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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183화 (114/489)

◈ 183화. 데뷔

차 한잔을 음미하는 시간.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그 시간에.

나, 너무 많은 일이 있었다.

‘……격식이 힘들다, 진짜.’

나는 간과하고 만 것이다.

그랑펠의 티타임 사랑을……!

그랑펠의 사전에 섞어 마시는 폭탄차(茶)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니. 나는 만년설꽃과 작열하는 해바라기를 우려낸 차를 차례대로 한 잔씩 음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격통이 시작됐다.

[영약, ‘만년설꽃’의 효과가 발동됩니다.]

[빙결 속성 친화력이 대폭 상승합니다.]

[빙결 마법 발현력이 대폭 상승합니다.]

[상태이상, ‘오한’이 발생합니다.]…….

각오는 했다만 상상 그 이상이었다.

시베리아의 찬바람?

북해도의 맹추위?

그것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수준의 한기였다.

굳이 비교하려면 세니오스의 만년설 정도는 가져와야 하지 않을까.

생각이 들 정도로.

덜덜덜.

그러나 나는 뻔뻔스럽게 지껄였다.

“기분이 좋을 정도의 서늘함이구나.”

누군 얼어 뒈지게 생겼는데, 뭔 개소리야!

그대로 얼어 죽을 순 없었다.

나는 곧장 작열하는 해바라기 잎을 우려내고, 홀짝였다.

그리고 또 한 번 후회했다.

[영약, ‘작열하는 해바라기’의 효과가 발동됩니다.]

[화염 속성 친화력이 대폭 상승합니다.]

[화염 마법 발현력이 대폭 상승합니다.]

[상태이상, ‘고열’이 발생합니다.]…….

머리로는 완벽했거늘.

실전은 다르다는 건가.

정말로 몸이 부서질 것만 같은 통증이었다.

쨍그랑─

오죽했으면 그대로 정신을 잃고 찻잔을 바닥에 떨어트렸을까.

격식으로도 극복할 수 없을 정도의 후폭풍이었다니.

정말로 미친 짓을 했구나, 자각이 든다.

그러나 강해서 살아남는 게 아니다.

살아남는 게 강한 거지.

결국, 버텨내고 눈을 떴으니 그만이라는 거다.

“나답지 않게 소란스러웠군.”

이 순간만큼은 입방정이 이리도 반가울 수 없구나.

그나저나, 또 한 번 실감하게 된다.

[첫 세계수의 축복]의 효과를……!

[첫 세계수의 축복이 ‘오한’을 거절합니다.]

[첫 세계수의 축복이 ‘고열’을 거절합니다.]…….

오한과 고열도 그 나름이다.

만약, 세계수의 축복이 없었다면.

작열하는 해바라기까지 갈 것도 없겠지.

나는 찻잔을 입에 댄 그대로 꽁꽁 얼어붙어서는, 세계 최초로 차를 마시다가 얼어 죽은 인간으로 박물관에 박제됐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고작 온기 버프로 막을 수준이 아니었어.’

두 영약을 모두 음용한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래, 효과가 중화되는 건 맞는데.

문제는 내 몸속에서 중화가 된다는 거였지!

[첫 세계수의 축복이 ‘내상’을 거절합니다.]

……흐릿한 의식 속에서 분명 섬뜩한 메시지를 봤던 것 같은데.

어쨌거나, 내가 괜히 그랑펠의 허세를 반가워한 게 아니란 말이다.

[칭호, ‘초월자’의 효과가 발동됩니다.]…….

그 아래로 떠오른 메시지.

두근─

그리고 무엇보다 반가운 심장박동까지.

무엇부터 확인해야 하나, 많은 생각이 들었거늘.

나는 가장 먼저 마력을 끌어올렸다.

흘러나온 마력이 깨진 찻잔을 휘감았다.

‘하여튼, 뭐가 됐든 흐트러진 꼴은 두고 보질 못하는구나.’

