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9화. 확실하게 주고받았군
제로 산맥의 등장.
인류가 쌓아온 모든 것을 제로(Zero)로 되돌릴 만큼 파멸적인 피해가 예상됐다. 전 세계의 석학들이 제로 산맥의 설정을 두고 머리를 맞댔다.
“꼭대기에 용이 산다고요?”
“……이런 말도 안 되는 게 지구에 솟아나요?!”
“코스모는 뭐 이런 비현실적인 산을 만들었답니까!”
“당장 바다에서부터 나타난다고 하더라도……!”
산맥이 높게 솟아오르면서 해수면에는 엄청난 파장이 일어나리라.
그 탓에 발생할 지진과 쓰나미의 파괴력은?
이건 특정 몇몇 나라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런 쓰나미 앞에 방파제 역할을 해줄 나라는 없을 겁니다. 말 그대로 모든 나라가, 모든 문명이 바다에 뒤덮일 겁니다!”
절망적인 소식은 세계 각국 지도자들에게도 전해졌다.
“……피해를 최소화할 방법은?”
물음에 대답할 수 있는 이는 없었다.
그럴 수밖에.
대격변 이전에도.
이후에도 인류의 과학은 무서운 속도로 발전해 왔다.
그러나 그 방향성은 어디까지나 파괴하는 방향에 그치지 않았던가?
그것이 대답이 없다고 닦달할 수 없는 이유였다.
그랬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인류는 간과하고 있었다.
과학과는 전혀 다른 개념.
다른 세계의 [마법]이 현실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
.
.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
마탑.
세계에 마탑에 관한 소식이 전해지기 시작했다.
마탑의 로비.
윤종진은 어딘가로 다급하게 전화를 걸었다.
그 수신인은 당연하게도 PD 현용석이었다.
“……선배, 제가 반드시 만회할 거라고 했죠?”
-바빠 뒈지겠는데,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
“아니, 호열 씨 꽃밭 사건 말이에요!!”
투데이 아르카나.
메인 카메라 감독의 촉.
그게 똥촉이라는 건 호열의 화원을 취재하면서 모두에게 탄로 났다. 화원을 가꾸는 호열의 모습이 시청자들에게 많은 화제가 됐건만.
정작 가능성을 알아본 건 동행했던 김 작가였으니까.
그 실수를 만회하겠노라.
달랑 카메라 하나를 챙겨 들고.
마탑 로비에 잠복하듯 대기하던 윤종진.
“며칠 동안 죽치고 있었던 보람이 있었어요.”
그가 의미심장하게 말을 이었다.
-화면 전송할 테니까. 알아서 편집해서 써봐요.
뚜뚜─
윤종진은 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현용석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렇지 않아도 방송국은 마비 상태였다.
“제로 산맥에 잠깐이나마 설렜던 내가 병신이다.”
아무리 직업병이 무섭다고 하더라도.
지구의 멸망보다 방송 소재가 끊이지 않겠다는 생각이 먼저 떠올랐었다니.
물론, 걱정한다고 한들.
한낱 방송국 PD가 자연재해 앞에서 할 수 있는 일 따윈 없겠지.
그나저나 이놈의 직업병이 또 도졌다.
“……뭣 때문에 호들갑을 떨었는지나 볼까?”
딸깍─
클릭과 동시에 완료.
이내, 실시간으로 떠오르는 윤종진의 앵글.
그걸 확인한 현용석의 동공이 휘둥그레졌다.
“뭐, 뭐야.”
기이한 마탑의 계단에서.
기이할 정도로 많은 마법사가 내려오고 있었다.
과거와 다르게 외부 활동을 시작한 마탑이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그건 한정적인 수준에 불과했다.
외부에 모습을 드러낸 이들은 마르셀로를 비롯한 몇몇에 불과했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
수석 마법사, 마르셀로를 필두로.
스무 명의 선임 마법사, 전원이 그 뒤를 따랐다.
그 뒤로도 수백의 숙련, 견습 마법사들의 행렬이 이어졌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놀라운 일이었거늘.
이내, 윤종진의 앵글이 누군가를 클로즈업했다.
중년보다 노년에 가까운 온화한 인상의 여인.
유달리 장식과 문양이 화려한 로브.
그녀의 복장만 봐도 지위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현용석이 중얼거렸다.
“……설마 원로 마법사인가?”
반신(半神)이라 불린다는 그 원로 마법사?
그 말이 뜻하는 바는 간단했다.
