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182화 (113/489)

◈ 182화. 두근

엘프의 고향, 시슬리.

시슬리의 자연은 때가 묻지 않았다.

시슬리에 거주하는 것은 오직 엘프뿐. 세계수의 축복이 존재했던 시절의 엘프는 완전무결한 존재로, 무엇도 필요치 않았었으니까. 때문에 시슬리의 꽃과 나무, 과실은 늘 진한 향을 풍겼다.

‘미개한 대륙에서는 구경조차 못 할 수준으로.’

괜히 시슬리를 들먹거리며 우쭐거리던 게 아니었다는 말이었다.

그러니까 엘시도어는 쉽게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고작 나흘.

보잘것없던 꽃들이 어떻게.

영겁에 가까운 세월을 살아온 시슬리의 꽃과 비슷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단 말이냐?

엘시도어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무슨 짓을 한 거지?’

이호열.

건방진 인간의 짓이라고 하기에는.

그는 거만한 자세로 꽃들에 물을 뿌린 것밖에 없었다.

굳이 한 가지 이유를 더 꼽아보자면…….

-“어떤 명화도 그대들의 색채에 비할 바는 못 되겠지.”

꽃에게 말을 걸었었지, 그는.

그때는 뭔 개짓거리인가 싶었거늘.

엘시도어가 흠칫했다.

‘……설마 그조차도 다 이유가 있었다는 건가?’

이유야 어찌 됐든.

엘시도어의 얼굴은 점차 일그러져 가고 있었다.

이래서야 더는 시슬리를 들먹이며 우쭐댈 수도 없었으니까.

간신히 이어붙인 자존심에 다시 금이 가던 그때였다.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엘시도어.”

“……!”

건방진 인간, 호열의 목소리였다.

또각─

침묵.

엘시도어는 일단 입을 다물었다.

좋은 말은 나올 수 없었으니까, 차라리 닥치는 게 나았다.

네 혹은 아니오.

대답을 강요당하는 굴욕은 한 번으로도 치욕적이었으니까.

“그대가 보기에는 어떠한가.”

“…….”

대답하지 않자 호열은 꽃을 향해 말했다.

“다들 잘 자라주어서 고맙구나.”

그러고는 다시 고개를 돌려 엘시도어를 바라봤다.

“그대의 보살핌 덕분에 결실을 맺었군.”

“……?”

……방금 뭐라고 그런 거지?

이렇게 자라난 게 내 보살핌 덕분이라고?

엘시도어는 진지하게 고민했다.

‘축복도 모자라서.’

설마 청력까지 빼앗아 가신 겁니까, 어머니?

그러나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호열은 정확하게 말했으니까.

“그 노고를 내가 알고 있다, 엘시도어.”

오늘 밤엔 내가 화원에 머물겠다.

이어지는 호열의 말에 엘시도어는 별실로 돌아왔다.

언제나처럼 신경질적으로 문을 닫아야 했거늘.

……쿵.

생각에 빠진 엘시도어는 그러지 못했다.

노고라니, 내가 한 게 뭐가 있다고?

의아해진 엘시도어는 지난 나흘을 거슬러 올라가 봤다.

“우습다고 비웃고, 하찮다고 비웃고…….”

시슬리와는 비교할 수 없이 형편없다고 우쭐대고.

내가 한 일이라고는 구시렁대는 것밖에…….

고뇌하던 엘시도어가 흠칫했다.

“설마.”

마법진을 말하는 건가?

마력과 마법은 별개.

엘프로서 방대한 마력을 타고난 엘시도어라고 하더라도. 마법, 그것도 인간이 만들어 낸 마법진을 해석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러니 엘시도어는 착각할 수밖에 없었다.

“단순하게 화원을 밝게 비춘 것 때문에?”

막대한 마력을 소모하는 고위 치유 마법진이었거늘.

엘시도어에겐 기초 마법, 라이트와 마찬가지로.

마력에 기별도 가지 않았으니까.

“그런가.”

내가 큰 역할을 했단 말인가?

하긴 귀찮은 벌레들을 내쫓긴 했지.

이내, 엘시도어의 얼굴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콧대가 다시금 높아졌다는 뜻이었다.

“하긴 인간 따위는 해내지 못할 일이지.”

어디 밤새도록 화원을 지키는 게 쉬운 일이란 말이냐?

