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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180화 (111/489)

◈ 180화. 모든 것이 무르익는다 (3)

엘프.

엘시도어는 움직이지 않았다.

정확히는 움직일 수 없었다.

[축복의 위계질서]를 거스를 수 없었으니까.

엘시도어가 분풀이를 하듯 살기를 발산했다.

“으, 으아아아아!!”

마음 같아서는 빌빌대는 벌레 두 마리를 도륙 내고 싶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울먹거리며 뒷걸음질 치는 꼴을 가만히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다, 다시는 얼씬거리지 않겠습니다!!”

“하, 한 번만 자비를 베풀어 주신다면……!!”

“…….”

“히이이익!!”

한참 뒤에나 찾아온 정적.

눈물, 콧물을 쏟다가 결국에는 네 발로 기어서.

두 벌레가 꺼진 뒤에야 주위가 고요해졌다.

그럼에도 엘시도어는 쉽게 살기를 거두지 못했다.

어째서 엘프인 내가.

인간 따위에게 휘둘려 이런 수모를 당하고 있단 말인가?

‘……내게 이따위 꽃을 키우라고?’

기필코 죽이겠다, 이호열.

엘시도어는 투덜투덜 수준을 넘어서 속으로 저주를 외웠다.

허나, 다짐과는 다르게 몸에서는 마력이 흘러나왔다.

인간이 아니기에 인간의 수준을 초월한 마력량.

반짝─

그런 엘시도어의 마력을 흡수한 비약초들은 어둠 속에서도 싱그러운 존재감을 뽐냈다.

엘시도어는 호열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이 세계에는 그런 말이 있다.”

-“……?”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

-“……!”

엘시도어는 현실에 떨어진 그날 이후.

황금 궁전의 별실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렇다고 심한 푸대접을 받았는가?

누군가 묻는다면 또 마냥 고개를 끄덕일 순 없었다.

-“그대에게 한정적인 자유를 허락하겠다.”

유스라 왕국, 어디를 돌아다녀도 좋다.

단, 타인에게 위해를 가하는 것은 엄격히 금지한다.

당연하게도 엘시도어에게는 있으나 마나 한 자유였다.

밖을 돌아다녀 봤자, 보이는 것은 버러지 같은 인간들뿐이거늘.

죽일 수 없다는 사실에 가슴만 답답해졌으니까.

-“식사입니다.”

엘시도어는 별실에 틀어박힌 채 머리를 굴렸다.

어떻게 해야 이 상황을, [축복의 위계질서]에서 벗어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 내도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나의 빌어먹을 어머니시여.”

자신들에게 영생의 힘을 가져다준 세계수의 축복이란, 그런 것이었으니까.

더군다나 엘시도어는 깨닫게 됐다.

“편애에도 정도가 있지 않습니까.”

그 대단하신 어머니의 축복이 오직 한 명의 인간.

호열에게 깃들어 있다는 것까지도.

그런 놈에게 덜미를 잡힌 이상 도망친다는 선택지는 없어졌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러나.

“……누가 도망친다는 말이냐.”

축복을 되찾기 전까지.

엘시도어는 꼬리를 내릴 생각이 없었다.

그러니까 호열의 말을 흘려들을 수가 없었다.

분명, 그렇게 말했었지.

-“원한다면 가져가 보는 게 어떻겠나?”

가져갈 수 있다면 가져가 보라고.

-“그대들 또한 세계수 앞에서 긍지를 증명해 내란 뜻이다.”

엘시도어의 고민은 ‘긍지’를 향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호열이 자신을 찾아온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이었다.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

그랬다.

엘시도어는 지금 밥값을 하고 있었다.

황금 궁전의 어느 누구도 공짜로 밥을 먹지는 않았으니, 엘시도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엘시도어는 화원의 꽃들을 바라봤다.

이따위 것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꽃과 풀들이 엘프의 땅, 시슬리에는 가득했거늘.

고작 이따위 꽃을 애지중지 키워대다니.

“흥.”

