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5화. 우리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3)
찬란하게 부서져 가는 균열의 풍경.
마탑의 수석 마법사.
마르셀로에겐 갈망하던 광경이다.
균열이야말로 기이의 공간.
연구의 대상이자 아르카나 대륙으로 돌아갈 수 있는 유일한 단서나 다름없었으니까.
“…….”
그러나 마르셀로의 머릿속에 연구는 없었다.
떠오르는 것은 오로지 호열의 계획뿐.
마르셀로가 작게 중얼거렸다.
“진정으로 가능하단 말씀이십니까?”
상위 마왕의 현현.
마르셀로는 그들의 강함을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
그러나 비교 대상을 통해 가늠해 볼 수는 있었다.
비교 대상은 반신(半神), 카림제바, 원로 마법사이자 악마 숭배자.
마법사란 족속?
자신 또한 마법사이기에 잘 알고 있다.
마법사는 대체로 본성이 오만하다.
길게 설명할 것도 없겠지.
그동안 마탑의 행보를 보면 알 수 있었으니.
진리, 의외의 것은 모조리 업신여겨 왔던 자신들이 아니던가.
그런 면에서 카림제바는 악명이 자자했다.
마탑에 입성하기 전, 화룡(火龍)이라 불리던 그는 온갖 범죄에 연루되어 있었으니까.
마탑에 입성한 이유도 마탑의 그늘에서 제국과 세간의 추적을 피하기 위함이란 소리가 소문으로 나돌 정도.
그 정도로 오만했던 카림제바가 자신의 본성을 억눌러 가면서까지 추진했던 게 상위 마왕의 소환이었다.
‘그러나 우리에겐 경이 있었다.’
카림제바와 두 악마 숭배자의 계획은 호열 덕분에 첫걸음에서부터 삐걱거렸었다. 그럼에도 카림제바는 억지로 상위 마왕의 부활을 추진했다.
‘누구보다 스스로 잘 알고 있었겠지.’
마탑을 적으로 돌린 이상.
설령, 자신이라고 하더라도 목숨을 부지하기는 어려울 거라는 걸.
그럼에도 카림제바는 실행했다.
자신의 목숨을 걸고 상위 마왕의 소환을 추진했다는 것이다.
‘마법사가 자신의 목숨을 걸었다…….’
나 또한 그와 같은 마법사이기 때문일까?
마르셀로는 알 수 있었다.
아니, 적어도 마탑의 마법사라면.
다들 짐작할 수 있겠지.
그렇다.
카림제바는 상위 마왕이 자신이 추구하는 진리를 실현할 수 있다고 믿은 거겠지.
마르셀로는 말을 이었다.
어리석게도.
“당신은 틀렸습니다.”
자신을 비롯한 마탑은 깨달았다.
주변을 업신여겨서 도달하는 진리에 의미는 없다는 것을.
그렇기에.
그동안의 행보를 속죄하기 위해 성전에 뛰어들지 않았던가?
허나, 우려는 그와 별개였다.
‘당신은 그들에게서 무엇을 본 것입니까?’
마르셀로는 호열과 함께하며 악마를, 마왕을 목격해 왔다.
지금만 하더라도 새롭게 마왕의 왕좌를 차지하기 위해 달려든 악마들과 맞서 싸우지 않았던가?
허나, 그들에게서 진리는커녕 말을 섞을 가치조차 느끼지 못했다.
화룡, 그의 성격이라면 자신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을 터.
분명, 목격한 것이리라.
상위 마왕에게서.
다른 악마들과는 다른 특별한 무언가를.
그러니까 마르셀로는 안도할 수 있었다.
“……말 그대로 계획이셨군요.”
만약, 자신이 호열과 함께 균열에 진입했다면.
그래서 상위 마왕을 목격했다면.
나는 머리를 굴리느라 제 역할을 해내지 못했겠지.
‘결점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노력했거늘.’
아마, 호열 경께서는 제 부족함을 꿰뚫어 보신 거겠지요?
마르셀로는 애써 미소 지었다.
뒤바뀌어 가는 시야 속에서 말을 이었다.
“현실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부디 무사하시기를.
.
.
.
네 번째 왕좌의 마왕, 가미긴.
목격하는 순간, 솔직하게 슬퍼졌다.
