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0화. 내가 있기에 가능하다 (1)
“그럼, 고생하게.”
예시카, 에노크와 대화를 나누고 대회의장으로 돌아온 하르콘.
꽤 시간이 흘렀지만, 키치는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황제의 검.
라이언 하트 기사단장의 눈매가 서늘하게 빛났다.
‘과거의 나였다면.’
쉽게 의심을 거둘 수 없었겠지.
그림자 용병단의 악명은 황궁에서도 자자했다.
의뢰를 핑계로 그들이 벌인 범죄는 예로부터 극악무도한 수준이었으니까.
그러나 하르콘은 알고 있었다.
‘모든 게 바뀌었다.’
대격변.
아르카나 대륙에서 모험가들의 세계로 떨어진 지금.
과거에 얽매여 있는 건 미련한 짓이겠지.
게다가 호열 경을 통해 알게 되지 않았던가?
‘악마가 아닌 인간은 바뀔 수 있다.’
하르콘, 자신만 하더라도 그랬다.
명성은커녕 기본 검술 실력조차 갖추지 못한 모험가들과 대화를 나누고, 심지어 훈련시키게 될 줄이야. 과거엔 상상도 하지 못했으니까.
그러니까 하르콘의 눈빛은 달라졌다.
“먼저 기다리고 있을 줄은 몰랐네, 키치 단장.”
“에이, 술 마시는 것밖에 하는 게 없는데 빨리 와야죠.”
“소식은 전해 들었네. 락키드의 상태는 어떤가?”
“이제 멀쩡해요. 더러운 성질머리도 여전하고요.”
“하긴, 그렇게 쉽게 쓰러질 사내가 아니지. 그는.”
평범한 대화.
의심을 거두자고 생각했거늘.
그럼에도 키치의 변화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결국, 하르콘은 단도직입적으로 묻고 말았다.
“달려졌군, 키치 단장.”
“네, 달라지다니요?”
“그림자 용병단이 성전에 참전하는 것도 모자라서. 단장인 그대가 회의 자리까지 참석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네. 어떠한 계기라도 있었던 모양이군.”
“계기라면…….”
키치는 일단 말꼬리를 흐렸다.
‘쳇. 이래서 제국 높으신 양반들과는 엮이기 싫은 건데.’
그림자 용병단의 명성은 오히려 높으신 분들 사이에서 더욱 자자했다.
그럴 수밖에. 그림자 용병단의 의뢰비는 서민은 물론, 웬만한 귀족의 상식도 초월한 수준.
애초부터 고객층이 가진 게 많은 높으신 분들뿐이었으니까.
‘하필 기사단장이 제일 먼저 나타나서는……!’
일찍 약속 장소에 나타난 이유?
당연히 점수를 따기 위해서였다.
우리 이호열 총대장님에게 잘 보여야 엘시도어인가.
뭔가 하는 개자식에게 얻어낸 정보를.
귀띔으로라도 엿들을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얘들아, 내가 이렇게 골 아프게 산다.’
저 사자 같은 눈빛을 보라.
조금만 대답을 잘못했다간.
이 속물적인 속내를 금방이라도 들키고 말겠지.
일단, 키치는 얼버무렸다.
“……다 이호열 총대장님 덕분이죠? 하하.”
유스라 왕국에 거주하며 깨닫게 된 사실 하나.
일단, 이호열 그 이름을 대면 뭐든 해결이 된다.
왜, 아르카나 대륙에서 여신교인 척을 하면 웬만한 의심을 피할 수 있던 것처럼 말이지.
솔직히 유스라 왕국에서 호열의 영향력은 여신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 않았다.
‘뭐, 납득할 수 있어.’
모험가들의 세계에 쉽사리 적응하지 못하던 아르카나인들.
그들이 어렵지 않게 정착할 수 있을 유스라 왕국, 프로스트, 뮤온을 정상화시킨 그였으니까. 과연, 그 이름값은 이번에도 키치를 져버리지 않았다.
