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0화. 끝맺음이 중요한 법이지
무지막지하게 거대하시다, 제로 산맥.
이렇게 높은 곳에서 내려다봐도 한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의 크기라니.
그런 의미에서는 역시 마탑이다.
‘잔잔하다, 잔잔해.’
마력 소모량은 간섭 과정에 얼마나 복잡한 과정이 더해지느냐에 달려있다.
예를 들어서…….
‘내가 [심미]에 괜히 호들갑을 떨었던 게 아니란 거지.’
만약 [심미]를 발동하지 않고, 그와 비슷한 효과를 내기 위한 간섭을 더한다면?
발현에 소모되는 마력은 적게는 몇 배, 많게는 몇십 배까지 늘어날 테니까.
바다를 잔잔하게 하는 데에 복잡한 간섭 과정은 필요하지 않았으니.
타고나길 천재로 태어난 마탑 마법사들의 마력이 더없이 효율적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말이었다.
‘이거, 내가 올 필요까지도 없었던 거 같은데.’
그러나 모든 일엔 절차가 있는 법.
얼굴을 비춘 이상, 안부라도 나눠야겠지.
나는 하늘을 걸어 유그위드와 마르셀로에게 접근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허공을 걷는데.
또각─
소리가 날 리가 있나.
내가 입을 열고 나서야 두 사람은 나를 알아차렸다.
“경?”
……왜 거기서 나와?
마르셀로, 얼굴이 딱 그렇게 말하는 표정이다.
일단, 따뜻한 말부터 건네자고.
“다들 고생이 많군.”
평소 입방정치고는 따뜻한 인사를 건네기도 잠깐.
마르셀로가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말씀 중에 죄송합니다만, 경께서는 휴직 기간이시지 않습니까? 그동안 무리하셨던 만큼, 이번에는 경께서 나서실 필요가 없도록 처리하려고 했는데…….”
미안해할 필요는 없다, 마르셀로.
그냥 내 팔자가 이렇게 생긴 걸 어쩌겠어?
그리고 내심 수석의 무게가 조금 그리웠거든.
옛말이 틀린 게 없더라고.
집 나가면 개고생이라더니.
‘악크샨보다는 마탑이 낫다.’
마지막엔 진짜 한계를 초월한 체력 단련이다, 뭐다.
진짜로 긍지에 가라앉을 뻔했으니까.
벤쉬의 출탑 신청서에 불합격을 휘갈기던 때가 아른거릴 정도였으니 말 다했지, 뭐.
그러니까.
“우려할 것 없네, 마르셀로.”
제로 산맥이 나타나지 않았더라도.
“나 또한 이 시간부로 수석의 업무로 복귀하겠다.”
마탑에 복귀했을 거란 뜻이었다.
그나저나 원로 마법사, 유그위드의 표정이 심각했다.
대충 이야기를 듣자하니, 심각한 표정을 지을만한 상황이었다.
“용마대전 시대의 마법진인가.”
드래곤과 마탑의 전쟁.
어쩌다 싸우게 됐는지 나로서는 그 이유를 알 순 없다만.
마탑은 그 패배에서 쫄아도 제대로 쫀 게 확실했다.
‘천하의 마탑이 마법진까지 남긴 걸 보면 말이야.’
단지 드래곤의 단잠을 깨우지 않기 위한 마법진이라니.
그 당시 마탑 체면이 말이 아니었을 것 같군.
하지만 그런 굴욕을 감수하더라도.
드래곤은 건드려선 안 될 존재라고 판단한 거겠지.
‘근데 그걸 대체 누가 건드린 거래?!’
나.
사실 속으로는 이미 식은땀을 한 바가지 흘렸다.
제로 산맥이 현실에 업데이트된 이상.
드래곤은 더는 남 이야기가 아니었으니까.
막말로 텟퍼른의 [깨워선 안 될 존재]처럼 깨어나기라도 해봐라.
‘상상하기도 싫다, 진짜.’
그런 의미에서 지체할 시간은 없었다.
제로 산맥이 만들어 낸 지진과 쓰나미야, 마탑의 마법사들이 충분히 잠재우고 있었으니까.
내가 할 일은 그보다 더한 재앙, 드래곤이 잠에서 깨어나지 않도록.
저 고대의 마법진을 복구하는 것이다.
“마법진의 복구부터는 내가 맡도록 하지.”