탑주를 제외한 마탑의 마법사 전원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 이건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에도 듣도 보도 못한 광경이었다……!
“대체 무슨 이유로……?”
불현듯 떠오르는 가능성.
그랬다.
이 순간 저들이 움직일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제로 산맥……!”
현용석은 자신에게 질문을 던졌다.
‘천하의 마탑이 단지 그 이유 하나 때문에?’
투데이 아르카나 PD.
현용석은 직책에 걸맞은 아르카나 지식을 겸비했다.
아르카나에서 마법사들이 어떤 족속인지도 잘 알고 있단 말이다.
‘마법사들은 오만하다.’
솔직하게 오만에 빠질만하다.
레벨에 걸맞은 장비가 필수인 다른 클래스와 다르게 마법사들에겐 육체를 흐르는 [마력]이 곧 무기이자 방어구였으니까.
‘마탑은 그런 마법사 중에서도 정점…….’
더군다나 고인 물은 썩는 법이지.
그동안 외부와 교류하지 않은 마탑이기에.
지금의 행동은 보고도 믿을 수 없었다.
그러나 현용석은 빠르게 판단했다.
“뭐가 됐든, 특종은 특종이네.”
망설이지 않고 투데이 아르카나 특별 방송 준비에 돌입했다.
그런 현용석의 판단은 정확하게 맞아떨어졌다.
채널 VBC.
특집 투데이 아르카나.
화면 속에서 마르셀로가 입을 열었다.
-구원을 받았으니, 구원을 드리겠습니다.
……천하의 마탑이 구원을 받았다니?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수십 억 인구 중에서.
그 말뜻을 바로 알아차린 이는 단 한 명밖에 없었다.
단 한 명, 호열이 화면을 응시했다.
.
.
.
내가, 그랑펠이 입에 달고 살다시피 했던 말.
“모든 일에는 주고받음이 있다.”
마르셀로.
그 뒤끝 가득한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었구나!
그렇지 않아도 마탑에 복귀해야 하나 싶었던 참이었다. 왜, 업데이트 내역이 떠오르자마자 난리도 여간 난리가 아니었으니까.
‘갑자기 제로 산맥이라니.’
등장의 여파로 초대형 자연재해가 뒤따를 거라고.
몬스터가 아니라 자연재해에 인류가 멸망하게 생겼다고.
뉴스의 전문가들이 워낙 심각하게 말씀들을 하셨으니까.
그런데, 내가 텔레파시를 보낸 것도 아닌데.
마르셀로가 먼저 움직일 줄이야.
솔직히 말해서 나, 마탑에게 조금 감동했다…….
“절차는 지켜야 하는 것.”
……감동하는 와중에도 뻔뻔하구나, 그랑펠.
휴직계를 제출했으니 알아서들 처리하는 게 기본이라는 거겠지.
그러나 발언과는 다르게.
나는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있었으니.
낙하산이라고 하더라도 나도 마탑의 일원이었으니까.
나는 창밖의 영약 밭을 바라봤다.
“과도한 수분은 오히려 뿌리를 썩게 하더군.”
……초대형 쓰나미를 물뿌리개에 담긴 물에 비유하지 마라, 그랑펠.
어쨌거나, 이런 자연재해 앞에서 가만히 손을 놓고 있을 순 없다는 것이다.
“또한 시련 뒤엔 보상이 따르는 법이지.”
게다가 다른 지역도 아니고, 무려 [제로 산맥]이었다.
꼭대기에 드래곤이 산다는.
사실상 아르카나 대륙 전기 최후반까지.
활동 무대가 될 수 있는 지역이라는 말이다.
500레벨 대에 진입한 뒤.
퀴른베르크 기계탑에 축적된 경험치를 날로 먹고…….
아니, 습득하고 상승한 레벨은 95레벨이었다.
‘덕분에 늘어난 경험치 요구량을 체감하진 못했지만.’
당연하게도 균열만 클리어해서는 그 정도의 레벨을 올리는 건 불가능했다.
클리어하면 사라지는 균열이 아닌 몬스터가 끊이지 않는 사냥터라면 모를까.
‘확실히 경험치 걱정을 덜 수 있을지도 몰라.’
지나치게 요란한 업데이트만 무사히 넘긴다면 말이지.
그런 내게 지구 멸망급의 자연재해를 막아낼 자신이 있느냐고 물어본다면, 당연하게도 자신 있다고 대답해 주리라.
