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3화. 우리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1)
[69번째 왕좌]
[적정 레벨 : Lv.700~750]
[붕괴 진행도 : 24.8%]
뉴욕.
도심 한복판에 생성된 균열.
균열 내부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 얼마나 격한지는 붕괴 진행도가 말해주고 있었다.
그러나 망설임은 없었다. 선두에 나선 건 여신교단의 성기사들이었다.
탈림이 외쳤다.
“전군, 방패를 들어라!”
철컥!
“진입하는 순간, 표적은 우리는 공공의 적이 된다!”
파돈돈과 쥬르발.
무려 800레벨에 육박하는 두 네임드 몬스터의 협공이 쏟아질 건 뻔히 예상되는 일. 플레이어들은 마른침을 삼켰다. 균열 내부의 압력이 피부로 와닿았다.
“……이거, 그냥 비명횡사했겠는데?”
의욕만 앞세워 진입했더라면.
클리어는커녕 저항 한 번 제대로 못하고 끝났겠지.
그러나 여신의 방패가 자신들을 에워싸고 있었다.
그것도 모자라서.
“후후, 이런 발현은 새롭네요!”
“자중하세요, 지브릴 숙련 마법사.”
“앗, 네. 마이아 선임님.”
마탑의 선임, 숙련 마법사들.
그들의 방대한 마력이 방패를 더욱더 견고하게 만들었다. 메시지로 확인하고, 눈으로 목격하고, 피부로 체감하고 있으면서도 믿기지 않는 광경이었다.
“…….”
“슈레이그,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
세컨드 썬.
동료의 말에 슈레이그는 감상에서 빠져나왔다.
그러고는 미소를 흘렸다.
“잠깐, 쓸데없는 생각 좀 했어.”
“이런 상황에서 쓸데없는 생각? 너답지 않은걸.”
“그러게 말이야.”
내가, 세컨드 썬이, 플레이어들이 저들 수준으로 강해지는 게 가능한 일일까. 하는 생각을 말이야. 슈레이그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만약, 호열이 자신의 모습을 봤다면.
‘긍지가 무뎌졌다며 역정을 내셨겠지.’
검기의 존재 여부조차 알지 못하던.
지금보다 훨씬 나약했던 던전 균열 때의 자신.
하지만 호열은 그런 자신에게 확신을 줬다.
그 결과가 플뢰레에 깃들어 있지 않던가.
곧 슈레이그의 눈빛이 결연하게 빛났다.
“다들 똑똑히 지켜보도록 해. 우리에게 배려에 놀라거나 기뻐할 자격은 없어. 언제까지고 아르카나 대륙에게 의존할 수도 없는 일이니까.”
끄덕─
각오와 함께 모두가 균열에 진입했다.
그와 동시에 시야가 뒤바뀌었다.
균열.
아르카나 대륙과 현실이 절반씩 섞인 공간.
복잡한 뉴욕의 도심이 어느샌가 피 칠갑이 되어버렸다.
갈라진 아스팔트 바닥에서 솟구치는 녹색의 불꽃.
곳곳에서 들려오는 악마의 울음소리.
생생하게 실감할 수 있었다.
“……균열이 붕괴하면 이게 현실이 된다는 거지?”
대다수의 플레이어들은 이 정도 적정 레벨의 균열에 진입하는 게 처음이었다.
저런 고레벨의 악마족 몬스터 앞에 선 것도 처음이었고.
“대체 어떤 생각으로…….”
진심으로 존경심이 솟아날 수밖에 없었다.
믿을 수 있는 동료.
그것도 모자라 여신교단의 성기사단, 심지어는 마탑의 마법사들과 함께 진입한 지금조차도 공포에 몸과 정신이 압도되는 기분이 들었거늘.
이런 균열을 혼자 클리어해오다니.
하지만 감탄은 오래가지 않았다.
탈림의 경고대로 균열에 진입하는 순간.
악마들의 시선이 침입자에게 집중된 것이다.
탈림이 소리쳤다.
“모험가들이여, 보이는가?”
챙!
탈림의 검이 하늘을 향했다.
정확하게는 하늘에 떠오른 왕좌를 가리켰다.
“저것이 바로 마왕 쟁탈전의 목적이다. 저 왕좌를 차지하는 악마가 바로 악마들의 왕, 마왕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
그래서 균열 내부가 피로 가득했던 건가?
악마들이 서로서로 싸우느라?
플레이어 중 누군가 중얼거렸다.
“……그럼 나중에 습격하는 게 좋지 않았을까요?”
적의 적은 아군.
왜, 이이제이라는 말도 있지 않던가?
