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5화. 따라올 수 있겠나 (3)
제로 산맥의 어둠을 밝히는 라이트.
“이런 말 할 상황은 아닌데, 아름답네요.”
“나만 그 생각한 게 아니었네.”
“맥이 풀릴 정도로 반짝거리네요. 예쁘다…….”
너무나도 밝아서 온기마저 느껴지는 빛의 구체.
그건 갖가지 복잡한 이유로.
호열의 이름만 들었다 하면 미간을 찌푸리는 드미트리가 말꼬리를 흐려지게 할 정도였다.
“……뭐 하는 짓이야, 이게?”
포탈에 진입할 때만 하더라도 잔뜩 긴장했다.
카밀라가 놀릴까 봐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탱커에게 어둠이 깔린 숲만큼 위협적인 전장은 없다.
울창한 숲에서 어떤 몬스터가.
어디서 튀어나올지 알 수 없으니까.
더군다나 이 숲이 어디 보통 숲이란 말인가?
제로 산맥이었다.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
경험했던 저레벨 구역도 아닌.
구경조차 해보지 못했던 중턱 부근이란 말이다.
“드미트리, 온다.”
문득, 들려오는 록스의 목소리.
정신을 차리자 달려드는 토끼 한 마리가 보였다.
드미트리가 방패를 치켜들었다.
“오케이!”
쿵!
바짝 치켜드는 가드.
그러면서도 드미트리는 생각을 이어나갔다.
만약, 라이트가 어둠을 밝혀주지 않았더라면…….
쾅!
“읏……!!”
나는 지금의 일격을 막아낼 수 있었을까?
겉보기엔 흔한 토끼와 다를 게 없었다.
그러나 토끼 주제에.
플레이어들에게 선공을 해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귀여운 생김새에 방심하면 안 된다는 사실을.
끼기긱─!
당겨지는 활시위.
카밀라가 화살을 입에 문 채 말했다.
“얘드 조으걸 얼므아나 즈어 머근 거야? (얘들 좋은 걸 얼마나 주워 먹은 거야?)”
제로 산맥 중턱 환경에서 살아남았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보통 토끼가 아니라는 증거일 터.
하지만 말했다시피 ‘빛’이 있었다.
“대열 유지. 레벨이 높아도 일반 몬스터다. 패턴은 뻔해.”
록스의 지휘 아래 샤이닝은 능숙하게 토끼들의 기습에 대처했다.
그동안 균열에서 악마족을 상대하며 극한 체험을 한 덕분인가.
그게 아니라면 어둠을 밝히는 라이트 덕분인가.
촤륵─
카밀라가 붉은 머리칼을 쓸어올렸다.
“환영인사는 대충 끝난 것 같은데~”
“…….”
쿵.
드미트리는 그제야 말없이 방패를 내려놓았다.
……얘가 이렇게 조용할 리가 없는데?
낌새를 알아차린 카밀라가 말을 걸었다.
“반응이 왜 그래? 우리 막내답지 않게.”
“……이해할 수가 없네.”
“응? 뭐가? 또 왜~”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
척─
드미트리의 두꺼운 손가락이 가리킨 건 빛의 구체였다.
아, 그거?
카밀라가 싱긋 웃었다.
“글쎄, 그걸 알면 나도 샤이닝을 뛰쳐나가지 않았을까?”
우리 제시처럼.
“카밀라, 나 듣고 있어.”
“헉. 정색하는 거 봐. 농담. 농담이야, 록스.”
카밀라가 까르륵 웃다가는 말을 이었다.
“사실 이유가 뭐가 중요하겠어.”
“?”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잖아? 우리 총대장님께서 이러시는 게 한두 번도 아니고. 번거롭고, 수고스럽게 나선 게 몇 번째라고 생각하는 건데? 설마, 이번이 처음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드미트리?”
드미트리는 입을 다물고 기억을 더듬었다.
‘최소 900레벨…….’
심지어 그것도 한참 전에 예상한 수치였다.
드미트리 또한 랭커이기에 잘 알고 있었다.
자리를 지키기 위해선 엄청난 노력이 필요하다는 걸.
‘레벨 업에 모든 시간을 때려 박아도 모자랄 판에.’
이호열은 어떤 행보를 보였던가?
