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199화 (199/489)

◈ 199화. 전해지는 승전보

AAU엔 난데없이 폭탄이 떨어졌다.

“그, 그러니까 지금 그 말을 믿으라고요? 또요?”

지부장 화상 회의.

대한민국 지부장, 박민재뿐만 아니었다.

뒤늦게 소식을 접한 지부장들.

모두가 마치 짠 것처럼 관자놀이를 지그시 눌렀다.

머리가 지끈거려서 참을 수 없었다!

“결투 참관 메시지가 떠서 승낙했다…….”

“그랬더니 갑자기 시야가 바뀌었다.”

“눈을 떴더니 웅장한 콜로세움이 나타났다……?”

“아니, 이걸 어떻게 믿으라는 건가요.”

마지막으로 한탄을 뱉은 건 박민재였다.

“이럴 땐 하루라도 플레이어가 돼보고 싶다니까요? 진짜로 우리 플레이어님들께서 이런 걸로 거짓말을 할 이유는 없으실 테고…….”

런던 지부장, 베이커 채트.

그는 흥미롭다는 듯 으하하 웃어 재꼈다.

“슈레이그의 말에 따르면 그렇게 화려한 콜로세움은 처음 봤다고 하던데요?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부터 쳐서 말이죠!”

“보석과 황금으로 지어진 콜로세움이라니…….”

“없잖습니까? 아르카나 대륙에도 그런 건.”

개발자 시절을 되살려 기억과 데이터베이스를 뒤져봐도.

플레이어들의 증언과 일치하는 콜로세움은 없었다.

아니지, 애초에 진입 방식조차 말이 안 되지 않는가?

“균열이나 포탈에 진입한 것도 아닙니다.”

“그렇죠! 그냥 눈을 감았다가 떴을 뿐이니까요!”

“시간이 흐르는 속도도 다르고요.”

미국 서부 지부장.

조슈아는 록스 일행과 그와 관련된 대화를 나눴다.

적어도 수십 분은 콜로세움에서 결투가 진행되었다는데, 현실로 돌아온 뒤 시간을 확인해 보니 불과 수십 초도 지나지 않았다고 했었지.

“……대체 단체로 어딜 다녀온 거랍니까?”

하여튼, 빌어먹을 아르카나!

하나를 알게 되면 모르는 게 와르르 쏟아진다.

박민재는 답답한 심정에 고개를 떨궜다.

덕분에 자신의 정수리에 쏟아지는 지부장들의 시선을 놓치고 말았다.

“근데 말입니다, 박 지부장님.”

“듣고 있습니다. 저, 자는 게 아니라 생각 중입니다.”

“알고 계실 분이 한 분 계시지 않습니까?”

“……예?”

은근한 목소리 고개를 든 박민재.

그에게 쏟아지는 건.

지부장들의 기대 어린 시선이었다.

직감할 수 있었다.

“……설마, 유스라 총책임자님 말씀하시는 겁니까?”

플레이어이자 유스라 지부 총책임자.

그와 동시에.

쏟아지는 의문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

이호열.

‘그건 좀.’

그러나 그런 호열과 단둘이 마주하는 건.

박민재로서도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니까 박민재는 다급히 화제를 전환했다.

“그쵸. 이야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대단하시지 않습니까? 검성, 셰그윈을 검을 쓰러트리시다니요! 완전 대박 사건!!”

애써 젊은이들의 단어를 빌린 효과려나.

지부장들이 하나둘 고개를 끄덕였다.

“셰그윈, 사실 플레이어더러 쓰러트리거나 대적하라고 설계한 NPC가 아니지 않습니까? 플레이어들에겐 범접할 수 없는 태산 격으로 만든 NPC잖아요.”

그랬다.

어찌 보면 마탑과 마찬가지였다.

검성.

말 그대로 검의 정점.

너무나도 강했기에 아르카나 대륙에 영향을 끼치게 설계할 순 없었다.

오직 검밖에 모른다는 외골수 설정을 넣은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었지.

“설정상의 나이를 생각하면……. 진작에 자연사했을 인물이기도 하고요.”

“그 부분에 대해선 조금 더 플레이어들의 이야기를 들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게 당장으로선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있어서요.”

젊음을 되찾은 셰그윈이라니.

그것만으로도 놀라운 일인데.

호열과의 결투에서 패배한 뒤에는 다시 노인이 되더니만.

녹색 불길에 휩싸여 검과 함께 사라져 버렸단다.

목격자가 한둘이 아니어서 망정이었다.

