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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179화 (110/489)

◈ 179화. 모든 것이 무르익는다 (2)

영약(靈藥).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은 비약초를 영약이라 부른다.

당연하게도 영약의 가치는 상상 초월.

아니, 측정불가라고 하는 게 맞으려나.

애초에 영약은 아르카나, 어떤 경매장에도 출품된 적이 없었으니까.

옛날부터 높으신 분들께선 자기 몸 하나 보존하는 데에 열과 성을 다하는 법이다.

비약초 관련 서적에 따르면, 고대 왕국 시절부터 왕과 귀족들은 영약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었다고 한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가장 많은 영약을 복용한 인간은 ‘철완의 우루스’이다. 타고나길 약골로 태어난 그는 살기 위해 영약을 복용했다가 영약의 진가를 깨닫게 됐다…….』

나중에는 드넓은 백작령을 영약과 맞바꾸어.

결국엔 떠돌이 몰락 귀족이 되고 말았다는 옛날이야기…….

모든 옛날이야기엔 교훈이 있는바.

그 구절을 읽으면서 나도 고개를 끄덕였었지.

이래서 약물 중독이 위험하구나, 하고 말이야.

그런데 내가 그런 영약을 탐하게 될 줄이야!

영약이 필요한 이유는 간단하다.

나는 비약초의 효과를 떠올렸다.

‘아무리 귀한 비약초라고 해도 스탯 상승이 끝이야.’

하이엘과 계약을 맺었던 [포식자의 늪지대]에서 습득했던 사색 겨우살이만 해도 그랬으니까. 하지만 영약의 효과는 고작 그런 수준이 아니었다.

‘스탯 몇 포인트 올랐다고 그런 변화는 일어나지 않아. 절대로.’

나는 불가능하다, 확신할 수 있었으니까.

확실한 증거가 있잖아?

스탯이 오르든, 말든.

매일같이 벅찬 육체 단련 클래스 퀘스트.

『우르스의 격변은 당시에도, 이 서적을 집필하는 지금도 설명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검을 제대로 쥘 악력조차 없던 사내가 주먹으로 수도성의 성문을 박살 내버린 것이었다…….』

그 탓일까?

서적의 말미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영약이라 부를 정도로 오랜 기간 뿌리내리고 자란 비약초들의 대다수는, 이미 고대 왕국 시절 무렵, 아르카나 대륙에서 모습을 감췄다고 전해진다…….』

하여튼 몸에 좋은 거라면.

사족을 못 쓰는 건 만국 공통이구나.

하지만 내가 누구인가?

[정순한 지식의 오망성]의 소유자.

아르카나 대륙 모든 식물에 관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내가 아니던가? 그러니까 귀하디귀한 ‘영약’의 지식 또한 내 머릿속에는 존재한다는 말이다……!

그랬다.

지금 내가 물을 주고 있는 건 전부 영약으로 자라날 가능성이 있는 비약초들이었다.

누군가는 묻겠지.

아니, 비약초만 해도 귀하신 몸 아니었냐고.

그런 비약초는 또 어디서 구해와 심은 거냐고.

나는 당당하게 대답해 주겠노라.

역시, 구질구질하길 잘했다고.

[만물과 통하는 지도]

[등급 : 에픽]

[제한 : 없음]

[효과 : 누군가 몰래 감춰둔, 누군가 잃어버린, 어딘가에 숨겨진 무언가의 위치를 알 수 있다. 또한 단 한 번, 무언가의 위치로 순간이동할 수 있다.

단, 순간이동 효과 발동 시 모든 효과를 그 즉시 상실한다.]

[설명 : 사용하기에 따라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가진 마도구.]

마르셀로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 아르카나 대륙으로 순간이동할 수밖에 없던 상황.

청렴결백, 물질에 연연하지 않는 그랑펠과 다르게.

나, 이호열은 물질에 대한 욕심을 포기할 수 없었으니.

[육망성 브로치]와 마찬가지로 나중에 써먹을 가능성이 있는 아이템의 위치를 미리미리 알아뒀단 말이지.

-“영약이라. 내겐 무의미하거늘.”

그렇게 중얼거린 기억이 있지만…….

그랑펠의 딴죽에도 잘 참았다, 호열아.