하찮고, 우스워서 코웃음이 나왔다.

호열에게 처음으로 이긴 기분이 들었다.

이내, 엘시도어가 비장하게 읊조렸다.

“허나, 이 수모도 내가 긍지란 걸 되찾으면 끝날 일이다.”

비장한 선언.

덕분에 엘시도어는 가벼워진 마음으로 화원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빛나는 마법진, 회복 마법이 밤새도록 비약초의 화원을 비췄다…….

*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는 법.

나는 엘시도어에게 화원 관리를 맡겼다.

사실 나, 이호열의 마음 같아서는.

엘시도어를 조금 더 격하게 부려 먹고 싶었다.

누구는 힘들어 죽겠는데, 놀고먹는 게 얄미웠거든.

확 그냥, 마왕 쟁탈전에 참전시켜 버릴까?

진지하게 고민까지 해봤다.

왜, [축복의 위계질서]가 존재하는 이상.

엘시도어는 허튼짓을 할 수 없었으니까.

‘최강의 전력.’

나를 포함.

유스라 왕국부터 마탑을 통틀어도 엘시도어보다 강하다고 자신할 수 있는 이는 없었다. 뭐, 마력 구체 속에서 부유하고 있는 마탑주라면 모를까…….

하지만 그랑펠의 긍지가 내 잔꾀에 찬성할 리가 있나.

“유감스럽게도.”

마왕 쟁탈전 또한 성전(聖戰)의 일부.

성전에 참전하기 위해선 조건이 있었다.

바로 자신의 긍지를 증명하는 것.

“긍지를 깨닫지 못한 이에게 성전에 참전할 영광을 내어줄 생각은 없다.”

……성전 같은 개고생만 가득한 퀘스트를 영광이라고 하다니!

정말이지.

내가 맨날 개고생을 하는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구나, 그랑펠.

[유리하라 사막의 오아시스]

[적정 레벨 : Lv.150]

[붕괴도 : 0.7%]

포탈에 진입.

순식간에 시야가 바뀌었다.

바닷가에 생성된 균열.

덕분에 바다 위에 모래사장이 둥둥 떠있는 듯한 모습이다.

장관이 따로 없구나.

솔직한 심정 같아서는 휴직계도 냈겠다.

이놈의 재킷도, 셔츠도 벗어버리고 일광욕이라도 즐기고 싶었거늘.

“하이엘.”

휴가는 개뿔이 휴가다.

느긋해 보이는 겉과 달리.

내 속은 삐걱, 아니, 츠릉거리고 있단 말이다.

곧, 하이엘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이엘, 부르심에 응답했습니다.”

언제 봐도 과하게 우아하구나, 하이엘.

나는 옷자락을 양손에 쥐고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는 하이엘과 이야기를 나눴다.

일단, 아르카나 대륙 상황부터 시작해야겠지.

“세력 단위의 움직임은 목격되지 않았습니다.”

당연하다.

마왕 쟁탈전에 참가한 악마들은 왕좌를 넘볼만한 세력을 가진 녀석들이었으니까. 그런 강자들이 아르카나 대륙에서 말끔하게 사라진 지금.

남아있는 세력은 기존의 마왕들밖에 없겠지.

“비로소 주제를 깨달은 것인가.”

그런 마왕들의 활동조차 잠잠한 이유?

같은 마왕이기에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 않을까.

상위 마왕이 어떤 존재인지를 말이야.

언어조차 통하지 않을 정도로 격이 다른 악(惡).

그런 네 번째 왕좌의 가미긴이 지옥에 처박혔다.

가미긴의 눈은 마안(魔眼)과 똑같이 생겼었으니까.

어쩌면 마왕들도 그 시야를 공유했을지도 모르겠군.

그렇다면 확실하게 이해가 된다.

-“두려움에 떨도록 해라. 악크샨이 돌아왔다.”

악크샨이 돌아왔다고.

나는 가미긴 앞에서 똑똑히 선포했으니까.

