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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181화 (112/489)
  • ◈ 181화. 모조리 자격 미달이다

    ──────

    [메인 퀘스트 : 전국시대(戰國時代)]

    격변의 시기.

    향하는 것은 단순한 권력인가.

    황제의 무능함인가.

    그것도 아니면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인가.

    대륙의 강자들은 황좌를 탐한다.

    그대의 선택이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 내리라.

    ──────

    수도성, 안토니움.

    제국 최후의 보루는 무너지지 않았다. 전례가 없는 피해를 입었음에도 악마에게 굴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필사의 항전.

    “막아라! 목숨을 걸어라!”

    “성벽이 무너지면 모든 게 끝이다!”

    “죽더라도 막아내고 죽는 거다!!”

    그 처절한 사투를 하늘도 가엾이 여긴 것인가?

    “……그게 정말인가? 악마들이 사라졌다니!”

    제국 곳곳에 난립했던 악마들의 세력이 하루아침에 궤멸해 버렸다.

    그뿐만 아니었다. 악마들의 왕, 마왕조차도. 이전과는 다르게 그 움직임이 움츠러든 것이었다.

    다그닥─

    안토니움 인근을 샅샅이 수색하는 정찰대.

    그들은 직접 보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이, 이게 무슨 조화랍니까?”

    전해져 온 소식처럼 정말, 악마들이 사라졌다.

    마치 ‘무언가’에게 겁을 먹은 것처럼.

    흔적조차 남기지 않은 채.

    “……자네는 돌아가서 폐하께 이 소식을 전하게!”

    황제를 비롯해 안토니움의 모두는 안도했다.

    “식량이 떨어져 가던 참이었는데 천만다행이군.”

    “어떤 계략이 숨어있는지는 모르겠다만…….”

    “부정 타는 소리는 집어치우게. 우리에겐 선택지가 없지 않은가? 그저 방심하지 않고 이 기회를 살리는 수밖에 없네.”

    “그래, 자네 말이 맞아.”

    비로소 벅찬 숨을 돌릴 틈이 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간과하고 있었다.

    부정적인 기운을 통해서 강성해지는 악마들.

    그런 악마들이 어째서.

    아르카나 대륙에 모습을 드러낸 이후에도.

    나날이 강해졌는지를.

    그 힘의 근원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우르르─

    안토니움을 향해 병사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그건 악마도, 그렇다고 지원군도 아니었다.

    “폐하! 유미르 공작이 병사를 이끌고……!!”

    “카사노 후작, 그가 제국에 반기를 들었습니다!”

    “제국 동부 제후들이 연합을 선포했습니다……!”

    제국을 무너트리려는 반군이었다.

    황제는 안토니움의 성벽으로 나아갔다.

    자신을 포위한 이들을 바라봤다.

    그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드리웠다.

    “……미련하게도 착각하고 있었군.”

    전서구에도, 황실 마법사의 텔레파시에도 응답이 없던 그대들이었다. 미련하게도 나는 그대들이 악마에게 대패했다고 여겼다.

    그대들을 지키지 못했다는 사실에 밤낮으로 자책했다.

    그러나.

    “그대들은 애초에 나를 노려보고 있던 거였군.”

    황제의 입가에서 쓴웃음이 흘러나왔다.

    “……누군가의 부러움을 살 자리가 아니거늘.”

    그 무게에 짓눌려 압사할 것만 같은 왕관을.

    그대들은 나서서 짊어지기를 원하는 것인가?

    황제의 자리가 넘겨줄 수 있는 거라면.

    기꺼이 넘겨주고 싶은 심정이었거늘.

    휘이이이잉─

    황제는 불어오는 바람에 살며시 눈을 감았다.

    바람에 실려오는 냄새가 달라졌다.

    피비린내도, 탄내도 이제는 느껴지지 않았다.

    “……정말, 모든 게 끝난 거라면.”

    정말, 악마들이 대륙에서 사라진 거라면.

    짐이 사라져도 제국의 백성이 고통에 신음하는 날이 없다면.

    짐은 기꺼이 황제의 자리를 내어주리라.