이 구질구질함이 나를 살릴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정순한 지식의 오망성] 덕분에 나는 내게 약 혹은 독이 될 영약을 구분할 수 있었다. 그렇게 추려낸 영약은 두 가지다.

만년설꽃.

작열하는 해바라기.

서클은 마법사의 경지였다.

당연하게도 서클을 활성화하려면, 내 비루한 마법적 능력을 끌어올려야만 했다.

그 방법이야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일단은, 그중에서도 가장 쉬운 지름길을 골랐단 거지.

‘다른 길은 내게 너무 벅차다.’

마르셀로도 못하는 걸 내가 어떻게 해내겠어?

해낸다고 하더라도 투자되는 시간이 상당하겠지.

그때까지 이런 심장박동을 듣는 건 정중히 사양하고 싶다.

「빙결 마법 친화력을 증가시켜 주는 만년설꽃.

그와 정반대의 성질을 가진.

화염 마법 친화력을 증가시켜 주는 작열하는 해바라기.」

나는 귀중하다는 영약을 둘이나 섭취할 생각이었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부작용으로 세상을 하직하고 말 테니까.

우르스 일화에서도 알 수 있듯.

영약에는 상당한 기운이 잠재되어 있다.

그런 영약을 다짜고짜 섭취하면?

당연하게도 몸이 받아들이지 못한다.

『우르스는 첫 영약을 복용하고 그대로 기절했다. 그로부터 꼬박 한 달 뒤에나 눈을 떴다. 그것마저도 선천적으로 약한 육체가 영약의 약효와 충돌하지 않은 덕분이었다.』

누군가는 의문이 들었겠지.

그렇게 효과가 좋은 영약이라면.

영약의 섭취자들은 전부 역사에 이름을 날렸어야 하지 않는가?

그렇지 못한 이유는 간단하다.

대다수가 영약을 먹고, 부작용으로 죽었으니까!

“추위도, 더위도 내게 영향을 줄 순 없다.”

한겨울엔 패딩.

한여름에는 반팔조차 걸치지 못하게 하는 격식.

하지만 이건 고작 추위, 더위 수준이 아니란 말이다. 그랑펠.

‘그냥 섭취해도 부작용으로 고생할 판에.’

츠릉─

나는 심장에 서클이란 족쇄마저 채운 상태였다.

그러니까 방법은 하나뿐이다.

만년설꽃과 작열하는 해바라기를 동시에 복용. 그 효과를 중화시키는 게 부작용 없이 마법적 능력을 끌어올리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쏴아아─

귀하디귀한 영약을 둘이나 섭취하겠다는 목표를 세웠거늘.

하는 짓은 고작 물뿌리개로 텃밭에 물이나 주고 있는 꼴이라니.

누가 보면 상추라도 키우는 거냐며 오해할 수도 있겠군.

근데, 이래 봬도 이게 단순한 텃밭이 아니거든.

-“여기 요청하신 연구 과제입니다!”

숙련 마법사, 클레.

과연, 그랑펠에게 합격을 받았던 만큼.

클레의 『비약초의 육성법』은 짧은 사이에 꽤 많은 발전을 이뤘다.

-“치유 마법으로 비약초가 성장하기에 최적의 환경을 유지한다……. 흥미로운 발상이군. 마력의 효율을 떠나서 칭찬받아 마땅하다.”

비약초는 까다로운 환경에서 자란다.

아르카나 시스템적으로 말하자면…….

특정 환경이 아니면 디버프가 걸린다고 설명하면 되려나?

클레의 육성법은 환경을 맞추는 게 아닌 디버프를 제거하는 데에 중점을 둔 것이었다.

‘물론, 마력이 말도 안 되게 들어가지만.’

가뜩이나 마력 소모량이 극심한 치유 마법이다.

그런 치유 마법을 고작 식물에 발현한다?

클레의 연구가 그동안 빛을 보지 못했던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하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믿는 구석이…….

아니, 믿는 것까지는 아니고.

‘써먹을 구석’이 하나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텃밭에 만년설꽃.

그리고 작열하는 해바라기로 자라날 수 있는 비약초를 잔뜩 심었다.

여기에 하이엘의 축복을 담은 물까지 뿌린다면…….

조금은 기대해 봐도 되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하이엘과 만나기 위해서라도.

내일은 균열에 진입해야겠군.

나는 한가로이 지껄였다.

