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186화 (186/489)
  • ◈ 186화. 역사에 아로새겨지는 것은

    제국.

    수도성, 안토니움에는 수많은 인재가 모인다. 그러나 마법사만큼은 아니었다. 대륙에서 손꼽히는 재능을 가진 이들은 마탑으로 향했으니까.

    세간에 흔히 떠도는 말로 마탑의 숙련 마법사쯤 되면, 마탑 밖에선 고위 마법사로 추앙받을 수 있다는 게 사실이라는 뜻이었다.

    제국 최고위 마법사, 내쉬 윌리엄.

    내쉬는 구석에서 손톱을 물어뜯었다.

    하나뿐인 형님, 벤쉬 윌리엄을 떠올렸다.

    ‘형님…….’

    어렸을 적.

    화룡에 버금갈 재능을 가졌다 평가받던 형님이었다.

    재능을 떠나 어디에 가서도 주눅이 들지 않던 형님.

    나이답지 않게 언제나 의젓한 모습을 보여주셨던 벤쉬 형님.

    비록 형님처럼 마탑에 입성할 정도의 재능은 아니었지만, 내쉬는 최선을 다했다.

    밤낮으로 마법 서적을 탐독, 다양한 분야의 마법에 관한 지식을 쌓았다.

    그리고 그 능력을 인정받아 제국 최고위 마법사 자리에 올랐다.

    하지만 내쉬는 오늘.

    자신의 한계를 실감하고 있었다.

    ‘저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형님……!’

    오늘따라 형님이 사무치게 그리웠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황제의 알현실 앞.

    대신들이 구석으로 찾아와서는 속삭여 왔다.

    “내쉬 경, 가늠할 수 있겠습니까?”

    아뇨.

    모르겠는데요.

    내쉬는 무책임한 말이 목구멍으로 치밀어 올랐다.

    대체!

    폐하와 알현 중인 저 정령은 무엇이란 말인가?

    우아함, 그 자체.

    외관에서 흘러나오는 기품으로는 정령왕이라 불려도 손색이 없을 정도.

    그래, 수십 번 양보해서 정령왕이 이례적으로 모습을 드러냈다고 생각해 보자.

    문제는 그 모습이 자신을 비롯한.

    모두에게 보인다는 것이었다!

    정령마법의 기초 중의 기초.

    정령마법은 선택받은 자들의 마법이라는 것.

    자연 상태의 정령을 목격하기 위해선 까다로운 조건을 충족해야만 했으니까.

    ‘하지만 모두의 눈에 보인다는 건…….’

    계약 정령으로 누군가와 계약을 맺은 정령이란 것이었다.

    내쉬는 억장이 무너져 내리는 듯했다.

    ‘정령왕과 계약을 맺다니!’

    세상에 어떤 마법사가 그럴 수 있답니까?

    혹 벤쉬 형님이라면 알고 계실까요?

    이 못난 아우는 짐작조차 못 하겠습니다.

    처량을 떨던 내쉬는 정신을 차렸다.

    어쨌거나, 이건 희소식이었으니까.

    내쉬가 큼큼 헛기침을 뱉고는 말했다.

    “신께서 제국을 저버리지 않으신 모양입니다.”

    대신들이 속닥거렸다.

    “……정령에 대해 물었는데, 뭐라시는 겁니까?”

    벤쉬 형님!

    형님과 달리 저는 아직 박력이 부족한가 봅니다아…….

    한숨을 삼킨 내쉬가 말을 덧붙였다.

    “정령이 가져온 것은 북부 원정을 떠나기 전 하르콘 경이 폐하께 하사받은 깃발이었습니다. 아마도 저 정령은 하르콘 경과 라이언 하트 기사단의 소식을 가지고 폐하를 찾은 것 같습니다.”

    대신들의 얼굴은 그제야 밝아졌다.

    “아니, 저 깃발이 그렇게 중요한 거였습니까?”

    “그 말은 하르콘 경이 살아있다는 뜻입니까?”

    “그럼 진작 말씀해 주셨야죠, 내쉬 경!”

    귀를 찌르는 대신들의 목소리.

    내쉬의 눈빛이 아련해졌다.

