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1화. 내가 있기에 가능하다 (2)
클래스 퀘스트는 간만이었다.
마왕 쟁탈전이 대형 이벤트라는 게 또 한 번 체감이 된다.
나는 다시금 퀘스트창을 살폈다.
[클래스 퀘스트 : 지옥의 문]
절멸의 아르카나 대륙.
새로운 악은 지옥에 떨어진 왕좌를 거머쥐기 원한다.
그러나 저들은 그대의 존재를 간과하고 있다.
최후의 악마 사냥꾼이여.
지옥의 불길로 오만한 악마를 불태워라.
─나약해진 육체를 단련하라. (반복)
─지옥에 떨어진 왕좌를 목격하라. (진행 중)
내용을 보는 순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어째서 악마들이 자신들에게 백해무익한 지옥의 문을 열어 재꼈는지 말이야.
그랬다.
악마들은, 악마 사냥꾼 손에 지옥으로 떨어진 마왕.
즉, 그들과 함께 지옥에 떨어진 왕좌를 노리는 것이었다.
그래서 왕좌가 뭔데?
과거의 나였다면 10년의 공백을 탓하며 울분을 터트렸겠지. 하지만 말했다시피 긍지에 가라앉지 않기 위해서. 발버둥을 멈추지 않았던 나였다.
이 아이템이 바로 그 증거고.
[마안의 망원경].
마안의 시야가 서서히 옮겨간다.
솟구치는 지옥의 불꽃.
불길 속에서 솟구쳐 오르는 왕좌를 향해서.
잠자코 지켜보던 남태민이 입을 열었다.
“……저건 의자인가요?”
그렇다.
“보다 정확하게는 악마들의 왕좌다.”
“왕좌……!”
“마왕 쟁탈전이라는 게 저 왕좌를 차지하는 싸움이었군!”
하르콘의 상황판단은 정확했다.
하쿠나가 우려스런 표정을 지었다.
“지옥의 불길을 감수하면서까지 왕좌를 차지하려고 하다니. 왕좌에 담긴 힘이 방대한 모양입니다. 하긴 저조차도 괴물 같은 힘을 내게 했던 거악이니까…….”
칠죄종 탐욕에게 빙의됐던 하쿠나였다.
고대 유스라 왕국에는 전투도 다툼도 없었다.
유스라의 국왕인 하쿠나에게 전투 능력은 전무한 게 당연했다. 하지만 그런 하쿠나의 육체로도 거악의 위용을 드러냈던 칠죄종 탐욕이 아니던가.
‘아르카나 시스템적으로 표현하자면.’
저 왕좌를 차지하는 악마는 보스 몬스터로 격이 상승한다는 거겠지. 과연, 이런 면에선 플레이어들이 눈치가 빨랐다. 히사기가 낮게 중얼거렸다.
“좋지 않군요.”
“무슨 소리인가, 히사기?”
“지옥의 불길을 감수하고 왕좌를 차지할 악마는 그 자체로도 강한 녀석일 게 분명합니다. 그런 녀석이 왕좌까지 차지한다면…….”
“……!!!”
맞는 말이다.
마계 서부의 패자, 락시오로스를 마지막으로 끌고 와볼까.
만약, 녀석이 멀쩡히 살아있어서 왕좌를 차지하게 된다면.
1,000레벨짜리 네임드 몬스터가 보스 몬스터로 탈바꿈한다는 뜻이지.
“악마들 또한 위험을 감수할 만하군요.”
마르셀로가 객관적인 판단을 내렸다.
“아, 그래서 그랬구나. 이제 이해가 됐어요.”
의문을 제기했던 키치도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그렸다.
뭐, 의문은 해결됐지만, 분위기는 축 가라앉았군.
그럴 만도 하다.
“핵심은 악마가 왕좌를 차지하는 것을 저지하는 것이겠군.”
“과정은 순탄치 않겠죠. 쟁탈전에 끼어드는 순간, 저희는 모든 악마의 공공의 적이 될 겁니다. 배신을 일삼는 악마의 천성에 기대하는 건…….”