……잠깐만, 그때는 별생각이 없었는데.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까 잘했다, 내 주둥이야.

‘아무래도 허세가 제대로 먹힌 것 같은데?’

지옥의 문이 닫힌 지금.

아르카나 대륙엔 악크샨도, 악마 사냥꾼도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건 나밖에 없잖아?

게다가 마왕 정도 된다면 분명 기억하고 있을 거다.

내가 아르카나 대륙에서 죽었다는 사실을.

입장을 바꿔 생각해 볼까?

‘악마들한테는 진짜 공포가 따로 없겠는데.’

시체도 남기지 않고 죽었던 내가.

성전에서 절멸한 악마 사냥꾼들을 이끌고 나타나서는.

악크샨이 돌아왔다고 선언한 꼴이잖아?

하이엘이 또 한 번 고개를 숙인다.

“저 하이엘, 그 여정에 함께하지 못해 송구합니다.”

나를 언제나 과대평가하는 하이엘이 이런 반응을 보일 정도라.

아이언 캐슬 호.

드워프들의 반응은 굳이 묻지 않아도 짐작이 됐다.

주눅 든 악마들을 보고 거의 축제 분위기 아닐까?

물론, 벅찬 속내와 다르게 나는 평소처럼 말했다.

“그런 건 여정도, 고생도, 시련도 아니다. 그저 스쳐 지나가는 잔바람에 불과할 뿐. 그러니 고개를 들거라, 하이엘.”

“!”

그냥 선배님들 덕을 봤다, 사실대로 말하면 될걸.

잔바람이 어쩌고저쩌고.

거창하게 포장하는 능력은 나날이 발전하는구나, 그랑펠.

너도 미안해할 거 없다, 하이엘.

“그대의 능력이 필요한 순간이니 말이다.”

이름 없던 하위 정령 시절에도 하이엘의 {자연} 능력은 효과가 상당했다. 고유 정령으로 격이 상승한 지금의 효과는 나조차도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런던에서만 하더라도 그랬다.

그냥 겉만 화려한 아쿠아리우 떡갈나무인 줄 알았더니, 생명력 회복 효과를 가지고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비약초를 영약으로 키워내겠다는 게…….

‘마냥 허황된 꿈이 아닐지 몰라.’

성공만 한다면.

돌덩이를 황금으로 바꾸는 것보다도 대단한 성과가 아닐까?

서적으로 전해지는 영약의 효과와 희귀도를 생각해 봤을 땐…….

[유니크]가 뭐냐, [에픽] 등급 정도는 될 테니까.

‘에픽 등급 아이템을 무한 재배하는 거지!’

순간, 황금빛 꿈에 부풀었거늘.

나는 주둥이가 초를 치기 전에 머릿속에서 생각을 지워버렸다.

오냐.

말 안 해도 알고 있다, 그랑펠.

그놈의 청렴결백 때문에 물질적인 삶을 추구할 수 없다는 걸.

“아직도 제 능력을 필요로 해주시다니 기쁩니다.”

그렇게 기뻐할 필요 없다, 하이엘.

아마도 앞으로도 계속 필요로 해야 할 것 같으니까.

이내, 하이엘의 축복이 오아시스에 깃들었다.

‘좋았어.’

축복받은 물을 균열 밖으로 옮기는 거야 어렵지 않다.

스킬이 아닌 마법이 있으니까.

보자, 지금처럼 적당한 물병에 『공간 확장』 마법을 걸면…….

스스스─

보이는 것처럼 물병 속으로 끊임없이 물이 빨려 들어간다는 것이다.

그나저나, 이걸 적당한 물병이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겠군.

‘……하여튼, 티타임만큼은.’

티타임의 필수품, 찻주전자.

고풍스럽게 오아시스의 물을 퍼담기도 잠깐.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인벤토리에 찻주전자를 집어넣던 내게.

하이엘이 무언가를 건네왔다.

“그리고 또 하나의 긍지를 되찾았습니다.”

……긍지를 되찾았다고?

