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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197화 (197/489)

◈ 197화. 전설의 출현

[?]

[등급 : 전설]

[제한 : 알려지지 않음]

[효과 : 알려지지 않음]

[설명 : 고귀한 자아를 가진 에고 소드.]

이름은 물음표.

그 제한과 효과는 알려지지 않았다고……?

길고 긴 기다림 끝.

뭐, 이딴 에고 장비가 만들어진 거냐고.

나는 한탄부터 했을지도 모른다.

등급마저 떠오르지 않았더라면 말이야.

‘전설……?’

알려진 바.

아르카나에서 가장 높은 아이템 등급은 [에픽]이다.

가장 높은 등급의 아이템답게 [에픽] 아이템은 절대 흔하지 않았다.

마왕의 전리품 정도는 돼야 [에픽] 등급으로 분류됐으니까.

‘저, 전서어어얼?!’

그런데, [전설]이라니.

헛것을 본 게 아니라는 듯.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업적 : ‘전설’을 써내려가는 자]

[효과 : 모든 ‘전설’ 등급 아이템 친화력이 소폭 상승]

[지속시간 : 영구지속]

그저 아이템을 손에 쥔 것만으로.

업적을 달성하게 되다니.

비로소 실감이 난다.

‘귀철아, 너 정말……!’

레전드로 꼬장을 부리더니, 진짜 전설이 됐구나.

하긴 귀철의 행보를 떠올려 보니.

나도 모르게 고개가 끄덕여질 뻔했다.

그 재료부터가 에고 장비가 되는 귀철이 아니던가?

거기에다가 드워프 최고의 대장장이, 월스와일이 제련을 맡았다.

호화스러운 담금질에 방점을 찍은 건 검성이 탐낸 마도구, [은하수 숫돌]이었으니.

과연, 귀하신 몸일 수밖에 없겠지.

근데, 잠깐.

마냥 흡족하게 볼 메시지가 아니잖아, 이거?

‘……친화력?’

업적의 효과가 어째 범상치 않았다.

대충 뉘앙스를 보니까…….

설마, [전설]급 아이템은 사용자를 가린다는 건가?

‘친화력이 낮으면 사용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그러나 우려할 건 없었다.

다른 전설급 아이템이라면 몰라도.

귀철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는 말일 테니까.

[이미 친화력이 최대치에 도달했습니다.]

그렇다.

내가 귀철을 선택한 게 아니었다.

귀철이 나를 선택한 것이었으니까.

나의 자신감을 증명하듯.

귀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순간만을 기다려 왔다. 나의 주인이여.

과연, 손에 쥐여오는 느낌부터가 다르다.

‘귀철의 목소리가 머리로 전해져 온다.’

귀철을 쥔 오른손에서부터 전해지는 울림, 고동, 공명…….

정말로 살아있는 듯한 느낌.

셰그윈이 어째서 검에게 말을 걸어댄 건지.

이해가 되는 기분이다.

‘……전에 쓰던 검도 모자란 게 아니었는데.’

[무명 대장장이의 유작-장검].

280레벨 제한의 장비였지만, 그래도 [유니크] 등급 장비였다.

[출혈] 효과까지 붙어있어서 검강을 발산하면, 500레벨 대의 몬스터를 상대할 때도 부족함이 느껴지지 않았거늘.

‘이건 차원이 다르다.’

내가 제대로 다룰 수만 있다면.

정말로 무엇이든 베어낼 수 있다는 확신이 들 정도.

과연, 검성이기에 검을 알아본다는 건가.

“……!”

셰그윈의 눈빛에 동요가 일었다.

댁의 아틀라스가 대단한 명검인 것쯤이야, 나도 그랑펠의 심미안을 통해서 어느 정도 알고 있기는 한데. 성능으로 보나, 심미적 관점으로 보나.

이젠 우리 귀철이가 몇 수 위처럼 보이는걸?

“……하하.”

허탈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나의 생각이 맞았다. 네놈은 흔하디흔한 마법사가 아니었어. 마법은 물론, 그만한 검에게 인정을 받을 정도의 검술 실력을 갖춘 괴물이었구나.”

셰그윈은 끅끅─ 웃었다.

