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9화. 역시 총대장님
월스와일.
자존심 높은 드워프들이 하나같이 최고로 꼽는 대장장이.
그의 실력에 대해서라면, 말보다는 보여주는 게 나았다.
악크샨의 결전병기 퀴른베르크 기계탑의 설계는 물론.
아이언 캐슬 호, 심지어는 드워프들의 은신처 관문까지.
그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으니까.
“젠장.”
“저저, 괜히 쓸데없는 말을 해서는……!”
“아뿔싸.”
쩌렁쩌렁한 귀철의 호통에 드워프들은 탄식을 뱉었다.
체인워커가 중얼거렸다.
“일 났군.”
드레드센 마을의 생존자들.
란샤를 비롯한 생존자들은 눈치껏 드워프들의 일손을 도왔다. 옛날이야기에서나 듣던 드워프들이 하늘을 나는 배를 타고 나타날 줄이야.
상상도 못 하던 일이었지만 꿈이 아니었다.
‘어쨌든, 쫓겨나기 싫으면 밥값을 해야 해.’
그러나 듣고 넘어가기엔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게다가 말하는 돌덩이라니!
결국, 란샤가 체인워커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무슨 심각한 일이라도 있는 걸까요?”
“아, 그대들이 우려할 건 없네. 그와의 맹약에 따라 우리 드워프가 그대들을 끝까지 보호할 테니까. 혹시 누가 싫은 소리를 한 건가? 내 텃세 같은 건 부리지 말라고……!”
“그라면…….”
검은 형체, 디엔드가 말했던 주군이시겠지?
맹약이 어떤 맹약을 말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란샤는 은인의 얼굴이라도 뵙고 싶은 심정이 들었다.
하지만 그전에.
“아뇨! 그런 게 아니라 고민이 있으신 것 같아서요!”
오해부터 해결해야겠지.
“대단하신 분이신가 봐요, 월스와일이라 불리시는 분이요!”
“그 이야기였나? 이거, 소란스러워서 면목이 없군.”
“아니에요. 간만에 활기차고 좋은걸요!”
빈말은 아니었다.
정말로.
간만에 살아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으니까.
“그렇다면 다행이군.”
체인워커가 푹 한숨을 내쉬더니 말을 이었다.
“월스와일, 저 고집에 시달릴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지끈해서 그러네.”
실력은 인정할 수밖에 없으나, 무언가를 제련할 때의 월스와일은 그야말로 괴물.
괴팍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말하지 못하는 철광석을 두들길 때도 충분히 까칠한 그였거늘.
“귀철에게 저런 소리를 들었으니, 가만히 있지 않겠지.”
과연, 체인워커의 예상은 적중했다.
쩌렁쩌렁했던 귀철의 고함.
그에 질 새라 월스와일이 입을 열었다.
란샤는 그제야 깨닫고 말았다.
“배려해 줬더니만 건방지구나, 귀철 녀석!”
저래서 걱정한 거였어?!
“의, 의외시네요? 굉장히?”
엄격, 근엄, 진지하기 그지없는 얼굴에서 저런 말이 튀어나올 줄이야. 란샤가 놀라움을 숨기지 못하자, 체인워커는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악크샨의 생존자여.”
그대의 귀철이 저 영감의 자존심을 건드리고 말았구려.
이제부터는 체인워커도 감히 짐작할 수 없었다.
월스와일, 드워프 최고의 대장장이와 귀철이 만나 과연 어떤 장비가 벼려지게 될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당연히 우려될 수밖에.
“오냐, 더 이상의 배려는 없다!”
화르륵!
출력을 높이자 더욱더 붉게 타오르는 초고열 용광로.
월스와일의 말에 귀철이 화답했다.
“미지근하다. 더욱더 뜨겁게!”
자고로 장비라는 건 사용자에 대한 배려가 있어야 한다.