    황제는 다짐했다.

    “그런 마지막도 나쁘지 않을 것 같으니.”

    더 이상은 버티기 힘들 정도로 지쳤단 뜻이네.

    황제가 눈을 뜨며 읊조렸다.

    “그러니 다시 만나도 나를 너무 책망하지는 말아주게나, 하르콘. 그대에게는 지금껏 진 빚만 하더라도 청산하기 벅찰 정도이니 말일세.”

    쿵─

    황제의 허망한 말을 끝으로.

    퀴른베르크 기계탑의 시야가 옮겨갔다.

    안토니움을 포위한 수많은 세력에게로.

    “우리들의 동맹은 안토니움을 무너트리고, 황제를 끌어내리는 순간까지입니다. 그 이후부터는 누구의 말도 믿지 마십시오, 공작님.”

    악마들이 하루아침에 증발하듯 사라지기 전까지.

    고통으로 신음하던 아르카나 대륙이다.

    그러나 모인 이들에겐 지친 기색이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이곳에 모인 이들은 악마와 맞서지 않았으니까.

    고통에 신음하는 백성들을 외면한 채.

    쥐죽은 듯 성에 틀어박혀 오늘을 위해 힘을 비축해 왔으니까.

    “대륙은 새로운 황제를 원한다!”

    “황제여! 그대의 무능이 대륙을 이 꼴로 만들었다.”

    “이것은 반란이 아닌 혁명이다!”

    쿠궁─

    목적은 오직 악마 사냥뿐.

    기계탑에 옳고 그름을 구분할 능력은 없다.

    단지 안토니움의 풍경을 기억 장치에 담았을 뿐.

    쿠궁─

    퀴른베르크 기계탑이 걸음을 옮기려던 순간이었다.

    그 앞을 사내 하나가 가로막았다.

    짙푸른 머리칼.

    새파란 눈동자.

    그리고 그보다도 서슬 퍼런 검강(劍罡).

    청년으로 보이는 사내는 입을 열었다.

    “이게 쓸데없는 짓을 하고 다닌다는 기계인가.”

    슥─

    그러고는 망설이지 않고 기계탑을 향해 검을 겨눴다.

    보는 것만으로도 찬 기운이 느껴질 정도로 푸른 검강이었다.

    그 밝기가 눈이 시릴 정도로 선명했다. 대낮에도, 심지어는 검기(劍氣)를 깨우치지 못한 자들의 눈에도 선명하게 보일 정도로 강렬했다.

    한마디로 검강, 그 이상의 검강이었다.

    주위가 웅성거렸다.

    “저분이 바로 셰그윈 경……!”

    검성(劍聖), 셰그윈.

    대륙 유일의 그랜드 소드 마스터.

    그와 동시에 초월자.

    “한데, 셰그윈 경께선 어찌 퀴른베르크 기계탑에 검을 겨누신 것이지?”

    “……악마들의 활동이 뜸해져서?”

    “그 가치가 빛이 바랬다는 것인가? 아니, 그러하더라도 검을 겨눌 필요까지는 없지 않은가? 게다가 아직도 마왕들이 아르카나 대륙에서 웅크리고 있다고…….”

    쏟아지는 우려 속에서.

    셰그윈이 삐딱하게 입꼬리를 비틀었다.

    “나는 소란스러운 게 질색이다.”

    스아아아악!

    그러고는 거침없이 검을 휘둘렀다.

    셰그윈의 검이 허공을 갈랐다.

    쿠구구구궁!

    그러자 퀴른베르크 기계탑이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일도양단.

    무수한 톱니바퀴를 피처럼 쏟으며 처참하게 무너져 내린 것이었다.

    비현실적인 광경.

    꼴깍!

    그 초월적인 무력은 셰그윈을 적으로 돌리게 된 안토니움.

    심지어는 그와 연대하게 된 이들조차도 경악하게 만들 정도였다.

    그러나 기계탑은 경악하지도, 동요하지도 않았다.

    마지막 순간.

    기계탑이 기억 장치 속에 담은 것은 그저 셰그윈의 한마디.