그러나 탈림은 단호하게 말했다.
“우리는 악마들의 왕 놀음에 놀아나지 않는다. 왕좌에 앉기를 바라는 악마든, 그걸 방해하는 악마든. 우리에게는 모조리 불살라야 하는 악마에 불과하다!”
악마를 향해 검을 치켜들었다.
“그것이 놈들에게 짓밟힌 아르카나 대륙, 우리 아르카나인들의 각오니까. 그까짓 왕 놀음 따위와는 짊어진 무게가 다르다는 것이다. 전진하라, 여신의 기사들이여!”
.
.
.
[58번째 왕좌]
[적정 레벨 : Lv.800]
[붕괴 진행도 : 26%]
벤쉬와 뱅그릿.
두 선임 마법사는 악마를 바라봤다.
벤쉬가 미간을 찌푸렸다.
“어떻게 생각합니까, 뱅그릿 선임?”
“뭘요?”
“마탑에 입성하고 나서 이런 일이 벌어질 거로 생각했느냐는 말입니다. 나는 상상도 해보지 않았거든요. 이런 상황까지는.”
“그런 거라면 저도 마찬가지예요.”
보자, 뱅그릿이 마탑에 입성한 이유는 단순하게 굶고 싶지 않아서였으니까. 밥도 주고, 재워주고, 심지어는 마법까지 공부하게 해준다니.
어린 뱅그릿에게 마탑은 천국과 다름없는 곳이었다.
“정말로요.”
그러나 뱅그릿에게 마탑은 지나치게 냉혹했다.
어린 뱅그릿이 삐뚤어져 자라게 됐을 만큼.
그 냉혹함은 선임 마법사가 돼서도 마찬가지였지.
특히 원로 마법사에게 뒤통수를 맞았을 때의 기분이란!
뱅그릿이 되물었다.
“그래서 기분이 나쁘신가요, 벤쉬 선임님?”
“아뇨. 그럴 리가.”
씨익─
벤쉬는 입꼬리를 올렸다.
그의 손에는 최상급 마도구, [소형 마력 태양]이 들려있었다.
벤쉬의 동공이 태양처럼 번뜩였다.
얼마 만이던가, 이 감각!
“저는 오히려 흡족합니다.”
벤쉬는 지나치게 솔직했다.
그 솔직함이 어디가랴.
출탑 신청서에 있는 그대로 자신의 목적을 적어왔다.
출탑의 목적이야 보다시피 뻔했다.
상급 마도구의 합리적인 반출을 위한 출탑.
“이런 식으로 허가를 받게 될 줄은 몰랐지만, 뭐.”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습니까?
중얼거린 벤쉬의 시선이 다시금 악마들에게로 옮겨갔다.
흘러나오는 벤쉬의 마력에 감응.
[소형 마력 태양]이 회전하기 시작했다.
“뱅그릿 선임, 나는 종종 생각했습니다.”
“?”
“어째서 마탑의 마법사는 마탑에 묶여 있어야만 하는가. 규율 때문에? 대체 그놈의 말도 안 되는 규율은 어떤 놈이 만들었단 말인가?”
마법의 경지와 진리를 탐구하는 것까지는 좋다.
그런데 마탑에 입성하는 순간, 속세와의 인연을 완전히 끊어야 한다니.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논리란 말인가? 그런 의미에서 벤쉬는 마탑의 변화가 마음에 들었다.
“이 수석께는 늘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호열 수석이 아니었다면.
나는 아르카나 대륙이 이 지경이 됐어도 마탑에 틀어박혀 마법 서적을 들춰대기나 했었겠지.
그러나 이 수석 덕분에 외면해 왔던 현실을 직시하게 됐다. 어긋난 현실을 바로 잡을 수 있게 됐다.
또 거기에다가…….
벤쉬의 시선이 뒤로 물러선 플레이어들을 향했다.
“제대로 지켜보도록 하세요. 그대들도 나처럼 될 수 있습니다. 아르카나 대륙의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 그대들은 반드시 성장해야만 합니다.”
……방금 대사, 약간 이 수석님 같지 않았나?
보다시피, 선임으로서 기를 세울 기회까지 얻었다.
벤쉬가 자신도 모르게 어깨에 힘을 주자 뱅그릿은 혀를 찼다.
“그렇다고 너무 신 내시지는 마시구요.”
가다듬는 호흡.
뱅그랫은 계획을 잊지 않고 있었다.
뱅그릿 또한 마력을 끌어올렸다.
표적은 역시나 왕좌를 노리는 악마였다.