나약한 인간과 다르게 엘프는 수면조차 필요로 하지 않았다.

졸음이나 피로에 한눈을 팔 일이 없다는 것이다.

엘시도어가 웃음을 흘렸다.

“그래도 감사할 줄은 아는구나.”

감사하다면.

다음에는 그 ‘긍지’라는 걸 건네도록 하라.

그렇다면 나는 어머니에게서 축복을 돌려받을 수 있을 테니.

두근두근─

엘시도어가 설렘과 함께 침대에 드러누웠다.

“명심하도록 해라, 화원을 지킬 수 있는 건 나밖에 없다는 걸.”

그 성격이 삐딱해서일까.

어쩐지 심각하게 어긋난 다짐과 함께…….

*

이른 오전.

유스라 왕국.

나는 여전히 깨어있었다.

새벽부터 비장한 목소리로 지껄였다.

“그대들의 희생은 잊지 않겠다.”

……멋있는 척하며 대사를 뱉지 마라, 그랑펠.

비약초 몇 뿌리 꺾었다고 칠 대사가 아니잖아!

그랬다.

나는 엘시도어를 별실로 내쫓은 이후로 비약초밭을 샅샅이 살펴봤다. 풍성하게 자라난 비약초들 사이에서 ‘영약’을 골라내기 위해서였다.

영약(靈藥).

전설처럼 전해져 내려오는 효과로 봤을 때.

[에픽] 등급 아이템일 수밖에 없는 귀하신 몸.

사실 보는 눈이 없다면 비약초에서 영약을 골라내기도 어렵겠지.

애초에 비약초부터가 플레이어들 사이에선 잡초 취급.

제대로 된 가치를 인정받고 있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아르카나 대륙 모든 식물에 관한 지식을 습득한 내게 해당하는 말이 아니었으니.

보다시피 영약이라 부를만한 비약초를 양손 가득 뽑아서 집무실로 돌아왔다는 말이다……!

‘진짜 하이엘 없었으면 어쩔 뻔했냐?’

고유 정령 하이엘의 축복이 깃든 물.

꼿꼿한 자세로 물뿌리개를 흩뿌린 보람이 있었다.

아니, 보람이 있는 수준이 아니지.

이건 상상하지도 못한 수확이다.

‘하나만 건져도 다행일 거라고 예상했는데.’

차디찬 기운을 내뿜는 만년설꽃이 세 송이.

그와 반대로 열감이 느껴지는 해바라기가 두 송이었다.

아르카나 대륙에서는 완전히 모습을 감췄다는 귀하디귀한 영약이 집무실 책상 위에 다섯 송이나 놓여있는 것이었다.

‘그래도 개고생이 아니었구나.’

마냥 하이엘의 축복만 믿고 있었다면, 불가능한 수확이었다.

비약초의 육성법도 큰 역할을 했을 테니까.

역시, 끊임없이 발버둥을 친 보람이 있구나.

거기에 마지막으로.

“그대도 노동의 가치를 깨달았기를 바란다.”

구르는 재주가 있던 엘시도어까지.

뭣보다 엘시도어를 부려 먹기를 잘했다.

들려오는 이야기로는 엘시도어도 웃음을 되찾았다고 했지?

그래, 인상을 피니까 얼마나 좋냐.

나도 겸사겸사 좋은 일을 한 것 같은 기분이 들고 말이야.

‘어째 과하게 친절을 베푸는 것 같긴 하다만.’

결과가 좋으니까, 이번만 너그럽게 넘어가 준다. 내가.

‘뒤끝을 부릴 시간은 없으니까.’

아르카나 대륙의 시간은 현실보다 수배나 빠르다.

이 순간에도 안토니움은 공세에 시달리고 있을 터.

나는 곧장 영약을 집어 들었다.

영약을 섭취하는 데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그러나 그보다 중요한 건 효과를 받아들일 육체의 상태.

‘솔직하게 부담스럽다.’

정반대의 효과를 가진 두 개의 영약.

동시에 섭취해 그 부작용을 중화시키겠노라.

당당하게 선언했거늘.

막상 영약이 수중에 들어오니 우려를 완전히 지우긴 무리였다.

‘영약의 효과를 버텨낼 수 있겠냐는 거지.’

츠릉거리는 심장이.

그리고 내 빈약한 그릇이 말이야.

