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6화. 목격자들
시공간의 사교장 혹은 고인물 커뮤니티의 절대적인 규칙.
서로 간의 모든 적대적 행위는 금지된다.
당연하게도 제대로 지켜질 리가 없는 규칙이었다.
아르카나 대륙 관점에서는 모르겠다만.
플레이어들은 자존심 하나만큼은 대단하거든.
당장 인터넷을 켜서 아무 플레이어 커뮤니티를 둘러봐도 진행 중인 키보드 배틀이 한두 개가 아닐 테니까.
그게 고인물, 초월자들만 모인 시공간의 사교장이라고 한들 뭐가 다를까.
아니, 심하다면 오히려 더 심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저런 규칙을 첫 번째로 걸어둔 건지도 몰라.’
만약, 시공간의 사교장에 저런 제약이 없었다?
그 호화스러운 공간에 피 냄새가 가시질 않았겠지.
하지만 분쟁은 막으려고 한다고 막을 수 없는 법이다.
뭣보다 허구한 날 싸워대는 플레이어들을 누구보다 많이 지켜봤을 AAU가 아니겠는가? 그런 상황에 대비한 규칙이 존재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겠지.
[단, 고인물 커뮤니티를 통해서 결투 콘텐츠 진행 가능.]
AAU의 자료엔 그렇게 명시되어 있었다.
그 말을 번역하자면…….
『단, 시공간의 사교장을 통해 결투를 진행할 수 있다.』
……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
미완성이지만 나름대로.
그와 관련된 추가적인 규칙과 목적도 있었다.
[결투는 아르카나 홈페이지를 통해 중계]
[랭커들의 결투에 많은 시청자가 몰릴 것으로 예상]
[그로 인한 스트리밍 부가 수입은 승자에게 배분]
[플레이어들의 레벨 상승 욕구를 자극 가능]…….
거기까지 확인했을 때는 AAU가 괜히 아르카나의 개발진이 아니었구나, 싶었다. 그야 플레이어의 심리를 완벽하게 꿰뚫고 있었으니까.
랭커들의 결투.
그걸 아르카나 홈페이지에서 생중계하고.
그로 인한 부가 수입은 모두 승자가 독식한다니.
‘나라도 군침을 흘렸겠는데.’
적혀있던 것처럼.
일반적인 시청자들에게는 엄청난 볼거리를 제공하고, 플레이어들에겐 랭커가 되어야만 하는 또 하나의 목적이 될 수도 있었겠지.
물론, 모든 건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했을 때의 이야기겠지만.
‘그 시스템이 어떤 식으로 구현되어 있을지는 알 수 없어.’
불확실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보다시피.
나는 셰그윈에게 시공간의 결투를 제안했다.
이유야 간단하다.
그랑펠의 말대로 가짜 긍지를 진짜 긍지로 꺾기 위해서?
아니, 그랑펠은 몰라도.
나, 이호열에게 그런 멋진 이유는 없다.
머리 위에서 느껴지는 기척.
제로 산맥의 최정상.
드래곤의 둥지에서 강렬한 기운이 피어오르기 시작했으니까.
마탑의 마법진 너머로도 이 정도 기운이라니.
장담할 수 있었다.
만약, 드래곤이 깨어난다면…….
‘진짜 못 막는다, 저건!’
봉인 마법진이 있지 않냐고?
그건 뭘 모르는 매스컴에서 떠들어 댄 말이고!
마탑의 마법진은 드래곤을 봉인하는 마법진이 아니다. 애초에 용마대전에서 참패한 마탑이 그런 마법을 발현할 수 있을 리가 있겠냐고.
‘정말로, 드래곤의 단잠을 방해하지 않기 위한 마법진일 뿐.’
마탑답지 않게 공을 들였으니까.
정말 웬만한 소란에는 깨어나기는커녕.
뒤척거리지도 않았을 거란 말이다.