쩌저적─

반전 마법 발현.

바닥에 떨어져 박살 났던 찻잔이 원래의 모습을 되찾아 간다.

그런데, 잠깐만.

뭔가, 생김새가 비슷하면서도 이전과 다른 것 같다……?

왜인지 모르게 더 비싸 보인다고 해야 하나?

반전 마법은 말 그대로 반전이다.

단지 원상태로 되돌리는 것뿐.

간섭 과정에서 무언가를 더하지도 않았거늘.

마치, [심미]라도 발동한 것 같은 변화라고?

짐작이 가는 건 하나밖에 없었다.

‘……서클의 효과다.’

원로 마법사, 유그위드 왈.

서클을 형성하기 전후, 마법 발현력은 수에서 십 배까지 차이가 난다고 했었다. 단순하게 위력을 말하는 줄만 알았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이러면, 범용성이 장난이 아니잖아.’

새삼스럽게 감탄하게 된다.

‘괜히 초월자의 경지가 아니라는 건가.’

……좋다, 정확한 효과를 확인해 보자.

나는 이내, 상태창에서 칭호를 열었다.

해금된 [초월자]의 효과를 확인했다.

[초월자 : 그대의 초월적인 경지는 초월자라 불리기에 충분하다…….]

어째 첫 문장부터 익숙했다.

어디에서 봤나, 싶었더니.

[숭고] 칭호랑 말투가 똑같잖아, 이거?

[숭고 : 숭고한 자여, 아르카나 대륙이 그대를 기억하고 있다.]

설마, 숭고처럼 직접 맞부딪혀 가면서 그 효과를 체감해야 되는 건가? 걱정이 앞섰거늘. 아니었다. 초월자의 칭호의 효과는 그렇게 짧지 않았으니까.

[초월자 : 그대의 초월적인 경지는 초월자라 불리기에 충분하다. - 현재 도달한 성취 : 서클 (모든 마법 발현력 1,000% 상승) / 없음 / 없음 / 없음…….]

짧지가 않아서 오히려 문제였다.

‘현재 도달한 성취? 서클만 있는 게 아니었다고?’

하긴 경지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 게 당연하다.

아르카나의 클래스만 하더라도 셀 수 없을 정도니까.

나부터도 검강과 서클이라는.

검술과 마법, 각각의 경지에 다다르지 않았던가.

하지만 눈으로, 시스템으로 확인하는 건 다른 문제였다.

그건 내게, 그랑펠에게 의미하는 바가 컸으니까.

“과연, 나의 길이 옳았군.”

나의 길.

최대한 많은 살 구멍.

최대한 많은 우물을 파왔던 것.

‘헛된 게 아니었다는 거잖아.’

그랑펠의 성격이라면 저 공란을 채우기 위해서라도.

절대 게으름을 피우지 않겠지.

이제는 효율을 핑계로 요령을 부릴 수도 없겠구나.

덕분에 죽어가는 건 나라는 말이었다……!

‘이호열 인생 정말로 기구하고, 가혹하구나.’

하지만 또 마냥 징징댈 생각은 없다.

보다시피 성취의 효과는 어마 무시했으니까.

나는 말을 이었다.

“확실히 아직은 성취라 부르기에 무리가 있겠군.”

생사의 갈림길.

아니, 그냥 한 번 죽어버린 덕분에.

중간 과정을 생략하고 ‘검강’의 성취를 이뤄내기는 했다만.

아직은 초월자의 수준이라 부르기엔 무리가 있겠지.

왜, 하르콘만 하더라도 나보다 선명한 검강을 발산했으니까.

‘셰그윈 정도는 되어야 한다는 거야.’

앞으로 얼마나 많은 영약을 처먹어야……. 아니, 얼마나 다채로운 노력을 해야 도달할 수 있는 경지인가. 지금으로선 가늠할 수도 없었거늘.

나는 태연하게 말했다.

