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7화. 서클
나는 사건의 전말을 깨달았다.
기어코 일을 내고 말았구나, 격식아……!!
서서 잠을 자는 것도 아니고, 기절한 채로 꼿꼿하게 서 있었다니!
정말로, 육체를 지배한 흑역사가 무엇인지 제대로 느끼게 된다.
수치스럽지만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자고.
‘그래도 다행이야.’
만약, 기절해서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고 가정해 볼까.
달칵─
나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태연하게 지껄였다.
“하마터면 의복을 버릴 뻔했군.”
……그래요, 그놈의 옷매무새도 물론 흐트러졌겠지요.
하지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역시나 가족들이었다.
‘특종감이니까.’
뉴스 속보로 아들이 쓰러진 모습을 보게 됐다면, 부모님 특히 우리 최 여사님께선 내 걱정에 밤잠을 이루시지 못하셨을 거다. 누나들도 마찬가지다.
지금만 하더라도 티를 내지 않을 뿐이지.
내가 균열에 진입할 때마다 안부를 물어왔으니까.
‘그런 면에선 한시름 놨는데…….’
츠릉─
……문제는 이 쇳소리의 정체가 뭐냐는 거지!
혹시 심장에 문제가 생겼나.
그래서 인공심장으로 갈아 끼우기라도 한 건가, 싶었는데.
‘에이,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니겠지.’
내가 정신을 잃고 침대에 누워있던 건 고작해야 몇 시간 정도였으니까. 게다가 뭔가 육체에 큰 문제가 생겼다기엔 지나치게 컨디션이 좋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메시지가 보였다.
[시공간에 당신의 업적이 울려 퍼집니다.]
[시공간의 존재들이 당신의 자격을 이야기합니다.]
[칭호, ‘초월자’를 습득합니다.]
천천히 곱씹어서 읽어봤다.
그러고는 상태창을 확인했다.
일단, 레벨은 550으로 6레벨이 올랐다.
[이름 :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
[칭호 : 최후의 모험가, 숭고, 초월자]
[클래스 : 악마 사냥꾼]
[레벨: 550]
[능력치]
근력 : 110 / 민첩 : 120 / 마력 : 461 / 행운 : 12 / 심미 : 中
[보유 포인트 : 6]
어디서 획득한 경험치인가.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악크샨의 유지] 덕분에 획득한 경험치겠지.
900레벨대, 진명의 악마를 셋이나 사냥했던 지옥의 악마 사냥꾼들이었으니까. 나는 [악크샨의 유지]를 발동한 기여도만 치더라도, 6레벨 정도는 오를 법도 하지.
‘내가 한 건 없지만, 일단 고맙다고 치고.’
그래서.
네 번째 왕좌의 마왕, 가미긴은 어떻게 된 거지?
확실한 건 한 가지다.
가미긴, 녀석은 분명 지옥에 떨어졌다는 것.
그래서 아르카나 대륙에든.
현실에든 다시는 모습을 드러낼 수 없다는 거겠지.
그러나 엄밀하게 따지자면 내가 가미긴을 사냥한 건 아니었으니까.
그 처치 경험치까진 획득하진 못한 건 납득할 수 있다.
씁, 신 포도라는 단어가 떠오른군.
‘오히려 억울했을지도 몰라.’
아르카나의 시스템상 레벨 업의 한계치는 50레벨이다.
레벨조차 짐작할 수 없는 상위 마왕.
가미긴을 잡고 고작 50레벨 상승에 그쳤다면, 나는 억울해서 아직까지 침대에 누워 이불킥을 차며 허우적거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 빌어먹을 격식.’
물론, 내적으로만 말이지.
그런 이유로 경험치 대신 습득한 보상에 눈길이 갔다.
칭호도 이걸로 세 개째였으니, 슬슬 익숙해져야 했거늘.
……어째 낯설다?
업적이 울려 퍼진 곳이 아르카나 대륙이 아니라 ‘시공간’이라고?
거기가 어딘지도 모르겠는데, 그다음 메시지는 더 가관이다.
“시공간의 존재들이 나의 자격을 이야기한다…….”
자격이라면 칭호, ‘초월자’의 자격을 말하는 건가?