이호열.
이름 석 자가 나오는 순간.
밝아지는 하르콘의 얼굴.
“그랬군! 그대 또한 긍지를 깨닫게 된 거군!”
“예, 예?!”
아니, 근데 왜 갑자기 긍지로 넘어가는 건데?!
“……그게 아닌가?”
싸늘하게 냉각되는 하르콘의 얼굴.
결국, 키치는 억지로 입꼬리를 올릴 수밖에 없었다.
대체 그놈의 긍지가 뭔지 알 순 없었지만.
“아니요, 맞아요! 긍지, 하하하! 히끅─”
……일단은, 깨달았다고 치자.
긍지라는 거.
그림자 용병단, 전원.
우리들의 안락한 노후를 위해서라도.
.
.
.
거대 연합.
남태민이 입가에 미소를 흘렸다.
“이제야 실감이 나네.”
호열 씨가 우리를, 나를 부르셨다!
성전에 뛰어들었을 때부터 같은 배를 탄 거나 다름없었지만.
회의까지 참석하는 건 감회가 새로웠다.
간만에 난 흥을 깬 건 나란히 걷던 히사기였다.
“설마 설레시는 겁니까, 남태민 군?”
“……또 뭐냐? 뭔 시비를 걸려고.”
“저는 걱정에 한숨도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히사기가 가련한 표정을 지었다.
뱀눈이 처연함을 더욱 돋보이게 해 꼴 보기도 싫었다.
남태민이 인상을 구겼지만, 히사기는 능글맞았다.
“저희가 이런 회의에 참석할 자격이 있을지 밤새워 고민했습니다. 라이언 하트 기사들부터 마탑의 마법사들까지. 그들과 비교하면 저흰 아직 한참 부족하니까요.”
“……야, 그렇게 말하면 내가 뭐가 되냐?”
“뭐가 되긴요. 감정에 충실한 게 딱 바바리안답습니다.”
두꺼운 덩치.
얄쌍한 덩치.
두 사내가 티격태격 대는 모습은 시선을 끌기 충분했다.
“하씨, 쪽팔리게.”
레오니는 걸걸하게 내뱉고는 두 사람과 몇 발자국 떨어져 걸었다.
하지만 거리 두기가 무색하게도.
두 사내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고개를 돌렸다.
“어떻게 생각하냐?”
“레오니 씨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둘 다 닥쳐, 그냥.”
매일같이 왜 싸우는지 모를 정도로.
레오니의 눈에는 둘 다 똑같아 보였다.
쨌든, 결판을 내야 싸움도 끝날 거고.
시선도 덜 집중되겠지?
그래야 나도 덜 쪽팔릴 거고.
결국, 레오니가 이를 갈며 입을 열었다.
“애초에 다투는 원인이 뭔데?”
“내가 기뻐하는 게 싫다잖아, 저 뱀눈이.”
“저의 이성으로는 야성을 이해할 수 없나 봅니다.”
“또 또 비꼬네?”
“……그만.”
말싸움이 근본적인 원인이 아니잖아, 이 덩치들아!
“자, 잘 들어.”
스윽─
고개를 숙이는 것도 모자라 허리까지 숙이는 두 사람.
……지금 내가 작다고, 짧다고 멕이는 건가?
순간, 속이 울컥했지만, 꾹 참아냈다.
“거슬러 올라가면 원인은 전원소집, 회의 때문이지?”
“그렇지.”
“맞습니다. 거기에서 오는 현대인과 야만인의 감성…….”
하여튼 한마디도 가만히 듣질 않는다.
남태민이 발끈하기 전.
레오니는 얼른 말을 덧붙였다.
“결국, 둘 다 똑같은 심정이잖아.”
“……엥? 내가? 이거랑?”
“둘 다 도움이 되고 싶어서 그런 거 아니야?”
“!!”
뿌듯함이 앞서든, 걱정이 앞서든.
결국, 마음이 향하는 곳은 같겠지.