“허나, 긍지가 깃들지 않은 검은 더없이 가벼운 법이다.”

그래, 정말로 위로가 됩니다요.

자신감 하나는 대단하다, 그랑펠.

어쨌든, 나는 마지막으로 떠오르는 메시지를 확인했다.

초월자 효과까지 확인했으니까.

더는 놀랄 것도 없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오늘따라 많이 간과하는구나, 호열아.

[초월자 고유 스킬, ‘시공간의 사교’를 습득하셨습니다.]

칭호에.

엄청난 효과에.

구체적인 목표 설정에.

이제는 고유 스킬까지.

너무 아낌없이 퍼줘서인가.

이제는 슬슬 의심이 될 정도였다.

나는 의심을 가득 품고 고유 스킬을 확인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나는 우연을 믿지 않는다.”

정말이지, 뻔뻔하게도.

“우연을 기다릴 바엔 내가 나아가겠다는 말이다.”

*

AAU 대한민국 지부.

타다닥!

윤수겸은 쉴 새 없이 키보드를 두드렸다.

눈치를 보던 성현준은 슬그머니.

선배의 책상에 커피를 올려뒀다.

그래도 반응이 없자 성현준은 지나가던 이를 붙잡고 속삭였다.

“혹시 윤 선배, 왜 저러시는 건지 알고 계세요?”

“아, 현준이 너 연차 냈었지?”

“네, 오늘 복귀했는데……. 분위기가 평소랑 다르셔서요.”

이호열의 휴직계.

그건 직장인들에게 둘도 없는 핑계였으니.

성현준도 호열을 따라서 밀린 연차를 소진한 것이었다.

쉬는 며칠 동안 별짓을 다 해봤다.

-“……씁, 이 자세가 아닌데?”

화원을 가꾸는 호열을 따라 화분에 물을 주기도 하고, 어머니께 선인장에 물을 그렇게 주는 놈이 어디 있느냐며 등짝까지 맞아봤으니까.

그렇게 이야깃거리를 잔뜩 들고 AAU로 복귀했건만.

윤수겸이 아침부터 저 상태였다.

말을 걸기 미안할 정도로 집중한 모습.

“왜, 간만에 연락이 닿은 모양이더라고.”

“연락이 닿아요? 누구랑요?”

“코스모 시절 팀원들이랑.”

“아아……!”

국가 간에 이해관계가 얽히게 되면서 지부 간 교류가 적어졌던 AAU였다.

하지만 유스라 지부가 출범하게 되면서 각 지부들 간의 교류가 대격변 초창기 때처럼 활발해졌다.

“나도 그렇고, 수겸이도 그렇고. 다들 바쁠 수밖에 없지. 다들 빚을 웬만큼 졌어야지. 우리 유스라 지부 총책임자님한테 말이야.”

유스라 지부 총책임자.

AAU에서 호열의 직책이었다.

“AAU가 단절되면서 흩어진 정보를 모으면 그래도 뭔가 나오지 않을까, 싶었거든. 그렇지 않아도 우리 팀에서도 쓸만한 정보 하나 건졌어. 왜, 드래곤에 관한 건데…….”

“드래곤이요?!”

“아니다. 이건 나중에 확실해지면 말해줄게.”

“아아…….”

“어쨌든, 현준이도 수고하고.”

그렇게 말한 사내가 성현준을 스쳐 지나갔다.

“아, 넵! 고생하세요, 선배님!”

성현준은 얌전히 착석.

윤수겸이 키보드에서 손을 뗄 때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한 시간 뒤.

타닥!

마침내 기회가 오자 재빨리 입을 열었다.

“선배, 옆에 커피요!”

“커피? 아 땡큐.”

“그나저나 뭔 회의를 그렇게 하신 거예요?”

초롱초롱.

성현준의 눈빛을 윤수겸은 피식 웃어넘겼다.

“기대하는 것처럼 대단한 건 아니고.”

“……에이, 비밀이에요?”

