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193화 (193/489)

◈ 193화. 따라올 수 있겠나 (1)

제로 산맥은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에도 존재했다.

그저 발견한 것만으로 메시지가 떠오를 리가 없지.

[업적 : 제로 산맥의 그늘을 밝히다.]

[효과 : 제로 산맥에서 아이템 습득 확률 소폭 상승.]

[지속시간 : 23시간 59분]

최초 업적 달성.

대격변 이전에나 보던 메시지였다.

그럴 수밖에 없겠지.

현실에 지역다운 지역이 업데이트된 건 제로 산맥이 처음이니까.

‘균열은 기이한 공간이니까 뜨지 않았던 건가.’

뭐, 어쨌거나 반갑다 업적아.

효과도, 지속 시간도 소박했지만.

이게 어디냐.

서클을 개방.

대폭 상승한 마법 발현력.

덕분에 기초 마법, 라이트 정도는 마구잡이로 발현에도 마력량에는 기별이 가지 않았다.

드넓은 제로 산맥의 초입을 환하게 비추는 것쯤이야. 어렵지 않은 일이란 거다.

두둥실─

‘말 한번 잘못해서 이게 뭐냐, 진짜.’

어려운 일은 아니더라도.

굳이 이럴 필요까지 있나 싶었거늘.

그나마 업적 효과가 내 마음을 달래주는구나.

물론, 그랑펠은 언제나처럼 초를 쳤지만.

“부귀영화란 허상에 불과하거늘.”

아주 어련하시겠습니까, 그놈의 청렴결백!

그랑펠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너라도 눈을 똑바로 뜨고 정신을 차려야 한다, 호열아.

그야 제로 산맥에선 챙겨야 할 게 굉장히 많았으니까.

[만.통.지]의 효과가 유효하던 시절.

나는 본전을 뽑기 위해서 알고 있는 얄팍한 정보들을 만통지에 닥치는 대로 물었었다. 그중에서도 핵심은 비약초와 [육망성 브로치]에 관한 정보.

그렇다.

이 광활한 제로 산맥 어딘가에.

[육망성 브로치]와 비약초가 존재했다.

비약초도 그냥 비약초가 아니다.

고대 왕국 시절.

아르카나 대륙에서 이미 모습을 감췄다던 귀하디귀한 영약들이었다.

‘드래곤 덕분이겠지.’

영약이 아무리 탐난다고 해도, 드래곤들이 잠든 제로 산맥을 오를 사람이 대륙 역사상 몇이나 됐겠냐고.

말했다시피 연맹 탐험가들조차 중턱에 다다르지 못하고 관둔 게 제로 산맥 탐험이었으니까.

나는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파수꾼 역할에 충실하구나.”

최강의 생물.

드래곤을 뭔 집 지키는 개처럼 부르지 마라, 그랑펠.

헛소리를 듣고 잠에서 깨어날까 봐 겁나니까…….

흠칫하면서도 머릿속에 정보를 되뇌어 본다.

‘당장 손에 넣을 수 있는 건 없어.’

영약들은 제로 산맥 중턱 위쪽에 서식했다.

손때를 타지 않은 장소가 그쯤부터일 테니까.

뭐, 그 정도는 예상했던 바였다.

그나저나 육망성 브로치가 문제겠군.

“빛이 들지 않는 동굴이라.”

그 당시엔 제로 산맥에 있는 동굴을 찾으면 되겠구나, 싶었는데.

십만 동굴에 관한 정보를 알게 되니까.

이렇게 막막하게 느껴질 수 없었다.

‘아니, 동굴에는 빛이 들지 않는 게 당연한 거잖아?’

십만 개나 되는 동굴을 혼자서 뒤질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그래, 좋다.

숲을 보자고, 나는 혼자가 아니잖아?

플레이어 중 아무라도 좋다.

누구라도 ‘빛이 들지 않는 동굴’에 발견하고 진입해서 [육망성 브로치]를 획득하면, 내가 그 브로치를 정당한 값을 지불하고 구매하면 되는 일이었다.

‘내가 돈 욕심이 없지. 돈이 없는 건 아니거든.’