    ‘벤쉬 형님, 마탑과 함께 어디로 사라지신 건가요? 아무래도 저는 관료 체질이 아닌 것 같습니다. 부디, 못난 동생 내쉬를 견습 마법사로라도 받아만 주신다면…….’

    내쉬가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던 그때였다.

    활짝─

    알현실의 문이 열렸다.

    황제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모두 들어와도 좋네.”

    “……!!!”

    장군, 대신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쉬가 알현실로 들어섰다.

    그곳에는 여전히 우아한 자세로 허공을 부유하는 정령이 있었다.

    황제가 입을 열었다.

    “정령의 이름은 하이엘…….”

    ……하이엘이라고?

    분명, 서적에 그런 이름의 정령왕은 없었거늘.

    내쉬가 생각하던 찰나에도 말은 이어지고 있었다.

    “……크리시아드 포시즌 리프.”

    자, 잠시만요. 폐하?

    불경하지만, 제대로 들으신 게 맞으십니까?

    그게 정녕 정령의 이름이 맞단 말입니까?

    이름으로 정령의 격을 판단할 수는 없었지만, 누가 보고 들어도 심상치 않은 외관과 이름이었다. 혹시나 하는 생각이 싹트기 시작했다.

    내쉬는 또 한 번 형님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형님, 정령왕 위에 정령 황제도 있는 걸까요?’

    부족한 아우는 모르겠습니다.

    내쉬는 고개를 떨궜지만, 황제는 담담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물론, 이어지는 말에 내쉬는 얼마 가지 않아 화들짝 놀라 고개를 치켜들고 말았다.

    “마, 마탑?”

    마탑이.

    형님이 계신 마탑이 무사하단다.

    그뿐만 아니었다.

    “하르콘을 비롯한 라이언 하트 기사단도……?”

    “프로스트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게 아니었다니!!”

    “그럼 그렇지. 뮤온이, 여신의 성지가 무너질 리 없습니다!”

    대륙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던 그들이 살아있단다.

    아르카나 대륙이 아닌 다른 세계에서라고 한들.

    살아서 숨 쉬고 있단다.

    황제는 입을 열었다.

    “그대들이 나를 어떻게 여길지는 모르겠군.”

    하이엘, 정령은 그리 말했다.

    아르카나 대륙과 모험가들의 세계.

    그 두 세계를 잇는 ‘균열’이 존재한다고.

    곧바로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지금은 충분했다.

    “부끄럽게도 나는 안도하고 말았네.”

    황제로서 그들을 지키지 못한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을 자책해야 했거늘.

    벅찬 감정이 끓어올라 억누르기에 벅차다니.

    그러나 황제는 할 일을 잊지 않았다.

    “또한 믿지 못할 이야기는 이제부터 시작이라네.”

    그래.

    하이엘이 전해온 영웅담을 전해야 했으니까.

    그건 혼자만 알고 있기 아까울 정도였으니.

    “들어라. 서기는 빠짐없이 적도록 하라.”

    스스슥─

    이내, 황제의 말이 양피지에 새겨지기 시작했다.

    “마왕의 손아귀에 빠진 프로스트를 구원했다는 말씀이십니까? 아르카나 대륙에서 정체를 감춘 모험가들이 목숨을 걸고……?”

    “마탑, 그 콧대 높은 마법사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니요. 그들은 폐하의 말씀에도, 선대의 명령에도, 아니 어느 누구의 명도 따르지 않던……!!”

    “드워프들이 제국을, 인류를 돕고 있다니……?”

    그 믿지 못할 소식들이 전부 황제가 공인한 역사가 되어가고 있었다. 거기에는 불과 어제의 일도 포함되어 있었다.

    “안토니움을 포위했던 유미르 대공 휘하 수십의 제후들. 그리고 검성이자 그랜드 소드 마스터인 셰그윈이 퇴각한 것 또한…….”

    스스스슥─

    깃털펜이 거침없이 적어나가던 도중.

    신하 중 누군가 말했다.

    감히 황제의 말을 의심하는 건 아니었다.

    “폐하, 이건 쉽게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업적입니다.”

    “음.”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구나.

    그러나 이곳에 무엇보다 큰 보증이 있다.

    펄럭!

    황제가 깃발을 펼쳤다.

    라이언 하트의 상징, 사자가 그려진 깃발.

