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4화. 우리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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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크샨의 유지 : 지옥의 불에서 악크샨 악마 사냥꾼을 불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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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크샨.
정말이지, 다시 생각해 봐도 어처구니가 없다.
죽어서도 은퇴할 수 없다니.
뭐, 이딴 클래스가 다 있냐 진짜?
그러나 비로소 이해가 된다.
지옥의 문이 활짝 열렸거늘.
악마들이 지옥에서 뛰쳐나올 수 없던 이유가.
철컥─
천적이 지옥의 문을 지키고 있었으니까.
지옥의 불이 점차 사람의 형체로 변해갔다.
이글거리는 불꽃 탓에 구체적인 얼굴 생김새까지 알아볼 수는 없었지만, 확실하다.
양손에 쥔 검과 석궁.
저것보다 선명한 악마 사냥꾼의 상징이 또 없거든.
이내,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악크샨과의 관계도, 영향력이 효과에 적용됩니다.]
[시무아르드 가문의 의뢰] 퀘스트를 성공한 순간, 떠올랐던 보상.
악크샨과의 관계도, 영향력 상승.
역시, 버그 같은 게 아니었구나.
다 쓸모가 있다는 거였어.
그땐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이해가 되지 않았었다.
악크샨은 절멸했는데, 뭔 소리를 하는 거냐고.
오히려 역정을 내기도 했었지.
‘하긴 악크샨이 지옥에 있을 거라고는…….’
AAU의 정보가 없었다면 발상조차 하지 못했을 거다.
[악크샨 악마 사냥꾼이 당신의 부름에 응답합니다.]
악크샨에서의 내 영향력이야, 뻔하지.
악크샨이 아르카나 대륙에 존재하던 시절, 나는 쪼렙이었으니까.
한 명이라도 응답했다는 거에 감사해야 할 수준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말이다.
악마 사냥꾼들이 제멋대로인 것쯤이야.
누구 때문에, 누구보다 내가 잘 알고 있거든.
[악크샨 악마 사냥꾼이 당신의 부름에 응답합니다.]
[악크샨 악마 사냥꾼이 당신의 부름에 응답합니다.]
[악크샨 악마 사냥꾼이 당신의 부름에 응답합니다.]…….
정말 제멋대로다, 다들.
지옥의 문이 열린 지금.
지옥의 악마 사냥꾼들도 균열의 광경을 지켜보고 있을 터.
그 말인즉, 내가 아는 악마 사냥꾼들이라면.
관계도나 영향력을 떠나서.
눈앞에 악마를 절대 두고 보고 있을 수 없다는 거겠지.
철컥!
철컥!
철컥!
장전 소리가 끊이질 않는다.
어느샌가 내 곁엔 수십의 악마 사냥꾼이 서 있었다.
“!!!”
시종일관 오만하던 뱀.
그리고 개와 새의 기세까지 순식간에 누그러들었다.
그럴 수밖에 없겠지.
천적이 어째서 천적인지는 누구보다 너희가 잘 알고 있을 테니.
나는 입을 열었다.
“그대들의 노고를 알고 있다.”
메시지가 떠오르기 전까지.
짐작은 했어도 확신하지 못했거늘.
역시나 뻔뻔하구나, 그랑펠.
그러나 이번만큼은 나도 말꼬리를 잡지 않겠다.
악마 사냥꾼.
한 명, 한 명에게 어떤 사연이 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짐작할 수는 있다.
그 말도 안 되는 악크샨의 훈련을 버틴 데에는.
각자 사연과 배경이 있다는 거겠지.
『가문의 유일한 생존자인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 이하 그랑펠은 그 악마에게 복수하기 위해 악마 사냥꾼의 길을 걷게 됐다.』
그랑펠처럼.
그러니까 진지할 수밖에 없다.
설령 악마를 사냥하다가 악마가 되었다고 한들.
그로 인해 동료의 손에 죽어 지옥에 떨어졌다고 한들.
이들의 가슴 속 긍지는 꺾이지 않았다는 것이었으니까.
드레드센 마을, 이름 모를 청년이 그랬던 것처럼.
“그 고독을 나 또한 알고 있다.”
그리고 긍지는 유지가 되어 악크샨 최후의 생존자, 나에게 이어졌다. 유지라는 거, 절대 가볍지 않겠지. 하지만 내가 원래부터 품고 있는 긍지가 워낙 무거워서 말이야.
가라앉지 않기 위해서.