그러나 나는 또 한 번 지껄이고 말았으니.

“내게 어둠은 더없이 익숙하지.”

부디 오해의 소지가 다분한 말은 자제해 주라, 그랑펠.

나는 언제나처럼 한숨을 머금고는 제로 산맥을 올랐다.

둥실─

내가 내디디는 걸음마다 빛의 구체.

라이트가 떠올랐다.

어디서 어떤 몬스터가 등장할지 모르는 제로 산맥.

‘이거 나 여기 있다고 광고하는 꼴 아닐까.’

그런 걱정이 들었지만, 괜찮다.

라이트는 곧 마력 덩어리와 같았으니까.

어디서 어떤 몬스터가 튀어나오든 즉시 라이트에 간섭.

마법을 발현해 대응할 수 있다는 소리다.

“밤의 산책도 나쁘지 않구나.”

그랑펠은 태평해보일지 몰라도.

나는 가라앉지 않기 위해서.

지금도 쉴 새 없이 머리를 굴리고 있단 말이다…….

*

지구상 유일한 AAU 협약 미가입국, 중국.

제로 산맥의 출현.

그 즉시 중국은 독자적인 활동에 돌입했다.

그 움직임은 어렵지 않게 포착할 수 있었다.

“중국의 함대가 제로 산맥으로 항해 중입니다!”

“이렇게 급진적인 움직임은 보인 적이 없었는데.”

“……대체 무슨 꿍꿍이일까요?”

AAU 미가입국이라고는 해도 중국은 그동안 상식 밖의 일을 벌이지는 않았다.

중국이 AAU에 가입하지 않은 이유? 야심이 있어서가 아닌 단순히 자신들의 권력 체제를 굳건히 하기 위함이었으니까.

‘그런데,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르는 제로 산맥에 함대를 파견했다……. 그것도 류오쥔춘을 비롯한 천하통일 길드원들을 태우고 말이지.’

AAU 지부장 회의.

대한민국 지부장, 박민재.

관련 자료를 들여다보던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거 출항 시각이 상당히 이른데요?”

“말씀대로네요. 정확하게는……. 정기 업데이트 내역이 떠오르자마자 출발한 것 같죠? 이건 상당한 위험을 감수했다는 건데.”

“확실히 움직임이 이상합니다.”

중국의 함대가 출항한 시각은 제로 산맥의 등장으로 인류가 멸망하니 마니 떠들고 있던 때였다.

막말로 마탑과 호열이 나서지 않았다면 지구가 멸망했을지도 몰랐을 상황에.

‘파도에 휩쓸려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에. 천하통일 길드원 전원을 태워서 제로 산맥으로 향했다고……? 쿠데타나 내분이 터질 가능성은 고려하지 않고?’

사실 어떻게 보면 승부수라고 볼 수도 있었다.

AAU 미가입국, 중국.

동시에 성전에 참가하지 않은 천하통일.

그들이 자신들의 위치를 확고히 할 수 있는 선택지는 하나.

제로 산맥밖에 없었을 테니까.

‘하지만 내가 아는 중국은 그러지 않았을 거야.’

대격변 이후의 행보를 보면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중국을 지배하는 데 만족했지.

세상을 지배하고자 하는 야심은 드러내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이 순간, 흐름이 바뀌었다.

“아무래도 중국 내부에 변화가 일어난 것 같군요.”

그게 어떤 변화였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짐작은 해볼 수 있었다.

AAU, 한때 아르카나의 창조주였던 그들이기에.

“……!!!”

지부장들.

누구 하나 입을 열지 않았지만, 모두가 한 사람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래. 군림할 수밖에 없는 [군주] 클래스 보유자, 천하통일의 길드 마스터를.

박민재가 입을 열었다.

“류오쥔춘. 앞으론 그의 행보를 주시해야 될 것 같군요.”

*

마탑의 포탈.

플레이어들 또한 천하통일의 소식을 접했다.

“와, 얘네들 진짜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왔네.”

“드미트리, 너는 배가 튀어나온 것 같은데……? 그나마 봐줄 만한 게 근육이었는데. 어떻게 된 거야? 실연의 아픔으로 폭식이라도 했어?”