    -“이게 그 쓸데없는 짓을 하고 다닌다는 기계인가.”

    악마의 천적.

    꺼진 악마조차도 다시 보는 악마 사냥꾼.

    악크샨의 긍지를 이은 결전병기였으니까.

    악마 사냥을 쓸데없는 짓이라 말한 데에는 분명 그 이유가 있을 터. 최후의 악마 사냥꾼이여. 부디, 셰그윈의 속내를 간파하기를 바란다…….

    쿵!

    .

    .

    .

    나는 연달아 떠오르는 메시지를 바라봤다.

    [퀘스트 : 쓸데없는 짓]

    셰그윈은 악마 사냥을 쓸데없는 짓이라 여겼다.

    셰그윈과 대화를 나누고,

    행동의 진위를 파악하라.

    ─셰그윈과 조우하라. (진행 중)

    좋아,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자.

    내용은 둘째 치더라도 각오는 했던 바다.

    말했다시피 나는 경험자잖아?

    악크샨의 전통.

    다른 악마 사냥꾼이 남긴 퀘스트를 이어받아 수행하는 것쯤은 예상했단 말이다.

    ……근데 뭔데, 이 스케일은?!

    일단, 퀘스트부터가 하나가 아니었다.

    [메인 퀘스트 : 전국시대(戰國時代)]

    아니, 갑자기 메인 퀘스트라뇨.

    나는 그랑펠을.

    이놈의 입방정을 원망할 수밖에 없었다.

    ‘진짜로 말이 씨가 됐잖아!’

    백번 양보해서 내 상태가 멀쩡했다면 반겼을지도 모른다.

    메인 퀘스트라니.

    월드 퀘스트와 달리 플레이어들 사이에서도 존재 여부로 찬반이 나뉠 정도로 관련 정보가 전무.

    심지어는.

    “창조주의 편린을 탐구하는 자들조차도 알지 못하는 이야기인가.”

    ……허세는 이런 상황에서도 여전하구나, 그랑펠.

    담백하게 말하자면 AAU에도 메인 퀘스트에 관한 구체적인 정보는 없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시스템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 법이다.

    거기에다가 굉장히 그럴싸하잖아, 이거?

    ‘로망이지, 플레이어라면 한 번씩 품을 법한.’

    제국의 황제가 될 수 있는 퀘스트라면.

    과연, 메인 퀘스트라 불러도 부족함이 없을 테니까.

    하지만 말한 것처럼 문제는 내 상태다.

    내 코가 석 자인데, 퀘스트가 뜨면 뭐 하냐고!!

    메인 퀘스트?

    악크샨 퀘스트?

    전부 좋다, 이거다.

    하지만 그 전에 츠릉거리는 서클, [초월자]의 효과를 해방하는 게 먼저였다. 그래, 그랑펠아. 네가 그토록 중시하는 ‘절차’를 지켜야 한다는 뜻이다.

    그야 나는 똑똑히 들었으니까.

    ‘악마 사냥이 쓸데없는 짓이라니.’

    검성.

    동시에 대륙 유일의 그랜드 소드 마스터, 셰그윈.

    퀴른베르크 기계탑이 남겼던 셰그윈의 모습에서 나도 찝찝한 냄새를 맡았단 거지.

    혹시 악마와 관련이 있는 건가, 하는.

    ‘뭐, 그냥 노파심이면 좋겠다만.’

    어쨌거나 악크샨의 퀘스트를 수행하기 위해선 셰그윈과 조우해야만 했다.

    [만.통.지]가 효과를 상실한 현재, 셰그윈을 만날 방법이라곤 균열의 우연성에 기대는 것밖에 없겠지. 혹시라도 우연이 겹쳐 만나게 된다면…….

    ‘일단, 충돌을 피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천하의 그랑펠이 그냥 넘어갈 수 있겠냐고.

    셰그윈은 멀쩡한 기계탑을 박살 내버렸다.

    그랑펠에게 있어선 동료를 부숴버린 것이나 다름없는 행동이거든.