설령 고대의 마법진이라고 한들.
그랑펠의 천부적인 재능.
거기에다가 『반전 마법』이라는 꼼수.
발현력까지 증폭시켜 줄 서클의 경지에 도달한 지금.
내게 머뭇거릴 이유는 없었다.
“따라서 발현하는 것이 아니네.”
“……?”
“그저 되돌리기만 하면 되는 일이니까.”
“……!!”
“마치 긍지를 되살리듯.”
……부디 반전 마법을 휘황찬란하게 포장하지 마라, 그랑펠.
유그위드와 마르셀로가 오글거려서 움찔거린 게 아니기를.
바라던 와중에 마법진이 원래의 형태로 돌아왔다.
스스스─
그러더니 드러났던 제로 산맥 최정상에 다시금 짙은 안개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마치, 드래곤들이 잠들었다는 둥지를 감추려는 듯이.
콰드드득─
그 와중에도 제로 산맥은 빠른 속도로 업데이트되고 있었다.
그랑펠 사전에 무언가를 우러러보는 일은 없었으니.
나는 산맥이 눈높이보다 높이 솟아오른 순간부터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유그위드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근데, 어째 신이 난 얼굴이시다.
“일주일. 아니지, 며칠이나 됐나요? 그 짧은 휴식기 동안 서클을 자유자재로 다룰 정도로 익숙해지다니요! 심장에서 울리는 마력의 박동도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청명하군요!”
마력의 박동이라면…….
그 츠릉─ 거리던 심장 소리를 말하는 건가?
지금은 영약 덕분에 서클도, 박동도 원래대로 돌아왔지만. 그땐 [초월자]의 조건을 충족하지 못했었으니까. 서클의 효과 또한 봉인된 상태였다.
“탑주님께서도 서클을 온전히 다루기 위해 숱한 위기를 겪으셨다고 들었는데. 그런 의미에서 이 수석은 정말 대단하시네요!”
그저 효과가 봉인되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것뿐이거늘.
나는, 그랑펠은 침묵했다.
사실 뭐, 틀린 말은 아니다.
따지고 보면 위기를 겪기는 했으니까.
그놈의 티티임을 고집하다가.
얼어 죽을 뻔했다가, 기절했다가, 하여튼…….
‘……지난 일이니까 말이라도 나오지.’
천하의 그랑펠이 찻잔을 놓쳐 깨버릴 정도였으니.
탑주가 겪었다는 숱한 위기를.
나는 단기간에, 한꺼번에 겪었다고 봐도 무방하겠지.
고개를 끄덕이려던 찰나에 기척이 느껴졌다.
“흡!”
벤쉬 윌리엄.
그가 나를 보더니 서둘러 입을 막았다.
곁에 있는 뱅그릿의 멋쩍은 표정을 보아하니, 내 이야기를 하고 있던 게 분명하군. 형편없는 출탑 신청서조차 그리웠다고, 한마디를 건네고 싶었지만 그럴 여유는 없었다.
슥─
마티스가 나를 보고 가볍게 묵례했으니까.
벨리에도 가볍게 손을 흔들었고, 페이얀은 무언가를 우물거리다가 다급하게 씹어 삼키곤 고개를 숙였다. 보자, 키코 선임의 다크써클도 여전한 게 다들 그대로구나.
마탑 전원 출탑.
타인의 시선에서 봤을 때야.
이 순간만큼 위엄 넘치는 모습이 또 없겠지.
하지만 내게는 언제나와 같은 풍경이었다.
새삼스럽게 나, 이호열.
참 많이 컸다는 생각이 든다.
그와 동시에 책임감이 느껴졌다.
제로 산맥이 현실에 모습을 드러낸 지금.
내게는 외면할 수 없는 퀘스트가 하나 있었으니까.
[월드 퀘스트 : 악룡(惡龍) 사냥꾼]
사악한 용의 일족을 사냥한 자여.
산맥의 전설이 그대를 부르고 있다.
─제로 산맥 최정상에 도달하라. (진행 중)
완전히 모습을 드러낸 제로 산맥.
그 높이는 하늘의 태양을 가릴 정도.
떠오르는 메시지는 누구라도 섬칫하게 할 정도였다.
[제로 산맥]
[적정 레벨 : 누구에게도 권장되지 않음]
[붕괴도 : 100%]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적정 레벨에 적힌 문구만큼은 똑같군.
