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191화 (191/489)

◈ 191화. 선물 (1)

침대에 누울 때까지만 하더라도.

이예림의 입가에선 미소가 떠나지 않았었다.

하나뿐인 동생.

호열이를 놀려먹을 생각에 싱글벙글했으니까.

“이호열, 너는 진짜 제대로 걸렸어.”

매일매일 장문의 안부 편지를 보내는 건 잘하는 짓이라고 치자. 평소엔 바쁘니까 그렇다 해도 휴가를 냈으면, 본가에 얼굴 한번 비치는 게 자식된 도리 아니냐?

“짜식이 안 그래도 걱정하시는데.”

물론, 엄마 아빠는 그런 소리를 하면.

-“저 가시나 또또 동생 괴롭히려고.”

-“예림아, 누가 들으면 효녀 난 줄 알겠다.”

-“우리 셋째 딸. 따님이나 엄마한테 잘하세요.”

어째선지, 화살을 나한테 돌렸지만.

그래도 이예림은 할 말이 있었다.

키득키득, 웃으면서 내뱉는 말.

“격식이라곤 찾아볼 수 없군, 내 동생.”

집 밖에서 호열이의 위치야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인류의 영웅이다, 평화의 상징이다, 뭐다.

TV에서 워낙 떠들어 댔어야 말이지.

그러나 언니들과도 말했다시피.

집에서 호열이는 여전히 동생이었다.

클 호에 기쁠 열.

그 이름의 뜻대로.

존재 자체만으로도 기쁨이 되는 우리 막내.

이예림의 입꼬리가 더욱더 위로 올라갔다.

“……이 누나는 상상만 해도 즐겁구나.”

간만에 괴롭힐…….

아니, 얼굴을 마주할 생각을 하니까.

왜, 호열이가 철이 들고 나서부터는 느낄 수 없던 즐거움이라고 해야 할까? 최근 호열이를 보다 보면 문득, 옛 생각이 나곤 했으니까.

이예림이 미간을 찌푸리며 골똘히 생각했다.

“분명, 저런 말투를 들어본 적이 있는데…….”

십 년도 훌쩍 지난 일이라 기억은 잘 나지 않았지만, 어째서인지 저런 호열이가 낯설지 않았다. 옛 기억을 되짚어 가던 이예림이 문득, 중얼거렸다.

“긴 이름이 같은 걸 들어본 것 같기도 하고.”

……뭔 로미오였던가?

그 이름이 하도 길고, 어려웠어야 말이지.

좋아, 그것도 내일 호열이가 오면 물어보자.

다음 날.

그런 이예림이 잠에선 깬 시각은 오전 여덟 시였다.

하지만 이예림은 거실로 나간 순간, 경악하고 말았다.

“……뭐, 뭐?!”

귀청 떨어지는 비명에 최 여사가 노하셨다.

“어휴, 시끄러워. 호열이 아까 왔다가 갔다고!”

“며, 몇 시에?!”

“새벽 다섯 시!”

“다, 다섯 시?! 미친 거 아니야 걔?”

와장창!

이예림의 원대한 계획이 무너진 순간이었다.

*

누나만 셋.

딸 부잣집 막내아들.

나, 이호열.

예전에도 말했지만, 누나들 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해 나의 잔머리는 발전할 수밖에 없었으니. 나는 긍지에 한 점 부끄럼 없이 알찬 휴가를 마무리했다는 것이다.

왜, 내일 찾아뵙겠다고 했으니까.

새벽 다섯 시에 찾아가도 거짓말은 아니잖아?

또한 긍지 없게 웬수와의 조우를 피하려고 일찍 움직인 것도 아니었다.

그렇지 않아도 [첫 세계수의 축복]의 효과 덕분에 잠자는 시간이 많이 줄어든 나였으니까.

항상.

언제나 새벽부터 발버둥 쳐온 나를.

이예림, 그 웬수가 잡을 수 있겠냐고.

-“얼굴이 반쪽이 됐네, 우리 아들.”

어머니, 최강희 여사께서는 나를 보자마자 와락 껴안으셨다.

따로 내색은 하지 않으셨겠지만, 아들 걱정에 잠 못 이루셨다는 것쯤이야. 누나들한테 전해 들어서 알고 있다.

-“이제 좀 듬직하구나, 호열아.”

아버지, 이준욱 사장님께선 내가 나온 신문이라면 전부 잘라서 스크랩해 두신다고 했나. 하여튼, 필사적으로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하시는 게 아버지다웠다.