오른손잡이, 왼손잡이, 그에 따른 손잡이의 설계부터 사용자의 능력을 섬세하게 고려하는 것까지. 그러나 귀철이 월스와일을 부채질한 이상.
“무엇이 됐든 감당할 수 있다는 거겠지, 그대의 주인은?”
배려가 없는 오직 성능만을 위한 장비가 탄생하리라.
그것이 체인워커가 얼굴을 감싸 쥔 것도 모자라 마른세수를 한 이유였다.
그런 무지막지한 장비를 호열 경이 다룰 수 있을까? 그러나 걱정이 무색하게도.
“물론이다. 계속해서 말하지 않았던가?”
누구보다 그를 가까이서 지켜봐 온 귀철이 말하고 있었다.
“그의 그릇은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을 만큼 방대하다!”
그랬다.
그 목소리엔 확신이 있었다.
“더 이상의 걱정은 그대에 대한 의심이 되겠지.”
덕분에 체인워커는 물론.
“진정 그렇단 말인가?”
망치를 들고 있던 월스와일도 걱정을 떨쳐낼 수 있었다.
월스와일은 다짐했다.
“좋다!”
단 한 번도 내지 않았던 진심을 쏟아내어 보리라.
“그렇다면, 월스와일이 그대를 전력으로 벼려내 주마!”
“좋다! 바라던 바다!”
파앗!
*
좋긴 개뿔이 좋을까!
하이엘, 디엔드, 귀철까지.
다들 의도는 알겠다.
전부 나를 위해서 그런 거겠지.
하지만 과한 충성심이 때론 나를 벅차게 만드는구나…….
귀철이 월스와일과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을 줄이야.
월스와일이 명품을 넘어선 역사에 남을 장비를 만들겠다고.
밤낮으로 귀철을 두들기기 시작했다니.
‘결과물이 걱정된다.’
퀴른베르크 기계탑을 시작으로.
수백만 악마를 쓸어버렸던 아이언 캐슬 호의 광선포까지.
드워프들의 기술력을 말 그대로 온몸으로 실감했던 나였다. 그런 드워프들 중에서도 최고로 손꼽히는 월스와일이 진심을 다하겠다 선언했다니.
‘……나 착용할 순 있는 걸까.’
막말로 레벨 제한 1,000짜리 아이템이 탄생하면?
정말이지, 그림의 떡이 따로 없겠구나.
물론, 그런 속내와는 상관없이 나는 지껄였다.
“나의 무기로서 훌륭한 자세로군.”
그랑펠에게 레벨 제한 따위야 숫자, 수치에 불과하니 문제가 되진 않겠지.
결국, 이 또한 나답게.
뻔뻔하게 꼼수로 해결하는 수밖에.
그렇지 않아도 [사악한 지룡의 송곳니]로 연습 중이다.
여러 가지 사용법들을 말이야.
이내, 디엔드의 감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과연, 주군이십니다.”
……헛소리를 당연하게 여기지 말아줘라. 제발.
진심이 느껴지지만, 마냥 기뻐할 수 없다.
그렇지만 청승맞게 불쌍한 척을 할 여유도 없다.
움직이기 시작한 아르카나 대륙의 악마들.
[마왕 쟁탈전]이 코앞으로 다가왔으니까.
나는 입을 열었다.
“하이엘, 디엔드.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거라.”
“말씀에 따르겠습니다.”
“존명.”
“그리고 전하거라.”
드워프와 드레드센 생존자들에게 당부를 덧붙일 필요는 없겠지.
그들을 포함해 아르카나의 생존자들은 생지옥에서 누구보다 치열하게 발버둥 쳐왔으니까.
그들에게 무언가를 바라는 것은 나의, 그랑펠의 긍지가 허락하지 않는다.
이제부터는 이쪽, 우리 차례라는 말이다.
“그대들의 긍지가 우리에게 닿았노라고.”
*
유스라 왕국, 황금 궁전.