시공간이 뭔지도 모르는데, 시공간의 존재들이 누군지 알 턱이 있나.
하지만 눈치로 짐작해 봤을 때.
‘대충 봐도 대단한 사람들이겠지?’
그래도 초월자 칭호를 습득한 걸로 봐선 나에 관한 이야기는 좋게좋게 끝난 모양이다. 누군지는 몰라도 고마우신 분들일지도 모르겠군.
생각을 마치기도 잠깐, 나는 입을 열었다.
“나의 자격을 논한다? 용납할 수 없는 일이군.”
물론, 내 생각과는 별개로.
그랑펠의 고고한 긍지가 남의 평가를 인정할 리 없었지만.
고집은 알겠다만, 이럴 땐 좋게 넘어가자 그랑펠.
무려 상위 마왕을 지옥에 처박아 넣고 습득한 칭호.
그래도 살짝 기대해볼 만하지 않나……?
나는 적당한 기대를 품고, 칭호의 효과를 확인했다.
그리고 경악했다.
[초월자 : 조건을 충족하지 못해 효과가 봉인됩니다.]
……밑 빠진 독이 드디어 일을 냈구나 싶어서.
*
나는 다음 날까지 안정을 취하고 일상으로 복귀했다.
그런 내게 마르셀로는 축하인사를 건네왔다.
“서클의 경지에 오르시다니, 축하드립니다.”
『서클』.
내가 마탑에서 탐독한 마법 서적이 몇 갠데. 그 개념을 모를 리가 있나. 쉽게 말해 서클은 모든 마법사가 도달하고자 하는 궁극의 경지였다.
『심장의 고리는 마력의 순환을 더욱더 빠르고 정순하게 흐를 수 있게 한다. 정순한 마력의 효율은 그렇지 못한 마력과 출력에서 상당한 격차가 존재하며…….』
쉽게 예를 들어 설명하자면 간단했다.
“경을 보며 제 부족함을 깨닫게 됩니다.”
그랬다.
마탑의 진짜 수석인 마르셀로조차도 형성하지 못한 게 바로 서클이란 말이다.
그러니까 나는 자각할 수밖에 없었다.
츠릉─
심장박동 대신 들리는 쇳소리의 원인을 깨달았단 거지.
과정은 생략하고, 결과만 보자.
나는 상위 마왕 처치라는 어마어마한 업적을 세워, 초월자의 자격을 갖췄고, 그로 인해 서클을 개방하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꼼수로 날로 먹을 수 없다는 거겠지.’
550레벨.
초월자라고 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그릇 때문에 심장의 고리를, 서클을 제대로 순환시키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츠릉거리는.
걸걸한 쇳소리도 그 때문에 들려오는 거였고!
“축하받을 일이 아니라네.”
서클이란 걸, 써먹지도 못하는데 무슨 축하를 받겠다고.
나는 담담하게 말했거늘.
표정을 보아하니, 또 멋대로 착각하고 있구나 마르셀로.
“그렇습니다. 경에게는 서클조차도 그저 거쳐 가는 경지에 불과할 테니 말입니다.”
아니, 그런 과대평가가 나를 이 악물고 발버둥 치게 한다니까?! 억울함에 가슴팍을 들이밀고, 츠릉거리는 심장 소리를 들려주고 싶었건만.
이놈의 주둥이가 진실을 말할 리가 있으랴?
“서클 이상의 경지라, 흥미가 생기는군.”
……말 돌리려는 속셈이 뻔히 보이는구나, 그랑펠.
그나저나.
꼼수든 뭐든, 상위 마왕을 지옥에 처박아 넣었단 말이다.
그런데 효과 봉인이라니.
억울해서라도 안 되겠다.
‘그 조건이라는 거 어떻게 해서든 충족시켜 봐야지.’
단순하게 레벨이 부족해서 그런 건 아닐 거다. 그런 거였으면 시스템 메시지로 떠올랐겠지. 그나저나, 그 조건을 어떻게 알아내야 한단 말인가…….
마음 같아서는 시공간의 존재들을 붙잡고 물어보고 싶구나.
‘일단, 마법 서적부터 들춰봐야 하나.’