꾸준하게 발버둥 쳐왔다는 것이다.
철컥─
지옥의 악마 사냥꾼들 사이에서.
나 또한 검과 석궁을 꺼내 들었다.
왜, 입으로 분명히 말했잖아?
-“마왕 쟁탈전은 우리에게 그저 양분이 될 뿐이다.”
플레이어의 수준이 성전에서 활약할 수 없을 정도로 부족하다는 건 잘 알고 있다.
[천적관계]나 [첫 세계수의 축복] 효과가 없다면, 나도 그들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도 잘 안다.
허나, 부족함을 깨달았다면 나아가면 되는 것이다.
마왕 쟁탈전뿐만 아니다.
성전의 모든 것을 양분으로 삼아 발전하면 되는 것이다.
아니, 발전해야만 한다.
-“우리가 모험가들의 방패가 되겠네.”
아르카나, 그들의 희생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그러니까 이제부터는 나도 집중해야겠지.
진짜 악마 사냥꾼의 전투를 목격하는 건 처음이었으니까.
무엇 하나 놓치지 않아야 한다.
‘어떻게 성전에서 그런 활약을 펼쳤던 건지.’
악크샨, 악마 사냥꾼의 비기를 목격하고야 말겠노라.
왜, 보고 따라 하는 거 하나만큼은 그래도 자신이 있으니까.
과연, 집중하길 잘했다.
악마 사냥꾼이 괜히 악마 사냥꾼이겠냐고.
악마를 보면 참지 못하니까 악마 사냥꾼이지.
슈슉!
순식간에 뻗어져 가는 석궁 볼트.
[아홉 머리 지옥견 : Lv.900]
[대악마를 삼킨 아나콘다 : Lv.920]
[마계 전설종, 비명조 : Lv.900]
‘시작은 원거리 견제인가.’
내가 악마 사냥꾼들을 따라 석궁을 발사하려던 순간이었다.
쿵!
소리가 들려왔다.
쿵! 쿵!
그것도 세 번씩이나.
잠깐만……. 내가 지금 뭘 보고 있는 거지?
“그런가.”
그런가는 뭐가 태연하게 그런가냐, 그랑펠.
900레벨짜리 진명의 악마들이 고작 석궁에 쓰러지고 있잖아?
그냥 휘청거리는 것도 아니었다.
정말, 치명상을 입은 것처럼 꼬꾸라지고 있었다!
“……비로소 왕좌에 가까워졌거늘.”
그러고는 유언과 함께 희번뜩한 눈을 감아버렸다.
잠깐만.
악마 사냥꾼의 전투는, 비기는 어디 갔는데?
뭘 보여줘야 따라 할 거 아니야.
고작 석궁 몇 발로 저런 괴물들을 쓰러트렸다고?
“악크샨의 긍지는 조금도 무뎌지지 않았군.”
태연하게 지껄이는 주둥이와 무관하게 나는 머리를 굴렸다.
석궁 볼트 몇 발로 900레벨 몬스터를 쓰러트렸다.
그랑펠의 눈이 있었기에 알아볼 수 있었다.
‘단순하게 방아쇠를 당겼을 뿐.’
그 과정에서 스킬이나 특별한 기술을 사용한 것도 아니다.
방금 그건 평범한 사격에 불과했다.
속된 말로 ‘평타’라는 것.
평타로 900레벨 네임드 몬스터를 사냥했다는 것이었다.
‘……순수하게 스탯으로 찍어눌렀다는 거잖아.’
그게 가능하다고?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잖아…….
라고 생각하던 순간.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는 단어가 있었다.
클래스 퀘스트.
─나약해진 육체를 단련하라. (반복)
말 그대로 체력 단련 퀘스트를 무한 반복한다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잠깐. 넘어가지 마라, 이호열……! 당장의 일과를 생각해 보란 말이다.
‘지금만 하더라도 훈련량이 감당이 안 되잖아!’
반복하면 반복할수록.
스탯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퀘스트 목표가 증가할 거란 게 훤히 보였다.
악마 사냥꾼, 하여튼 이 빌어먹을 노다가 직업!
하지만 나의 절규가 무색하게도.
나는 입을 열었다.
“과연, 그대들은 여전히 오롯이 악크샨이다.”
……악크샨의 비기를 흡수해서 조금 쉽게 가나 싶었거늘.
결국, 나는 여전히 오롯이 고통을 받게 생겼구나.
이내, 시야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20번째 왕좌 균열을 클리어하셨습니다.]