“이번 출탑이 마지막이 되고 싶지 않으시다면요.”
“예? 아니, 뱅그릿 선임. 무슨 말을 그렇게 서운하게 합니까? 나도 알고 있습니다, 이 수석님의 계획! 근데 누가 보면 뱅그릿 선임은 뭐, 출탑 신청서라도 통과되신 줄 알겠습니다?”
“전 통과됐는데요.”
“……예?! 뭐요, 그게 정말입니까? 왜 나만?!”
.
.
.
나, 그리고 악크샨의 악마 사냥꾼들에게 사냥당한 마왕의 숫자는 열하고 둘.
떠오른 왕좌와 균열 또한 열 하고 둘이었다.
나는 이제 막 생성된 균열을 바라봤다.
[20번째 왕좌]
[적정 레벨 : Lv.1,000]
[붕괴 진행도 : 33.3%]
다시 생각할수록 대단하다, 악크샨 선배님들.
성전에서 그렇게 크게 뒤통수를 맞고도 마왕을 열이나 지옥에 보내버리시다니.
그중에 서열 20위 마왕도 섞여있다니!
십 년이 훌쩍 넘는 공백기가 무색할 정도로 선배님들을 향한 존경심이 샘솟는다. 특히 네 자릿수에 육박한 적정 레벨을 보니까 더욱더.
‘진짜 어느 정도였다는 거야?’
괜히 악마들이 악크샨이 절멸할 때까지 쭈그려 지내온 게 아니구나, 싶다. 물론, 그 기다려온 세월이 무색하게도. 너희는 한 가지 실수했지만 말이야.
나는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생사를 떠나 긍지는 이어지는 법이다.”
악크샨, 최후의 생존자인 내가 멀쩡하게 살아있으니까.
아르카나 대륙에서도 손꼽히던 무력 집단들이 나와 함께였으니까.
그러니까 내게 우려는 없었다.
사실 걱정하는 게 이상한 거 아닐까.
왜, 경험을 통해서 대충 견적이 나왔거든.
세 개의 [마왕성] 균열을.
고작 몇 분 만에 짓밟아 줬던 경험이 있었으니까.
균열의 숫자가 늘어나고, 등장하는 악마의 머릿수가 늘어났다고 한들. 녀석들은 마왕이 아니었다. 아직까진 네임드 몬스터, 보스몹이 아니란 뜻이었다.
물론, 이번 [마왕 쟁탈전]엔 그보다 중요한 계획이 있었다.
[마왕성] 균열 때 확실하게 깨달았거든.
악마들은 정말이지, 무식한 족속이란 걸.
마왕이 셋이나 죽어나갔는데, 교훈으로 삼지는 못할망정.
왕좌를 차지할 생각이나 하다니!
그랑펠이 괜히 열등한 족속.
말끝마다 열등이라는 수식어를 괜히 붙이는 게 아니라니까?
지금도 봐라.
“……?”
나와 눈이 마주치고도 상황파악을 못 하고 있잖아.
[아홉 머리 지옥견 : Lv.900]
[대악마를 삼킨 아나콘다 : Lv.920]
[마계 전설종, 비명조 : Lv.900]
뒤엉켜 싸우던 네임드 몬스터, 진명의 악마 셋.
업데이트 내역대로 레벨들 한 번 살벌하시다.
무엇보다 녀석들은 자신들의 강함을 잘 알고 있다.
그러니까 무려 서열 20위 왕좌에 도전한 거겠지.
물론, 의문이 들 법도 하다.
“그대는 무엇이냐?”
그나저나 존댓말을 하는 뱀이라.
집어삼킨 대악마가 누군지는 몰라도 격식은 갖췄군.
확실히 레벨값을 한다는 건가?
여태까지 봐온 악마들과는 느껴지는 위압감부터 다르다.
뭐, 싸움을 멈추고 질문을 던질 법도 해.
나는 단신으로 균열에 진입한 참이었으니까.
그 의문은.
“오, 그대는 악마 사냥꾼이 아닌가?”
내가 자신들의 천적.
악마 사냥꾼이란 걸 알아차려도 크게 달라지지 않겠지.
뱀의 눈이 하얗게 뒤집어지더니 말을 잇는다.
“내가 마안의 시야를 통해 그대의 최후를 똑똑히 지켜봤거늘. 이상한 일이구나, 그대여. 어째서 살아있는 것인가? 가련한 악마 사냥꾼이여.”
물론, 격식을 갖췄다고 하더라도.
악마는 악마.
그랑펠 성격에 말을 섞어줄 리가 있나.