전쟁에 익숙한 하르콘과 탈림.
두 기사는 빠르게 요지를 파악했다. 왕좌를 두고 다툴 악마들 사이에서 전략적 이득을 취할 가능성까지 염두에 두는 거겠지.
물론, 나는 초를 쳤지만.
“긍지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어련하겠냐, 그랑펠.
악마에게 기대할 바엔.
그냥 가라앉고 마는 게 그랑펠의 긍지였으니까.
하지만 말했다시피 말만 거창한 게 아니다.
내가 살아있다.
내가 살아있기에 활로가 있었으니까.
애초에 마왕 쟁탈전이 본격적으로 개시된 이유가 뭔데?
‘악크샨이 절멸했으니까.’
그래, 마왕 쟁탈전은 악마들에게도 양날의 검과도 같았다.
사지(死地)나 다름없는 지옥의 문을 제 손으로 열어버리는 것.
그게 바로 마왕 쟁탈전이 오랫동안 개전되지 않은 이유였다.
‘천적인 악마 사냥꾼이 새파랗게 눈을 뜨고 있는데.’
간이 배 밖으로 나온 것도 아니고.
그런 짓을 할 수 있을 리가 있겠어?
그러나 성전에서 악크샨은 절멸.
거기에 악크샨 최후의 생존자이자 칠죄종 탐욕과 마왕 몇몇을 지옥으로 보내버린 나 또한, 수백만 악마의 희생으로 처치했다고 판단.
마왕 쟁탈전에 방해물은 없다고 결론을 내린 거겠지.
[최후의 모험가] 효과에 대해 알 턱이 없으니까!
“어리석은 족속은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그게 바로 내가 뻔뻔하게 내뱉은 이유였다.
“나라는 존재를.”
……아니, 잠깐만.
틀린 말은 아니지마는 꼭 그렇게 거창하게 해야겠냐고!!
나의 절규가 무색하게도.
“!!!”
그 말에 모두의 시선이 내게 집중됐다.
살 구멍 팔 시간에 쥐구멍도 하나 파놓을걸.
……진짜 내가 이렇게 힘겹게 산다.
*
AAU엔 또 한 번 폭탄이 떨어졌다.
신규 AAU 지부.
AAU 유스라 지부에서 온 협조 공문 때문에.
“마왕 쟁탈전?! 그게 뭔데?!”
타다다다닥!
곳곳에서 끊이지 않는 타자 소리.
성현준과 윤수겸은 서둘러 데이터베이스를 뒤졌다.
성현준이 다급하게 외쳤다.
“아니, 선배. 마계에 관한 정보는 있어도 지옥에 관한 정보가 있을까요? 뭔가 착각하신 거 아닐까요? 왜, 마계랑 지옥. 어감이 비슷하잖아요!”
“지옥 같은 소리 하지 말고 일단 찾는 데까지 찾아봐.”
“……선배, 방금 발음이? 욕하신 거 아니죠?”
[지옥].
데이터베이스에 그 단어를 검색하자 튀어나오는 건 케케묵은 정보나 설정들뿐이었다. 몇 가지 예를 들자면……. 성현준이 입을 열었다.
“에픽 아이템 설정, 지옥의 횃불. 낭만 탐험가, 로렌츠크가 지옥의 입구를 발견한 기념으로 설정된 아이템. 구체적인 스토리 라인은 개발 중.”
구체적인 설정이 있는 게 이상한 일이겠지.
낭만 탐험가, 로렌츠크부터가 간단한 설정만 몇 가지 잡은 미구현 NPC였으니까.
“그리고 하나 더 있네요. 악마 사냥꾼에게 사냥당한 악마들은 지옥에 떨어져 두 번 다시 부활하지 못한다. 그 어떤 악마라고 하더라도.”
나머지 정보들도 그와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지옥이라니, 그나마 기본적인 설정이라도 존재하던 마계와는 다르게 지옥은 정말 언급만 되는 수준에 불과했으니까.
성현준이 입술을 깨물었다.
“이런 쓸데없는 정보가 도움이 될까요?”