자신에게는 시시할 뿐일 균열에서도 최선을 다했다.
마왕을 비롯한 조금이라도 인류에게 위협이 될만한 존재들?
싹부터 짓밟아 버렸다.
그러면서도 오만하거나 자만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자신이 구축한 아르카나 세력을 움직여 뒤처진 플레이어들의 성장을 돕기도 했다.
그랬다.
[퀘스트 : 끝나지 않은 성전(聖戰)]
눈앞에 떠오른 퀘스트야말로 그 한결같음의 증거였다.
절레절레─
이내, 드미트리가 고개를 저었다.
“……숲이 아니라 나무를 보고 있었나, 나는.”
그런 사내를 단순한 질투의 시선으로 바라보다니.
“이제 와서 깨달은 척? 그래도 멋없거든~”
오늘만큼은 카밀라에게 저런 소리를 들어도 싸다.
찰싹!
드미트리가 양손으로 뺨을 거칠게 두드렸다.
“좋아, 이제부터는 조금 더 진지하게 가야겠어.”
다짐하는 드미트리를 보고 록스는 쓰게 웃었다.
‘이쯤 되면 인정하지 않는 게 이상한 거겠지.’
제시도 모자라서.
드미트리의 자유분방한 성격마저 바꿔놓을 정도라니.
나는 이호열에게 완벽하게 졌구나.
록스가 산맥을 수놓은 빛의 길을 바라봤다.
그러고는 검과 방패를 치켜들었다.
“억울하다면 부지런히 쫓아가는 수밖에 없나.”
“……뭐라고 했어, 록스?”
“아니, 아무 말도 안 했어.”
그래, 나는 언더독.
애써 폼을 잡아도 근본부터가 개다.
누군가를 뒤쫓는 데에 이골이 난 사냥개란 말이다.
록스가 서포트 팀에게 명령했다.
“베이스캠프는 포탈에서 가장 가까운 곳으로 잡자. 일대의 몬스터도 정리했겠다, 여기도 나쁘지 않겠지. 그럼, 부탁할게. 다들.”
“벌써 끝? 에이, 아니겠지. 록스?”
“맞아, 이제 막 사나이의 열정에 불이 붙은 참이라고!”
“물론, 성의를 봐서라도 더 나아가 봐야지.”
그런 샤이닝이 걸음을 떼려던 순간이었다.
두둥실─
“?”
별안간 공중으로 떠오르는 빛의 구체들.
“우와, 뭐냐. 엄청 예쁜데?”
그 장관에 놀라기도 잠깐.
쌔애애액─!
라이트는 한 줄기 빛이 되어 제로 산맥을 가로질렀다.
“……!!!”
샤이닝뿐만 아니었다.
제로 산맥의 모두가 짐작할 수 있었다.
저 빛의 줄기 끝에 호열이 있다는 것을.
시야 확장 스킬, [이글아이].
독수리의 눈으로 제로 산맥을 둘러본 카밀라.
그녀가 그녀답지 않게 말을 더듬었다.
“……자, 잠깐만 얼마나 높이 올라간 건데?”
[이글아이]의 시야로도 닿지 않을 정도.
보는 그대로.
빛의 줄기는 산맥의 최정상을 향해 뻗어있었다.
놀라움은 곧 경악으로 바뀌고 말았다.
아득히 머나먼 곳에서 들려오는 소리 때문에.
쿠구구구궁─!
대체 얼마나 큰 굉음이기에.
이렇게 멀리 떨어진 곳까지 소리가 전해지는 걸까?
위쪽에서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길래……?
드미트리가 혹시나 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잠깐, 최정상 근처면 드래곤의 둥지 쪽이잖아?”
*
[운율의 지휘봉]
[등급 : 에픽]
[제한 : 없음]
[효과 : 착용 시, 방대한 음악적 지식을 습득하며 그 음악적 지식에 걸맞은 효과의 버프를 착용자의 통제 아래 있는 모든 것에게 부여한다.]
[설명 : 고상한 외관만큼이나 고상한 효과를 지닌 마도구.]
그랬다.
[만물과 통하는 지도], [마안의 망원경]과 더불어 마왕성 압살 때 획득한 마왕의 전리품. 그 효과 덕분인가. 나는 익숙하게 음악 용어를 내뱉을 수 있었다.