예전처럼 마탑 뒤에서 호가호위하던 이호열은 더 이상 없다.
왜냐고?
중간과정을 뛰어넘었든 어쨌든.
나는 심장에 서클을 품고 있었으니까.
[현재 도달한 성취 : 서클 (모든 마법 발현력 1,000% 상승)]
속성에 친화력이 있다면, 마법에는 발현력이 있다.
나는 그런 서클의 위력을 확인할 생각이었다.
머뭇거릴 새는 없었다.
마력을 끌어올리자 확실히 평소와 느낌이 달랐다.
고오오─
……이게 서클의 위력인가?
곧장 허공에 발현된 고위 마법, 포탈.
마르셀로조차 간섭 과정에 공을 들여야 하는 포탈이었거늘.
즉시라고 말해도 좋을 정도로.
신속하게 발현하게 될 줄이야.
스스로도 놀랄만할 성장이었거늘.
항상.
나는, 그랑펠은 언제나처럼 동요하지 않았으니.
“자연의 섭리와 맞서는 것은 처음이군.”
그저 읊조리며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섭리를 거스르기 위해 힘 조절은 하지 않겠다.”
정말로.
“오너라, 자연이여.”
여러 의미로 심각하게……!
*
제로 산맥의 위치가 특정됐다.
태평양.
인류는 고민에 빠졌다.
“백 전문가님, 이걸 기뻐해야 하는 걸까요?”
“그래도 최악은 피했다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제 의견은 조금 다릅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황 전문가님?”
“피해가 없이 넘어가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차라리 대륙 어딘가에 생성됐다면 그 일대는 초토화가 됐을지라도, 인류는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건……!”
“어허, 대를 위해 소가 희생해야 한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다.
누군가에겐 냉정한 말일 수도 있었지만.
그게 사실이었다.
“다들 아시지 않습니까? 이건 나눈다고 나눠서 질 수 있는 피해가 아니라는 걸요!”
그러나 이제 와서 열을 내봤자 바뀌는 건 없었다.
제로 산맥이 태평양 한가운데에 생성된다.
전인류가 그 생성의 후폭풍을 그대로 감당할 상황에 직면했다. 재난영화에서나 봤던 수백 미터짜리 쓰나미의 위협이 현실로 다가온다.
전부가 예정된 사실이 됐으니까.
그때였다.
“마, 말씀 중에 죄송합니다만. 속보입니다……!!”
“……?”
스튜디오에 새로운 소식이 전해진 건.
앵커가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마탑의 마법사 전원이 외부 활동을 시작했다는 소식입니다. AAU 측에 따르면 대격변 이전에도 전례가 없던 일이라고 하는데요, 자세한 소식은 현장에 나와 있는……!!”
마탑이 움직이기 시작했단다.
수석, 선임, 숙련, 견습, 그리고 원로 마법사까지.
마탑의 전력(全力)이 포탈 너머로 걸음을 옮겼단다.
단, 한 마디 말만을 남기고서는.
-구원을 받았으니, 구원을 드리겠습니다.
그런 마탑의 마법사들이 포착된 건.
제로 산맥을 촬영하기 위해 비행하던 헬리콥터.
카메라의 앵글 속에서였다.
콰드드득─!
굉음과 함께 솟구치는 제로 산맥.
그 크기와 생성 속도는 실시간으로 새로운 대륙이 생성된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그와 동시에 출렁이는 파도 또한 재난 영화에서 CG로만 봤던 그것이었다.
스오오오─!
그러나 카메라가 향한 곳은 제로 산맥이 아니었다.
하늘을 부유 중인 마탑의 마법사들 방향이었다.
화염마법학 선임, 벤쉬는 어깨를 으쓱였다.
“과학이란 건 비효율적이네요. 그렇지 않습니까, 뱅그릿 선임?”
투두두두─
하늘을 날기 위해서는.
저 요란한 소리를 내는 기계 장치에 탑승해야만 한다니.
순수마법학 선임, 뱅그릿은 멋쩍게 대답했다.
“다 장단이 있는 거겠죠.”
“장단이 있다니. 뱅그릿 선임, 지금 마법을 뭐로 보는 겁니까? 세상에 마법처럼 위대한 건 없습니다. 자, 지금처럼. 저 거친 파도도 이렇게 잔잔하게 잠재울 수 있지 않습니까?”
“그게……. 제 생각이 아니라 이호열 수석님께서 하신 말씀이신데요? 모든 것엔 장단점이 있다. [『기이』]에 대한 탐구는 바로 그 인정에서 시작하셨다고.”