타닥!
윤수겸이 자판에서 손을 떼고 의자를 돌려 앉았다.
“판단하는 건 우리가 아니라 이호열 플레이어…….”
아니지, 이젠 호칭부터 제대로 해야 한다.
“AAU 유스라 지부, 총책임자님이시겠지.”
AAU 유스라 지부.
특별 지부이니만큼 지부장은 존재하지 않았다.
다만, 책임을 지는 총책임자만이 존재할 뿐.
세상이 호열에게 거는 기대만 하더라도 충분히 무겁거늘.
호열은 또 하나의 짐을 짊어진 것이었다.
“참, 직책 한번 막중해 보이네.”
이제는 AAU조차도 호열에게 기대는 꼴이 돼버렸다.
일개 사원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겠지.
그럼에도 성현준과 윤수겸은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 싶었다.
“그렇겠죠? 그러면 싹싹 긁어서 넘겨드려야겠네.”
물론.
“후후─”
AAU 대한민국 지부장.
박민재의 마음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박민재는 서랍 속에서 서류 한 뭉치를 꺼냈다.
먼지 쌓인 서류.
“이걸 다시 꺼내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쓱─
먼지를 닦아내자 그 문서의 정체가 드러났다.
[레이먼 션, 대화록].
“진짜 간만이군.”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하고, 자신도 코스모 사원으로 재직하던 시절. 박민재는 하늘 같은 CEO 레이먼 션에게 정식으로 이의를 제기했었다.
그때 동료의 반응?
“뭔 개지랄이냐고 난리가 났지.”
많은 월급.
낮은 노동 강도.
칼퇴.
개발자들에겐 신의 직장이라 불리던 코스모였다.
당장만 하더라도 바랄 게 없었는데, 괜한 긁어 부스럼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는 눈치들이었지. 하지만 이놈의 반골 기질이 가만히 있으랴.
“그땐 특히나 궁금한 건 못 참는 성격이었거든 내가.”
그때나 지금이나 가장 큰 의문은 같았다.
레이먼은 어째서 사원, 간부들에게도 아르카나 대륙 전기의 로드맵을 공개하지 않은 걸까? 정확하게는 플레이 목적과 스토리의 큰 틀조차 제시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다시 와서 생각해 보니까 나도 제정신이 아니긴 했어?
“당근만 흔드는 주인을 싫다고 물 생각을 했으니까.”
뭐, 그러니까 반골이라는 거겠지만.
박민재는 레이먼 션에게 직통으로 메일을 퍼부었다.
자신의 의문점을 성심성의껏 포장해서 말이야.
그 결과, 박민재는 레이먼 션과 단독으로 면담을 했다.
그 면담의 대화가 서류에 적혀있었다.
“퉷. 서랍에 넣어놨는데 뭔 먼지가.”
박민재는 입가를 훑고는 서류를 펼쳤다.
쭉 살펴보고 있자니 그때의 기록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문득, 한 구절이 시선을 끌었다.
──────
션 : 그게 본론인 것 같군요.
──────
“눈치 하나만큼은 기가 막혔지. 그거.”
어째서 우리에게 아르카나의 목적과 틀을 공유하지 않는가?
나름대로 은근슬쩍 물어봤다고 생각했는데.
내 속내를 훤히 들여다보고 있었지, 그 자식.
──────
션 : 그럴 필요가 없으니까.
──────
정말이지, 다시 봐도 재수 없는 말이 아닐 수 없다.
──────
션 : 이미 완성된 것에 간섭할 필요는 없다는 겁니다.
──────
그때는 뭔 개소리를 하는 건지 몰랐었다.
단순하게 레이먼 션, 능구렁이에게 말려서 본전도 찾지 못했다고 생각했을 뿐.
녹음기를 되돌려보고, 은밀하게 대화록을 작성할 때만 하더라도 열불이 났었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니 저절로 이해가 되더라.
나이를 먹고 머리가 커져서 그러냐고?
아니, 대격변이 터졌거든.
“……완성된 것에 간섭할 필요가 없다.”
