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4화. 따라올 수 있겠나 (2)
아르카나 대륙에 득실거리는 게 악마였으니까.
제로 산맥에 악마가 있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겠지.
근데 너희도 그랑펠 이상으로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왔구나?
‘무섭지도 않냐?’
잠자는 드래곤들은 제외한다고 치더라도.
제로 산맥의 몬스터가 무섭지도 않은 거냐고.
왜, 지금처럼 저지대 저레벨 구역 몹들이야.
호다닥─
내 기척을 느끼자마자 도망쳐 버렸지만.
위로 갈수록 강한 몬스터들이 등장하는 건 상식이다. 다른 걸 떠나서 드래곤에 주눅 들지 않고 서식하는 것만 봐도 한가락 하는 몬스터들이라는 것이다.
그나저나.
“짐승조차 이토록 현명하거늘.”
쪼렙 구간 구역에서 건방 떨지 마라, 그랑펠.
너는 흔한 토끼 앞에서도 폼을 잡고 싶어?
그러나 나는 뻔뻔하게도 말을 이었다.
“주제를 모르고 설치는구나, 악마여.”
[천적관계].
바람을 타고 풍겨오는 악마의 냄새.
레벨이 상승해서인가.
아니면 지옥의 악크샨 악마 사냥꾼에게 특훈을 받아서인가.
광활한 제로 산맥에서도 감각은 무뎌지지 않았다.
‘이 정도면 악마가 넘쳐나는 아르카나 대륙에서는…….’
거의 상시 [천적관계] 발동 상태가 아닐까?
그걸 좋아해야 하는 건지.
아니면 안타까워해야 하는 건지.
복잡한 기분이 든다.
그러나.
“도망칠 생각은 하지 말도록.”
당장은 눈앞의 악마에 집중하는 게 최선이다.
[천적관계]가 발동된 지금.
제아무리 제로 산맥이라고 하더라도 움츠러들 필요는 없었다.
아무리 중간과정을 건너뛰고 도달한 경지라고 해도 정도가 있다. 초월자의 경지, 서클과 그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검강을 깨우친 나란 말이다.
‘밑 빠진 경지라고 해도 몇 배나 상승하는 셈이니까.’
물론, 그렇다고 해서 중간과정을 무시하겠다는 말은 아니다.
‘완벽하게 깨우치면 몇십 배가 될지도 모르지.’
뭐, 순서야 약간씩 뒤바뀌더라도.
결국, 완전히 습득하면 해결될 일 아니겠어?
그런 의미에서 어떤 녀석인지는 몰라도 눈치가 빠르군.
내 존재를 알아차린 건가.
재빠르게 나와의 거리를 벌리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숨바꼭질인가.”
튀어나오는 차가운 목소리.
“놀이에 어울려 줄 정도로 나는 한가롭지 않다.”
악마에게만큼은 자비가 없는 그랑펠이었으니.
나는 곧장 마력을 끌어올렸다.
얼마든지 뛰어보도록 해라.
달리면서 힘을 빼면 더 좋다.
나야 포탈을 발현하면 그만이니까.
게다가.
또각─
아무리 그래도 구둣발로 등산만큼은 좀 피하고 싶거든…….
*
셰그윈은 공허한 눈으로 산을 올랐다.
목이 탔다.
불과 몇 분 전 샘에서 목을 축였건만.
갈증은 오히려 더 심해졌을 뿐이었다.
다시금 자각할 수 있었다.
자신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
철컥─
셰그윈이 검을 거두자 산맥이 피로 뒤덮였다.
산맥 고지대의 네임드 몬스터, 칠미호(七尾狐)가 절명했다.
셰그윈은 과거, 노쇠했던 자신의 육체를 떠올렸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근력이다.’
그 시절.
셰그윈은 제로 산맥을 올랐다가 꼬리 다섯 달린 여우와 마주쳤었다.
검성의 칭호답게. 그 시절에도 오미호를 압도했던 셰그윈이었지만 승부에 결착을 내지는 못했었다.
‘내 육체는 확실히 강해졌다.’
그러나 지금은 그보다 강한 꼬리 일곱 달린 여우를 죽였다.
전성기 때보다 강해진 육체가 칠미호가 주술을 부리기도 전에 도륙을 내버린 것이었다.