다시금 그놈의 비바체를 원망할 수밖에 없구나, 그랑펠……!
‘어쩔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선 이게 최선의 판단이다.
[시공간의 결투가 승인되었습니다.]
의식 속으로 전투 장소를 옮기는 것.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했을 때야.
결투 승패에 목숨을 잃을 걱정은 없었겠지.
그러나 지금은 다른 이야기다.
‘목숨이 걸려있다는 건 변하지 않아.’
달라진 건 나도, 셰그윈도 도망칠 수 없다는 것뿐.
셰그윈도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검은 동공이 처음으로 나와 마주쳤다.
“이런 규칙을 알고 있었을 줄이야. 역시 신입답지 않아.”
과연, 검성은 검성.
초월자는 초월자였다.
[천적관계]를 오로지 강인한 정신력만으로 극복하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이쪽도 정신력에서는 절대 뒤지지 않아서 말이지.
“결투에 응한 판단을 칭찬하겠다.”
봐라, 상대를 앞에 두고 칭찬을 해줄 정도로 태연하잖아?
시공간의 결투.
상호 간의 동의가 필요한 게 당연하다.
셰그윈이 재밌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아니, 오히려 내가 감사해야 할 일이군.”
건방지게 칭찬해도 오히려 감사하다니.
뭐냐, 그 찝찝한 반응은?
하지만 셰그윈은 진심으로 고마운 눈치였다.
“도망칠 수 없다고 생각하니, 오히려 머릿속이 편안해졌다.”
……아, 그런 말이었어?
나는 드래곤을, 셰그윈은 천적을 피하려는 악마의 본능을 억누르기 위해서. 서로의 이해관계가 일치해 시공간의 결투가 승인되었다는 거겠지.
이내, 공간에 풍경이 덧씌워지기 시작했다.
채워지는 것은 필드.
관중석까지 존재하는 게 영락없이 원형 경기장, 콜로세움이었다.
그나저나 역시 화려하구나.
갖가지 금은보화로 장식된 사교장과 비교해도.
꿇리지 않을 정도로 화려한 경기장.
무엇보다 크고 웅장하다.
‘의식’이라는 개념을 알지 못하면 보는 것만으로 압도될 정도로.
슥─
그러나 나도 셰그윈도 의식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망설임은 없다는 것이다.
셰그윈이 검을 치켜들었다.
그러고는 쓰게 웃었다.
“여기까지 와서도 대답이 없는 거냐, 아틀라스.”
검강을 발산할 수 없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던 건가.
마치 그동안 걸어온 길을 모조리 부정당한 것처럼.
처량한 표정을 짓고 계시는군.
하지만 착각하지 마라, 셰그윈.
아틀라스와 별개로 그랑펠의 처분은 이제 막 시작된 참이니까.
나는 읊조렸다.
“인간이기를 포기하면서까지 관철한 헛된 긍지.”
“……?”
“그를 검에게 부정당한 기분은 어떠한가, 셰그윈.”
……예전부터 느낀 거지만, 악마 한정으로 그랑펠의 화법은 바가지를 긁는 데 타고났다. 지금도 셰그윈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 좀 봐라.
물론 아직도 멀었다, 셰그윈.
“그러나 나 또한 부정해 주겠다.”
지금부터는 순전 그랑펠의 긍지 때문이었다.
악마로 타락, 검강까지 발산할 수 없게 된 셰그윈이었거늘.
그럼에도 자신할 수는 없다.
천적관계, 서클의 마법, 마왕의 전리품으로도.
마냥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상대였으니까. 검성은.
“나의 검으로.”
그런데 검 대 검으로 맞서겠다니요, 그랑펠 씨……!
정말로 빌어먹게도 무거우신 그랑펠의 긍지가 아니라면 떠올리지도 못할 발상이다. 하지만 내가 마냥 대책도 없이 지껄인 건 또 아니거든.
그렇다.
모든 건 한결같은 발버둥.