“조금 더 일찍 찾아뵈어야 했거늘.”

매일 아침마다 편지를 써서 그런가.

얼굴을 맞댄 지 오래됐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게다가 무엇보다 본가엔 웬수가 있었으니까.

‘내가 1, 2호까지는.’

큰누나나 둘째 누나를 누이라고 부르고 존댓말을 하는 건…….

그래, 참을 수 있다.

하지만 이예림한테 존댓말이라니.

격식이고 뭐고,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그런 의미에선 잘 넘겼다, 호열아.’

평일에도 늦잠을 자는 그 생활 패턴.

예전부터 한결같구나, 나의 웬수여.

어쨌거나, 나는 곧장 마탑으로 향했다.

벌써 아침 일곱 시인가.

새벽 다섯 시에 본가를 찾았거늘.

밀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금방 시간이 흘러갔다.

그나저나, 부모님 앞에서 이런 말투로 말을 내뱉으려니.

진심으로 민망해서 죽을 것 같은 기분이었는데 말이야.

우리 이 사장님께서 참 좋은 말씀을 해주셨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말투도 진중해졌구나. 그래, 그런 위치에 있으면 그 정도 무게감은 가지고 있어야지.”

아버지.

정말, 오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진심으로 안도했다.

‘……흑역사 때문이란 건 절대 들키고 싶지 않다.’

가족 앞에서 수치사만큼은 전적으로 피하고 싶단 말이다.

이내, 발현된 포탈으로 진입.

시야가 돌아오자 마탑의 집무실이 보였다.

슥─

나는 손가락으로 책상을 훑었다.

그러고는 나지막이 읊조렸다.

“먼지를 털어낼 필요는 없겠군.”

하여튼 옷매무새부터 깔끔한 척은 다 떠는구나, 그랑펠.

최 여사님이 껴안았을 때도 옷이 잔뜩 구겨졌는데.

그땐 어떻게 가만히 있었나 싶을 정도다.

그것보다 도착하자마자 물은 왜 끓이는 건데?!

“식사를 거를 순 없는 법.”

탁─

책상에 내려놓는 건 보자기에 쌓인 무언가.

“그중에서도 아침은 오후의 티타임과 견줄만하다.”

그냥 배가 고팠다고 말하면 될 걸 꼭……!

어쨌든, 나는 보자기를 풀었다.

내가 보자기에 도시락을 싸올 리는 없었으니.

우리 최 여사님께서 아들을 위해 챙겨주신 아침이었다.

그나저나 보자기는 왜 또 그렇게 뚫어지라 보는데?

“규칙과 불규칙이 공존하는 비단이라. 훌륭하군.”

흔한 조각보에 의미부여 하지 말아주라, 그랑펠.

내가 언제나처럼 태클을 걸기도 잠깐.

똑똑─

누군가 문을 두들겨 왔다.

사전에 약속되지 않는 만남은 가지지 않는 나다.

그러나 복귀 첫날에는 융통성을 발휘할 필요도 있겠지.

뭐, 벤쉬도 아닌 것 같으니까.

나는 입을 열었다.

“들어와도 좋네, 마르셀로.”

“좋은 아침입니다, 경…….”

마르셀로가 나를 바라보더니 멈칫했다.

“이런, 혹시 식사 중이셨습니까?”

“그렇다네.”

“사전에 말씀을 드렸어야 하는데, 죄송합니다.”

“나는 부재중이지 않았던가? 개의치 말도록.”

“아뇨. 식사를 방해할 정도로 급한 일은 아닙니다.”

시무아르드 가문, 시한부의 저주.

악마와의 계약에서 해방된 마르셀로.

덕분에 이전과는 다르게 연구에 집중할 체력이 생긴 모양이었다.

양손에 수북하게 가져온 서류를 보면 말이지.

‘저건 분명 기이에 관한 자료들이겠지.’

돌아오자마자 업무 폭탄이라니!

잊고 있던 직장인 시절이 떠올랐건만.

긍지가 수석의 업무를 외면할 수 있을 리가 있나.

게다가 기이에 관한 연구라면 절대 간과할 수 없다.

‘상위 마왕, 가미긴에게도 통했던 기이다.’

그때는 가미긴에 기이에 저항한 것에 놀랐는데.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까.

기이가 가미긴에 통한 것에 놀라야 하는 게 맞았다.

그런 의미에서 다른 우물들보다 더욱 깊게 파볼 가치가 있다는 거겠지, 기이는.