    그러니 나는 냉랭하게 읊조렸다.

    “경솔한 행동에 대한 책임은 엄격히 따져 묻겠다.”

    그러니까 더더욱.

    어떻게 해서든 서클을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같은 초월자로, 급이라도 맞춰야 말이라도 섞을 수 있을 테니까.

    그러나 이 순간.

    무엇보다도 앞서는 생각은 따로 있었다.

    안토니움.

    성벽에서 씁쓸한 표정을 짓던 황제.

    그런 황제의 오른팔이었던 하르콘이었다.

    ‘하르콘이 이 소식을 알게 된다면…….’

    하르콘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황제를.

    안토니움을 구원하기 위해 움직이겠지.

    그렇다면 [메인 퀘스트]의 행방은 어떻게 될까?

    나는 퀘스트 목표를 바라봤다.

    ─안토니움을 함락하라. (선택)

    ─안토니움을 수성하라. (선택)

    [전장 퀘스트]처럼 세력을 선택하는 퀘스트 목표.

    나는 냉정하게 양측의 전력을 가늠했다.

    공성전은 기본적으로 수성측이 유리하다.

    게다가 무수한 악마의 습격에도 무너지지 않은 안토니움이었거늘. 그런 안토니움도 슬슬 한계에 봉착했고, 포위한 세력의 숫자 또한 상당했다.

    게다가 나는 두 눈으로 확인하고야 말았다.

    검성, 셰그윈의 압도적인 무력을……!

    뭐든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이라지.

    나 또한 검강의 경지에 올라서일까?

    셰그윈의 검술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수준인지 알 수 있었다.

    ‘퀴른베르크 기계탑의 내구도는 상당해.’

    [정순한 지식의 오망성].

    덕분에 퀴른베르크 기계탑이 어떤 광물로 구성됐는지 전부 파악하고 있는 나다.

    제아무리 수도성의 성벽이라고 해도, 그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값진 광물로 만들어진 기계탑이다.

    ‘그런 기계탑을 두부 자르듯 잘라냈으니까.’

    하르콘 그 이상.

    현재의 나로서는 넘볼 수 없는 경지라는 거다.

    그러니 지극히 플레이어적인 관점으로 봤을 때.

    제국, 황제에게 승산은 없었다.

    분노에 찬 하르콘이 합류한다고 하더라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을 터.

    그러니까 수성을 선택했다가는.

    메인 퀘스트를 대차게 실패해 버리고 말겠지.

    그런데 말이다.

    “나로서는 그대의 심정을 짐작할 수 없군, 하르콘 경.”

    내가.

    그랑펠이.

    언제부터 이성적인 판단을 내렸다고.

    그래, 모든 것은 긍지에 따라서.

    내 가슴 속 무거운 긍지가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해 보이는군.”

    나는 곱씹듯 읊조렸다.

    “단, 한 명도 빠짐없이.”

    뭐, 황제를 몰아내고 새로운 황제가 되겠다고?

    그런 자식들이 말이야.

    악마가 대륙을 쑥대밭으로 만들 때까지 꼭꼭 숨어서 꼼짝도 하지 않았어?

    백번 양보해서,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의 영향일지도 모르겠지.

    너무 강대한 힘을 가져 묶여있던 마탑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야.

    그러나 이해하려고 생각해 봐도 이해할 수 없다.

    결국, 마탑은 모순을 깨고 바뀌었으니까.

    게다가 누구라고.

    아니, 나라고 죽고 싶어서 거악에 마왕도 모자라서 상위 마왕하고 맞선 줄 알아?!

    “모조리 자격 미달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또 한 번의 의기투합이었다.

    “셰그윈, 그대도 다를 것 없다.”

    그랑펠의 긍지.

    그리고 나, 이호열이 느낀 억울함의 합작.

    망설임은 없었다.

    그런 나의 눈앞이 점멸했다.

    ─안토니움을 함락하라. (실패)

    ─안토니움을 수성하라. (진행 중)

    검성?

    대륙 유일의 그랜드 소드 마스터?

    확실히 거창하신 이명이시군.