“싱그럽구나.”

비약초 위에 맺힌 물방울.

텃밭을 가꾸는 게 타인의 시선에선 더없이 평화로워 보이겠지. 그러나 당사자인 나는 조금도 즐길 수 없는 휴가가 시작된 순간이었다…….

“과연, 자연보다 위대한 예술품은 없는 법이군.”

……마찬가지로 이놈의 혼잣말도 즐길 수 없구나.

*

갑작스런 휴식의 이유가 무엇인가?

“분명 퀘스트 때문이라니까요?”

윤종진은 간만에 큰 목소리를 냈다.

이호열이 처음으로 세상에 존재감을 표출했던 [아스큐라 백작 성채] 균열.

그 호열의 첫 행보를 지켜봤던 윤종진이 아니던가?

“그 지독한 이호열이라고요! 시베리아 설산에서도 패딩 하나 안 걸치고 돌아다니던 이호열! 그렇게 독한 인간이 갑자기 모든 활동을 중지하고 휴식? 말이 안 되는 거거든!”

비켜라.

인내심의 한계다.

쌀쌀맞은 목소리는 아직까지 윤종진의 귓가에 선명했다.

윤종진의 강한 주장에 현용석은 결국 백기를 들었다.

“그래서, 네 말은 마탑 포탈에서 대기하고 있겠다고?”

“그렇죠. 퀘스트를 수행하려면 어쨌든 균열에 진입해야 하잖아요. 플레이어들이 그 모습을 포착할 거고, 저는 포탈을 타고 딱!”

“그래, 그러든가. 의욕적인 게 보기 좋네.”

분명,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겠다…….

윤종진은 현용석에게 한 방 먹여주고 싶었다.

투데이 아르카나.

메인 카메라 감독으로서의 감이란 게 있단 말이다.

윤종진이 세트로 달려온 김 작가에게 말했다.

“내가 관상 하나는 잘 보거든요. 우리 고모가 무당이신데, 그래서 그런가 내가 약간 신기 비슷한 게 있어요. 우리 호열 씨 관상은 절대 쉴 수 있는 관상이 아니야.”

……그럼, 내 관상은 얼마나 사나워서 여기로 끌려온 거지?

김 작가는 할 말이 많았지만, 꾹 참았다.

그리고 대충 맞장구를 쳤다.

조잘조잘.

“그런 의미에서 용 피디님 관상은 아주 가관…….”

윤종진이 수다를 이어가던 순간이었다.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던 김 작가가 흠칫했다.

그러고는 다짜고짜 자리에서 일어났다.

“감독님, 카메라! 카메라 챙기세요!”

“떠, 떴구나! 내가 그럴 줄 알았지!”

윤종진은 서둘러 장비를 챙겼다.

삼각대를 접고, 부지런히 김 작가의 뒤를 따랐다.

러시아만 아니면 어디든 환영이었다.

“그래서 어디 쪽 균열이래요?”

“균열이요? 균열 아닌데요?”

“엥? 균열이 아니라고요?”

“유스라 왕국이에요.”

……아, 그런가!

유스라 왕국에서 시작되는 퀘스트로구나.

가능성은 충분했다.

유스라 왕국부터가 고대 왕국이 아니던가?

얽힌 떡밥이면 퀘스트가 무궁무진할 테니까.

그러나 윤종진의 관상학개론은.

“뭐, 뭐야 이거? 합성 아니에요?!”

김 작가가 윤종진의 얼굴에 스마트폰을 들이댄 순간.

무참히 깨져버렸다.

액정에 떠오른 사진.

거기엔 언제나처럼 고고한 자세로.

웬, 꽃밭을 가꾸는 호열이 있었으니까.

윤종진이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관상이 그런 관상이 아닌데?”

“감독님, 관상 타령 그만하시고 카메라!”

“카메라? 이걸 찍으러 가자고요?”

슥─

김 작가가 안경을 올려 쓰고는 눈을 빛냈다.

김 작가에게도 감이 있었으니까.

“꽃밭을 가꾸는 이호열. 그것도 분명 수요 시청자층이 있을 거라고요. 일단, 신선하잖아요! 뭣보다 용 피디님한테 쓴소리 듣기 싫으시면…….”

……아뿔싸.

고뇌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큰소리를 땅땅 쳐놓지 않았던가?