“……헉.”
언제 나 모르게 그런 소리를 하셨단 말인가?
설마, 원탁 회의에서 마티스 선임에게 잔소리를 듣고.
웅크리고 있다가 잠깐 졸고 말았을 때 그때인가?!
당황한 벤쉬에게 뱅그릿이 되물었다.
“설마, 이 수석님 말씀에 동의하시지 않는다는……?”
“아, 아뇨! 그럴 리가 있습니까?”
고오오오─
벤쉬는 다급하게 마력을 끌어올렸다.
“그게 이 발현에 집중하느라 잠깐 말이 헛나왔을 뿐입니다. 제가 또 태우는 마법이 아니면 서투르지 않습니까? 하하……. 제 마음 아시죠, 뱅그릿 선임?”
태평양을 즈려밟는 마법.
바다를 잠잠하게 하는 데엔 복잡한 간섭 과정은 필요치 않았다.
한 명, 한 명이 선택받은 이라 불리는 마탑의 마법사들.
그들의 방대한 마력이 파도를 가뿐하게 통제하고 있었다.
“보, 보고도 믿기 힘든 광경입니다!”
실시간으로 세계에 퍼져 나가는 광경.
거짓말처럼.
아니, 『마법』처럼.
인류를 멸망으로 끌고 갈 뻔한 파도가 잦아들기 시작했다.
원로 마법사, 유그위드는 웃음을 흘렸다.
“이런 협력은 또 새롭네요, 마르셀로.”
“함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 인사에 섭섭해지는 것 또한 새롭네요.”
“아…….”
“농입니다. 농.”
유그위드는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제로 산맥을 바라봤다.
과연, 마탑 전원을 움직이게 할만한 거산(巨山)이었다.
왜, 그 최정상 둥지에는…….
“슬슬 오래된 악연의 냄새가 풍기는군요.”
용마대전의 승자, 드래곤이 웅크리고 있었으니까.
마탑 전원이 움직인 건 바로 그들 때문이었다.
소란에 혹시라도 둥지에 잠든 드래곤.
그들 중 하나라도 잠에서 깨어나기라도 한다면…….
“진짜 재앙이 찾아올 테니까요.”
그런 불상사에 대처하기 위한 전원 출탑이었다.
그렇기에 제로 산맥을 유심히 주시하던 유그위드는 이내.
심상치 않은 낌새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마르셀로 수석.”
용마대전의 패배자, 마탑.
그런 마탑이 얻었던 교훈.
어느 누구도 드래곤의 잠을 깨워선 안 된다.
교훈을 잊지 않기 위해서.
최정상 언저리에 발현해 뒀던 마법진들.
그 마법진 중 하나가 파괴된 상태였다.
그 말이 뜻하는 바는 간단했다.
“아무래도 변수가 생긴 것 같군요.”
누구의 짓인지, 당장은 알아낼 수 없겠지.
보는 것만으로도 광활한 제로 산맥이거늘.
그 안에는 십만 동굴이라는 더욱더 깊은 심연이 존재했으니까.
그러니까 우선시해야 할 목적은 역시나.
“마법진을 복구하는 데 집중하겠습니다.”
파괴된 마법진의 복구였다.
이론마법학의 창시자, 마르셀로.
그의 능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유그위드였지만.
쉽지 않으리라, 짐작하고 있었다.
용마대전은 아득히 먼 과거의 일이 아니던가?
고대 마법진의 구조를 파악한다고 하더라도 탐색, 간섭하여 발현까지 해내는 것은 다른 문제였으니까. 유그위드가 작게 중얼거렸다.
“……그 날개 달린 도마뱀들 인내심이 썩 좋진 않을 텐데.”
그러나 유그위드 또한 간과하고 있었다.
드래곤만큼이나 인내심이 없는.
그런 자는 마탑에도 존재했으니까.
문득, 뒤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들 고생이 많군.”
“……!!!”
“나 또한 이 시간부로 수석의 업무로 복귀하겠다.”
흩날리는 은발.
한결같은 차림새.
한결같은 목소리가 말을 이었다.
“마법진의 복구부터는 내가 맡도록 하지.”
그리고.
“……이, 이호열 수석?!”
한결같이 해내고야 말았다.
.
.
.
고대의 마법진인 게 무슨 상관이냐.
『반전 마법』.
한 방이면 원상복구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