“……그런데 이건 알려져도 믿기 힘든 이야기겠는데요?”

아무리 목격한 플레이어가 많다고 하더라도.

단체로 환각을 목격한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인간적으로 너무나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아닌가?

특히.

“아무리 이호열 총책임자님이라고 해도…….”

검으로 검성을 꺾었다니.

아까도 말했던 것처럼 셰그윈은 플레이어가 꺾을 수 있게 설계된 존재가 아니다.

플레이어들이 알게 된다면 경악을 금치 못할 정도로 사기적인 능력치, 고유 스킬을 보유하고 있었으니까.

때문에 그와 관련해서도 이야기가 오갔다.

“글쎄요. 뭔가 착오가 있지 않았겠습니까?”

“착오라뇨?”

“알다시피 검성은 정점으로 설계된 캐릭터입니다. 검으로는 이길 수 없도록 만들어졌단 말입니다. 그래서 노인으로, 아르카나 스토리가 진행되면서 자연스럽게 퇴장할 인물이었고요.”

“……그거야 그렇죠.”

“뭔가 플레이어들이 정상적인 판단을 할 수 없는 상황이 아니었을까요? 왜, 플레이어들의 증언에서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호화스러운 콜로세움도 모자라서, 젊음을 되찾은 셰그윈이 다시 노인이 돼서는 녹색 불길에 휩싸였다니.”

……이거, 화제가 돌아가서 다행이기는 한데.

잠자코 듣고 있자니 또 열이 받았다.

박민재가 썩은 미소를 흘렸다.

조슈아, 감히 우리 총책임자님을 의심해?

앞에서 알랑방귀를 뀔 때는 언제고.

하여튼 추잡하다.

몇몇은 긍지라곤 찾아볼 수 없다.

“후하─”

레이먼 션에게 들이박았던 박민재의 본성이 튀어나오려던 찰나.

각 지부장에게 긴급한 소식이 전해졌다.

“?”

다름 아닌 아르카나 공식 홈페이지 업데이트 소식.

누군가 절규하듯 소리쳤다.

“오늘 목요일도 아니잖아? 설마 긴급 업데이트라고?!”

다행히도 최악은 아니었다.

떠오른 건 업데이트 내역이 아니었으니까.

그래, 홈페이지에 떠오른 건 동영상 하나.

“……아르카나 공식 계정? 이거 레이먼 션이 업로드한 건데요? 잠깐, 레이먼이 동영상을 올렸다고? 업데이트 내역 말고 다른 게시글이 업로드된 건 처음이잖습니까?!”

“진정하고. 일단, 재생해 봅시다.”

이내, 지부장 채팅룸에 공유되는 동영상.

“……!!!”

유달리 말이 많던 조슈아는 입을 다물었다.

재생된 영상에 떠오른 것은 콜로세움.

검성과 마주한 호열의 모습.

그리고 화려한 공방 끝.

검성을 쓰러트린 호열이 꼿꼿하게 서 있었으니까.

*

그래, 화제가 될 수밖에 없겠지.

‘내가 봐도 놀랄 정도였으니까.’

아르카나 공식 홈페이지에 박제된 셰그윈과의 결투.

플레이어의 시점에서 촬영된 게 아니었다.

사방에서 카메라 들이댄 것 같은 앵글.

그리고 블록버스터 영화 뺨치는 편집까지.

이런 짓을 벌일 수 있는 이는 한 명밖에 없으리라.

‘레이먼 션.’

아주 그냥 액션 영화 뺨치게 찍어주신 덕분에 커뮤니티는 난리가 났다.

셰그윈과 합을 주고받는 장면에서는 슬로우모션까지 걸어놓지를 않나. 포장도 모자라 금칠까지 덕지덕지 발라놓으셨다.

-실화냐고ㅋㅋㅋㅋ검성보다 더 검성 같은데?

-슬로우 걸었어도 눈이 따라갈 수 없음 ㄹㅇ

-내가 우산으로 싸울 때부터 알아봤자너ㅋㅋ 검술 실력

당연하게도 마음이 편할 수가 없다.

그야 저 움직임은 나의 검술에서 비롯된 게 아니었으니까.

모든 건 에고 소드.

[전설]급 아이템.

귀철 덕분이란 말이다……!

‘하여튼 철면피.’

그러나 내 얼굴에서.

그 진실이 드러날 리가 없었으니.

괜히 내가 봐도 놀랄 정도라는 게 아니었다.

알고 봐도 속을 정도로 표정이 진지한 게.