척─
“비바체(Vivace).” - 화려하고 빠르게.
근데 하필이면 비바체가 뭐냐, 비바체가!
점점 빠르게, 라든가.
아니면 그냥 빠르게 여도 충분했잖아?
이런 장소에서 꼭 ‘화려하고’를 붙였어야 했니, 그랑펠?
포탈을 타고 와서 방향 감각을 상실한 거냐고, 묻고 싶을 정도다. 그야 살짝 고개를 들면 보이는 저게 바로 드래곤의 둥지였으니까……!
콰콰콰콰쾅─
나는.
그런 드래곤의 둥지 아래에서 요란하게 마법을 퍼붓는 중이었고.
진심으로 우려스럽다.
이렇게 시끄럽게 굴다가 드래곤이 잠에서 깨어나는 게 아닐까.
‘층간 소음 스트레스가 얼마나 심한 건데.’
깨어난다면 그 화가 나를 향하는 건 당연한 일이겠지.
눈앞의 셰그윈을 상대하기도 벅찬데, 드래곤이라니.
그것만큼은 절대 피하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최대한 빠르게 승부를 내는 수밖에 없겠지.
전력을 쏟아부어야 한다는 것이다.
눈으로 따라가기조차 힘들었던 셰그윈의 움직임.
그러나 [운율의 지휘봉]을 치켜든 순간부터 전장을 지휘하는 건 나였다.
그래, 그놈의 비바체 덕분이다. 물론, 지휘봉이 나의 신체 능력까지 끌어올려 주지는 못했다.
‘그랬다면 에픽 이상의 아이템이었겠지.’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지휘에 따라 신속하게 움직이는 라이트.
그 못지않게 신속한 나의 탐색, 간섭, 발현.
라이트, 마력 구체가 각각 다른 마법으로 발현되어 셰그윈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불꽃, 냉기, 심지어는 시야를 흐트러트리는 환각 마법까지.
쏟아내는 마법의 개수가 나조차도 헤아리기 힘들 정도였다.
‘이게 서클이라는 건가.’
정직하게 도달한 초월자의 경지가 아니었거늘.
지금의 효과만으로도 체감할 수 있었다.
어째서 원로, 유그위드가 자기 일처럼 흥분했었는지도.
그러나.
‘조금도 벅차게 느껴지지 않는다.’
분명 내게는 과분한 서클일 터.
하지만 나는 서클의 효과를 자유자재로 활용하고 있었다.
아니, 그런 걸 넘어서.
비로소 ‘전력’을 쏟아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타고난 마법적 재능은 웬만한 마법은 그저 보는 것만으로 흉내 낼 수 있을 정도였다.』
그래, 서클을 형성한 지금에서야.
그랑펠의 설정이 제 위력을 내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슥─
나는 무심하게 휘둘러지는 지휘봉을 바라봤다.
……이래선 진짜 지휘자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인걸.
검성이자 대륙 유일의 그랜드 소드 마스터.
셰그윈이 쏟아지는 마법을 피하는 데 급급해한다.
그 모습이 마치 쏟아지는 음표에 삐걱거리는 단원 같았으니까.
뭐라 그랬더라.
거친 심장박동과 비명의 이중주라고 했었나.
정말, 내뱉는 말은 실현해 내고야 마는구나. 그랑펠.
그러나 간과해서는 안 된다.
마찬가지로.
아니, 지름길을 가로지른 나와는 다르게.
셰그윈은 자신의 힘으로 경지에 다다른 초월자였다.
그런 나의 짐작에 화답하듯.
쌔애애애액─!
곧 거센 풍압이, 쏟아지는 마법의 음표들을 튕겨내 버렸다.
“빌어먹을 마도구로군.”
스스스─
산맥에 피어오르는 먼지.
그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셰그윈.
걷혀가는 먼지 속에서 드러나는 그의 동공.
“그리고 빌어먹을 느낌이다.”
검게 물든 눈동자.
셰그윈이 정말로 악마로 타락했다고 말해주고 있었다.
하지만 그 동공이 거칠게 흔들리고 있었다.
정확하게는 나와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같은 초월자끼리 무력에 위축됐을 리는 없어.’
그렇다면 이유는 하나.
악마 사냥꾼 대 악마로서.