“……너 또 그건 어떻게 알았냐?”

“너 어제 눈물 셀카 올렸잖아~”

어쩜 여자들이 싫어하는 것만 골라서 하는 걸까?

티격태격─

카밀라와 드미트리가 말싸움을 벌이기도 잠깐.

“발이 빠르다고 칭찬을 해줘야 할까?”

록스가 중얼거렸다.

샤이닝과 천하통일.

록스와 류오쥔춘.

라이벌이기에 서로의 사고방식을.

누구보다 잘 안다고 자신할 수 있었다.

게다가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최정상, 언저리에서 내려오지 않았던 두 사내가 아니던가?

“천하통일은 도박수를 던진 거야.”

“도박수? 왜 그렇게 생각해?”

“제로 산맥의 위험성보다 최초 업적 효과가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겠지. 류오쥔춘의 [군주] 클래스는 업적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으니까.”

[군주].

히든 클래스는 아니었지만, 굉장히 희귀한 클래스 중 하나였다. 아니, 랭커 플레이어 중 [군주] 클래스는 류오쥔춘밖에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어쩌면 히든 클래스라고 봐도 무방하겠지.

드미트리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확실히 군주의 클래스 효과라면…….”

[군주]는 부하로 둔 이들이 획득하는 경험 일부를 습득했다.

그 경험엔 경험치는 물론.

버프를 비롯한 각종 업적 효과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 면만 본다면 군주는 사기적인 클래스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걔는 그걸 거기까지 키운 것도 대단하다~”

군주는 동시에 현대 사회에서는 절대 육성이 불가능하다 평가받는 클래스기도 했다. 군주에게 충성을 맹세한 플레이어는 일방적으로 손해를 봤으니까.

드미트리가 입술을 삐죽거렸다.

“그 자식은 그냥 나라를 잘 타고 태어난 거지.”

“그래서 부러워?”

“미친 소리 하지 마. 나는 자유로운 영혼이라고.”

“그래서 자유롭게 뻥뻥 차이는 거구나~?”

또다시 티격태격─

시끄러운 것과 별개로 록스도 그 의견에는 동감이었다.

국가 차원의 지원이 아니었다면.

류오쥔춘은 절대 500레벨의 벽을 돌파할 수 없었겠지.

‘하지만 이 정도로 노골적인 움직임은 없었다.’

함대를 이끌고 제로 산맥을 찾았다니.

여러모로 신경 쓰이는 행보가 아닐 수 없었다.

록스는 주변을 바라봤다.

인파 속에서 우뚝 솟은 두 사내의 머리.

그리고 보이진 않지만, 곁에 있을 한 사람까지.

“그쪽도 같은 생각 중이겠지?”

.

.

.

남태민은 피가 끓어올랐다.

“아니, 이렇게 선수를 친다고?”

천하통일……!

AAU가 제로 산맥의 출현을 정식으로 발표하기도 전에 한 발짝 빠르게 움직이다니. 아무리 AAU에 가입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반칙 아니냐고, 이건!

“아니, 같은 플레이어로서의 상도덕이 없네.”

씩씩거리는 남태민을 말린 건 히사기였다.

“천하통일도 리스크를 감수했을 겁니다.”

“리스크? 뭔 리스크?”

“현실에 나타난 제로 산맥은 아르카나 대륙에 있던 제로 산맥과 다를 테니까요.”

“……?”

라이벌이란 타이틀.

그 앞에 ‘선의의’라는 수식어만 추가됐을 뿐.

히사기에게 설명을 듣기만 하는 건.

남태민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는 일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떠오르는 게 없었다.

‘……드래곤을 말하는 건가? 아니지, 그것도 호열 씨가 제대로 봉인하셨으니까. 아르카나 대륙 때랑 크게 다를 건 없을 텐데.’

결국, 남태민은 입을 열었다.

“잠깐, 신발 끈 좀 묶고 말하자.”

“……그 갑옷에 신발 끈은 어디 있는 겁니까?”

“아니, 말이 그렇다는 거지.”