그게 뭔 듣기만 해도 피곤해지는 소리야!

나도 모르게 심장이 츠릉했는데.

자세히 보니까 퀴른베르크 기계탑의 잔해였다.

‘그래, 레벨도 물론 중요하지.’

적정 레벨 150짜리 균열에 진입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듯.

현재 나는 일반적인 균열 공략을 통해 레벨을 올리기가 어려웠다.

‘악마족 몬스터가 넘쳐나면 또 모를까.’

악마들의 활동이 둔해진 지금.

다음 정기 업데이트 균열에서도 레벨 업을 기대하기는 힘들겠지. 그런 의미에서 퀴른베르크 기계탑에 축적된 경험치는 가뭄에 단비, 그 이상이었다.

“부디 평안하시기를. 나의 주군이시여.”

과하게 충직한 인사를 마지막으로 하이엘이 아르카나 대륙으로 복귀. 나도 곧장 균열을 빠져나와 유스라 왕국으로 통하는 포탈을 발현했다.

경험에서 교훈을 얻는 법.

반전 마법을 발현하는 것치고 마력을 꽤나 집어삼켰지, 기계탑의 잔해는. 서클이라는 족쇄 아닌 족쇄가 채워진 상태. 최대한 편한 상태에서 반전 마법을 발현할 필요가 있었다.

달칵─

“과연, 해가 저물었음을 실감하게 되는군.”

……차가 맛있다는 말을 거창하게도 하는구나.

어쨌거나.

너에게는 티백 녹차만큼 심적 평안을 주는 것도 없겠구나, 그랑펠.

나는 그러려니 하고는 천천히 마력을 끌어올렸다.

고오오─

또 한 번 칭호 시스템에게 감사하게 된다.

[초월자]의 효과로 서클이 봉인되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마법을 발현할 수도 없지 않았을까.

이래서 선행학습이 무용지물이라는 거겠지.

철커덕─

맞물려 돌아가기 시작하는 톱니바퀴.

다시금 빛을 되찾아 가는 마력석.

방대한 기운이 기계 장치에서 뿜어져 나왔다.

벌써 두 번째였다.

그럼에도 쉽게 적응이 되지 않을 정도의 기세다……!

머리카락이 사정없이 흩날리고, 가지런히 정리된 책상이 흐트러질 정도의 박력.

그랑펠 식으로 표현하자면.

그래.

기계탑의 긍지가 몸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어지럽게 메시지가 떠올랐다.

[결전병기 퀴른베르크 기계탑에 축적된 경험치를 습득합니다.]

[결전병기 퀴른베르크 기계탑에 축적된 명성을 습득합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이번에도 한계치, 50레벨까지 노려볼 수 있으려나.

상태창을 열어보기 전까지는 알 수 없겠지.

‘하지만 그 전에.’

먼저 확인해야 할 게 있었다.

악크샨의 일원, 퀴른베르크 기계탑의 마지막을 목격해야 한다는 말이다.

[퀴른베르크 기계탑에 축적된 기억을 습득합니다.]

이내, 눈앞에 펼쳐지는 기계탑의 기억.

“……!”

그런데 의아한 일이었다.

내게 존재하는 십 년 하고도 수년의 공백기.

지난번 기억에서 목격했던 드레드센 마을이 낯설었던 것처럼.

웬만한 아르카나의 도시와 마을은 내게 익숙할 수가 없었거늘.

이 순간, 눈앞에 떠오른 풍경은 묘하게 익숙했다.

웅장한 성벽.

흩날리는 깃발의 문양.

심지어는 성벽 위.

고독한 사내의 얼굴까지도.

기시감이 들 정도로 익숙했다.

나는 곧, 그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런가, 그대들도 왕좌에 목이 말랐던 것인가?”

그랬다.

쟁탈전은 악마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제국.

수도성, 안토니움.

성벽 위 사내, 황제의 목을 겨눈 반역의 칼날.

그 순간,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메인 퀘스트 : 전국시대(戰國時代)]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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