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5화. 절차에 감사하도록
순식간에 공기가 얼어붙었다.
마탑에서나, AAU 회의장에서도 느낀 거지만 내 주둥이엔 냉방 기능이 탑재된 게 확실하다.
어떻게 말을 꺼내기만 하면 분위기가 싸해지냐고!
그러나 내뱉은 이상.
물러서는 것도 그림이 영 아니다.
‘뭣보다 꿇릴 게 없거든.’
시공간의 사교장 규칙 하나.
서로 간의 모든 적대적 행위는 금지된다.
물론, 사교장에서의 일이 사교장 안에서만 끝나리라는 법은 없다.
사교장 밖에서 입방정의 대가를 치르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지.
하지만 그것도 나랑은 관계가 없는 일이다.
왜?
나는 다른 초월자들과 달리.
아르카나 대륙이 아닌 현실에 있으니까!
가고 싶어도 못 간다는 말이다, 아르카나 대륙엔.
‘당장 뒷감당을 걱정할 필요는 없거든.’
그러니까 그렇게 노려봐도 하나도 안 무섭다는 거다, 셰그윈.
“…….”
내게 호출당한 셰그윈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다짜고짜 자신의 죄를 알고 있느냐니.
사실 뭔 개소린가 싶을 거야.
그러나 이미 저지른 마당에 이쪽도 물러섬은 없다.
나는 다짐한 참이었거든.
‘이곳에서의 일은 이곳에서 확실하게 끝맺는다.’
그래,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입방정의 대가는 여기서 끝내야 한다.
단절된 아르카나 대륙과 현실이라고 해도, 균열이라는 변수가 있다.
혹시라도 앙금을 남긴 채로 셰그윈이 균열에서 모습을 드러낸다고 생각해 봐라.
‘……상상하기도 싫다. 그냥.’
그런 복잡한 사정으로 나는 말을 이었다.
“나와 마주 앉는 것을 허락하겠다.”
“……!”
말을 과하게 생략해서 하지 말아주라, 그랑펠.
그냥 친절하게 풀어서.
사교장이 워낙 크고 웅장해서 이렇게 먼 거리에서는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누기 힘들 것 같다.
그러니 오순도순 마주 앉아서 대화를 나누면 어떻겠냐.
좋게좋게 말할 수도 있잖아, 진짜.
그러나 한탄해 봐도 이미 늦었다.
저벅─
셰그윈이 나를 향해 걸어오기 시작했으니까.
새삼스럽게 느끼는 건데.
초월자쯤 되면 풍기는 분위기가 장난이 아니었다.
셰그윈뿐만 아니라 사교장에 보이는 모든 이들이 그러했다.
일단, 외관부터 범상치 않았다.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의 단어로 표현하자면, 굉장히 신경 써서 만든 네임드 NPC 같다고나 할까.
물론, 그 행동도 마찬가지였다.
턱─
셰그윈이 테이블 위에 검을 내려놓았다.
이럴 땐 기가 막히게 명품을 알아보는.
그랑펠의 심미안이 원망스럽다.
‘아무리 봐도 최소 유니크 이상이지?’
화려한 검집의 문양부터 ‘나는 보통 검이 아니요.’ 말하고 있다.
하긴 검성이자 대륙 유일의 그랜드 소드 마스터가 사용하는 검이니 대단한 게 당연하겠지.
물론, 자랑할 의도로 테이블 위에 검을 올려둔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
심기가 불편하시다는 표현일 터. 그런데 심기가 불편한 건 이쪽도 마찬가지거든.
나는 검을 바라보며 읊조렸다.
“이 검인가.”
“……?”
“퀴른베르크 기계탑을 베어낸 것은.”
움찔!
셰그윈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어떻게 그 사실을 알았느냐는 눈치인데.
일단, 마저 듣기나 해.
“알고 있는가. 그대가 무너트린 퀴른베르크 기계탑은 직전까지 수만의 악마를 사냥해왔다는 사실을. 또한, 그 긍지가 다할 때까지 악마를 사냥했으리란 사실도.”
그런 기계탑을 셰그윈, 그쪽이 박살 냈다는 말이다.
덕분에 아르카나 대륙 수만의 악마가 목숨을 부지했고.
나는 무려 5레벨이나 손해를 봤다는 거야.
그랬다.
안토니움도 중요하지만.