그런 의미에선 최선의 준비를 했다.

[이름 :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

[칭호 : 최후의 모험가, 숭고, 초월자]

[클래스 : 악마 사냥꾼]

[레벨: 595]

[능력치]

근력 : 112 / 민첩 : 124 / 마력 : 467 / 행운 : 12 / 심미 : 中

[보유 포인트 : 45]

퀴른베르크 기계탑에 축적된 경험치를 습득.

그 덕분에 상승한 레벨은 45레벨이었다.

아무래도 중간에 기계탑이 파괴된 탓이겠지.

‘셰그윈에겐 또 하나 갚아줄 게 생겼다.’

내 소중한 경험치야……!

무엇보다 서클은 마법사로서의 초월 경지였다.

그 능력을 해방하기 위해선 당연히 마법사로서의 그릇을 넓혀야 한다. 약간이라도 도움이 될 테니까. 이번에는 습득한 레벨 업 포인트를 전부 마력에 투자했다.

[마력 : 512]

그걸로 현시점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준비는 끝.

남은 건 영약을 섭취하고.

부디 부작용이 심하지 않기를 기도하는 것뿐.

말했다시피 영약을 섭취하는 데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었건만.

고려할 가치는 없었다.

내가, 그랑펠이 선택할 방식이야 한결같았으니.

똑─

그렇다.

나는 꽃잎을 떼어 찻주전자에 띄웠다.

말하나 마나 티타임이라는 것이다.

*

슥─

용맹한 사자의 검이 허공을 갈랐다.

땀에 젖은 머리칼.

단련된 육체조차 비명을 내지를 정도로.

스왁─

사자는 한시라도 육체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육체를 혹사시키는 이유야 간단했다.

그래야만 버틸 수 있었으니까.

꾸욱─

하르콘이 더욱더 세게 검을 붙잡았다.

‘불순하게도 의심하고 말았습니다.’

수도성, 안토니움에 연기가 피어올랐다.

과거, 그 소식을 접했을 때 하르콘은 최악을 가정했다.

어쩌면, 안토니움은 이미 함락됐을지도 모른다고.

그러나 오판이었다.

“성장하셨군요, 폐하.”

슥─

어쩌면 나는, 나 자신을 과대평가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없는 폐하는 버텨내시지 못할 것이라고.

불경하게도 주군을 과소평가했을지도 모른다.

그런 자신을 책망하듯 안토니움은 무너지지 않았다.

수많은 악마의 습격에도 굳건하게 버텨냈다.

그래, 마왕 쟁탈전이 무(無)로 돌아간 지금이야말로.

제국이 다시 일어서 반격할 기회였거늘.

하르콘의 눈빛이 이내,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대들이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 알고 있기를 바라네.’

악마의 습격을 명분으로 삼아 반기를 들다니.

그들은 안토니움으로 진격하며 목격했을 것이다.

고통으로 신음하는 제국의 백성들을.

그럼에도 백성을 외면하고 기어코 안토니움으로.

오직 왕관만을 바라보고 고삐를 당겼단 뜻이었다.

그 충격적인 소식을 전해온 것은 호열이었다.

“……나는 제국의 기사단장으로서 부끄럽기 그지없네.”

모험가들의 세계와 아르카나는 다른 세계이거늘.

마치 자신의 세계가 마수에 떨어진 것처럼. 목숨을 걸고, 긍지를 불사르며, 정면으로 악마와 맞서 싸워온 호열 경이 저들의 추태를 지켜봤다는 뜻이었다.

스와아아악!

“수치스러워서 고개를 들 수 없다는 말이네!”

휘이이이익!

거세게 휘몰아치는 검풍이 하르콘의 심정을 말해주는 듯했다.

빠득─

저절로 이가 악물어졌다.

“……어찌 그럴 수 있단 말인가, 경.”

나조차도 인간의 옹졸함에 질려버릴 것 같았거늘.

저들의 더없이 추한 꼴을 지켜봤음에도.

어째서 그대는.

-“나를 믿어주겠나?”

그리 말할 수 있단 말인가?

하르콘은 제국의 기사단장으로서 수많은 강자를 봐왔다.

『번개의 아이』, 『남쪽 바다의 마녀』, 『우르스』, 『일출의 무사』…….

그리고 안토니움을 포위한 『검성, 셰그윈』도 빼놓을 수 없겠지.

