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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178화 (109/489)

◈ 178화. 모든 것이 무르익는다 (1)

생각해 보면 정말 쉴틈 없는 나날이었다.

일단, 지긋지긋한 무한 반복 클래스 퀘스트부터 시작해서. 거악을 쓰러트리면 마왕이 튀어나오고. 마왕을 쓰러트리면 악마 숭배자가 튀어나오고. 그걸 쓰러트리면…….

‘결국엔 상위 마왕, 가미긴까지 달려왔으니까.’

적 앞에서 밑천을 드러낼 순 없는 법.

밑 빠진 독에, 파놓은 우물에서 퍼올린 물을 채워넣으면서 말이지.

하지만 경지부터는 구멍을 용납하지 않는 모양이다.

달칵─

“이른 오전의 차도 나쁘지 않군.”

오전, 9시.

원래라면 마탑에서 한창 수석의 업무를 수행하던 시간이다. 보자, 지금쯤이면 벤쉬의 출탑 신청서에 가차없이 불합격을 휘갈길 타이밍인가?

짹짹─

지저귀는 새 소리.

그러나 나는 유스라 왕국의 집무실에서 창밖을 내다보며 찻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제출한 연차, 아니, 휴직계가 무리 없이 통과됐으니까.

막말로 얼마 만에 제대로 된 휴식이냐, 이게?

내가 티를 내지 않아서 그렇지.

티를 냈으면 말이야.

하루 종일이 뭐냐.

일주일 내내 징징거릴 자신도 있었다.

그동안 진짜 죽을만큼 힘들었으니까!

아니, 막바지엔 [첫 세계수의 축복]이 없었다면 과로사로 눈을 감았을지도 모른다.

현실도 모자라서.

[마안의 망원경]을 획득한 이후부터는 아르카나 대륙의 상황까지도 염두에 두고 머리를 굴려야 했으니까.

하지만 이 주둥이가 엄살을 용납할 리 있나.

“곧 그대들에게 돌아가겠다.”

멋있게 말하지 마라, 그랑펠.

지금은 폼 잡을 때가 아니란 말이다.

이 순간에도 서클의 고리는 내 심장을 옥죄어 오고 있었으니까.

나는 유그위드의 말을 떠올렸다.

-“서클을 형성하시다니. 저 스스로가 부끄러워질 정도의 성취로군요, 이호열 수석. 이래서는 이 수석에게 원로 대접을 받지 못해도, 섭섭할 자격이 없겠습니다?”

서글서글한 얼굴로 뒤끝 가득한 말을 뱉었지, 유그위드.

역시 무섭다, 마법사란 족속……!

그래도 유그위드는 성심성의껏 서클에 대해 설명해 줬다.

-“쉽게 말해 서클은 말의 고삐와 같습니다. 이 수석께서 고리를 쥐고 거칠게 흔든다면, 마력은 성난 말처럼 날뛰겠지요.”

서클을 형성한 마법사의 마법은,

그렇지 못한 마법사의 마법을 압도한다.

서클을 형성하기 전후의 마법 위력을 수치로 표현하면 최소 수에서 일십(一十)배의 격차가 난단다.

-“그러나 고삐와 마찬가지로 서클을 다루는 데에는 섬세한 통제가 필요하답니다. 이 수석께서도 알고 계시다시피 서클은 심장에 형성되니까요.”

그렇다.

서클을 다루기 위해서는 그만한 능력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말보다는 몸으로 느끼는 게 빠르려나.

나는 천천히 마력을 끌어올렸다.

둥실─

허공에 떠오른 마력의 구체, 라이트.

하도 우려먹은 기초 마법이기에 탐색, 간섭 과정은 가뿐하게 생략.

나는 라이트의 빛을 유심히 살폈다…….

역시나, 출력의 변화랄 건 없다.

츠릉─

물론, 심장이 죄어오는 느낌도 아직은 없다.

[초월자 : 조건을 충족하지 못해 효과가 봉인됩니다.]

그 메시지로 봤을 때, 서클은 형성만 됐지 작동하지 않는 모양이었으니까. 그런 의미에서는 칭호의 효과가 봉인된 것에 감사해야 되는 건가?

아직 능력을, 그릇을 만들지도 못했는데.

다짜고짜 서클의 고리를 쥐고 흔들었다면…….

서서 기절이 뭐냐.

꼿꼿하게 서서 심장마비로 황천을 건넜을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탑주님께서 기뻐하실 소식이군요. 종종 아쉬워 하셨거든요. 마탑에 자신과 마법적 식견을 나눌 마법사가 없다는 것에 대해서 말이죠.”

유그위드의 말에 나는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아르카나 대륙, 최강의 무력 집단 마탑.

그 천하의 마탑에도 서클을 형성한 마법사는 탑주 하나뿐이었다는 사실을. 그러니까 실감이 났다. 나 정말 말도 안 되게 중간 과정을 생략해 버렸구나……!

그러니까 주화입마에 걸린 것도 이해가 된다.