그렇다.
나는 누구에게도 권장되지 않는, 제로 산맥 최정상에 도달해야 했다.
월드 퀘스트를 떠나서. 최정상에 도달할 정도의 능력을 갖춰야만 그랑펠의 무거운 긍지에 가라앉지 않을 테니까.
나는 산맥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읊조렸다.
“산맥과 긍지. 비로소 무엇이 더 드높은지 겨룰 수 있겠군.”
……제발, 누구도 듣지 못했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
마탑이 나설 때만 하더라도 세상은 반신반의했다.
-아무리 마탑이라고 해도 가능함?
-일단 닥치고 지켜보자
-아니;;; 행복회로만 돌릴 순 없자너
-왤케 부정적이냐?? 악마임??
-ㄹㅇ긍지 없는 놈
누구의 말대로.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클 수밖에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런 마음가짐이 무색하게도.
마탑은 보란 듯이 대재앙을 진압했다.
아니, 진압이라 하기도 뭐했다.
-아니, 잔물결 하나 안 보이는데?!
-이과 나와보셈 저게 물리적으로 가능한 거임???
-ㅁㅊ놈아 마법인데 이과가 불러서 뭐하게
-그럼 플레이어, 마법사라도 나와봐!!
과연, 아르카나 대륙 최강의 무력 집단이라는 것인가?
잔잔해진 바다를 당연하다는 듯 내려다볼 뿐.
카메라에 비친 그들의 얼굴에선 긴장감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총출동이라는데 플레이어들은 안 보이네?
-저기 껴서 마법 발현할 수 있는 플레이어는 아직 없지
-ㄹㅇ 마법 개념만 이해한 상태일 걸 다들
-아니, 잠깐만 있는 것 같은데?!!
그 가운데 유일한 플레이어.
호열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자 선임 마법사 중 몇몇의 표정이 급격하게 변했다.
그중에서도 벤쉬 윌리엄, 그는 경악에 가까운 표정을 지었다.
-선임들 표정 보니까 마탑도 예상하지 못한 것 같은디?
-설마 휴가가 남았는데 출근한 거임???
-아니, 휴가 중에 출근이라고??
-ㅁㅊ 그건 사람이 할 짓이 아니잖아!!
-인류를 위해서 휴가 반납을…… 그저 호멘
그러나 무엇보다 주목을 받은 건 호열과 마르셀로.
그리고 원로 마법사로 추정되는 이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었다.
스튜디오의 전문가들은 그 장면을 뜯어보듯 분석하기도 했다.
일시정지─
“자, 여기 보시면 이호열 플레이어가 마법을 발현한단 말입니다? 제로 산맥 정상을 향해서요. 어떤 마법을 발현했는지 알 순 없지만…….”
그러나 마법에 대해서도 이해하지 못하는데.
고대의 마법진과 반전 마법을 알아볼 수가 있으랴.
그럼에도 추측은 가능했다.
“두 사람의 표정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표정이요?”
“확대해 보면 아시겠지만, 둘 다 굉장히 놀란 표정들 아닙니까? 이호열 플레이어가 발현한 마법의 수준이 굉장히 수준 높은 마법일 것이다. 저는 그렇게 예상합니다.”
그 대단한 마탑의 원로, 수석이 놀랄 정도의 마법이라고?
먹음직스런 떡밥을 넷튜버들이 놓칠 리 없었다.
[이호열, 제로 산맥에 발현한 마법의 정체는?!]
[마법 발현 이후, 최정상의 안개가 짙어졌다!!]
[뭐, 제로 산맥 꼭대기에 드래곤이 산다고?!]
꼬리에 꼬리를 물던 추측.
모든 정보를 종합해 보자면 이러했다.
“……정리하자면, 호열 님께서 현실에 풀려나면 어떤 영향을 끼칠지 모르는 드래곤을 제로 산맥 최정상에 봉인하신 게 분명해 보입니다!”
이호열.
그가 제로 산맥 최정상에 드래곤들을 봉인했다고.
플레이어들은 또 한 번 경악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드래곤의 위엄은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부터 자자했었으니까.
“사실상 최종 보스잖아, 드래곤이면?”
“그런 드래곤을 봉인할 정도로 강하단 말이야?”