‘그나저나…….’

양손 가득 서류를 든 마르셀로가 위태로워 보인다.

아니, 시한부의 저주도 사라졌는데.

왜, 아직도 뼈밖에 없는 건데. 마르셀로.

밥은 먹고 다니는 건지 의심스럽다.

“식사는 들었는가.”

“경황이 없어서 먹지 못했습니다.”

그래?

또 우리 최 여사님 손맛 한번 보여줘야겠네.

나는 마르셀로에게 말했다.

“괜찮다면 함께 드는 게 어떤가.”

“……네?”

“아침을 거르는 것은 좋지 않은 습관이라네.”

마르셀로는 멈칫하며 책상에 놓인 반찬통을 바라봤다.

어째, 이게 뭔지 궁금해하는 눈치군.

아르카나에 이렇게 생긴 음식은 없을 테니까.

호기심을 가질 법도 하다.

설명이야 어렵지 않은 일이지.

“이것은 밭에서 나는 곡식, 육류, 채소를 한데 모아 조리한 음식으로 그 재료의 준비부터 상당한 정성이 요구되네. 또한 그 조리방식에 따라 맛 또한 현격하게 달라지니, 마법으로 비유하자면 간섭 과정에 무엇을 더하느냐에 따라 완벽히 다른 음식이 발현된다고…….”

세상에.

‘군만두, 찐만두 맛이 완전 다르긴 해도……!!’

만두 설명을 그렇게 거창하게 하는 사람은 없을 거다, 그랑펠!

하지만 최 여사님의 정성이 들어갔다는 건 틀린 말이 아니다.

그 맛 또한 사남매를 키워낸 맛이다.

그러니까 아무한테나 권하는 만두가 아니다, 마르셀로.

“……그런 귀한 음식을 제가 들어도 되겠습니까?”

“그대는 그럴 자격이 있네, 마르셀로.”

“그럼, 염치를 무릅쓰고 동석하겠습니다.”

“어떠한가?”

“오오……!”

“과연, 말이 필요치 않겠지.”

“그보다 경…….”

“?”

“저도 한잔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아니, 안 될 건 없는데.

하나에 300원짜리라서 뭐가 다른가.

왜, 마르셀로까지 티백 녹차를 찾는 거람?

*

아이언 캐슬 호.

대륙을 내려다보던 드워프들은 경악했다.

“세, 세상에!”

아르카나 대륙.

심지어는 자신들의 은신처에서도 존재감을 발하던 제로 산맥이 사라졌다. 그것도 하루아침 사이에. 지도자, 체인워커가 심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악크샨 최후의 생존자이자 모험가.

호열과의 교류.

덕분에 체인워커는 균열에 대해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다.

균열은 아르카나 대륙과 모험가들의 세계를 잇는 통로.

그런 제로 산맥이 아르카나 대륙에서 사라졌다는 건…….

“그렇다면, 경의 세계에 제로 산맥이 나타났다는 건가?”

체인워커의 말에 드워프들이 웅성거렸다.

“무사하겠지?”

“글쎄. 제로 산맥이 워낙 거대하지 않은가?”

“그런 게 난데없이 떨어진다면……. 마력사출포 수만 방을 갈긴 충격과 맞먹겠군.”

복잡한 기계 장치들의 창조주, 드워프.

그래서일까.

제로 산맥이 난데없이 등장했을 때의 피해가 머릿속에 선명히 그려졌다.

물론, 그건 드워프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였다.

잠자코 듣고 있던 드레드센의 주민들이 속삭였다.

“……가드너 아저씨. 믿어지세요?”

“그럴 리가 있겠니, 란샤.”

“정말 무언가 일어나고 있는 것 같아요.”

제로 산맥이 있던 자리.

그곳은 더없이 평평해 언덕조차 보이지 않았다.

“……여러모로 걱정이 되네요.”

하늘을 나는 배.

아이언 캐슬 호는 제국의 수도성, 안토니움으로 향하고 있었다.

드레드센 주민들을 안토니움에 정착시키기 위함이었다.

‘한없이 깊으신 어둠 속 한 줄기 빛님…….’

이명이 아닌 그 이름은 호열 경이라고 들었다.

란샤는 아이언 캐슬 호에서 머물며 호열의 업적에 대해 알게 됐다.

최근에는 악마들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주셔서 그들이 움츠러들게 하셨다고 하셨지. 란샤, 자신의 눈으로 봐도 정말 악마들의 활동이 눈에 띄게 줄어든 것 같았다.