내 마력은 잘 쳐줘야 숙련 마법사와 엇비슷할 터.

그런 마력에 서클이라는 고리를 채워버린 셈이니까.

쥐고 흔들 수 있는 고삐가 되기는커녕 묵직한 족쇄가 될 수밖에.

츠릉─

“쉴 새 없이 날뛰는군.”

하지만 이놈의 긍지가 어디 자신의 부족함을 쉽게 인정한단 말인가?

팟─

이내, 허공으로 흩어지는 마력 구체.

나는 태연하게 지껄였다.

“이토록 거친 야생마를 다루는 건 오랜만이군.”

……그 발언은 서클이 야생마라는 거지?

이젠 비유까지 써먹는 거냐, 그랑펠.

뻔뻔한 것도 정도가 있지, 진짜로!

경악하면서도 사실 한편으로는 마음이 놓였다.

만약, 내가 온전히 이호열이었다면.

지금쯤 나는 불치병에 걸렸다면서 온갖 처량을 떨고 있지 않았을까? 하지만 우리 긍지 높으신 그랑펠 님 덕분에. 나는 일찌감치 준비하고 있었다.

“그 야성을, 내가 친히 굴복시켜 주마.”

츠릉─

주화입마.

내 심장에 깃든 초월자의 힘.

서클을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한 발버둥을!

*

스슥.

마르셀로의 집무실.

책상 위에는 수많은 서적과 서신이 쌓여있었다.

마르셀로는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나약해진 육체 때문에 알아차리지 못했었다니.

작게 웃음이 나왔다.

“저도 모르게 많은 신세를 지고 있었군요.”

마법사란 족속이 어떤 이들인가?

진리를 갈구하듯 새로운 것을 보면 탐구하고 싶어하는 이들이다. 균열은 물론, 모험가들의 세계에 대해서도 궁금한 점이 많은 게 당연하겠지.

출탑 신청서만 하더라도 그 양이 상당했다.

“경의 말씀대로 모든 것은 절차에 따라…….”

엄격하게 살피는 출탑의 목적.

그렇게 출탑 신청서를 결제하다 보니, 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

마르셀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래서야…….

“……정말, 하루하루가 부족하셨겠군요.”

마탑에 머물며, 오직 마탑만을 관리하는 자신과 호열은 달랐다.

유스라 왕국, 프로스트, 심지어는 이곳 모험가들의 세계에서까지.

호열이 떠맡은 짐의 무게는 감히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였으니까.

“중요한 시기에 잘 결정하셨습니다.”

서클을 형성한 지금.

경에게도 서클에 적응할 시간이 필요하시겠지.

그런 의미에서 지금 같은 적기가 없었다.

무(無)로 돌아간 마왕 쟁탈전.

거기에 상위 마왕, 가미긴까지 지옥에 떨어진 지금.

아르카나 대륙에서 악마들의 활동은 잠잠해진 참이었으니까.

마왕성 균열 때처럼 착각이 아니었다.

그때와 다르게 [마안의 망원경]으로 아르카나 대륙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으니까. 사기가 꺾일 대로 꺾인 악마들의 모습을 목격했다는 것이다.

“경의 빈자리를 채워보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렇게 중얼거린 마르셀로의 깃털펜이 사각거렸다.

“벤쉬 윌리엄 선임은 조금 더 분발하셔야겠군요.”

『불합격』.

*

세계는 평화로웠다.

단, 한 명의 인명 피해도 없이 열두 개의 균열을 클리어한 영웅들이 있었으니까. 균열 곳곳에서 영웅담이 들려오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라이언 하트 기사단, 네임드 몬스터 격퇴!]

[선임 마법사, 그리고 마탑의 강함에 대하여.]

[최강의 방패, 여신교단의 성기사들.]

[소수 정예 끝판왕, 그림자 용병단의 맹활약.]

큰 관심을 받는 건 역시나 맹활약한 아르카나인들이었다. 수많은 플레이어들, 그리고 카메라 렌즈 앞에서 압도적인 무력을 증명한 셈이었으니까.

“크하하하!”

황금 송아지 주점.

조금도 그립지 않던 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락키드가 대낮부터 두 번째 술통을 깠다.

“끝판왕……. 뭔 말인지는 정확히 모르겠는데, 왕이면 좋은 거겠지? 빌어먹을 세상이 드디어 락키드 님의 진가를 알아보는구만!”

엘시도어에게 당했던 패배는 여전히 쓰라렸지만…….

뭐, 그쪽은 우리 고용주님께서 처리하신다고 했으니까.

신경 쓸 필요는 없겠지.

그보다는 지금 이 순간을 즐기고 싶었다.

“자, 뭐라고 떠들어 대는지 보자고.”

락키드는 투박한 손가락으로 리모컨을 눌렀다.

삑─

곧장 그림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자, 악마를 도륙 내던 이 몸의 도끼가 나올 차례로군.”

그런데…….

아무리 기다리고 술을 몇 통씩이나 비울 때까지도 락키드의 모습은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하루 종일 똑같은 인물에 대해 떠들어댈 뿐이었다.