그림자 용병단의 단장으로서 수많은 금은보화를 만져본 키치였지만, 황금 궁전의 화려함에는 도무지 적응되지 않았다.
사뿐사뿐─
그러나 황금 궁전을 가로지르는 키치의 발걸음은 오늘따라 유난히 가벼웠다.
표정도, 분위기도 오늘 아침까지와는 정반대였다.
“저기, 단장.”
2석, 울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술 마셨어?”
“안 마셨는데? 왜? 한잔 땡겨? 울프가 웬일?”
“아니, 그런 게 아니라 기분이 좋아 보여서 말이지.”
아까만 하더라도 키치의 얼굴은 ‘죽.상’이었다.
정말이지, 누구 하나 ‘죽일 것 같은 상’.
그 이유야 뻔했다.
어쨌거나 같은 배를 탄 단원.
말석, 락키드가 엘프에게 중상을 입었으니까.
그런 상황에 자신은 술에 취해 단잠에 빠져있었으니까.
여러모로 화를 주체하지 못하는 게 당연한 거겠지.
황금 궁전 별실.
키치가 들어서자 제각각 딴청을 피우던 단원들의 시선이 집중됐다.
거기엔 이제 막 정신을 차린 락키드도 포함이었다.
락키드가 반쯤 잠겨 더욱 걸걸한 목소리로 말했다.
“……거, 단장.”
“뭐야? 일어났어? 팔다리가 덜렁거리더니!”
“씁, 말하는 꼬라지하고는 정나미 떨어지게.”
그에 대한 설명은 7석, 알카리가 대신했다.
“마탑의 마법사가 이곳에 들렀었네.”
“그랬구나……. 가 아니라 마, 마탑의 마법사가?! 왜?! 혹시 누구 뭐 잘못한 사람 있어? 너희 마왕성 균열 때 헛소리한 거 들켰지?”
“큰일 날 소리를 하는군, 단장.”
“엥? 아냐?”
“락키드가 멀쩡히 깨어난 이유가 뭐겠는가?”
“그야 오우거처럼 무식하게 튼튼해서…….”
아니지, 락키드의 상처는 중상이었다.
알카리가 제작한 포션조차도 별 효과가 없을 정도로.
그런데 저렇게 멀쩡하게 깨어났다는 건…….
“설마, 그 마탑 마법사가 락키드를?!”
“맞네. 그중에서도 선임 마법사께서 직접 행차하셨었지.”
“……걔네들이 왜?”
키치는 마법사란 족속을 잘 알고 있었다.
암살 의뢰 명단에 숱하게 오르는 게 바로 마법사들의 이름.
더러운 성질머리에 대한 증거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하겠지.
마탑의 마법사라면 더하면 더하지, 절대 덜하지 않을 터.
‘애초에 접점이랄 게 없는데……?’
마왕성 균열 말고 다른 접점이 있었나?
생각하던 키치의 머릿속에 순간.
스쳐 지나가는 인물이 있었다.
“……이호열 총대장?”
알카리가 클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요청으로 부상자를 치료하러 왔다고 하더군. 황홀할 정도의 마법이었네, 그건. 방대한 마력이 락키드의 몸을 감싸더니……!”
알카리의 생생한 표현이 무색하게도.
키치의 귀엔 아무것도 들려오지 않았다.
머릿속에 맴도는 목소리 때문에.
-“그대들을 책임지는 것은 나다.”
키치가 피식 웃었다.
‘책임 한번 제대로 지시네, 이번 고용주님께선.’
물론, 그 사연을 알 턱이 없는 락키드였다.
스륵─
락키드가 천천히 자신의 거구를 일으켜 세웠다.
“그래서 그 새낀 어디에 있는 거야?”
“그 새끼?”
“그 귀 큰 새끼 말이야. 당했으니까 갚아줘야지. 이 빚을.”
고용주님께서 간신히 숨을 붙여놨더니만.