그 전에 그에 관한 이야기부터 들어야 한다.
[퀘스트 : 쓸데없는 짓]
셰그윈은 악마 사냥을 쓸데없는 짓이라 여겼다.
셰그윈과 대화를 나누고,
행동의 진위를 파악하라.
─셰그윈과 조우하라. (진행 중)
말했다시피.
그 진위에 따라서.
나의, 그랑펠의 처분은 달라질 수밖에 없을 테니까.
나는 셰그윈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대는 어째서.”
“……?”
“내가 가동한 기계탑을 베어낸 것인가?”
“!!!”
.
.
.
턱─
셰그윈은 자신의 상징과도 검을 상대의 앞에 올려뒀다.
사내를 떠보기 위함이었다. 귀찮은 규칙이 존재하는 사교장에서 상대의 실력을 가늠하기 위해 자주 써먹었던 수법이었다. 자신이 당했던 수법이기도 하고.
‘이빨을 드러내라.’
미끼를 던짐으로써 알아낼 수 있는 정보는 많다.
상대의 표정에서 적의가 드러난다면.
그건 곧 사교장의 규칙에 대해 무지하다는 뜻.
그러나 지금처럼 무표정 그대로라면…….
‘규칙에 대해선 알고 있는 모양이군.’
첫 진입이면서 어떻게 사교장의 규칙을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다만.
놀랄 것까지는 없었다.
아직 자신은 미끼를 거두지 않았으니까.
이내, 검을 향하는 사내의 시선.
그 시선에서 셰그윈은 의아함을 느꼈다.
‘……검으로 나를 알아본 게 아니다.’
쾌검, 아틀라스 소드.
셰그윈의 분신과도 같은 검.
그렇기에 아틀라스 소드를 들이밀었을 때.
상대방은 이런 반응을 보여야만 했다.
-“……그대는 누구지?”
-“셰그윈이 이런 애송이에게……?”
-“셰그윈에게 자식이 있었다는 소리를 듣지 못했는데?”
반로환동(返老還童).
셰그윈.
자신이 젊음을 되찾은 것을 알고 있는 이들은 초월자를 포함, 극소수에 불과했으니까. 그렇기에 검을 올려두고 면전을 맞댄 것이었다.
젊음을 되찾은 자신을 셰그윈이라 생각할 순 없을 테니.
그런데, 무엇인가. 이자는?
“이 검인가. 퀴른베르크 기계탑을 베어낸 것은.”
……어떻게 그 사실까지 알고 있는 것이냐.
당시에 주변에 있었던 것인가.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떨쳐냈다.
‘아니, 내가 느끼지 못했을 리 없다.’
전성기의 육체를 되찾은 현재.
자신의 감각은 그 어느 때보다 예민했다.
더욱이 강자는 강자를 알아보는 법.
이런 수준의 초월자를 내가 알아보지 못했을 리가…….
‘……잠깐.’
기억을 곱씹던 셰그윈은 멈칫했다.
상위 마왕을 떠올린 것이었다.
격이 다르기에, 감히 헤아릴 수도 없는 존재.
그런 상위 마왕을 지옥에 떨어트린 사내였다.
상위 마왕과 같은 격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설마, 내가 가늠하지 못할 정도의 힘이라는 것인가?’
이어지는 호열의 말.
그러나 셰그윈은 그 말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머릿속에 또 다른 가능성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걸 지켜볼 장소는 하나뿐이다.’
드높게 솟은 수도성, 안토니움.
이자는 안토니움에서 모든 것을 내려다본 것이다……!
찰나의 순간, 셰그윈이 판단을 내렸다.
‘실책이다.’
악마, 마왕들의 공세에도 안토니움이 무너지지 않은 이유는 다른 게 아니었다.
이 사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조차 헤아릴 수 없는 격을 가진, 이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그 사실을 인정하듯.
사내는 태연하게 물어왔다.
“그대는 어째서. 내가 가동한 기계탑을 베어낸 것인가?”
“……?!”
현재 아르카나 대륙에서 가동 중인 퀴른베르크 기계탑.
그 존재는 초월자들 사이에서도 의문이었다.
퀴른베르크 기계탑을 세운 것은 드워프.
그런 기계탑을 움직이는 건 드워프 혹은 그들과 밀접한 관계를 구축한 이들만 가능한 일일 테니까.