“그, 그렇겠지? 반신이라는 원로 마법사가 저렇게 놀라는 표정을 짓는 걸 보면……. 마냥 뇌피셜이 아니라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 같은데?”
유스라 왕국.
황금 송아지 주점에서 오가는 대화.
락키드가 웬일로 주정 없이 술만 들이켰다.
“이번 건 시원하게 인정하지, 총대장 씨.”
꿀꺽─
드래곤을 봉인하다니.
젠장, 나는 절대 못 해낼 일을 해내셨군.
자고로 발 없는 말은 진짜 말보다도 빠른 법.
황금 궁전의 화원.
“감히 나의 관심과 보살핌을 받고도 이 정도밖에 자라지 못한단 말이냐? 뿌리부터 뽑히기 싫다면 더욱더 크고 화려하게 자라도록 하거라.”
쫑긋─
비약초를 향해 협박을 쏟아내던 엘시도어의 커다란 귀에도.
호열의 소문이 들려왔다.
이호열, 그 건방진 인간 놈이 드래곤을 봉인했다고?
엘시도어는 코웃음을 쳤다.
“흥, 웃기지도 않는군.”
그건 다른 의미의 코웃음이었다.
“어머니의 축복을 독식했으니 당연한 일이지.”
엘프.
드래곤과 동격이라 봐도 무방하며 그들을 도마뱀이라 부를 자격이 있는 유일한 존재.
엘프, 엘시도어의 입장에서는 고작 이런 일로 호들갑을 떠는 인간들이 이해가 되질 않았다.
“녀석은 애초에 이 몸조차 굴복시켰다.”
제로 산맥에 드래곤을 봉인하는 것쯤이야, 어렵지 않은 일이겠지. 만약, 봉인하지 못했다면 오히려 내가 녀석을 용서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건 이 몸께서 한낱 도마뱀보다 못하단 말이 되니까.”
커뮤니티를 달구는 뜨거운 반응.
창밖에서 들려오는 엘시도어의 혼잣말까지.
호열은 그 모든 걸.
유스라 왕국의 집무실에 앉아서 감상하고 있었다.
달칵─
언제나처럼 느긋하게 찻잔을 기울이며.
.
.
.
도대체, 나는 언제쯤 과대평가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그냥 용마대전부터 전해 내려온 마법진을 반전 마법으로 복구한 것뿐인데. 마치 전설 속 드래곤을 봉인한 용사가 된 것 같은 취급이다……!
“칭송이 지나치군.”
말은 그렇게 하면서 너, 어깨에 힘은 왜 주는 건데?
어쨌거나, 진짜 휴가 마지막 날까지 다이나믹하구나.
사실 그랑펠의 긍지께서는.
당장에라도 마탑에 복귀하려고 했거늘.
마르셀로의 만류가 있었다.
-“부디 오늘만큼은. 저희 마탑과 아르카나 대륙이 경과 모험가들에게 받은 구원을. 돌려드릴 수 있도록 양보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그랑펠도 고집을 부릴 순 없었다.
물론, 쉬는 게 쉬는 게 아니었다.
온 세상이 나에 대한 과대평가를 늘어놓는데.
어떻게 마음이 편할 수 있겠냐고!!
게다가 나는 알고 있었으니까.
그 어떤 과대평가라고 해도.
그랑펠은 그걸 기어코 현실로 만들고 말리라는 것을.
‘……내일부터는 고생길이 시작되겠구나.’
달칵─
그래서일까.
티타임을 소중하게 여기는.
그랑펠의 마음을 조금은 알 것 같기도 하다.
“과연, 흠잡을 곳 없는 맛과 향기다.”
물론, 티백 녹차를 향한 극찬에는.
여전히 공감할 수 없지만.
그래도 마지막 여유를 즐기자.
위이잉─
위잉─
윙─
“?”
다짐하는 와중에 스마트폰이 연달아 진동했다.
도착한 건 메시지.
그 내용을 확인한 나는 곧, 생각을 고쳐먹고 말았다.
아무래도 그 고생길이 지금부터 시작된 것 같다고.
-야
-야야
-야야야
-이호열
-너는 어떻게 된 애가 휴가라면서
-엄마 아빠 누나
-아니지
-누ㅋ이ㅋ들한테 얼굴 한 번을 안 비추냐???
……부디 진정해라, 나의 웬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