흑역사도, 세상도 모자라서, 이젠 균열마저도 내게 너무 가혹하구나 싶었거든.
‘쉬운 게 없구나, 진짜.’
원로 마법사, 카림제바가 마탑을 배신하게 한 상위 마왕의 능력이다. 그런 상위 마왕 중에서도 무려 서열 4위, 가미긴을 눈앞에 뒀거늘.
‘주어진 시간이 찰나뿐이라니.’
클리어된 균열은 각각 현실로, 아르카나 대륙으로 나뉜다.
가미긴의 출현과 상관없이 현실에 있던 나는.
균열 밖 현실로 튕겨나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아까부터 타이밍을 노리고 있었다.
[마왕, 가미긴을 ‘의식’으로 초대합니다.]
구마의식 발동 타이밍을……!
구마의식이 뭐, 대단한 스킬도 아니고 시간을 느리게 하거나 거스를 순 없다.
하지만 시간 감각을 속일 수는 있지.
의식 속은 정신력이 모든 걸 지배하는 공간이니까.
스릉─
나는 검을 치켜들었다.
급하다고 흐트러지면 격식이 아닌 법이다.
절도있게 굽혀지는 팔의 각도.
유려하게 움직이는 손목.
그럼에도 모든 풍경이 찰나의 상태, 그대로다.
진짜 듬직한 아군이 있으면 뭐하냐고!
구마의식.
의식 속에는 오직 악마 사냥꾼과 초대당한 악마만 존재할 수 있었으니까.
만약, 누군가 곁에 있었다면 눈 깜짝할 사이에 모든 게 끝났다고 착각할 수밖에 없겠지.
당연히 협력할 틈도 없다고 느꼈을 테고.
그러나.
철컥!
지금,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말했다시피 의식 속에서 존재할 수 있는 건 오직 악마 혹은 악마 사냥꾼뿐. 내 곁에는 선배님, 악크샨의 악마 사냥꾼들이 있었으니까.
나는 가미긴을 바라봤다.
괜히 상위 마왕이 아니군.
의식에 초대됐어도 동요는 보이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감정변화를 알아차릴 수 없었다.
크다, 수준을 넘어서 거대하다.
네 개의 다리가 각각 퀴른베르크 기계탑 크기라고 하면 표현이 가능할까. 말 대가리는 무너지는 균열과 겹쳐져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군.
하지만 무엇보다.
“□□□.”
어째서인가, 말이 통하지 않았다.
귀청이 떨어질 정도로 거대한 울림이었거늘.
나는 조금도 이해할 수 없었다.
‘뭔데.’
플레이어는 자신들끼리는 물론, 아르카나인과도 어렵지 않게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
심지어는 아르카나 대륙 언어로 쓰인 마법 서적까지 읽을 수 있었으니까.
‘갑자기?’
말을 알아들을 수 없을 줄이야.
당연히 이유를 알 순 없었다.
물론, 이유 따위는 중요하지 않겠지.
슈슈슉─!
악마와 불필요한 대화는 하지 않는 법이니까.
역시, 선배님이시라는 건가.
문답무용.
악마 사냥꾼들은 가미긴을 향해 석궁 볼트를 쏟아냈다. 보잘것없어 보여도 900레벨에 육박하는 네임드 몬스터를 일격에 처치한 공격이다.
‘……!’
거대한 표적.
빗나가지 않고 확실하게 적중했단 말이다.
그러나 가미긴에게 변화는 없었다.
젠장, 내 아르카나 상식으로는 따라가기 벅찬 광경이다.
대체 레벨이 몇이길래.
900레벨 네임드 몬스터를 단번에 보낸 공격이 수십 발씩 쏟아져도 멀쩡할 수 있다는 거냐.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카림제바.’
순간, 녀석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나를 풀어준다면 모든 것을 말해주겠네. 성전에 대해서도 진정한 진리에 대해서도! 악마 사냥꾼인 그대라면 내 뜻을 분명 헤아릴 수 있을 거야. 화룡, 카림제바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겠네!!”
카림제바는 진정한 진리에 다다르기 위해서 상위 마왕을 부활시키고자 했었지…….
그런가, 슬슬 이해가 되기 시작한다.
한 줄 요약하자면 차원이 다르다는 것이다.
반신(半神)으로 불리던 원로 마법사, 카림제바가 추구하던 ‘진정한 진리’. 그 진리에 도달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바로 ‘상위 마왕’이라는 것이다.