‘그런데 어째서냐.’
셰그윈은 자신의 검, 아틀라스를 바라봤다.
검강이 발산되지 않았다.
검과 통하는 공명이 느껴지지 않았다.
빠득─
셰그윈은 신경질적으로 이를 갈았다.
“……너마저도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냐?”
미련한 것.
“너만 멀쩡했더라도 이 거지 같은 산맥을 찾지 않았을 것이다.”
셰그윈이 제로 산맥을 찾은 이유는 간단했다.
검강은 생사의 갈림길에서 짙어지는 법.
다시금 검강을 깨우치기 위함이었다.
‘내가 너무나도 강해진 탓이다.’
타락하여 젊음을 되찾은 육체다.
웬만한 전투에선 생사의 갈림길에 설 수조차 없겠지.
“그러나 걱정할 것 없다.”
제로 산맥의 주인.
드래곤이라면 나를 생사의 갈림길로 몰아넣을 수 있을 테니까.
아틀라스, 그것이 네가 원하는 바라면 나는 그리하겠다.
셰그윈이 피식 웃었다.
“너도 주인이 죽는 꼴을 보고만 있진 않을 테니.”
계속해서 산맥을 올랐다.
마법진이 새겨졌던 봉우리가 보였다.
과거나 지금이나 마탑은 참으로 귀찮은 존재였다.
누구도 드래곤에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마법진을 발현해 놓았을 줄이야.
‘과거였다면 애를 먹었겠군.’
또한 그 마법진을 보호하기 위해서.
발현된 무수한 함정 마법들까지.
셰그윈은 봉인 마법진을 건드렸다가 함정 마법에 당해 적잖은 상처를 입었었다.
인간보다 악마에 가까운 육체가 아니었다면 다시는 걷지 못할 정도의 부상이었다.
“……?”
하지만 그 고생이 무색해졌다.
셰그윈은 목격하고 말았다.
분명, 자신이 무너트렸을 마법진이 새겨진 봉우리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우뚝 솟아있는 모습을.
나는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가?
아니면 아직도 정신을 잃은 채 무의식을 헤매고 있는 건가?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처럼 머리가 지끈거렸다.
“……아무래도 두개골이 제대로 흔들렸나 보군.”
그렇게 착각할 법도 했다.
그야 밤하늘에서 더는 마안이 보이지 않았으니까.
그뿐만이 아니었다.
제로 산맥에서 내려다보는 경치 또한 바뀌었다.
“……빌어먹을.”
넘실거리는 저건 분명 바다다.
아르카나 대륙은 어디로 갔는가.
사방을 둘러보아도 보이는 건 온통 푸른 바다뿐이었다.
하루아침에 제로 산맥이 바다에 떨어졌다고?
그럴 가능성보다는.
자신의 감각이 고장 났을 가능성이 더 높을 터.
콰득!
셰그윈이 신경질적으로 나무를 내려치자 기둥이 그대로 꺾여서는 쓰러졌다. 셰그윈은 스스로를 타일렀다. 생각해 보자, 어디서부터 일이 틀어졌는지를.
“…….”
일이 꼬이기 시작한 건.
시공간의 사교장.
그곳에서 은발의 사내와 마주친 시점부터였다.
그래, 모든 원흉은 그놈이었다.
‘녀석이 아니었다면 지금쯤 나는.’
안토니움을 함락시키고 은하수 숫돌을 손에 넣었을 것이다.
제후들을 내 손으로 죽이는 일도.
그 탓에 악마의 힘을 자각하게 되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거란 말이다.
그렇게 이를 갈던 때였다.
“?”
두근─
심장이.
두근두근두근─
거칠게 뛰기 시작했다.
“……!”
제로 산맥의 대요괴, 칠미호의 앞에서도.
심지어는 드래곤의 둥지를 앞에 두고서도.
평소와 다를 것 없이 뛰던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기 시작했다.
경험이 없었다면 착각하고 말았겠지.
보여야 하는 마안이 보이지 않고.
보이지 말아야 할 바다가 보이는 감각처럼.
심장에도 이상이 생긴 것뿐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셰그윈은 심장박동의 원인 또한 알고 있었다.
‘……녀석이다!’