“그러니 그런 말도 안 되는 업적을 세우고, 만장일치로 시공간에 입성한 거겠지. 빌어먹게도 우물 안 개구리였구나, 셰그윈. 뭐가 유일의 그랜드 소드 마스터고, 뭐가 검성이라는 말이냐.”

……아니, 처량한 신세 한탄 중에 미안한데요.

지금 누가 누구더러 괴물이라는 거야?

셰그윈, 오해해도 단단히 오해하고 있다.

만장일치로 시공간 입성이었다니, 고맙기는 한데.

그 업적이 어디 나 혼자 힘으로 세운 업적이냐고!

상위 마왕, 가미긴의 처치.

그건 말 그대로.

천운(天運)이 따른 덕분이었다.

마왕 쟁탈전으로 ‘지옥의 문’이 열리고, 그런 지옥에서 악크샨 선배님들을 불러내고, 도움을 받은 덕분에 가능했던 일이란 말이다.

그러나.

‘좀 민망해하는 척이라도 하든가.’

말하나 마나 그랑펠의 목은 꼿꼿하기 그지없었다.

그래도 입은 다물고 있어서 다행이다…….

왜, 관중석을 한번 둘러보자.

‘보는 눈이 이렇게 많은데.’

인파 앞에서 망언을 뱉는다?

상상만 해도 더없이 끔찍하다…….

허나, 나는 간과하고 말았다.

하이엘, 디엔드에 이은 나의 또 하나의 분신을.

-뭐라고 지껄이는 거냐, 애송이가.

……갑자기 뭔데, 급발진이야?!

‘뭣보다.’

너 지금 셰그윈한테 애송이라고 한 거니, 귀철아?

저래 보여도 나이가 몇 살인데!

그랑펠도 그렇게 시비조의 단어를 내뱉진 않는단 말이다.

차라리 셰그윈이 알아듣지 못했다면 좋았을거늘.

검기의 사용자가 검기를 알아보듯.

셰그윈 또한 아틀라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듯.

귀철의 말도 알아들을 수 있는 모양이었다.

“……나더러 애송이라고?”

순간, 솟구치는 살기.

그러나 귀철은 조금도 주눅 들지 않고 말을 이었다.

-애송아, 네 검의 비명이 들리지 않는다는 말이냐?

“……!”

-그 끔찍한 비명을 듣지도 못하면서 스스로를 가엾이 여기다니. 검을 쥐고 휘두른 세월이 무색하구나. 역시 너는 잘못된 길을 걸었다, 애송이.

검 대 검으로.

나의 긍지로.

셰그윈의 긍지를 꺾어주겠노라.

다짐이 무색해지게도.

이거, 내가 할 말을 귀철이 벌써 다 해버렸잖아.

정말이지, 누굴 닮아서 말 하나는 잘하는구나.

물론, 언제나 그 뒷감당을 해야 하는 건 나지만.

“다물어라.”

빠득!

이 가는 소리와 함께 쇄도해오는 셰그윈.

몇 번이나 강조했다시피.

[천적관계]는 쉽게 극복할 수 없다.

타고나기를 거악으로 태어난 칠죄종, 탐욕조차도.

경험이 없다면 극복할 수 없는 관계라는 것이다.

타타탓!

그러나 이 순간, 셰그윈의 움직임에 공포는 없었다.

악마와 계약하고, 인간이기를 포기하면서까지 걸어왔던 자신의 검로(劍路). 그 행보를 귀철에게 모욕당한 것에 대한 분노가 천적에 대한 공포마저 집어삼켰다는 거겠지.

그러나 명심해라, 셰그윈.

나는 냄새를 쫓았다.

냄새가 풍겨오는 방향으로 검을 치켜들었다.

“모든 것이 그대의 선택이었다.”

어차피 죽었을 인간들이었다고?

아니, 셰그윈 당신이었다면 구하고도 남았다.

그쪽은 단지 저울질 끝에 선택한 것뿐이다.

최악의 길을.

생각하는 내게 귀철이 말했다.

-부탁이 있다, 나의 주인이여.

챙!

맞부딪히는 귀철과 아틀라스.

귀철이 음성이 더욱 가라앉았다.

-이 결투를 내게 맡겨주겠는가.