그걸 다르게 말하자면…….
‘상위 마왕은, 신(神)에 가까운 존재라는 건가.’
다시금 고막에 울리는 거대한 소리.
“□□□ □, □□□ □□□□.”
그렇게 생각하니까.
말이 통하지 않는 것도 대충 이해가 되는데.
말이 통하지 않을 정도로, 격이 다르다는 거겠지.
젠장, 진심으로 마음이 꺾이려고 한다.
거악이라는 산을 넘었다고 생각했는데, 그 거악은 갓 태어난 어린 악마에 불과했단다.
마왕이라는 산을 넘어섰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상 최약체나 다름없던 마왕들이었단다.
그럼에도, 산을 넘기 위해서 발버둥을 쳐왔더니.
이젠 산을 넘어서, 신에 닿아야 한단다.
진심으로 의문이 든다.
정말로, 플레이어에 불과한 내가.
저런 신격(神格)에 도달할 수 있단 말인가?
다그닥─
말발굽이 움직일 때마다 균열이 진동한다.
하늘이 놀라고 땅이 흔들린다는 게 이런 것인가.
몸으로 깨닫게 된다.
정말로 나, 이호열의 대가리로는.
정신력으로는 버텨낼 수 없을 정도의 광경이다.
그러나.
『그 어떤 악마의 유혹과 기만, 시련도 그랑펠의 고고한 긍지에는 흠집조차 낼 수 없다.』
그랑펠은 굴하지 않았다.
항상.
평소와 같았으니.
아무리 발버둥 쳐봤자 의식의 주도권은 내게 있다는 뜻이다.
그 순간, 들려오는 소리.
스릉─
물론, 잊지 않고 있었다.
내가, 그랑펠이 과거를 숨겼듯.
나 또한 저들의 사연까지는 알 수 없다만.
악크샨의 악마 사냥꾼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죽음조차 꺾을 수 없었던 긍지다.”
또각─
흔들리는 땅 위에서 나는 몸을 바로 세웠다.
“고작 악마 따위가.”
검을 치켜들었다.
“쥐고 흔들려 들 수 있는 게 아니란 말이다.”
그런 나의 선언은 신호탄이 되었다.
지옥불에 휩싸인 악마 사냥꾼들이 가미긴을 향해 쇄도했다.
‘빠르다.’
인간의 한계를 초월했다고 느껴질 만큼.
뒤따라잡기 위해서는.
나 또한 엘프의 몸놀림을 따라 할 수밖에 없게끔.
새삼스럽게 느끼는 거지만, 역시나 단순하다.
비장의 기술은커녕 정직할 정도로 올곧다.
그러나 우습지는 않았다.
때론 단순할 정도로 올곧고 굳세기에, 꺾이지 않는 것도 있는 법이니까.
그렇다, 악크샨의 악마 사냥꾼은 꺾이지 않았다.
꺾이지 않는 걸 넘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자신의 몸을 휘감은 지옥불조차 공격 수단으로 사용하겠다는 건가. 악마 사냥꾼 하나가 가미긴에 바짝 달라붙었다.
“□□□.”
다그닥─
신격에 가까운 상위 마왕님이시라고 해도, 악마는 악마구나?
지옥불을 참아낼 순 없는 거겠지.
나만큼이나.
아니, 나보다도 악마를 잘 알고 있는 악크샨의 악마 사냥꾼 선배님들이시다.
말하지 않아도 낌새를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스릉─
그들은 석궁 대신 양손에 날붙이를 쥐었다.
누군가는 양손에 단검을.
누군가는 검 대신 석궁 볼트를 쥐었다.
‘정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구나.’
마찬가지로 지옥불을 가미긴에게 옮겨 붙이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나도 보고만 있을 순 없겠지.
혹시라도 다리를 자르고 도망치려는 생각 같은 건 하지 마라, 가미긴.
콰드드득!
허공에 떠오르는 암석.
나는 무너진 지반에 탐색, 간섭, 발현해 계단을 수놓았다.
하늘에 닿을 듯한 계단이라.
어쩌면 수만 개로도 부족할지 모르겠지.
일반적인 마법사는 마력 탈진을 호소했을지도 모르겠다만, 나는 아니거든.
‘이런 게 주특기라서 말이야.’