이번에도 은발의 사내다.
떠올리는 순간.
머릿속에 울리는 목소리.
-“그대는 사교장의 절차에 감사하는 게 좋겠군.”
-“나는 지금 필사적으로 인내하고 있으니까.”
-“검성. 아니, 악마보다 추악한 칼잡이여.”
꿀꺽─
더욱더 목이 타들어 갔다.
셰그윈은 마른침을 삼키곤 뛰기 시작했다.
‘도망쳐야 한다.’
검성.
대륙 유일의 그랜드 소드 마스터인 내가 도망을 치다니.
스스로도 납득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방법이 없었다.
무려 상위 마왕을 지옥에 떨어트려 만장일치로 초월자의 자격을 거머쥔 그였다. 검강을 발산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승리를 자신할 수 없거늘.
아틀라스가 응답하지 않는 지금은…….
‘내게 승산은 없다.’
그나마 다행인 건 신체 능력이 멀쩡하다는 것이었다.
쉬지 않고 산맥을 가로질러서인가.
덕분에 녀석과의 거리가 벌어진 덕분인가.
심장박동이 점차 안정을 되찾아 갔다.
셰그윈이 걸음을 멈춘 그때였다.
고오오오─
셰그윈의 눈앞.
허공에 그려지는 마력의 빛무리.
포탈이다.
마력의 역광 속에서 그림자가 나타났다.
그림자가 점차 가까워졌다.
……두근두근두근!
심장이 다시금 고장 나버렸다.
.
.
.
진짜로 네가 왜 거기서 나오는 거냐.
“셰그윈.”
내가 강해져야만 하는 이유이자 목표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네 잘못은 아니겠지만, 대체 왜 그랬냐……?
필사적으로 도망가길래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토끼가 도망치는 것처럼.’
나는 기껏해야 임프나 하급 악마인 줄 알았지!
왜, 악마들은 강해질수록 영악해진다.
위험을 감지하고 도망치냐고?
아니, 위험에 처할 상황 자체를 만들지 않는다는 뜻이다.
‘지금 아르카나 대륙만 봐도 그렇지.’
상위 마왕, 가미긴이 지옥에 떨어진 현재.
아르카나 대륙은 이보다 평화로울 수 없었다.
상황 파악을 못 하는 하급 악마 나부랭이들이나 가끔 눈에 띄었지.
마왕이나 그에 준하는 진명의 악마들은 [마안의 망원경]으로 둘러봐도 코빼기 하나 비추지 않을 정도로 몸을 사리고 있었으니까.
‘그니까 네가 왜 여기서 나오냐고.’
내가 널 걱정하는 건 아닌데.
제로 산맥이 얼마나 위험한 곳인데.
무려 꼭대기에 드래곤이 산다고, 드래곤이!
상상도 못 한 조우에 역정이라도 내고 싶었거늘.
‘잠깐.’
이내, 머릿속에서 퍼즐이 맞춰졌다.
나는 입을 열었다.
“그대로군. 마탑의 마법진을 파괴한 건.”
세상에 어떤 간 큰 놈이 마탑의 마법진을 파괴했나 싶었는데.
그게 셰그윈이라면 납득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정곡을 찌른 모양인데?
한 발자국─
셰그윈이 뒤로 물러나더니 입을 연다.
“역시 너로군. 마법진을 복구한 건.”
당연하게도 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랑펠에게 있어서 셰그윈은 악마, 아니 악마보다 못한 존재였으니까. 한마디 말을 건넨 것도 상당한 인내심을 발휘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문득.
“……크흐흐흐.”
셰그윈이 흐느끼듯 웃었다.
왜 저래 또.
갑자기 섬뜩하게.
내가 흠칫하는 와중에 셰그윈은 말을 이었다.
“정말로 빌어먹게 일이 꼬여버렸구나.”
……저기요, 그게 누가 할 말인데요.
되받아치고 싶었지만, 셰그윈에게 내 말을 들어줄 여유는 없어 보였다. 셰그윈은 곧바로 검을 치켜들었으니까. 그런데 무언가 허전하다.
검강이 보이지 않잖아……?
“보아라. 아틀라스, 네 주인께서 죽을 위기에 처했다.”