그러나 인간을 혐오하여 아르카나 대륙에서 모습을 감춘 드워프들이 아니던가?
꼬리에 꼬리를 물던 의문에 대한 대답이 눈앞에 있었다.
‘비로소 모든 게 납득이 되는군.’
‘대륙을 쥐락펴락하고 있었단 거잖아.’
‘히히. 잘못 걸렸네, 검성 할아범.’
셰그윈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때처럼 시끄러운 게 질색이라고 답했다가는.
-“답변에 따라 그대의 처분을 결정할 것이다.”
마주 앉은 상대가 어떤 행동을 보일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건.
사내는 이미 참을 만큼 참고 있다는 것이었다.
당장 안토니움 공성전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것만 봐도 그러했다.
‘영문은 몰라도 나로서는 환영할 일이다.’
셰그윈은 이미 판단을 내렸다.
안토니움에서 퇴각하겠다고.
수많은 제후와의 신뢰?
단언컨대 그들을 적으로 돌리는 것보다.
이 사내를 적으로 돌리는 것이 더 위험한 일이었다.
그러니까 셰그윈은 이를 악물었다.
‘이자가 참았듯 나도 인내할 때다.’
셰그윈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알지 못했다. 나의 실책을 인정하겠다.”
이런 말을 내뱉어 본 게 얼마 만이던가?
셰그윈, 자신도 아득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이번 안토니움 공성에서는 자신도 많은 것을 걸었다. 특히나 황궁의 창고에 잠든 마도구, ‘은하수 숫돌’을 놓치게 되는 건 굉장히 뼈아픈 일이었다.
그러나.
“또한 나는 안토니움에서 물러나겠다.”
마도구를 얻겠다고 목숨을 내놓을 순 없겠지.
무엇보다 이 육체로 무리하고 싶지 않았다.
셰그윈은 속으로 생각했다.
‘인정하마. 지금은 네가 강하다.’
그러나 나는 젊음을 되찾았다.
설령, 추악하게 손에 넣은 젊음이라고 하더라도.
결국, 시간은 나의 편이라는 것이다.
슥─
셰그윈이 자리를 뜨기 위해 검에 손을 뻗은 순간.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대의 목적은 황좌가 아니었나.”
흥, 셰그윈은 코웃음을 쳤다.
초월자.
그것도 격이 다른 초월자면서 그런 질문을 던지다니.
솔직한 목적을 뱉으라는 거겠지.
계획이 물 건너간 마당에 말해주지 못할 이유도 없었다.
“그깟 왕관을 누가 쓰든지 내 알 바가 아니다. 나는 마도구, 은하수 숫돌을 손에 넣기 위해 제후들에게 힘을 빌려줬을 뿐이다.”
은하수 숫돌.
구체적인 목적까지 털어놓자 사내는 말했다.
“그대의 말을 믿겠다.”
“고맙군.”
“그럼 다음 질문이다.”
“……?”
그러나 이어 들려온 말에 셰그윈은 주먹을 쥐었다.
‘……이런 굴욕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거냐?’
순간, 분노가 치밀었다.
하지만 셰그윈은 내색하지 않았다.
지금은 사내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고, 안토니움에서 안전하게 퇴각하는 것이 최우선이었으니까.
셰그윈이 고개를 끄덕이자, 곧장 다음 질문이 이어졌다.
“셰그윈, 어째서 그대에게…….”
그건 조금도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다.
“추악한 악마의 냄새가 나는 것인가?”
“?!”
.
.
.
다른 건 몰라도.
내가 악마 냄새 하나만큼은 기가 막히게 맡거든.
─셰그윈과 조우하라. (성공)
─셰그윈과 악마의 연결고리를 찾아내라. (진행 중)
확실해.
셰그윈에게서는 악마 냄새가 났다.
나는 올곧은 시선으로 셰그윈을 응시했다.
과연, 그 표정이 심히 볼만하구나.
검성이자 대륙 유일의 그랜드 소드 마스터.
셰그윈이 나를 노려보며 답한다.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
그런 시치미가 악마 사냥꾼한테 통할 거로 생각하면 오산이다.
무엇보다 나는 알고 있다. 누구에게나 공평한 시간이 아르카나 대륙에선 더욱 빠르게 흐른다는 것을.
하르콘은 셰그윈에 대한 감상을 말했었다.