탐색을 생략할 정도의 광물 관련 지식.
그것도 모자라 비약초 도핑.
[천적관계]에 [첫 세계수의 축복]까지 발동 중이었으니까.
콰드드득!
수만 개의 계단을 발현해도 마력에는 기별도 가지 않는다는 뜻이다.
탓!
악마를 사냥하기 위해 뭉친 악마 사냥꾼들 사이에.
대화는 물론, 눈빛 교환도 필요하지 않았다.
타다닥!
이내, 계단을 타고 쇄도하는 지옥의 악마 사냥꾼들.
그 순간, 가미긴의 몸에서 거대한 기운이 일렁거렸다.
지각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 □□ □□□.”
갈라졌던 땅이 서로 엉겨 붙기 시작했다.
직감할 수 있었다.
가미긴, 목적을 달성한 녀석이.
열었던 [지옥의 문]을 다시 닫으려는 것이었다.
‘……지옥의 문이 닫히면.’
지옥의 불길도 사그라질 터.
──────
악크샨의 유지 : 지옥의 불에서 악크샨 악마 사냥꾼을 불러낸다.
──────
악마 사냥꾼들도 다시 지옥으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할 수만 있다면 [지옥의 문]에 마법을 발현하고 싶었거늘. 나는 [지옥의 문], 그 실체를 목격조차 하지 못했으니까. 탐색조차 불가능했다.
“실로 악마답구나.”
부활이라는 자신의 목적을 이뤘으니.
굳이 천적과 맞설 이유는 없다는 거냐.
비겁하게 아르카나 대륙으로 내빼려는 거냐.
나는 고개를 들어 가미긴을 바라봤다.
“왕을 자칭하는 어리석은 악마여.”
그랑펠의 심정에 나도 모르게 공감하고 있었거든.
“목숨이 아까운 것인가?”
아르카나 대륙에서 그렇게 많은 생명을 짓밟아 놓고서는.
네 목숨이 아까운지는 안다는 말이잖아.
그것도 모자라 목숨을 잃고도, 증오하는 악마가 되어 지옥에 떨어져서도, 긍지를 잃지 않은 채 악마를 사냥해 온 악크샨이 여기에 있다.
“우리에게서 도망치는 것인가?”
그들의 처절한 긍지를 외면하지 마라.
“왕을 자칭한다면 오롯이 맞서란 말이다.”
내가 읊조리는 순간.
다그닥!
가미긴의 말발굽이 뒷걸음질 쳤다.
정말, 내빼려는 거구나.
악크샨이 무서워서 피하는 건지.
더러울 정도로 끈질겨서 피하는 건지.
나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그건 내가 용납하지 않겠다.”
이대로 가미긴을 놓친다면.
녀석은 아르카나 대륙에서 날뛰게 된다.
이미 만신창이가 된 아르카나 대륙이다.
게다가 나는 입으로 내뱉지 않았던가?
그들의 할 일은 우리들에게 긍지를 전해온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그러니까 나는 뱉은 말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너를 놓칠 수 없다는 말이다.
끌어올리는 것은 마력.
그것도 방대한 마력. 물론, 내 마력으론 어떠한 마법을 발현해도 녀석에게 생채기조차 낼 수 없겠지. 하지만 상관없다. 너를 불태우는 건 내가 아니니까.
말 그대로.
나는 단지 지옥의 문이 닫히려는 이 순간에.
가미긴을 ‘지옥’에 처박을 생각이었으니까.
‘너는 실수한 거야.’
지옥불이 아무리 뜨겁더라도 참았어야지.
약점이 아닌 것처럼 필사적으로 버텨냈어야지.
천적이 어째서 천적인데.
약점을 끝까지 놓지 않으니까 천적인 법이거든.
탐색.
나는 가미긴의 거대한 몸을 짓눌렀다.
일순간 빠져나가는 거대한 마력.
그러나 나는 탐색을 멈추지 않았다.
『마법』만으로 역부족이라면.
간섭 과정에 [중력]을 더해주마.
이것이 바로 [『기이』]다.
쿵─!
순간, 가미긴의 몸이 무언가로 내려친 듯 주저앉았다.
“□□……!!”
우드득.
가미긴, 녀석의 다리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그리고.
“엎드린 자세야말로 네게 어울리는 모습이다.”
넷.
쿠구구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