귓가에 들리는 말, 하나하나 놓치지 않은 덕분이다.
셰그윈, 그쪽이 했던 말을 말하는 거야.
-“그깟 왕관을 누가 쓰든지 내 알 바가 아니다. 나는 마도구, 은하수 숫돌을 손에 넣기 위해 제후들에게 힘을 빌려줬을 뿐이다.”
은하수 숫돌로 화룡점정.
비로소 귀철의 제련이 끝났다는 뜻이다.
나는 입을 열었다.
“하이엘.”
결투에서 정령 소환이 가능한 것인가.
누군가 묻는다면 당연하다 대답해 줄 수 있다.
불가능하다면 정령 마법사는 결투에서 손가락만 빨다가 패배하라는 소리잖아.
이내, 허공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하이엘.
어째서인가.
모습을 드러내는 게 하이엘뿐만이 아니었다.
빈 공간에서 콜로세움이 생겨났던 것처럼.
콜로세움의 관중석에서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는 이들.
그런데, 다들 익숙한 얼굴들이다……?
나는 그제야 깨닫고 말았다.
[결투는 아르카나 홈페이지를 통해 중계]
……그게 이런 식으로 구현되는 거였어?
*
제로 산맥.
플레이어들의 눈앞에 떠오른 메시지.
[시공간의 결투, 참관에 응하시겠습니까?]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목소리.
“……엥?”
“이거 나한테만 뜬 거 아니죠?”
“시공간의 결투라고? 이건 또 뭐냐?”
여태까지 본 적이 없던, 의미를 알 수 없는 메시지였다.
그러나 시스템 메시지는 스팸 메시지 따위가 아니다.
시스템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메시지가 떠올랐다는 건 그만한 이유가 존재한다는 것.
그렇다면 떠올릴 수 있는 가능성은 하나뿐이었다.
“……잠깐만.”
쿠구구구궁─
빛의 줄기가 향하는.
동시에 굉음이 들려오는 곳.
이건 호열과 관련된 일이 분명했다.
슈슈슉─
메시지는 빛의 행렬을 따라 산맥을 가로지르던 거대 연합의 길드 마스터들에게도 떠올랐다.
가장 앞서나가던 레오니가 걸음을 멈췄다.
“……결투?”
클래스, 광전사.
레오니에겐 익숙한 단어였다.
클래스 스킬의 숙련도를 향상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전투를 반복해야 하는 광전사.
그에 가장 적합한 장소는 사냥터가 아닌 전투가 끊이질 않는 콜로세움이었으니까.
구구구궁…….
메시지가 떠오름과 동시에 잦아드는 소음.
그러자 산맥을 가로지르던 라이트도 제자리에 멈춰버렸다.
레오니는 확신할 수 있었다.
휙─
고개를 돌려서 외쳤다.
“누구랑 뜨는 건지는 몰라도 맞짱 뜨러 간 것 같아!!”
맞짱이라니.
그러나 돌발 상황에서 격식을 챙길 틈은 없었다.
히사기의 눈이 가늘어졌다.
“역시, 결투가 그 결투였을까요.”
남태민이 고개를 저었다.
“몰라. 뭐가 됐든 직접 확인해 보면 되는 일이야.”
결투라고 하더라도 의문은 여전했다.
대체 어떤 결투길래.
다른 플레이어에게까지 참관 메시지를 띄운단 말인가?
세 사람이 다시금 눈빛을 교환했다.
“승낙하자.”
“승낙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당연히 해야지. 참관.”
다시금 떠오르는 메시지.
[시공간의 결투장에 진입합니다.]
그리고 뒤바뀌는 시야.
“!!!”
마치 포탈을 타고 워프한 것처럼.
모든 풍경이 뒤바뀌었다.
세 사람 중 가장 먼저 입을 연 건 레오니였다.
“미친.”
시공간의 결투장이라고 하길래.
콜로세움이 맞구나, 확신했다.