대격변 이후로 지금까지.
세월이 조금 더 흐르고 다시 그 말을 보니까.
비로소 그 말뜻이 잡힐 것 같기도 하다. 왜, 코스모 데이터베이스엔 한 줄짜리 설정만 존재하는 몬스터나 NPC들이 맹활약하는 걸 보면 말이야.
“우리의 개발 여부랑은 상관없었다는 건가.”
박민재는 어깨를 으쓱였다.
“뭐, 이제 와서 열 내봤자 뭐 하겠어.”
레이먼 션은 진작 행방불명.
그때처럼 면담도 불가능한데 말이다.
하지만 이 정도면, 작은 엿 정도는 먹여줄 수 있지 않을까.
“왜,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도 있잖아?”
대화록을 다시 보니 새롭게 보이는 게 있는 것처럼 말이다.
때로는 아르카나 대륙을 실시간으로 살펴보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착각마저 들게 하는 이호열이라면. 이 대화록에서 레이먼 션의 진짜 의도를 파악할 수 있지 않을까?
박민재가 입꼬리를 올렸다.
“그렇지 않습니까, 잘나신 레이먼 션 CEO님?”
*
유스라 왕국의 집무실.
아르카나 대륙에서 마왕 쟁탈전이 발발한 현재.
나는 언제든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게 대기 중이었다.
달칵─
물론, 이 드높으신 긍지가 고작 악마 때문에 티타임을 생략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 그래도 그랑펠의 입맛과는 합의를 봤다.
입에 달고 살았던 티백 녹차를 잠깐 끊고, 비약초를 우려낸 차를 마신다는 것이다.
“과연, 숫자는 숫자에 불과하군.”
……수십만 원짜리 비약초보다 300원짜리 녹차 티백이 낫다고 돌려 말하지 마라, 그랑펠. 짧은 투정도 잠깐, 나는 AAU에서 도착한 서류를 확인했다.
책상에 쌓인 서류량이 제법 된다, 이거.
‘철민 씨가 고생했겠는데.’
남태민의 형제, 남철민.
나는 AAU 유스라 지부, 중책을 남철민에게 맡겼다.
나는 뭐, 바지사장이니까.
어째서 바지사장을 자처했느냐고?
AAU까지 신경 썼다가는 진짜 몸이 남아나질 않을 테니까.
현재 일과만 하더라도 세계수의 축복이 없었다면 진작 골로 갔을 지옥의 일정이란 말이다.
그것도 모자라 AAU 유스라 지부장으로, 날마다 AAU 회의까지 참석해야 한다면?
진심으로 끔찍하다……!
그래서 총책임자라는 새로운 직급까지 요구했다, 내가.
‘그래도 맡길 사람이 있어서 다행이네.’
남철민은 가온, 이제는 거대 연합의 브레인이나 다름없었으니까.
그 능력을 의심할 필요는 없겠지.
뭐가 됐든, 나보다는 여러모로 나을 거야.
지부장 회의에서 잔소리를 쏟아내는 그랑펠을 상상을 해보자.
벌써부터 피곤해진다고…….
각설하고.
나는 AAU가 전달해 온 자료를 살폈다.
솔직하게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AAU의 밑천이야, 그동안 봐서 잘 알고 있었으니까.
“AAU, 창조의 편린을 탐구하는 자들이여.”
그러니까 제발 거창하게 포장 좀 하지 마라, 그랑펠.
따지고 보면 틀린 말은 아니긴 하지.
AAU는 과거 아르카나의 개발진들이었으니까.
근데, 애초에 남아있는 정보랄 게 별로 없다잖아……?
‘……잠깐만.’
들은 바로는 분명 그래야 하는데.
뭐지, 내 눈에는 보이고 있었다.
『아르카나 대륙』.
[아르카나 대륙 전기].
두 세계를 모두 경험한 내게.
쓸데없어 보이는 정보를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가.
“그대들의 탐구가 [『기이』]를 이끌어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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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로운 월드 이벤트, ‘마왕 쟁탈전’이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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