싸늘한 히사기의 뱀눈에도 남태민은 꾸역꾸역 허리를 숙여 쪼그려 앉았다.

그러곤 고개를 들어 올렸다.

뚱한 표정의 레오니에게 입을 뻐끔거렸다.

“……이거, 무슨 말 하는 거야?”

레오니는 진심으로 생각했다.

‘죽일까?’

왜, 악의가 느껴지지 않아서 더 약이 오르는 느낌?

남태민과 히사기를 바라보고 있으면 항상 그런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허리를 숙이지 않아도.

‘보이고 들린다고. 이 덩치만 큰 새끼들아.’

레오니가 그런 뜻을 담은 싸늘한 시선을 보냈다.

남태민은 한숨을 내쉬었다.

“됐다. 바바리안에 버서커가 뭔 머리를 쓰겠다고.”

“?!”

……진짜 한 대 후려갈길까?

그런 충동이 치밀어올랐지만, 참아보자.

다짐했잖아?

나도 그 격식이란 걸 좀 가져보자고.

레오니가 용케도 입부터 열었다.

“바다에 솟아났으니까. 상대적으로 저레벨 몬스터가 등장하는 제로 산맥 아래쪽은 전부 바다에 잠겼겠지?”

“……와씨, 너 천재냐?”

“너도 뇌까지 근육은 아니잖아. 좀 써보는 게 어때?”

누가 봐도 격식과는 거리가 먼 회화였지만, 레오니는 스스로 만족했다. 욕지거리를 뱉지 않았으니, 그녀의 기준에서는 크나큰 발전이었다.

히사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대격변 이전, 우리가 알고 있던 제로 산맥의 정보는 모조리 쓸모가 없어진 겁니다. 저레벨 지역은 전부 태평양에 잠겼을 테니까요.”

……뭐야, 다 듣고 있었어?

남태민은 모른 척하고 일어났다.

“확실히 일리가 있네.”

해수면 위로 드러난 제로 산맥.

과연, 그 수준이 어떤지는 진입하고 맞부딪혀 봐야지만 가늠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의미에서 천하통일은 도박수를 던진 게 맞았다.

“우리도 긴장할 필요가 있겠어.”

레벨 업은 물론.

라이언 하트 기사단을 비롯한 아르카나인들의 도움으로 강해졌다고는 해도 자만은 금물이었다. 성전에서 제 몫을 해내기까지는, 아직 한참 부족했으니까.

이내, 포탈로 진입하는 플레이어들.

시야가 바뀌자 그들을 맞이한 건 웬 빛이었다.

“뭐야, 이거?”

시차 때문인가, 그게 아니면 태양마저 가릴 정도로 드높이 솟은 제로 산맥 때문인가. 어둠 속에서 빛나는 구체, 라이트만이 더욱 선명하게 보였다.

“천하통일 짓인가?”

아니, 걔들이 누구 좋으라고.

그럴 리가 있나.

게다가 보이는 라이트의 숫자가 많아도 너무 많았다.

이 정도의 라이트를 발현하기 위해선.

천하통일에 존재하는 마법사들이 마력을 쏟아부어도 부족할 터.

덕분에 생각의 방향은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제로 산맥에 진입할 정도의 강자.

타인을 위해 어둠을 밝힐 정도의 마음씨.

라이트를 대규모로 발현할 정도의 마법적 능력.

그 모든 걸.

동시에 갖춘 이는 한 명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같은 생각을 한 것인가.

남태민, 히사기, 레오니.

세 사람의 눈빛이 마주쳤다.

“……호열 씨?”

.

.

.

[숭고의 효과로 작은 변화가 일어납니다.]

……뭐지?

또 나도 모르는 사이에 어떤 숭고한 짓을 한 거냐?

전부 사실대로 털어놔라, 그랑펠.

그러나 나의 성화에도.

그랑펠을 느긋하게 읊조릴 뿐이었다.

“뒤쫓고 있는가. 나의 빛을.”

그리고 나아갈 뿐이었다.

“그렇다면 나도 우려하지 않고 나아가겠다.”

[스킬, ‘천적관계’가 발동됩니다.]

악마의 기척이 느껴지는 곳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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