쿠구궁!!
그와 동시에 균열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평소 같았으면 오늘도 어찌어찌 가라앉지 않았구나, 안도했었겠지.
하지만 오늘은 아니다.
그야 아직 ‘계획’이 끝나지 않았으니까.
무너져 가는 균열 속에서.
나는 꼿꼿하게 허리를 세웠다.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
.
.
[45번째 왕좌 균열을 클리어하셨습니다.]
[57번째 왕좌 균열을 클리어하셨습니다.]
[24번째 왕좌 균열을 클리어하셨습니다.]…….
떠오르는 클리어 메시지.
플레이어들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게 바로 아르카나인들의 전력이란 말인가?
경외의 눈빛 속에서 하르콘이 입을 열었다.
“보았는가, 모험가들이여. 그대들이 믿었든, 믿지 않았든. 우리는 약속을 지켜냈다.”
단 한 명의 사상자도 발생하지 않게 하겠다.
우리의 고향, 아르카나 대륙을 쑥대밭으로 만든 악마에게.
더 이상은 그 무엇하나도 빼앗기지 않겠다.
아르카나인들은 긍지를 걸고 다짐을 지켜냈다.
하르콘이 말을 이었다.
“그러니 믿어주겠나, 모험가들이여? 그대들에게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 그대들은 우리들, 그 이상으로 강해질 수 있다.”
플레이어고, 스탯이고, 스킬이고.
하르콘에게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개념들이었다.
그러나 사기진작을 위한 빈말이 아니었다.
왜, 대격변 이전에도 모험가들을 지켜보지 않았던가?
하르콘이 미소를 지었다.
“과거를 잊지 말게나.”
“……?”
“아르카나에서 그대들의 존재는 기적, 그 자체였다는 걸.”
“!!!”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
플레이어들은 당연하게도 부활할 수 있었다.
사망 페널티가 존재하긴 했다만, 아르카나인들이 시스템을 이해할 순 없었으니까. 아르카나인들에게 플레이어들은 존재 자체가 기적이나 다름없었다.
하르콘이 말을 이었다.
“물론, 나는 아직도 그 기적을 믿고 있다네.”
쿠구구궁!!
무너져 가는 균열.
하르콘이 속으로 되뇌었다.
‘……아니, 믿기지 않더라도 믿을 수밖에 없다네.’
황금 궁전에서의 회의가 떠올랐다.
-“못해도 수백만의 악마가 몰려들겠군.”
-“그대들은 생각해 보았는가?”
-“무엇을 말인가, 호열 경?”
-“수백만 악마 중 왕좌에 오르는 것은 고작 몇십에 불과하다. 왕좌에 오르지 못한 이들은 그 과정에서 모조리 전사한다는 뜻이다.”
호열이 던진 건 조금도 생각하지 못한 질문이었다.
-“그렇다면 수백만 악마의 시체는 어떻게 되는가.”
-“……시체?”
-“기억하고 있는가, 하르콘. 그리고 거대 연합이여.”
거대 연합.
남태민, 레오니, 히사기.
세 사람이 언급되는 순간.
하르콘은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었다.
프로스트에서의 기억을.
모험가들의 세계에 프로스트가 떠오른 그날, 프로스트는 백성의 시신과 피로 가득했었다. 시신과 피야말로 마왕의 부활을 위한 제물이었으니까.
-“……호열 경, 설마 그 말은?”
뒤늦게 마왕 쟁탈전의 이면(異面)을 깨달은 자신에게 호열은 말했었다.
-“마왕 쟁탈전은 새로운 마왕을 선출하는 데에서 끝나지 않겠지. 왕좌에 앉아 한껏 오만해진 새로운 마왕들에게 서열이라는 규율을 각인시켜야 할 테니까.”
그래, 그러기 위해서는.
-“상위 마왕, 그들이 모습을 드러낼 수밖에 없을 터.”
상위 마왕.
너무나도 방대한 힘을 가졌기에.
단순히 모습을 드러내는 데에만도 막대한 제물을 필요로 하는 존재들.
그러나 마왕 쟁탈전에 제물은 충분했다.
히사기가 확인하듯 말했었다.
-“프로스트에서 마왕 소환 의식이 방해를 받자, 데카라비아는 자신의 수하들을 제물로 삼아 부활했었습니다. 제물이 꼭 인간일 필요는 없다는 거겠죠. 그렇다는 건…….”
호열은 결론을 내렸다.