그러나 이렇게 거대한 콜로세움이 나타날 것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었다!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부터 따져도 이렇게 웅장한 콜로세움은 처음이었다.
스스스─
이내, 자신과 마찬가지로.
콜로세움 관중석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플레이어들.
옆자리의 남태민과 히사기.
두 사람 말고도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록스, 카밀라, 슈레이그, 류오쥔춘……?”
뱀눈을 흘기던 히사기가 결론을 내렸다.
“아무래도 제로 산맥에 진입한 플레이어, 모두에게 메시지가 떠오른 모양입니다. 특별한 이유가 있지 않고서야 메시지에 거절할 플레이어는 없었겠죠.”
덕분에 콜로세움의 관중석은 빠르게 채워져 갔다.
“이, 이런 경기장이 갑자기 어디서 튀어나온 거야?!”
모두가 상황을 파악하기도 잠깐.
광활한 콜로세움보다 중요한 게 떠올랐다.
‘……호열 씨는?’
남태민의 시선이 콜로세움 중앙을 향했다.
“!”
그곳에는 역시나 호열이 있었다.
언제나처럼 꼿꼿한 호열이.
그리고 맞은 편에는 사내가 있었다.
“……누구야, 저거?”
파란색 머리카락.
멀리서도 눈에 띄는 개성적인 외형이었다.
마주친 적이 있었더라면 쉽게 잊을 수 없을 정도로.
그러나 짚이는 바가 조금도 없었다.
‘호열 씨랑 결투를 벌일 정도라면…….’
플레이어 중에서 그만한 실력자를 알아보지 못할 경우가 있을 리가.
곧장 결론이 나왔다.
저 사내는 아르카나인이다.
생각하던 와중 관중석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깐만, 나 누군지 알 것 같은데?”
“뭐? 누군데?”
“저 검 말이야! 본 적 있어!”
“검?”
그 말에 일제히 사내의 검을 향하는 시선.
모두가 어렵지 않게 알아볼 수 있었다.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부터.
저렇게 화려한 검은 흔치 않았으니까.
그랬다, 저건 검성의 검이었다.
남태민이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까 검성도 파란 머리 아니었나?”
“검성, 셰그윈.”
“맞아! 그 이름! 나, 들어본 적 있어!”
히사기의 말에 레오니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나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었다.
플레이어들이 기억하는 셰그윈은 중년.
아니, 그보다 노년에 가까운 사내였으니까.
“회춘의 묘약이라도 먹은 건가?”
“아무리 아르카나라고 해도 그런 아이템이 있다고?!”
“아니, 그 전에…….”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은 또 있었다.
“……왜 저 두 사람이 싸우고 있는 건데?”
제로 산맥에 들리던 요란한 굉음.
그 소리의 주인공이 바로 호열과 검성이었단다.
플레이어들은 물론.
호열을 곁에서 지켜봐 온 남태민 일행조차도.
쉽게 사정을 짐작할 수 없었다.
그러니까.
역시나 이해하지 못할 일이었다.
“하이엘이다.”
허공에서 우아하게 내려오는 하이엘.
그런 하이엘의 품엔 웬 ‘검’이 안겨있었으니까.
그리고 그런 검을 호열이 받아 들었으니까.
웅성웅성─
관중석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아니지?”
“설마 검성이랑 검으로 맞붙는 거야?”
“그것도 젊음을 되찾은 셰그윈이랑?”
“아무리 호열 님이라고 해도 그건……!!”
그러니까 마지막까지도 이해할 수 없었다.
철컥─
호열이 검을 치켜든 순간.
자신들의 눈앞에 메시지가 떠오른 이유도.
[업적 : ‘전설’을 목격하다.]
.
.
.
나는 떠오르는 시스템창을 확인했다.
몇 번이나 다시 봐도 바뀌는 건 없었다.
귀철아…….
[등급 : 전설]
……너 대체 뭐가 된 거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