그러니까 거대 연합이 지금까지 굴러갈 수 있던 거고.
그런데 왜 맨날 치고받고 싸우는 거야, 대체?
“이제 와서 깨닫는 표정을 짓는 거. 진심 열 받는다.”
하르콘 단장님, 이것 좀 보세요.
이것들은 체력 훈련 이전에 머리부터 어떻게 해야 될걸요.
그제야 만족할 만한 대답을 들은 걸까.
남태민이 허리를 펴고 고개를 세웠다.
“알아들었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순간, 마주치는 시선.
동시에 여는 입.
“긍지라는 거지.”
“긍지군요.”
“……?!”
아니, 그거 맞아?
왜 갑자기 핸들을 꺾고 긍지로 들이받는 건데?!
레오니가 어이가 없어 할 말을 잃었다.
“좋아, 오늘은 휴전이다.”
“찬성입니다, 남태민 군.”
“……미친놈들.”
이호열 씨, 이것 좀 보세요.
당신이 얘네들을 이렇게 만들었어.
우다다.
레오니는 두 사내를 뒤로 한 채 황금 궁전으로 향했다.
저 긍지라는 게 옮을 것 같아서 한시라도 빠르게.
.
.
.
그러나 대회의실에 들어선 레오니는 경악하고 말았다.
광전사인 자신이 할 말은 아니었지마는…….
감히 확신할 수 있었다.
“……쟤네만 미친 게 아니었어.”
이건 광기다.
남태민과 히사기만 뭐라고 할 게 아니었다.
들려오는 심상치 않은 대화.
“탐험가 연맹이 참전할 줄은 몰랐네만.”
“성전에선 저희 탐험가들이 활약할 수 있는 여지가 충분하니까요. 물론, 연맹장인 저도 놀랐습니다. 저부터가 탐험가지만, 탐험가처럼 단합이 안 되는 족속도 드문데……. 대부분 연맹 탐험가들이 뜻을 함께해 줄 줄이야.”
“탐험가의 긍지라는 말이군!”
기승전긍지.
저 광신도와 같은 대화를 나누는 이들이 누구던가?
플레이어도, 랭커도 아니고, 무려 라이언 하트 기사단장 하르콘과 탐험가 연맹장 파비앙이었다.
이번에는 왼쪽 고막을 파고드는 대화.
“교단의 성물을 내어주셨다고 들었습니다. 벨리에 선임이 감사 인사를 전해달라고 부탁해 왔습니다. 물론, 저 또한 큰 신세를 졌습니다.”
“아닙니다. 그 성물은 더 이상 저희의 것이 아니니까요. 어떻게 사용하시든 교단에게 감사하실 것은 없습니다. 성물보다 값진 긍지를 깨닫게 되었으니까요.”
“과연, 그 말씀엔 공감됩니다.”
아르카나 대륙 최대의 종교, 여신교.
수만에 이르는 여신교단 성기사들을 이끄는 탈림.
수식어조차 필요 없는 마탑의 수석, 마르셀로.
역시나, 저쪽 이상으로 대단하신 분들이시다.
그쯤 되니 레오니는 진지하게 걱정이 들었다.
‘……잠깐, 이쯤 되면 내가 잘못된 건가?’
설마, 나만 깨닫지 못한 건가?
심정 같아서는 속 시원하게 물어보고 싶었다.
대체 긍지라는 게 뭐냐고!
하지만 플레이어들 사이에서 떠도는 말이 떠올랐다.
-“긍지가 뭐냐고 묻는 것부터 긍지가 없는 행동이지.”
데구르르─
결국, 레오니는 입을 다물고 눈알만 굴렸다.
그러던 도중 맞은편에 앉은 키치와 눈이 마주쳤다.
긍지가 긍지를 알아보듯, 레오니와 키치도 서로를 알아봤다.
“!!”
……그쪽도 긍지가 뭔지 모르는구나?
물론, 반가움은 오래가지 못했다.
약속 시각 정각.