-“설령 우리가 모든 악마를 사냥하고, 새로운 마왕의 즉위를 막아낸다고 하더라도. 상위 마왕이 모습을 드러낸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는 것이네.”
언제나처럼 말을 이었다.
-“그러나, 악마를 사냥한다는 목적에도 변함은 없겠지.”
뒤늦게 나타날 상위 마왕까지 사냥하겠노라.
하지만 원대한 목표와 반대로 계획은 단순하며 명료했다.
호열의 말 한마디로 설명을 대신할 수 있을 만큼.
-“그렇다. 내가 상위 마왕을 사냥하겠다.”
그것이 바로 호열이 혼자서 균열에 진입한 이유였다.
“……무너져가는 균열 속에서 어떻게 마왕을, 그것도 상위 마왕을 사냥하겠다는 것인가? 경, 나로서는 아직도 이해할 수가 없다네.”
그러나 단지 믿을 뿐이었다.
모험가, 이호열.
그가 언제나처럼 기적을 이뤄내기를.
하르콘이 간절히 바라던 순간.
무너지는 균열의 하늘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웅성거리는 플레이어들.
“……저게 뭐야?”
다그닥!
이내, 섬뜩할 정도로 거대한 말발굽 소리가 울렸다.
플레이어들의 시야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마왕, □□□이 출현합니다.]
……잠깐만, 출현 메시지라고?
.
.
.
균열이 클리어되면 플레이어는 현실로 복귀한다.
그건 거스를 수 없는 아르카나의 시스템이다.
하지만 즉시 현실로 쫓겨나는 건 아니다.
왜, 지금처럼 균열이 완전히 무너질 때까지.
약간의 시간적 여유가 주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처럼 지켜볼 수 있다는 거겠지.
허공에 떠오르는 무수한 악마의 시체들.
균열이 무너지면서, 각 균열 사이의 거리도 무너졌다는 건가.
사방에서 시체가 모여들기 시작한다.
그나저나, 겁나게 많잖아.
‘뭐, 이상한 일도 아닌가.’
다른 것도 아니고 상위 마왕을 위한 제물들이었으니까.
이내, 거대한 그림자가 균열에 드리웠다.
그런데, 그림자의 형체가 어째 익숙했다.
말(馬)이다.
카림제바가 불러냈던 [깨진 차원의 틈] 균열.
그 균열의 배치와 똑같이 생긴 말의 형상이었다.
“끈질긴 것인가. 그게 아니라면.”
그때부터 포기하지 않았던 거구나, 너?
“짐승이기에 학습 능력이 떨어지는 것인가?”
나의 말에 대답하듯.
다그닥!
말발굽 소리가 울린다.
눈앞에 메시지가 떠오른다.
[마왕, 가미긴이 출현합니다.]
마법 서적도 달달 외우는 그랑펠의 두뇌가 있는데.
일흔 남짓한 마왕들의 서열을 외우지 못할 리가 있겠냐.
가미긴, 나는 그 이름 석 자를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마왕 서열 4위.
가미긴이 극최상위 마왕이라는 것까지 말이야.
농담 아니고, 평상시 같았으면 바로 현실로 튀었을 거다.
‘적정 레벨 천짜리 균열에서 출현 메시지면…….’
대체 얼마나 강하다는 건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너희가 착각해 준 덕분에.
오만하게도 지옥의 문을 열어준 덕분에.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랑펠과 마찬가지로.
상위 마왕 앞에서 위축되기는커녕.
고오오오─
오히려 긍지를 불사르는 지옥의 악마 사냥꾼들이 곁에 있었다. 그 불리했던 성전에서 탐욕을 자결하게 하고, 열 명의 마왕을 지옥에 떨어트린 악마 사냥꾼들이 나와 함께였다.
그러니까 모든 것은 나의 계획대로다.
나는 인벤토리에서 악마의 아이템을 꺼내 들었다.
균열이 붕괴하는 것도.
덕분에 내게 허락된 시간도 찰나지만.
‘의식’ 속에서의 시간 흐름은 나의 권한 아래에 있는 것.
[‘악에 물든 일각의 지휘봉’이 제물로 선택되었습니다.]
[스킬, ‘구마의식’이 발동됩니다.]
[마왕, 가미긴을 ‘의식’으로 초대합니다.]
“두려움에 떨도록 해라.”
그러니까 오너라, 가미긴.
네 번째 왕좌의 마왕이여.
나는 언제나처럼 당당하게 읊조렸다.
“악크샨이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