이어들은 십만 동굴 중에서 단 하나의 동굴조차 찾지 못한 상태였다. AAU에게서 나와 똑같은 정보를 전달받았어도 말이지.
물론, 내게는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나한테는 「마법」이 있었으니까.
산맥을 뒤덮다시피 발현해 뒀던 라이트.
그 마력 덩어리를 탐색.
‘간섭 과정에서 시야 공유를 더하면…….’
이렇게 특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동굴의 위치를.
포탈의 좌표는 발견한 동굴 앞.
고오오─
나는 곧장 포탈을 발현, 진입했다.
이게 말은 굉장히 쉬워 보였지만, 마르셀로가 들어도 경악할 정도의 마법 발현일 거다.
애초에 시야 공유 간섭 과정 자체가 [마안(魔眼)의 망원경]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것이었으니까.
‘마법도 모자라서 아이템의 효과까지 어느 정도 따라서 발현할 수 있다니.’
새삼스럽게 서클이 대단하긴 하다.
서클을 형성함으로써.
비로소 그랑펠의 재능을 제대로 활용하는 기분이군.
그랑펠 성격에 어째 우쭐할 법도 한데.
이거, 그럴 분위기가 아니었구만.
동굴 앞에 서자 떠오른 메시지.
[던전 : 용암의 사이렌]
[적정 레벨 : Lv.800]
[붕괴 진행도 : 0%]
예상대로 동굴은 균열 취급이었다.
다른 점은 붕괴 진행도가 0퍼센트에 멈춰있다는 것.
제로 산맥이 이미 붕괴한 상태나 다름없는 덕분이겠지.
‘천적관계 없이 800레벨 던전인가.’
그냥 몬스터라면 우려할 필요가 없었거늘.
나는 런던에서 던전의 위험성을 경험했었다.
던전의 변수를 생각하면 혼자서는 부담스러울 수도 있다는 거지.
그러나 누가 혼자라는 거냐.
나에게는 누구보다 듬직한 동료.
아니, 분신이 셋이나 있는데.
하이엘, 디엔드, 귀철까지.
다들 어디에 내놔도 약간 낯 뜨거워진다는 게 문제지만…….
나는 곧장 동굴에 진입했다.
그러곤 우선 하이엘의 이름을 불렀다.
이내, 허공에서 모습을 드러낸 하이엘.
그런데, 품에 안고 있는 그거.
혹시 내 새로운 방어구니, 하이엘?
아니, 근데 잠깐만.
무슨 방어구가 그렇게 휘황찬란한 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