“그런가. 그 서늘한 눈빛을 보니 더욱더 확신이 드는구나. 역시, 그대는 수백만 악마와 함께 장렬하게 산화한 악마 사낭꾼이 맞다. 어떻게 부활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즐거운 일이로군!”
뱀의 말에는 개와 새도 귀를 기울이는 듯했다.
스스스─
덩치 때문인가, 혀를 날름거리는 소리가 웅장하게 들려온다.
셋 중에서도 가장 높은 레벨답게 뱀이 거만하게 말했다.
“왕좌에 앉아 맛보기에 걸맞은 만찬이군!”
캬악!
순간, 벌어지는 뱀의 주둥이.
그때까지도 나는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균열에야 나 혼자뿐이었지만.
만약, 지켜보는 눈이 있었더라면 정말 미친놈 소리를 들어도 할 말이 없겠지.
나를 최소 900레벨로 알고 있는 남철민조차도 진입을 만류할 정도였으니까.
-“호열 씨, 아무리 계획의 일부라고 해도 위험 부담이 너무 큽니다. 호열 씨의 레벨을 고려하더라도, 혼자서 저런 네임드 몬스터를 셋이나 상대하는 건…….”
과연, 남철민에게 AAU 유스라 지부를 맡긴 건 잘한 일이었다.
분석관답게 아르카나 네임드 몬스터의 패턴을 예로 들어가며 나를 설득하려고 했었거든.
물론, 내 고집을 꺾을 순 없었지만.
‘나’라고 말했으니, 이건 그랑펠의 긍지 때문만이 아니었다.
나, 이호열도 원하던 바였기에.
단신으로 균열에 진입한 거란 말이다.
[천적관계].
[첫 세계수의 축복].
[육망성 브로치].
만반의 준비 덕분에 자신감이 넘쳐서?
아니, 그럴 리가 있나.
세상 두려울 게 없는 그랑펠은 몰라도 나는 아니다.
아무리 버프와 템빨로 떡칠했다고 하더라도 적정 레벨 일천(一千)의 균열을 혼자서 클리어한다?
불가능하다는 걸 잘 알고 있으니까.
그랬다.
합당한 이유가 있다는 뜻이다.
균열에 진입하고, 왕좌를 목격했던 순간부터.
점멸하던 퀘스트창.
─지옥에 떨어진 왕좌를 목격하라. (성공)
그 아래로 새로운 퀘스트 목표가 떠오른다.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내게는 [『기이』]로 획득한 정보가 있었으니까.
고오오오─
이 순간에도 바닥에서 일렁이고 있는 지옥의 불.
처음 왕좌를 목격했던 순간, 의문이 들었다.
왕좌도 지옥에서 빠져나오는데.
어째서 악마는 지옥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는 것인가?
그 의문은 오래가지 않았다.
AAU에서 전해온 아르카나 대륙 전기의 정보.
나는 그 서류에서 목격했으니까.
아르카나, 지옥의 설정을.
[지옥 : 악마 사냥꾼에게 사냥당한 악마가 떨어지는 사후세계. 지옥에 떨어진 악마는 두 번 다시는 부활할 수 없다. 설령, 지옥의 문이 열린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결코 지옥을 빠져나올 수 없다.]
떠올렸으니까.
악크샨 악마 사냥꾼의 말을.
『심연을 들여다볼 때 심연도 나를 들여다본다? 설령 악에 빠져 악마가 된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악마를 사냥할 뿐이다. 그것이 악마 사냥꾼의 길이니까.』
악마가 된 악마 사냥꾼을 사냥하는 것 또한 악마 샤냥꾼이다.
그렇다면 악마가 된 악마 사냥꾼은 죽어서 어디로 가는가?
당연하게도 악마와 다를 바 없이 지옥에 떨어지겠지.
그런데 말이야.
내가, 그랑펠이 옛날부터 누누이 지껄이던 말이 있잖아?
“죽음조차도 긍지를 꺾을 순 없다.”
그래, 그 말을 증명하듯.
퀘스트 목표가 떠올랐다.
─지옥의 악마 사냥꾼과 조우하라. (진행 중)
고오오오─
그와 동시에 지옥의 불이 더욱더 거세게 치솟았다.
─지옥의 악마 사냥꾼과 조우하라. (성공)
메시지가 떠올랐다.
[조건을 충족했습니다.]
[보상이 지급됩니다.]
[클래스 고유 스킬, ‘악크샨의 유지’를 습득하셨습니다.]
“그렇지 않은가? 악크샨이여.”
나의 물음에 화답하듯.
지옥의 불길 속에서.
석궁의 장전 소리가 들려왔다.
철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