그래.

그들의 무력은 자신의 식견으로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그렇기에 호열과 그들의 우위를 직접 비교할 순 없었다.

그러나.

‘경은 그들과 다르다.’

너무나도 높은 경지에 올라서인가?

대륙의 강자들은 모든 것을 업신여겼다.

하지만 호열은 달랐다.

하르콘의 기억 속에는 프로스트에서 호열이 보여줬던 모습이 아직도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었으니까.

마왕의 앞에서도 백성들의 시신을 수습하던 그 숭고한 모습이.

‘경에게는 모두의 목숨이 똑같이 소중한 것이겠지.’

하르콘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나는 주군과 제삼자의 목숨을 동일시할 수 있는가?’

답은 당연하게도 ‘그럴 수 없다.’였다.

그러나 호열에게 타협이란 없었다.

마왕 쟁탈전에서도 목격하지 않았던가?

-“우리에겐 단 하나의 희생도 없을 것이다.”

뱉은 말을 실현해 낸 호열을.

그러나 하르콘은 알고 있었다.

결국, 불가능한 걸 실현해 낸 건 호열이었다.

홀로 균열에 진입해서, 홀로 상위 마왕과 맞선다는.

무모한 계획을 성공해 냈으니까.

하르콘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허나 그 모두에 언제나 경, 본인은 포함하지 않았지.”

하르콘은 잊을 수 없었다.

그날, 선 채로 혼절한 호열의 모습을.

모험가 남태민의 말을 떠올렸다.

-“알고 계실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저희 세상에서 호열 씨는 평화의 상징이나 다름없습니다. 호열 씨가 흔들리면 세상이 흔들리게 되니까요.”

세상을 위해서.

정신을 잃고서도 꼿꼿하게 서 있을 수밖에 없던 것이겠지.

그러나 그날을 계기로 자신을 비롯한 모두가 알게 되었다.

경은 그저 내색하지 않았을 뿐이라는 것을.

“경은 알고 있는가?”

경이 휴식을 결정한 이후.

나를 비롯한 모든 이들은 단 한 순간도 쉬지 않았다네.

그대가 짊어진 긍지라는 무거운 짐을 나눠 들기 위해서 말일세.

그러니까 하르콘은 각오를 다졌다.

‘그리 말해주었으니, 나는 언제나처럼 경을 믿겠네.’

나를 주군의 곁으로 데려가 주리라, 믿고 있겠네.

그런 내가 할 수 있는 건 검과 검을 맞부딪혀 셰그윈을 막아서는 것이겠지. 검성을 상대로 이 늙은이가 얼마나 활약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고오오─

하르콘의 검강이 은은하게 빛났다.

“이 생명을 불살라서라도 막아내겠네.”

경도 알고 있지 않은가?

생사의 갈림길에서 검기는 짙어지는 법이라는 것을.

이 순간부터 나는 매 순간 심장을 걸겠네.

누구의 앞에서도 물러섬이 없는 사자의 심장을.

*

무엇 하나 숨기고 넘어가는 법이 없는 긍지였다.

하르콘에게 안토니움의 상황을 전달하고.

-“나를 믿어주겠나?”

마지막에 가서 그런 말까지 지껄였을 땐.

나는 눈앞이 캄캄해지는 기분이었다.

아니, 폼만 잡으면 다냐고 진짜로!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나는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만.통.지]의 효과를 상실한 지금, 아르카나 대륙에 접근할 방법 따윈 알지 못한다는 소리였다.

그러니까 이쯤 되면 슬슬 흠칫할 수밖에 없었다.

『그랑펠에게 겸손이란 감정은 존재하지 않았다. 과소평가에는 증명을. 과대평가는 기어코 현실로 만들어 내고야 말았으니까.』

말이 씨가 되듯.

……스스로에 대한 과대평가가 현실이 됐다는 말이다.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얼마나, 눈을 감고 있던 거지?

바닥에 떨어져 깨진 찻잔만이 내가.

천하의 그랑펠이 어떤 격통에 시달렸는지를 말해주고 있었다.

그러나 개고생이 아니었다.

눈앞에 떠오른 수많은 메시지 사이에서.

똑바로 들리고 있었으니까.

……두근!

나의 심장박동이.

[칭호, ‘초월자’의 효과가 발동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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