아틀라스, 그게 검의 이름인가.
그나저나 죽을 위기라니?
그것도 내가 하고 싶은 말이거든?
‘솔직하게 쫄린다.’
[천적관계]가 발동된 상태.
그것도 모자라서.
악마가 강하면 강할수록.
드높아지는 그랑펠의 긍지가 높아질 대로 높아진 걸로 봤을 때…….
셰그윈은 부담스러운 상대가 확실했다.
설령, 검강을 발산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그 쾌검술이 어디로 사라지는 게 아니잖아.
“아틀라스, 정말 나를 죽일 생각이 아니라면.”
“…….”
“얌전히 고집을 꺾는 게 좋을 거다.”
팟!
역시, 불길한 예감은 틀리는 법이 없구나.
뭐가 저렇게 빠르냐.
여태까지 봐온 그 어떤 몬스터보다 민첩하다.
‘전투 센스까지.’
악마로 타락한 셰그윈이었다.
그 외관은 청년이었지만, 인간 시절 그는 전성기가 훨씬 지난 검성이었다. 그만큼 경험이 풍부하겠지. 과연, 마법사와의 전투 경험도 넘쳐나는 모양이시군.
셰그윈이 지형지물에 몸을 숨겼다.
‘이게 초월자의 능력인가.’
내 눈으로 도저히 포착할 수 없는 속력이다.
새삼스럽게 셰그윈이 악마가 아니었다면.
나는 정말 초전박살이 났겠구나 싶다.
그러나 악마로 타락한 이상.
“거기로군.”
[천적관계]의 반경을 피해 갈 순 없었으니.
악마의 구린 냄새가 풍긴다는 말이다, 셰그윈.
나는 스스로 되뇌었다.
‘눈으로 바라보는 게 아니다.’
……냄새로 쫓는 거다.
가장 중요한 건 티를 내지 않는 것이다.
셰그윈이라면.
내가 자신의 움직임을 놓쳤다는 걸 알아채는 순간.
검을 들고 내 숨통을 끊으러 달려들 테니까.
유감스럽게도 나는 그 일격을 막아낼 자신이 없거든.
하지만 철면피가 있다.
“숨어도 숨길 수 없는 게 법이다.”
그래, 항상의 자세.
장담하는데.
내게선 조금의 동요도, 빈틈도 보이지 않을 거다.
두근두근두근─
찰나의 침묵.
덕분에 셰그윈의 거친 심장박동이 나에게까지 전해졌다.
저건 분명 겁을 먹은 악마의 심장박동이었다.
‘아까부터 왜 저렇게 쫄았는 지는 모르겠다만.’
좋다.
나는 저 착각을 이용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야만 무거운 긍지에 가라앉지 않을 테니까.
‘착각, 과대평가를 현실로 만드는 거?’
감정을 내비치지 않는 것만큼이나 자신 있는 일이다.
여태까지 그랬던 것처럼.
뻔뻔하게 해낼 자신이 있다는 거다.
그러니까 나는 절도있게 팔을 치켜들었다.
“그 심장이 악기라도 되는 것 같구나.”
품에서 꺼내 드는 것은 마왕, 암두시아스의 전리품.
“그렇다면.”
[악에 물든 일각의 지휘봉].
아니, 이제는 [운율의 지휘봉].
나는 마왕의 전리품을 치켜들고 말을 이었다.
“비명을 더한 이중주도 나쁘지 않겠군.”
……뭘 더한 이중주?
아니, 됐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지금은 네가 뭐라 지껄여도 태클을 걸 여유가 없다, 그랑펠.
다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내가 지휘봉을 꺼내 든 데에는 이유가 있다는 것.
혼자만 그렇게 빠른 건 조금 치사하잖아, 셰그윈?
슥─
지휘봉을 치켜들자.
둥실─
제로 산맥 곳곳에서 떠오르는 무수한 빛의 구체.
그래, 내가 발현해 둔 라이트들이었다.
슥─
두둥실─
지휘봉이 움직이는 대로.
순수한 마력 덩어리들이 따라 움직인다.
그러더니 이내.
“?!”
셰그윈조차 피할 수 없는 속도로 가속한다.
“비바체(Vivace).” - 화려하고 빠르게
내가 지휘하는 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