들려오는 구두 소리.
또각─
호열이 대회의실에 모습을 드러냈으니까.
.
.
.
모두가 시간을 엄수해 줘서 고맙다.
뭐, 나머지는 그렇다고 치더라도.
기대하지 않아서인가.
키치에게 특히나 고맙군.
‘……아니었으면 끔찍하거든.’
긍지가 부족하다.
격식과 예절이 없다.
하마터면 잔소리로 회의를 시작할 뻔했으니까.
덕분에 나는 지체하지 않았다.
착석하자마자 본론을 꺼냈다.
“오늘, 그대들을 소집한 이유는 간단하다.”
몇 번씩이나 말하지만, 설명보다는 직접 보는 게 낫다.
나는 [마안의 망원경]을 대회의실 원탁 위에 올려뒀다.
효과를 발동하며 말을 이었다.
“마왕 쟁탈전이 시작됐다.”
“……!!!”
이내, 허공에 떠오르는 아르카나 대륙의 전경.
황폐화된 대륙의 모습도 이젠 다들 익숙해졌겠지.
그러나 이제까지와는 차원이 다르다.
지각 변동, 아르카나 대륙이 갈라져 있었다.
마르셀로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건 마법이 아닙니다.”
“마법이 아니라면……?”
“악마, 그들의 짓이겠지요.”
갈라진 틈에서 솟아오르는 녹색 불길.
……잠깐만.
중얼거린 파비앙이 설마 하는 표정으로 입을 연다.
“지옥의 횃불과 같은 빛……? 그렇다면 설마?”
맞다. 그 설마가 설마다, 파비앙.
“그렇다. 지옥의 불길이다.”
“지옥의 횃불이라니. 파비앙, 무슨 소리인가?”
“……이럴 수가. 일단, 보여드리겠습니다.”
파비앙이 곧 [지옥의 횃불]을 꺼내 들었다.
아르카나 대륙에 피어오른 녹색 불과 같은 빛으로 타오르는 횃불이었다.
나야 [텟퍼른 미궁] 균열에서 봐서 놀랄 건 없었지만, 다른 이들은 아니겠지.
“과거, 지옥의 문을 목격했다는 연맹 탐험가가 남긴 게 바로 이 지옥의 횃불입니다. 직접 확인하진 못했지만, 악마를 태우는 효과가 있다고 전해 들었습니다.”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꼬던 키치가 물었다.
“말씀 중에 죄송한데요. 마계랑 지옥은 다르잖아요?”
좋은 질문이다, 키치.
마계와 지옥은 엄연히 다르다.
마계는 악마들의 고향이지만, 지옥은 그랑펠의 말을 빌려 표현하자면 악마들이 처박히는 공간.
정확하게는 악마 사냥꾼에게 사냥당한 악마들이 떨어지는 사후세계였으니까.
“뭐, 아르카나 대륙에 악마가 판치는 걸로 봐선 마계와의 통로야 열린 지 오래전인 것 같은데……. 악마들이 굳이 지옥의 문이란 걸 열 이유가 있을까요?”
어째서 악마들은 자신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장소.
지옥으로 통하는 문을 열었는가?
마왕 쟁탈전이 어떤 식으로 진행되는지도 알지 못하는데.
다들 짐작할 수 없는 게 당연하겠지.
나도 마찬가지였다.
눈앞이 점멸하기 전까지는 말이야.
[클래스 퀘스트 : 지옥의 문]
그러나 모든 것을 알게 된 지금.
나는 언제나처럼 꼿꼿할 수 있었다.
예상 밖의 상황에 동요하는 이들 앞에서.
평소처럼 태연하게 지껄일 수 있었다.
“의문을 가질 필요도, 우려할 것도 없다.”
“……?”
“내가 있으니.”
“!!!”
내가 무슨 광신도를 이끄는 사이비 교주도 아니고.
이번엔 단순한 허세가 아니다.
정말로 내가 생존해 있기에 가능한 ‘계획’이 있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