벌써부터 머리가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내가 꾸역꾸역 방법을 떠올리던 때였다.
마르셀로가 입을 열었다.
“역시, 경이시라면 보다 먼 미래를 내다보실 거라 생각했습니다.”
또 뭔 소리야.
당장 서클부터 해결하지 못했는데, 뭔 미래?
그러나 내 얼굴에 의문은 드러나지 않았으니.
마르셀로가 말을 이었다.
“탑주께서 자리를 비우신 현시점에 마탑에서 서클. 그리고 그 이상의 경지에 관해 알고 있는 분은 유그위드 원로 마법사님뿐이십니다. 그에 관련해 대화를 나눠보신다면…….”
……아차.
잠깐, 잊고 있었다.
악크샨처럼 마탑에도 선배님이 계셨지?
*
마탑의 원탁 회의.
특별하게도 마탑의 마법사만 참석한 게 아니었다.
원래는 유스라의 황금 궁전에서 모여야 할 인물들이 크리스탈 홀에 모여있었으니까.
사유는 간단했다.
“무리하시면 안 되지.”
쓰러졌던 호열을 위해서였다.
히사기가 뱀눈으로 남태민을 흘겨봤다.
“그런 것치고는 들뜨셨군요.”
“…….”
참자.
남태민은 대꾸하지 않았다.
히사기의 클래스는 마창사로 육탄전만큼이나 마법에도 능숙했다.
마탑이 성전에 참전하며, 견습으로 받아들인 플레이어 중에는 히사기도 포함되어 있다는 뜻이었다.
“저는 제집처럼 편안한데 말입니다.”
하르콘 밑에서 훈련은 훈련대로 받고, 마탑에선 마법까지 향상시키고 있다니. 반칙이잖아, 이건! 부럽다. 그게 바로 남태민이 이를 악물고 히사기를 무시한 이유였다.
“뭐, 처음이라면 눈이 부실 수도 있습니다. 확실히 아름다우니까요, 크리스탈 홀의 전경은. 그렇지 않습니까, 레오니 씨?”
쪽팔려서 떨어져서 앉았더니 왜 아는 척하고 지랄?
레오니는 엮이기 싫어서 입을 다물었지만.
이번엔 남태민이 고개를 돌려왔다.
“역시, 너도 나랑 같은 생각 하고 있었구나?”
넌 또 뭔데?
“뱀눈, 진짜 재수 없지 않냐?”
정말로 안 맞는다, 거대 연합.
레오니가 고개를 절레절레 털어내자 키치는 슬쩍 말을 걸었다.
지은 죄가 많은 마탑에서 가만히 눈치만 보고 있자니 지루했거든.
“셋은 사이가 좋네요, 친구 사이?”
“……?”
찌릿─
‘아, 괜히 건드렸다.’
삐죽거리는 머리부터 알아봤어야 하는데.
고슴도치가 따로 없잖아?
까칠한 반응에 키치는 본전도 건지지 못했구나, 탄식을 삼켰다.
‘……아니다, 그래도 같은 편이니까.’
그러나 곧 레오니가 눈가에 힘을 풀었다.
그래, 죄는 저 두 덩어리한테 있는 거니까.
레오니가 성질을 죽이고 대꾸했다.
“그냥 비즈니스 관계예요.”
“그럼, 나랑 똑같네!”
“그림자 용병단, 키치 단장님이시죠?”
“맞는데, 단장님이 뭐야. 그냥 편하게 불러요.”
“그럴까?”
……아니, 그렇다고 바로 반말을 깐다고?
‘누가 봐도 내 쪽이 연상인데?!’
키치는 그제야 레오니의 걸걸한 입버릇을 떠올렸다.
괜히 편하게 부르라고 했나.
살짝 후회됐지만, 무를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리고 그보다…….
“원탁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수석 마법사, 마르셀로의 말에 정적이 찾아왔다.
더 이상 재잘거리기엔 눈치가 보였거든.
키치는 크리스탈 홀의 분위기를 살폈다.
‘뭐가 이렇게 빡세?’
마탑.
규율이 엄격하다는 건 소문으로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런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많은 인원이 모였는데.
숨소리말고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고?