진심으로 그보다 듬직한 말이 또 없구나.

왜, 지금만 하더라도.

나는 셰그윈의 움직임을 완전히 놓치고 말았거든.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빨라……!!”

“전성기의 검성이야. 얼마나 강할지 짐작도 안 돼!”

“그런데, 그런 일격을 호열 님이 완벽하게 막아냈다고!!”

과연, 지켜보는 플레이어들의 눈이 정확하다.

폭발력만 따지자면 전성기보다 강성해졌을 셰그윈의 육체.

그 쾌속의 움직임을 오직 냄새를 쫓아서 막아낸다?

나로서는 불가능하다.

‘덕분에 살았다, 귀철아.’

그렇다.

모든 것은 에고 소드, 귀철 덕분이었다.

내가 검을 치켜든 게 아닌 귀철이 나의 팔을 이끌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듣던 중 반가운 소리란 말씀.

하지만.

“목적은?”

나는 몰라도.

우리 그랑펠 님께서는 호락호락 허가를 내주실 리가 없었으니.

그래도 그놈의 절차 덕분에 귀철의 생각을 헤아릴 수 있게 됐다.

-애송이의 검을 구원하고 싶다.

과연, 그랑펠의 분신다운 목적이시다.

그랑펠이 인류를, 아르카나 대륙을 구원하듯.

귀철, 너도 같은 검을 구원하고 싶다는 거구나.

당연하게도 그런 목적이라면 그랑펠도 반대할 수 없겠지.

“허가하겠다.”

귀철에게서 고동이 전해져 왔다.

-너그러운 자비에 감사를 표하겠다, 주인이여.

나는 콜로세움을 둘러봤다.

“데뷔 무대로 나쁘지 않을 것 같으니.”

그러고는 검강을 발산했다.

귀철의 검신을 타고 흐르는 은빛의 기백.

이내, 검강을 두른 귀철이 나를 이끌었다.

“뜻대로 날뛰어도 좋다.”

가속했다.

‘……근데, 잠깐만.’

내가 날뛰어도 좋다고 했지만 말이야.

‘빨라도 너무 빠르잖아?!’

내가 어떻게 검을 휘두르고 있는지.

알아보지도 못할 정도의 속도잖아, 이건!

역시, 내가 이럴 줄 알았다.

귀철아, 네가 비바체보다 한술 더 뜨는구나…….

.

.

.

쾌검(快劍).

속도에 중점을 둔 셰그윈의 검술.

그런 검술이 비롯되는 바탕은 육체였다.

검을 휘두르고 거두는 것은 검사의 육체였으니까.

그것이 셰그윈이 젊음을 갈망한 이유였다.

-“이건 계약입니다. 젊음을 거머쥘 수 있는 계약.”

악마는 그렇게 말했다.

그 말에 셰그윈은 자신의 노쇠한 육체를 바라봤다.

자신의 검로.

그 끝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아직도 갈 길이 멀었거늘.

자신에게 남은 수명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 간악한 혀를 잘라버리기 전에 다물어라.”

발검(拔劍).

검집에서 아틀라스를 빼 드는 속도 또한.

더는 쾌검이라 부를 수 없을 정도로 느릿했다.

그렇기에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당신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이 성에는 가엾은 인간들에게 나눠줄 식량 따윈 없습니다. 굶어 죽거나 악마에게 인간의 존엄성을 유린당하다 죽겠지요. 셰그윈 경은 그저 자비를 베푸시는 겁니다!”

셰그윈은 주먹을 쥐었다.

결국, 은발 사내의 말이 맞았다.

자신은 그저 인간으로서 최악의 판단을 한 것뿐이었다.

그러나 선택한 이상, 후회하지 않겠다 결심했다.

검로의 끝에 다다를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하겠다고.

스스로 맹세했었으니.

‘그런데, 정작 네가 나를 저버리는구나. 아틀라스.’

셰그윈은 사내의 검을 바라봤다.

흑색으로 물드는 검신(劍身).

은빛의 검강(劍罡).

마주한 사내의 검강은 지나치게 찬란했다.

셰그윈은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이래 봬도 검성이었으니까.

생사의 갈림길에서 검기는 고유의 색을 가진다.