과연, 검성의 자리를 두고 벌이는 결투라고 봐도 손색이 없을 정도구만.

달칵─

내려놓는 것은 티백이 잠긴 찻잔.

하지만 나는 이해한다고 해도.

그랑펠의 심기가 용납할 수 있을 리가 없겠지.

나는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레이먼 션, 그대에겐 자격이 없다.”

마지막 순간.

셰그윈이 발산했던 더없이 푸른 검강.

그가 긍지를 되찾은 덕분인지.

그게 아니라면 칭호 [숭고]의 효과 때문인지.

나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하다.

“그의 마지막을 구경거리로 만들 자격이.”

승리에 환호하는 이들을 책망하는 게 아니다.

그들은 셰그윈과 나 사이에 어떤 사정이 있었는지 알지 못하잖아? 마지막 순간, 어째서 지옥의 불길이 셰그윈을 집어삼켰는지도 모를 거다. 지옥의 불이 뭔지도 모를 테니까.

근데.

그쪽은 전부 알고 있잖아, 레이먼 션.

모든 걸 알면서도 그러는 건.

그랑펠의 긍지께서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서 말이야.

“언젠가 우리가 만나게 될 날을 기대하겠다.”

언제가 될 줄은 모르겠다만.

나도 기대가 되는걸?

모든 일의 원흉이잖아, 레이먼 당신이야말로.

나도 갚아줄 게 있다는 말이다.

‘그쪽만 아니었어도.’

내가 수치사를 걱정할 필요는 없었는데!

됐다, 당사자는 듣지도 못할 신세 한탄은 관두자.

게다가 당장은 확인할 게 있었으니까.

시공간의 결투에서 승리.

승리로 지급된 보상.

그건 금화였다.

정확하게 일백(一百) 개.

“금화라…….”

그놈의 청렴결백.

부귀영화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건 충분히 알고 있거든, 그랑펠.

하지만 그냥 금화가 아니니까 조금은 인내심을 가지고 살펴봐라.

[시공간의 금화]

[등급 : 에픽]

[제한 : 초월자]

[효과 : 시공간에서 화폐로 사용 가능.]

[설명 : 초월자의 영역, 시공간에서 통용되는 금화.]

시공간의 금화.

한마디로 [고인물 커뮤니티], 『시공간』에서 쓰이는 돈이었다.

상세한 쓰임새야 아직은 짐작할 수밖에 없었다.

AAU에서 전해준 정보가 있긴 했다만, 어떤 식으로 구현됐을지는 직접 경험해야 알 수 있는 거니까. 시공간의 결투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야.

그래도 사교장에서의 사용법만큼은 이미 알고 있지.

“으음.”

이거 봐.

차 주문하는 데 필요하다니까 그냥 넘어가는 거.

대체 얼마나 티타임을 중요하게 여기는 건데?

물론, 승리 보상은 금화로 끝이 아니었다.

아르카나 공식 홈페이지에 결투 영상이 업로드된 참이다.

그에 따른 수익이 내 앞으로 떨어질 터.

그야말로 진짜 부귀영화였으니, 내게는 쓸데없는 보상이었지만.

‘……적금이라 생각하자.’

모아두면 노후에라도 다 쓸데가 있겠지.

어쨌든, 형식적인 승리 보상은 거기까지.

사실 이제부터가 진짜 보상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칭호를 확인했다.

[초월자 : 그대의 초월적인 경지는 초월자라 불리기에 충분하다. - 현재 도달한 성취 : 서클 (모든 마법 발현력 1,000% 상승) / 미완성 쾌검술 / 없음 / 없음…….]

성취에 새롭게 떠오른 미완성 쾌검술.

그렇다.

이번에도 그랑펠의 재능이었다.

마법을 목격한 것만으로 따라 발현하듯.

셰그윈의 쾌검술마저 합을 겨루며 목격하고.

결국에는 습득해 냈다는 것이다.

‘아직 미완성이라 효과가 명시되진 않았지만…….’

갈고닦는다면.

서클처럼 제대로 된 효과가 떠오르지 않을까?

내게는 금화나 돈보다도 훨씬 와 닿는 수확이었다.

다른 누구의 검술도 아닌 검성.

셰그윈의 검술을 습득한 셈이었으니까.

나는 읊조렸다.

“그대의 검로는 내가 이어 걷겠다.”

참 고상하게도 돌려서 말하는구나, 그랑펠.

“진정한 승리를 거머쥐기 위해서라도.”