    그 뒤편엔 각기 다른 필체로 글자가 적혀있었다.

    『예시카 브라이트.

    에노크 로렌.

    카제트 오너…….』

    마지막 기사단장, 하르콘.

    라이언 하트 기사들의 이름이다.

    의문을 제기했던 사내가 조심스럽게 그 이름들을 살폈다.

    이내, 그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헛된 기대로 실망하지 않고 싶어서 의심했거늘.

    분명했다.

    이 필체는…….

    “……카제트, 나의 아들아. 무사했구나.”

    자신의 아들의 것이 확실했다.

    “송구합니다, 폐하. 의심을 거두겠습니다.”

    황제는 마지막 문구를 다시금 살폈다.

    『부디 무사하시길 기원합니다, 나의 주군이시여.』

    내가 그대의 필적을 어찌 잊을 수 있겠나, 하르콘.

    북부 원정에 나선 라이언 하트 기사단.

    그들이 종적을 감춘 뒤 황제는 끊임없이 자책해 왔다.

    ‘그대가 올린 출사표를 수도 없이 곱씹으며 후회했으니 말일세.’

    그러나 그런 황제가.

    ‘헛된 짓이 되었지만 그렇기에 기쁘군, 하르콘.’

    이제는 미소 짓고 있었다.

    그 입가에서 말이 이어졌다.

    “그리고 이 모든 업적이 단 한 명의 사내에게서 비롯된 일이니, 서기는 그의 이름을 정확하게 적도록 하라.”

    “……!!!”

    꿀꺽!

    긴장감 속에서.

    “제국의 구원자.”

    그 이름이.

    “한없이 깊은 어둠 속 한 줄기 빛.”

    황제의 입으로 울려 퍼졌다.

    “이호열.”

    *

    과연, 아르카나 대륙의 시간이 현실보다 빠르다는 걸 체감하게 된다.

    달칵─

    티백이 담가진 찻잔을 내려놓는 순간, 시야가 점멸했다.

    [수도성, 안토니움과의 관계도가 대폭 상승했습니다.]

    [수도성, 안토니움에서의 영향력이 대폭 상승했습니다.]…….

    하르콘과 라이언 하트 기사단의 깃발.

    하이엘이 무사히 황제에게 소식을 전달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하이엘…….

    너, 어떤 소식을 어떻게 전한 거니?

    관계도, 영향력 상승까지는 예상했었다.

    전후 사정을 제쳐놓더라도.

    어쨌거나 나는 셰그윈을 비롯한 반란군을 내쫓는 데 성공했으니까.

    그를 증명하듯 퀘스트 목표도 갱신됐고.

    [메인 퀘스트 : 전국시대(戰國時代)]

    격변의 시기.

    향하는 것은 단순한 권력인가.

    황제의 무능함인가.

    그것도 아니면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인가.

    대륙의 강자들은 황좌를 탐한다.

    그대의 선택이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 내리라.

    ─안토니움을 수성하라. (성공)

    결과적으로 위기에서 제국을 구했으니까.

    그 정도의 퀘스트 보상은 예상했다는 거지.

    그런데, 이건 보상의 정도가 심하잖아?!

    [제국과의 우호도가 최대치에 도달했습니다.]

    벌써 최대치라고?!

    불현듯 떠오르고야 마는 하이엘의 전과.

    그랑펠을 쏙 빼닮은 하이엘의 입방정 때문에 드워프들 사이에서 있는 거품, 없는 거품이 잔뜩 생겨버린 내가 아니던가? 직감할 수 있었다.

    ‘이번에도 엄청나게 양념을 쳤구나, 하이엘.’

    ……그래, 이미 엎질러진 마당에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단순하게.

    디엔드가 나서지 않은 것만 해도 어디야?

    “비로소 그 추악한 계획이 물거품으로 돌아갔군.”

    ……거품이란 단어를 뱉으면서도 찔리지 않는다니.

    과연, 철면피가 나날이 두꺼워지는구나. 그랑펠.

    그러나 아직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갱신된 또 하나의 퀘스트.

    [퀘스트 : 쓸데없는 짓]

    셰그윈은 악마 사냥을 쓸데없는 짓이라 여겼다.