사내의 검강을 보는 순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가 얼마나 많은 생사의 고비를 겪어왔는지를.

저런 괴물 같은 능력을 갖춘 사내가 어째서.

수많은 생사의 고비에 처했었는지도.

그래, 그는 고비 속으로 뛰어든 것이다.

찬란을 넘어 ‘숭고’한 검강이 그 증거였다.

셰그윈은 속으로 생각했다.

‘인정하마. 너는 내게 지껄일 자격이 있었다.’

그러나 네 말에 걸음을 돌리기에는.

나는 너무 먼 길을 와버렸다.

그것도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길을.

셰그윈이 땅을 박차고 내달렸다.

‘그러니 모든 걸 네게 맡기마.’

나의 처분도.

검성의 칭호도.

그리고 아틀라스, 너도.

그러나 쉽게 넘겨주지는 않으리라.

“가져갈 수 있다면 가져가 보아라.”

이것은 추악한 칼잡이의 알량한 자존심.

셰그윈은 신경이 비명을 지를 정도로 근육을 쥐어짜 냈다.

검강을 발산할 수 없는 지금.

활용할 수 있는 것은 우월한 육체 능력뿐이었으니까.

그러나 사내는 쾌속에 반응해 냈다.

챙!

츠릉!

챙!

그것도 모자라 쾌속을 따라오며 합을 맞췄다.

보면 볼수록 어이가 없는 사내였다.

그 복장 또한 시공간의 사교장에서 봤을 때와 별다를 게 없었거늘.

예복에 가까운 불편한 차림으로 저런 움직임을 보일 수 있다니.

그러나 무엇보다 놀라운 건 사내의 검이었다.

챙!

강렬하다.

아틀라스가 맞대결에서 밀릴 만큼.

‘대체 무엇으로 만든 검이란 말이냐.’

셰그윈이 의문을 되뇌는 순간.

머릿속으로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애송이가 감히 이 몸을 가늠하려 들지 마라.

“……!”

흠칫할 수밖에 없었다.

검, 주제에 어찌 나의 머릿속을 꿰뚫어 본단 말인가?

셰그윈이 거리를 벌렸다.

그러자 목소리가 이어졌다.

-아직도 네게는 들리지 않는다는 것이냐?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네 검이 울부짖는 소리가.

“!”

-나는 네놈의 마음을 읽은 게 아니다.

“……그렇다면.”

-네 검과 대화를 나눴을 뿐이다.

“……!!”

흠칫한 셰그윈은 아틀라스를 바라봤다.

여전히 아틀라스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사내의 검이 대신하여 말을 전해왔다.

-자신의 검이 분하고 원통해서 울부짖는 소리조차 듣지 못하다니. 신검합일의 경지가 무색하구나. 애송아.

……아틀라스가 분하고 원통해 울부짖고 있다고?

“!”

셰그윈은 그제야 깨달았다.

그렇다, 검로(劍路)였다.

검의 길이기에.

검과 함께 걸어야만 하는 길이었다.

그러나 나는 오만했다.

네가 없으면 걸을 수 없는 검로였거늘.

아틀라스, 너를 그저 휘두르는 무기로만 여겼다.

“…….”

셰그윈은 그제야 고개를 들어 올렸다.

잘못된 길.

후회해도 돌아갈 수 없는 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끝으로 사내의 말을 떠올렸다.

-“인간이기를 포기하면서까지 관철한 헛된 긍지. 그를 검에게 부정당한 기분은 어떠한가, 셰그윈. 그러나 나 또한 부정해 주겠다. 나의 검으로.”

‘그대는 굳이 검을 들 필요가 없었거늘.’

비로소 말뜻을 깨닫게 되었다.

사내의 검강이.

어째서 그토록 숭고한 빛을 띠고 있었는지도.

셰그윈은 입을 열었다.

“그대의 뜻을 미련한 내가 알아들었다.”

그렇다.

모든 것은 사내의 배려.

검성, 아니 글러 먹은 노친네에 대한 구원.

“그 뜻에 전력으로 화답하겠다.”

그러자 사내의 검이 말했다.

-오너라. 나는 오늘 쾌검을 베고, 나의 주인은 검성을 베리라!

그리고 승부가 났다.

서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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