고용주, 이호열!

“크흠.”

엘시도어 때 받은 도움을 생각하면…….

호열을 원망하기에는 얼마 남지 않은 양심이 찔릴 정도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러려니 하고 넘기기는 또 억울했다.

결국, 락키드는 애꿏은 술만 연거푸 들이켰다.

쾅!

“뭔, 할 말이 그렇게 많아서 종일 떠드는 건데?!”

락키드는 이해할 수 없어도, 주점에서 숨 죽이고 있던 플레이어들은 이해할 수 있었다. 처음 존재를 드러냈을 때부터 행보에 숨김이 없던 호열이었다.

“심할 땐 파파라치가 따라붙을 정도였죠?”

왜, 플파라치라고.

플레이어 사이에서도 악명 높은 놈들이 정보를 캐보려고 호열에게 따라붙은 적이 있었다.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다. 저건, 컨셉질이 분명하다. 반드시 실체를 밝혀내겠다고. 밝히기만 하면 돈방석에 앉을 거라고 군침을 삼켰었죠. 다들.”

물론, 얼마 가지 않아 전부.

혀를 내두르고 사라지고 말았지만.

말 그대로 쳇바퀴였다.

마탑, 균열, 마탑, 유스라 왕국…….

일탈은커녕.

욕구가 존재하는 인간이 맞기는 한 것인가?

의심이 될 정도로 규칙적인 일과를 반복하던 호열이었으니까. 마지막으로 쐐기를 박았던 건 신화의 길드 마스터, 백이설이 호열에게 접근했을 때였다.

“몇 연속이었죠? 10연속 퇴짜? 하여튼, 그 문전박대를 보고 플파라치들도 이호열 쪽으로는 카메라 들이댈 생각도 안 하더라고요.”

그런 일과를 반복하면서도.

무수한 균열을 클리어해 온 이호열이었다.

그런 호열이 짐을 내려놓고는 휴식기를 가진단다.

세간의 관심이 그 첫 휴가에 집중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플레이어 커뮤니티에선 벌써 떡밥 굴러가고 난리도 아니더라고요! 뭔가 엄청난 퀘스트를 받은 거 아니냐는 추측도 있고……!!”

.

.

.

시간이 생기니 늘어나는 것은 인터넷 서핑 시간이었다.

긍지에 어긋나는 일이 아니냐고?

그럴 리가 있나.

“급하다고 한들, 기이에 소홀할 순 없겠지.”

이쯤 되면 긍지를 초월한 합리화가 아닐까?

의문이 들었지만, 태클을 건다고 저항할 수 있는 긍지가 아니다.

그보다.

‘내 휴가에 왜 이렇게 관심들이 많으신 거래?’

마르셀로를 통해 원탁 회의에 휴직계에 관한 소식을 발표했으니까.

플레이어들을 통해서 세상에 알려지는 것까지는 예상을 했다.

그래서 나름대로 각오는 했다만, 기대 이상으로.

상당히 부담스러운 관심이 아닐 수 없군.

-ㄹㅇ 월드 퀘스트 아님? 상위 마왕이 엮였는데?

-솔직히 월드 퀘스트만 되겠음? 메인 예상함

-메인 퀘스트가 뭔데 씹덕아

-애초에 메인퀘가 실존하긴 함?

-사실 나도 모름 ㅈㅅㅋㅋ

-떡밥이 떡밥이다 진짜 어그로 오지네;;

뭐냐, 무슨 착각을 하는 건데 다들?

내가 월드 퀘스트를 성공한 것보다 대단한 업적을 세우기는 했다만.

그러면 뭐 하냐?

그 보상을 제대로 소화시키지도 못하고 있는데!

거창한 게 아닌 폐관수련 비슷한 거란 말이다.

“상상력이 빈약하군.”

……빈약한 건 너의 양심이다, 그랑펠.

제발, 말이 씨가 되는 소리는 그만하자.

특히나 지금 순간에는 더욱더 민망해지니까.

나는 간절하게 바라며 시선을 옮겼다.

내가 민망하다고 한 이유가 바로 눈앞에 있다.

휴직계를 제출한 첫날.

나는 월드 퀘스트, 메인 퀘스트의 장소도 아닌.

유스라 왕국에 있었다.

정확히는 유스라 왕국 별실의 텃밭에 꼿꼿하게 기립했다.

흔들리지 않는 자세.

정확한 팔의 각도.

격식 넘치는 모습으로 텃밭에 물뿌리개를 흩뿌렸다.

그럴싸하게 지껄였다.

“길들이는 데에도 여러 방법이 있는 법이지.”

그렇다.

발버둥도 쳐본 놈이 쳐보는 거라고.

그동안 내가 파놓은 우물이 몇 개인데.

아까워서라도 할 수 있는 건 다해봐야지 않겠어?

『비약초의 육성법』.

주화입마.

비약초로 극복할 수 없다면.

비약초가 성장한 영약은 어떠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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