‘악마에 관한 걱정은 덜었지만…….’

우리가 수도성, 안토니움에 잘 적응할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서는 게 사실이었다.

드레드센은 누구에게나 외면받았던 작고, 가난한 마을이었으니까.

그러나 란샤는 주먹을 쥐었다.

‘그런 우리도 살아남았으니까.’

어둠의 정령, 디엔드.

디엔드가 말했던 긍지라는 걸 잊지 않았으니까.

란샤에겐 오히려 호열을 걱정할 여유가 생겼다.

드워프들의 표정이 워낙 심각했기 때문이었다.

“무사하시겠죠?”

란샤는 충격량 같은 건 잘 알지 못했지만…….

그냥 생각해 봐도 보통 일이 아닐 것 같았다.

강물에 사람이 뛰어들어도 수면이 출렁거리는 걸 생각해 보면.

제로 산맥이 떨어진다면 수면은 얼마나 거칠게 일렁인다는 걸까?

가드너가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저 무사하시기를 비는 수밖에 없겠구나.”

드레드센의 구원자, 호열.

가진 것 없는 자신들이 할 수 있는 건.

그저 구원자가 무사하기를 기도하는 것.

그리고 안토니움에 그 영웅담을 널리 퍼트리는 것 정도에 불과했다.

체인워커가 란샤와 가드너를 바라봤다.

“그대들의 말대로 호열 경의 세계, 그 안위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겠군. 제로 산맥 등장의 충격이야, 경이 어찌어찌 막아낼 수 있다고 치더라도.”

꿀꺽─

체인워커가 마른침을 삼켰다.

“제로 산맥은 그 자체만으로도 위험하니 말일세.”

수많은 강자가 태어나고, 살아온 아르카나 대륙.

그럼에도 여태껏 제로 산맥 최정상에 다다른 이는 없었다.

제로 산맥의 최정상을 지키고 있는 드래곤의 존재 때문이었다.

‘……경의 능력을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어디까지나 경도 인간이 아니던가?

인간과 드래곤.

그 체급은 땅과 하늘의 차이라 봐도 무방했으니까.

“후후.”

그러나 드워프들은 알고 있었다.

타고난 체급.

그 누구보다 짧고 두터운 체구를 가진 자신들이기에.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 또한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니까.

체인워커의 눈이 번뜩였다.

“비로소 경에게도 장비가 필요할 시기가 왔군!”

그렇지 않아도 호열을 위한 장비가 드워프들의 손으로 제련 중이었다. 특히나 방어구는 하이엘의 주문 아래 더없이 우아하게 담금질되고 있었다.

마력의 백금.

고순도 마력석.

남색 나비 실타래…….

드워프의 보물창고에서 희귀하다고 손꼽는 재료들로 만들어지는 방어구였으니, 그 성능은 드워프의 최선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기대할 만할 것이네, 경.”

문득, 체인워커의 시선이 굳게 닫힌 철문을 향했다.

“……크흠, 무기는 빼고 말일세.”

드워프 최고의 대장장이, 월스와일.

그가 봉문(封門)하고 귀철의 제련에 매달린 지도 벌써 수십 일째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철문, 사이로 들려오는 목소리.

“부족하다. 턱없이 무디구나!”

“닥쳐라. 아직 제련은 끝나지 않았다.”

“드워프여, 그가 베어야 할 적들을 떠올려라!”

……경, 하필 찾아도 저런 귀철을 찾았단 말인가?

계속해서 이어지는 귀철의 음성.

체인워커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나는 더욱더 예리해져야 한다. 하늘의 별, 마안을 베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런 대륙의 숫돌로는 부족하다. 말 그대로 하늘에서 떨어진 숫돌, ‘은하수 숫돌’로 나를 벼려내라는 말이다!”

광물 주제에.

아는 것도 많고.

요구는 더 많구나.

“나 원 참, 은하수 숫돌이라니.”

천하의 드워프들 사이에서도 전설로만 전해 내려오던 마도구를.

대체 어떻게 찾아내서 벼려내라는 말인가?

.

.

.

……잠깐만.

은하수 숫돌?

순간, 떠오르는 셰그윈의 목소리.

-“그깟 왕관을 누가 쓰든지 내 알 바가 아니다. 나는 마도구, 은하수 숫돌을 손에 넣기 위해 제후들에게 힘을 빌려줬을 뿐이다.”

그거 안토니움 황궁 창고에 있다고 하지 않았나?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