그리고 뒤끝 한번 장난 아니구나, 그랑펠.

진정한 승리가 뭐냐고?

기승전악마.

당연하게도 성전에서의 승리를 말하는 것이다.

유혹에 넘어간 셰그윈이었지만, 그는 마지막 순간 긍지를 되찾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악한 건 셰그윈의 연약함을 파고들어 기만한 악마였으니까.

‘이렇게 또 긍지에 긍지를 얹는구나…….’

백날 발버둥 치면 뭐 하냐?

버틸만하면 남의 긍지마저 얹어버리는데.

하지만 말했다시피 모든 것이 나의 업보겠지.

그래도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자.

‘……맞아, 홈페이지에 박제가 안 된 게 어디냐?’

어디에 내놔도 부끄러운 이름.

[이름 :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

개인정보를 비공개로 돌려놔서 다행이다, 진심…….

.

.

.

시공간의 사교장.

보이는 건 테이블에 널브러진 여인 뿐이었다.

……저 사람, 언제부터 저러고 있는 건데?

사교장에 입장한 사내는 혀를 찼다.

“마녀님은 금화 벌어서 전부 연초 사는 데 쓰십니까?”

“주둥아리 다물지 그러느냐.”

“……쩝, 무서워서 말도 못 걸겠네.”

일출의 무사.

짧은 흑발의 사내는 자리에 앉았다.

짤랑─

금화 하나를 꺼내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곧장, 물이 담긴 컵 한 잔이 허공에서 나타났다.

“크.”

금화 한 닢짜리 『달의 정화수』.

삼키기 무섭게 육체의 피로가 씻은 듯 사라졌다.

사내는 사교장을 살폈다.

“……마녀님,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귀한 영약으로 만든 연초를 입에 달고 사는 건 아무리 금화가 많다고 해도 과소비 아닙니까? 뭐, 금화 많다고 자랑하는 것도 아니고.”

무려 한 개비에 금화 열 개짜리 연초.

그걸 귀한 걸 언제나처럼.

뻑뻑 피워대는 ‘남쪽 바다의 마녀’님 말고는.

다른 초월자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사내는 어깨를 으쓱였다.

“다들 여러모로 바쁜가 보군.”

아르카나 대륙의 상황을 보면 그럴 법도 하지.

지금이야말로 초월자들.

각자가 자기 뜻을 펼칠 시기일 테니까.

그런 의미에서는 의외였다.

“웬일로 영감이 안 보이네.”

셰그윈.

다른 초월자들과 다르게.

자신의 검로만을 추구하는 노인네.

“물어볼 게 좀 있었는데.”

셰그윈이 젊음을 되찾았든, 뭐가 됐든.

사내에게는 중요하지 않은 일이었다.

어차피 검에 관한 담론 말고는 서로가 서로에게 관심이 없었으니까.

그런 사내의 시야에 문득, 양피지가 들어왔다.

힐끗─

사내가 연초 기운에 널브러진 여인을 흘겨봤다.

“이것도 확인 안 하셨네. 제가 까봅니다?”

사교장에 새로운 소식이 도착하는 건 흔치 않은 일이거늘.

대답도 못하는 게 저건 완전 중독이라니까, 중독.

사내는 고개를 내젓고는 양피지를 펼쳤다.

그런 사내의 얼굴에 동요가 일었다.

“……시공간의 결투에서 사망?”

……셰그윈, 그 영감이?

몇 차례 대화를 나눠봤기에 알 수 있었다.

셰그윈, 그가 상당한 실력의 검사였다는 것을.

애초에 자신과 같은 초월자가 아니던가?

“……어떤 놈이냐?”

사내는 그 상대의 이름을 확인했다.

그리고 흠칫했다.

그건 여태까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이름.

그렇기에 추측할 수 있는 단 한 사람.

“신참인가.”

그랬다.

업적 평가 때는 드러나지 않았던 사내의 이름이.

양피지에 적혀있었다.

사내가 그 이름을 읊조렸다.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

“……?!”

그때였다.

덜컥!

옆자리에 널브러져 있던 마녀가 몸을 바로 세웠다.

그렇지 않아도 매서운 눈을 더욱 날카롭게 뜨면서.

사내에게 말했다.

“다시 말해.”

“……갑자기 무슨 소리를?”

“그 이름, 다시 말하라고.”

……이름?

길어서 제대로 듣지 못했나.

사내가 다시 한번 중얼거렸다.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

그러자 마녀가 되뇌었다.

“그랑펠……. 클라우디……? 크, 클라우디 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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