    하지만 이쪽도 이명이라면 지지 않아서 말이야.

    한없이 깊은 어둠.

    그런 어둠 속 한 줄기 빛.

    악룡 사냥꾼까지!

    ‘빌어먹을, 내 입으로 말하니까 수치심이 더욱 배가 되는구나.’

    하지만 이명을 떠나서 나도 꿇릴 건 없잖아?

    그래, 나도 셰그윈과 마찬가지로 [초월자]였으니까.

    효과가 봉인된 반푼이라고 하더라도, 어쨌든.

    그러니까 내가 할 일은 간단했다.

    드륵─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집무실 창밖을 바라봤다.

    ……반드시 키워내야지, 영약.

    *

    별실.

    엘시도어는 별실의 문을 열고 황금 궁전을 거닐었다. 행선지는 당연하게도 화원이었다. 엘시도어를 보고 황금 궁전의 사용인들이 수군거렸다.

    “……뭔가 기분이 좋아 보이죠?”

    “쉿, 말조심하세요! 들을까 봐, 겁난다구요.”

    “저도 마찬가지긴 한데, 신기하지 않아요?”

    황금 궁전 별실에 감금된 이후.

    엘시도어의 얼굴은 언제나 죽상이었다.

    조각과도 같은 엘프의 외모가 빛이 바랠 정도로.

    언제나 살기등등한 눈빛만을 쏘아대던 엘시도어였으니까.

    “근데 글쎄, 별실 안에서도 웃고 있었대요!”

    그런 엘시도어의 얼굴이 달라졌다.

    어째서일까?

    생각할 수 있는 건 역시 하나밖에 없었다.

    “……화원에 들른 다음부터죠?”

    그랬다.

    엘시도어가 달라진 건 호열의 화원을 관리하기 시작한 이후부터였다.

    사용인들이 호들갑스럽게 맞장구를 쳤다.

    “역시, 전설대로 엘프는 자연 친화적이네요!”

    “……설마, 갑작스레 별실에 화원을 만드신 것도 엘프를 위해서였을까요? 아무래도 맞는 것 같지 않나요? 원래 그러실 분이 아니시잖아요!”

    “무뚝뚝하신 것 같으면서도 사려가 깊으시다니까요?”

    쫑긋─

    엘프의 커다란 귀가 움찔거렸다.

    뭐, 그 자식이 배려?

    감히 나를 이 꼴로 만든 자식이 사려가 깊다?

    엘시도어가 빠득 이를 갈았다.

    “……기필코 죽이겠다.”

    허나, [축복의 위계질서]의 효과는 여전히 발동 중.

    비장한 다짐과 다르게 엘시도어는 정성껏 화원을 돌볼 수밖에 없었지만.

    “우습구나.”

    엘시도어가 웃음을 되찾은 이유?

    간단했다.

    엘시도어가 흘린 건 비웃음이었으니까.

    “잘난 척은 있는 대로 다 하더니.”

    고작 이따위 꽃밭에 수고롭게 물이나 주고 있다니, 하찮구나. 벌레답게 하찮아. 엘시도어는 화원에서 호열을 곱씹으며 자존감을 되찾아 가던 것이었다.

    “정말로 무의미한 수고로구나.”

    하루.

    “물을 줘봤자 무엇이 달라지겠는가?”

    그리고 또 하루.

    “건방진 녀석에게 시슬리의 꽃밭을 보여주고 싶군.”

    후후후.

    엘시도어의 표정이 날이 갈수록 밝아져 가던 때였다.

    정확하게 나흘 뒤.

    화원에 들어선 엘시도어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

    비웃고, 악담을 퍼붓고, 뒷담화를 즐기느라 자세히 살피지 못한 며칠 사이. 화원의 꽃들이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게 성장해 있었다.

    엘시도어가 중얼거렸다.

    “……대체 어떻게?”

    고작 나흘 만에.

    그 하찮던 꽃들이.

    영겁을 살아온 시슬리의 꽃보다도.

    크고 화려하고 그윽한 기운을 내뿜을 수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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