‘무서울 정도네, 진짜.’
이 또한 호열.
정확히는 호열의 격식이 가져온 변화라는 걸.
키치는 알아차릴 수 없는 게 당연했다.
‘……괜히 마탑이 아니라는 건가?’
키치가 새삼 마탑의 위엄에 감탄하던 순간.
마르셀로가 본론을 꺼냈다.
“마왕 쟁탈전에서 우리는 승리했습니다. 단순한 승리를 넘어서 계획했던 목적을 달성. 상위 마왕을 처치하는 데에 성공했습니다.”
담담한 승리 선언이 떨어지자 침묵은 깨져버렸다.
계획에 관해 알고 있던 건 극소수에 불과했으니까.
“잠깐. 상위 마왕이라고?”
“마왕 출현 메시지, 그게 진짜였던 거야?”
“역시 착각한 게 아니었어!”
“……근데 마왕을 벌써 처치했다고?”
웅성웅성─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되지 않았다.
출현 메시지는 분명, 균열이 클리어되고 무너지는 찰나에 떠올랐단 말이다.
대체 누가, 그런 찰나에, 적정 레벨 800~900짜리 균열에 출현 메시지를 띄우는 상위 마왕을 쓰러트릴 수 있단 말인가?
의문에 대답하듯 마르셀로가 말했다.
“계획대로 이호열 수석께서 해내신 겁니다.”
“……!!!”
……이호열이라고?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가 혼자 [20번째 왕좌] 균열에 진입했다는 것까지는.
업데이트 내역을 통해 확인했단 말이다.
그 균열에 어떤 몬스터가 등장했는지도.
“각각 900레벨이 둘, 920레벨이 하나였어. 그걸 혼자서 처치한 것도 모자라서……. 균열이 클리어되는 순간에 상위 마왕까지 쓰러트렸다는 거야?”
말도 안 돼.
웅성거리는 마탑의 플레이어들.
그 반응에 지브릴은 코웃음을 쳤다.
“뭐가 말이 안 된단 건지.”
“지브릴 양, 들리겠어요!”
“들으면 어쩔 건데요. 저는 숙련 마법사거든요? 다들 이렇게 믿음이 부족해서야.”
발 없는 말이 날개를 달고 활강한 덕분인가?
플레이어를 제외한 마탑의 마법사들에게 동요는 없었다.
그러나 소란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런데, 어쩐 일로. 이 수석님께서 보이시질 않네요?”
“?”
지브릴의 말에 클레가 크리스탈 홀을 둘러봤다.
마르셀로 수석께서 단상에 오르실 때부터 짐작은 했지만.
정말 호열이 보이지 않았다.
회의에 불참하실 분이 아니신데……?
클레가 고개를 갸웃거리던 순간이었다.
“그리고 한 가지 소식이 있습니다.”
마르셀로가 말을 이었다.
그건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말이었다.
“또한 당분간, 이호열 수석께서는 모든 수석의 업무에서 물러나 휴식기를 가지실 예정이십니다. 출탑을 비롯해 이호열 수석께서 담당하시던 모든 업무는 이제부터 제가 대행하겠습니다.”
뭐라고?
“천하의 이호열이 휴식?”
“……호열 씨가?”
“!!!”
휴식을 가진다니.
분명 심상치 않은 일이었으니까.
.
.
.
마탑의 최상층.
츠릉─
유그위드와 대화를 나누고 나온 이 순간에도.
내 심장은 쇳소리를 내며 삐걱거리고 있었다.
덕분에 빌어먹게도 실감이 난다.
유그위드의 말을 한 줄 요약하자면 간단했다.
나는 이 초월자의 힘을, 소화해 내지 못하면 죽는다.
한 줄을, 한 단어로 줄이자면 주화입마(走火入魔).
그러므로 나는 결단을 넘어선, 특단을 내렸다.
스스슥─
양피지에 깃털펜을 휘갈겼다.
『휴직계
신청자 : 이호열
소속 : 수뇌부
직위 : 수석…….』
“때론 스스로를 돌아볼 시간도 필요한 법이지.”
……다 좋은데. 사유에 혼잣말까진 적지 말아줄래, 그랑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