윤종진이 곧장 삼각대를 들고 뛰기 시작했다.

“황금 궁전 별실 쪽 맞죠? 먼저 가 있을게요!”

.

.

.

결과론적으로 김 작가의 감은 옳았다.

[시청률 : 21.7%]

한가로이 화원을 가꾸는 호열의 모습.

그건 누구도 목격하지 못했던 광경이었으니까.

동시에 작게나마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동안 얼마나 지쳤으면 갑자기 꽃을 키우겠냐고

-ㄹㅇ그만 좀 건드려라

-근데 저거 무슨 꽃임???

-그것도 그만 궁금해하라고!!

이호열.

그는 정말, 단순하게, 쉬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그런 여론이 주를 이루자 그동안의 호열의 행보가 재조명을 받기 시작했다.

-살인적인 스케쥴이었음 그냥;;;

-거기에다가 이호열 레벨을 생각해보셈

-하긴 최소 900레벨이자너

-그런 레벨을 달성했다는 건 우리가 안 보이는 데에서도 끊임없이 뭔가를 했다는 거잖아? 나도 플레이어지만 진짜 존경스럽다…….

물론, 세상에는 긍지를 품은 이들만 살아가는 게 아니었다.

누구의 말대로.

빛이 있다면 그림자도 있는 법이니까.

같은 걸 보고도 딴생각을 품는 이들이 있다는 것이다.

어둠이 깔린 유스라 왕국, 황금 궁전.

두 개의 그림자가 어둠 속에 파묻혔다.

스킬, [은신] 발동.

두 그림자는 은밀하게 귓속말을 나눴다.

“킨베르, 그 자식이 빠진다고 했다고? 정말?”

초신성, 킨베르.

몇 번이고 다른 플레이어들과 합을 맞춰봤지만, 그만큼 확실하며 잔혹한 플레이어가 또 없었다. 무엇보다 킨베르는 작업 앞에서 내빼지 않았다.

“얼굴이 하얗게 질렸더라고.”

“……킨베르 얼굴이 질려? 설명 제대로 한 거 맞아?”

“내가 병신도 아니고, 작업을 잘못 설명했겠어? 확실하게 설명했어. 누구를 죽이거나, 습격하는 게 아니다. 그냥 슬쩍 해오는 거라고.”

경비병들이 눈을 부릅뜨고 있는 황금 궁전 안으로 잠입하자는 것도 아니고, 그냥 텃밭에 있는 꽃 몇 뿌리를 뽑아오자는 것뿐이었다.

누가 감히 엄두나 내겠는가?

천하의 이호열 화원을 털다니.

하지만 해내기만 한다면.

뒷세계에서 자신들의 담력을 의심할 플레이어들은 없을 터.

“몸값을 올릴 기회라는 거지.”

두 플레이어는 그걸 노리고 황금 궁전 별실에 잠입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 새낀 왜 빠진 거지?”

킨베르의 [은신] 스킬 숙련도를 생각하면, 이런 어둠 속에서는 누구도 그를 발견할 수 없을 터.

하지만 킨베르는 이호열 이름이 나오자마자 못 들을 걸 들었다는 것처럼 자리를 떠버렸다.

“뭐, 쫄보 새끼 얘기는 됐어.”

어쨌거나, 이호열도 자신의 화원을 터는 놈들이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모양이군.

경비병들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역시, 찾길 잘했어.

“그나저나 애지중지 가꾸는 것 같았지?”

“혹시 귀한 아이템은 아닐까?”

“……흠, 풀떼기가 귀하면 얼마나 귀하다고.”

슥─

두 그림자가 화원에 접근하던 순간이었다.

오소소!

“!!”

순간, 전신에 소름이 돋아났다.

어둠 속에서 형형하게 빛나는 눈동자.

두 사내의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공포가 발생합니다.]

[스킬, ‘은신’이 해제됩니다.]

극도의 공포감이 은신을 강제 해제하는 것도 모자라서.

팅!

들고 있던 무기마저 바닥에 떨어트리게 하였다.

이내,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거대한 존재감.

그 정체를 알아차린 두 사내의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대체 어째서?

드래곤과 비견되는 전설의 존재.

그림자 용병단원, 락키드를 초전박살 낸 괴물.

엘프가 이호열의 화원을 지키고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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