-“검성, 그에게는 전성기라는 말이 무의미했다네.”
거기서 의문이 들었다.
내가 본 셰그윈은 새파란 청년이었는데.
어째서 전성기가 지난 사람처럼 말하는 건지 말이야.
내가 착각을 했나, 싶었는데.
직접 얼굴을 맞대보니까.
비로소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나는 입을 열었다.
“그 젊음과 무엇을 맞바꾼 것인가.”
악마 숭배자들은 꼴에 악마와 교류하는 걸 부끄럽게 여긴다.
카림제바부터가 그랬었다.
자신의 목적은 ‘진정한 진리’라고.
자신은 단지 악마를 이용했을 뿐이라고 지껄였었지.
만약, 내게 경험이 없었다면.
셰그윈과 악마의 연결고리라는 걸.
쉽게 알아차리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아르카나 대륙에서 영생이란.
오직 [첫 세계수의 축복]을 받은 이만 거머쥘 수 있는 권능.
엘프가 그 사실을 대신 증명해 줬잖아? 나한테서 축복을 돌려받기 위해, 코빼기도 비추지 않던 대륙에 곧장 모습을 드러낸 게 그 증거다.
“……맞바꾼 게 아니다. 영약, 영약의 효과다.”
기껏 떠올린 게 영약인 모양인데.
유감스럽게도.
아르카나 대륙에 그런 영약은 존재하지 않는다.
또각─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셰그윈, 그가 젊음과 무엇을 바꾸었는가.
나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상관없다.
“모든 인간은 하루를 살고, 하루를 죽어간다.”
점멸하는 퀘스트 목표.
─셰그윈과 조우하라. (성공)
─셰그윈과 악마의 연결고리를 찾아내라. (성공)
스스로 자각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말이야.
─진명의 악마, 셰그윈을 사냥하라. (진행 중)
셰그윈, 그쪽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니거든.
그 사실을 증명하듯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스킬, ‘천적관계’가 발동됩니다.]
“그대는 사교장의 절차에 감사하는 게 좋겠군.”
허세가 아니다.
초월의 경지, 서클을 개방한 현재.
[천적관계]의 효과라면 셰그윈과 맞서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아니, 무리를 떠나서 그랑펠의 긍지는 오히려 강대한 악마의 앞에서 더더욱 드높아지는 법.
나는 차갑게 내뱉었다.
“나는 지금 필사적으로 인내하고 있으니까.”
“!!!”
“검성. 아니, 악마보다 추악한 칼잡이여.”
.
.
.
안토니움.
끝나지 않는 공성전.
지친 병사들은 밤하늘을 바라봤다.
빌어먹을 마안이 자신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래도 희망이 보였는데.”
어떻게.
이런 상황에.
대륙 절멸의 위기에.
아군의 등에 칼을 꽂을 수 있단 말인가?
결국, 울분을 참지 못한 병사가 성벽 밖으로 소리쳤다.
“이 악마보다 더한 새끼들아!!”
저저 미친놈이!
곧장 화살 세례가 쏟아지리라.
병사들이 재빠르게 방패를 치켜든 순간이었다.
“…….”
각오가 다르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방패 사이로 병사들이 살짝 고개를 내밀었다.
다그닥─
어째서인가.
다그닥…….
말발굽 소리가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이내, 믿지 못할 소리가 들려왔다.
악마보다 못한 새끼들이라고 소리쳤던.
정신 나간 사내로부터.
“후, 후퇴하고 있다!!”
“……?!”
“병력이 후퇴하고 있다아아아!!”
그 믿지 못할 소식은 성벽 위에 있던 황제에게도 전해졌다.
황제는 전장을 바라봤다.
정말로 적들이 물러가고 있었다.
함락을 앞둔 안토니움에서.
마치 꽁무니를 내빼듯 퇴각하고 있었다.
전략적 후퇴인가.
간교한 계략인가.
황제는 모든 수를 생각했다.
그러나 입가에서 흘러나온 말은…….
“……나는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것인가?”
그럴 수밖에 없었다.
문득, 올려다본 하늘에서.
사자가 보였으니까.
정확하게는.
“폐하! 저 문양은……!!”
라이언 하트 기사단의 상징.
사자 문양이 그려진 깃발.
그 깃발을 나부끼며 정령이 내려오고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