나와 셰그윈은 체급이 맞지 않는다는 뜻이다.
‘진명의 악마, 셰그윈. 마왕이 아니다.’
마왕 정도는 돼야.
마왕 중에서도 악마 사냥꾼과 맞선 경험이 있어야지만.
조금 더 쉽게 말하자면 천적관계를 극복한 적이 있어야지만.
천적 앞에서도 동요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탐욕과 비슷한 경우겠지.’
스스로 목숨을 끊고 새롭게 태어났던 칠죄종 탐욕.
녀석은 거악이면서도 악마 사냥꾼에 대한 내성이 없었다. 지금보다 훨씬 약했던 과거의 내게 별다른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지옥에 처박혔었지.
셰그윈도 같은 경우다.
‘악마로 타락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까.’
천적에 대한 내성이 없다는 것.
미숙한 악마의 냄새가 난다는 것.
역시나 나에게는 희소식이었다.
그러니까 이렇게 당당히 지껄일 수 있었고.
“그 모습이 역시나 추악하다.”
셰그윈의 입꼬리가 비뚤게 치켜 올라갔다.
“사교장에서도 느낀 거지만 말버릇 한번 대단하구나. 세상을 업신여기는 그 눈빛 또한 오만하고, 방자하다.”
반말에 발끈하다니.
젊음을 되찾았어도 나이는 속일 수 없구나?
그나저나 내가 한 번쯤 쓴소리를 들을 줄 알았다, 그랑펠.
‘세니오스에게 끝까지 반말할 때부터 알아봤어, 내가.’
물론, 그렇다고 해서 셰그윈.
그쪽이 존댓말을 들을 자격이 있다는 건 아니고.
나는 대꾸했다.
“착각하고 있군.”
“……?”
“인간과 인간이 나눌 법한 대화를 늘어놓다니.”
“……!”
“설마, 아직도 자신이 인간이라 착각하고 있는 것인가?”
빠득─
셰그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쯤에서 확신할 수 있었다.
‘정말, 악마로 타락할 생각은 없었던 것 같은데.’
그러나 달라지는 건 없다.
아니, 오히려 더 악질이다.
단순하게 젊음을 되찾기 위해서 악마와 거래를 한 거잖아.
악마에게 속아 넘어갔다고 하더라도 죄질이 다르다는 것이다.
셰그윈에게도 반박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착각도, 후회도 하지 않는다. 아직도 내 귓가엔 인간들이 울부짖던 소리가 선명하니까. 하지만 무엇이 그렇게도 잘못됐다는 것이냐?”
검은 동공에선 오히려 광기가 비쳤다.
“어차피 악마에게 유린당했을 목숨이다. 그런 이들을 제물로 바쳤을 뿐이다. 무엇이 잘못됐다는 것이냐? 나를 모독한 건 빌어먹을 악마 새끼만으로도 충분하다. 닥치란 말이다!”
솟구치는 악마의 기운.
셰그윈의 말뜻을 생각해 볼 수는 있었다.
실제로 아르카나 대륙은 악마에게 짓밟혔으니까.
그러나 내게는, 그랑펠에겐 들을 가치도 없는 말이었다.
나의 입술에서 차가운 음성이 흘러나왔다.
“아니, 그대는 외면한 것뿐이다.”
“……외면했다고?”
“추악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고개를 돌린 것뿐이다.”
설교를 할 생각은 없지만, 합리화를 들어줄 생각은 더더욱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그랑펠은 이럴 말을 할 자격이 있다.
죽어라 발버둥 쳐서 잠깐이라도.
아르카나 대륙에 평화를 가져온 우리다.
지껄일 자격 정도는 있다는 거다.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 하찮은 변명이 그대가 관철해 온 긍지라면.”
그러고는 천천히 지휘봉을 내려놓았다.
“진정한 긍지로 꺾어주겠다.”
그렇다.
이것이야말로.
셰그윈에게 내리는 그랑펠의 처분.
나는 말을 이었다.
“시공간의 사교장에 전한다.”
“……?”
“초월자, 셰그윈에게 시공간의 결투를 신청한다.”
“!”
그러자 시야가 뒤바뀌었다.
“검을 들어라. 나 또한 검을 들겠다.”
그래, ‘새로운 검’을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