    셰그윈과 대화를 나누고,

    행동의 진위를 파악하라.

    ─셰그윈과 조우하라. (성공)

    ─셰그윈과 악마의 연결고리를 찾아내라. (성공)

    ─진명의 악마, 셰그윈을 사냥하라. (진행 중)

    셰그윈은 악마에게 빙의된 게 아니었다.

    스스로가 악마로 타락한 것이었다.

    자신은 단순히 젊음을 되찾았다고 생각하는 눈치였다만, 그 새까만 동공은 악마의 그것이었거든. 무엇보다 [천적관계]가 발동했던 것처럼 확실한 증거도 없겠지.

    시공간의 사교장.

    그 규칙 때문에 퀘스트 성공까진 무리였다.

    나는 지껄였다.

    “합리적이지 못한 규율은 수정할 필요가 있겠군.”

    너는 몰라도 나는 결사반대다, 그랑펠.

    셰그윈은 악마니까.

    [천적관계]빨로 어떻게 비벼볼 수 있다고 치더라도.

    다른 초월자들이 존재했으니까.

    할 말, 못 할 말 다 내뱉는 이놈의 성격!

    무엇보다 그랑펠이 초월자들을 좋게 볼 이유가 없었다.

    사실 내 눈에도 졸렬하게 보이기는 하더라고.

    그렇게 강하면서 말이야.

    아르카나 대륙이 악마에게 당해 쑥대밭이 되도록.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니.

    ‘마탑처럼 사정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만.’

    그랑펠이 그 사정이란 걸 고려할 리 있겠냐고!!

    이번에야 셰그윈이 목적이었으니까.

    넘어갔다고 치더라도 다음에는……?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초월자들한테 다짜고짜 긍지가 없다고.

    면박을 주는 상상을 하면……!

    또 한 번 사교장의 절차에 더없이 감사하게 된다.

    ‘물론, 셰그윈 너는 예외다.’

    빙의돼서 몸을 빼앗긴 것도 아니고 스스로 악마가 된다고?

    게다가 뭐 대단한 목적이 있는 것도 아니고.

    고작 젊음을 되찾기 위해서어어?!

    “더없이 어리석구나.”

    누구는 말이야.

    영생 소리만 들어도.

    평생을 흑역사에 시달릴까 봐 치를 떨고 있는데!!

    셰그윈, 너는…….

    ‘……더없이 팔자가 좋구나.’

    나조차도 용서하지 못할 정도니까.

    그랑펠의 심정은 설명할 필요도 없겠지.

    셰그윈 정도 되는 강자가 누군가에게 목숨을 잃을 일은 없을 터.

    언젠가는 맞부딪히게 된다는 말이었다.

    ‘서클을 해방했다고 우쭐댈 게 아니야.’

    마법 발현력을 1,000퍼센트 증폭시켜 주는 서클.

    그러나 셰그윈도 마찬가지로 초월자였다.

    검술과 검강으로 어떤 효과를 내뿜을지를, 나로서는 알 수 없다는 뜻. 확실한 건 서클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무지막지한 효과를 가지고 있다는 정도겠지.

    ‘결국, 대비해야 한다는 거야.’

    내 방식대로.

    모든 방면으로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한다.

    당연하게도 거기엔 검술도 포함이다.

    문득, 떠오르는 셰그윈의 명검(名劍).

    되게 좋아 보이긴 했는데.

    뭐, 내 무기도 그에 뒤처질 것 같지는 않아서 말이야.

    “재회할 날이 기다려지는구나, 귀철.”

    무려 드워프 최고의 대장장이, 월스와일이 제련하고 있을 에고 장비란 말이다! 그러니까 필요한 건 장비에 걸맞은 검술 실력과 육체의 그릇이다.

    그리고 나는 그걸 전수해 줄 훌륭한 스승을 알고 있다.

    아니, 스승이라고 할 정도로 친한 인간들은 아니지만…….

    나는 지체하지 않았다.

    스스슥─

    곧장 깃털펜을 휘갈겼다.

    수신인은 탐험가 연맹 연맹장, 파비앙 들롱.

    그 목적은 탐험가 연맹의 마도구, [지옥의 횃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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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악크샨의 유지 : 지옥의 불에서 악크샨 악마 사냥꾼을 불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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