“아니, 비밀이 아니라 진짜 별게 아니라서.”

윤수겸은 손가락으로 모니터를 가리켰다.

깜빡─

작성 중인 텍스트가 눈에 들어왔다.

성현준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와씨, 왜 전 이 생각을 못 했을까요?!”

초고레벨 플레이어 콘텐츠.

그건 모든 게임 개발진의 숙명이었다.

새록새록 코스모 재직 시절이 떠올랐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목요일마다 전쟁이었죠?”

“그래, 매주 업데이트에 별거 없다고 난리가 났지.”

“진짜로 뼈를 갈아야 했다니까요? 특히 우리 대한민국 게이머들 근성은 진짜……. 공략에 최소 한 달은 걸릴 콘텐츠를 어떻게 하루 만에 쌈 싸먹냐고요!”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

플레이어들의 콘텐츠 소모 속도는 그야말로 상상 이상이었다.

덕분에 회의에선 초고레벨 콘텐츠에 관한 아이디어라면 닥치는 대로 기록해 뒀었지. 윤수겸이 각 지부의 팀원들에게 연락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때 아이디어 찾아보시려고요?”

“맞아, 파볼 만할 가치가 있을 것 같았거든.”

“선배 말씀이 맞네요. 마왕도 그렇고, 드래곤도 그렇고. 전부 구상 단계에 머문 콘텐츠들이었으니까요. 그런 게 마치 원래부터 존재했던 것처럼 균열에 등장했으니까요.”

마찬가지로 아이디어에만 머물렀던 초고레벨 콘텐츠들이 아르카나 대륙엔 이미, 예전부터 존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뜻이었다.

“당장 그만한 정보가 필요할 건…….”

순간, 성현준의 동공이 확장됐다.

“맞아, 이호열 총책임자 님에게 전달 드릴 거야.”

“다른 플레이어들은 몰라도……. 확실히 총책임자 님께는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네요! 아니지, 설마 이미 다 알고 계시는 건 아닐까요?”

“어느 쪽이든, 일단은 최대한 긁어모아 보려고.”

역시, 선인장에 물을 줬다가 등짝을 맞은 이야기를 할 분위기가 아니었구나.

게다가 성현준 자신도 수다보다 궁금한 게 있었다.

“선배,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여쭤봐도 돼요?”

“뭔데. 말 거는 사람 없어서 심심했으니까 들어줄게.”

“아싸.”

드륵─

성현준이 의자를 끌고 오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긁어모으신 아이디어 중에서 총책임자 님한테 가장 도움이 될 게 어떤 정보예요? 방금까지 타이핑 중이셨던 심해도시? 그게 아니면, 제로 산맥의 십만(十萬) 동굴?”

어디 보자.

윤수겸이 턱을 쓰다듬었다.

“다 중요하지만 그런 콘텐츠는 당장은 도움이 안 되겠지? 뭐가 됐든, 그와 관련된 균열이 떠올라야지 관련 정보를 쓰든 말든 하실 테니까.”

그런 의미에서 존재만 한다면.

그리고 호열이 조건만 충족했다면.

당장 활용할 수 있는 콘텐츠는 역시…….

“……[고인물 커뮤니티]려나?”

*

유스라 황금 궁전보다도 호화스럽고.

마탑보다도 비현실적인 구조의 공간.

적어도 아르카나 대륙에 이런 장소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 이곳은 『시공간의 사교장』.

다른 세계의 언어로는 [고인물 커뮤니티].

오직 초월자들만이 입장할 수 있다는.

‘의식’의 공간이었으니까.

극소수에게만 허락된 사교장.

“?”

그곳에 정말 오랜만에 낯선 기척이 느껴졌다.

모두의 관심이 기척이 느껴진 곳으로 향했다.

검성, 셰그윈의 시선도 마찬가지였다.

이내, 그 기척이 점차 가까워졌다.

더없이 또렷하고 청아한 소리와 함께.

또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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