뭐?
빚을 갚아?
키치의 눈매가 다시금 가늘어졌다가.
“이게 아직도 정신을……! 후우, 아니다. 락키드.”
다시금 원래대로 돌아왔다.
아직 뭘 모르고 있으니까, 저런 반응을 보일만도 하지.
울프가 화를 억누르라 바쁜 키치를 대변했다.
“일단 진정하라고, 락키드. 그런 상태로 가능하겠어?”
“활쟁이가 뭘 안다고 떠들지? 다시 붙으면 내가 이긴다.”
“그래? 뭐, 그렇다면야.”
울프는 어깨를 으쓱이고 키치를 바라봤다.
그를 따라 모든 단원의 시선이 키치를 향했다.
말했다시피 그림자 용병단에겐 규율이 있었으니까.
빠득─!
락키드가 이를 갈았다.
“반드시 당한 만큼 갚아준다.”
드디어 본론을 꺼낼 차례네.
키치가 입을 열었다.
“아침에 얘기했던 것처럼. 이호열 총대장, 그와 대화를 나눴어. 엘프의 처리에 대해서.”
“우리에겐 명분이 있으니까. 이야기는 잘 끝났겠지? 그래서 귀 큰 새끼는 지금 어디에……!!”
“우선 진정하고 들어, 락키드. 엘프, 그 엘시도어라는 녀석은 지금 황금 궁전에 있어. 우리처럼 별실에 머물고 있다고 하더라고.”
“……뭐?”
락키드는 흠칫했다.
기절하는 바람에 끊긴 기억.
남아있는 기억 속에서 엘프는 미친놈과 다를 바 없었다.
강함을 떠나서 알아듣지 못할 말만 지껄이지 않나, 다짜고짜 덤벼오질 않나. 누구의 말도 들을 생각이 없어 보였으니까. 그러니까 이야기를 듣고서도 믿을 수 없었다.
“그, 그 새끼를 무릎 꿇렸다고?!”
그것도 입 몇 번 뻐금거린 것만으로?
“…….”
락키드는 믿을 수 없어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증거가 있었다.
다름 아닌 귀 큰 녀석이 황금 궁전에 얌전히 처박혀 있다는 거겠지.
마법은 물론, 자신조차 알아볼 수 없는 경지에 도달한 검기도 모자라서.
이번에는 말로 엘프를 복종시켰다는 건가?
“터무니없구만.”
락키드는 슬쩍 키치를 바라봤다.
‘……어쩌면 단장보다도 큰 목표를 찾은 건지도.’
기뻐할 일이었지만, 확실하게 해야겠지.
“그래서 그게 빚을 갚아주는 거랑 무슨 상관인데, 단장?”
락키드의 말엔 오류가 없었다.
울프와 알카리를 비롯해서 모든 그림자 용병단원들의 이목이 다시금 키치를 향했다.
키치가 머리를 쓸어올리며 우쭐거렸다.
“원하는 건 녀석의 목숨이잖아?”
“역시, 단장이군. 잘 알고 있잖아?”
“그에 관해서 우리 고용주, 총대장님께서 말씀하셨거든.”
“……?”
기대감을 고조시키듯.
단원들을 둘러본다.
충분히 뜸을 들인 키치가 말을 이었다.
“목숨보다도 값진 걸 뱉어내겠다고 만들겠다고.”
“……!!!”
키치의 말에 모두가 흠칫했다.
목숨보다 갚진 걸 뱉어내겠다고 만들겠다니.
그거 아무리 봐도…….
“우리가 잘하는 ‘그거’잖아?”
목숨을 담보로 한 고문, 심문, 협박!
락키드가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이거 우리 총대장님에 대한 호감도가 올라가는데?”
빡빡한 줄 알았는데.
의외로 통하는 구석이 있었잖아?
키치가 허리춤에 손을 얹고 호탕하게 웃었다.
“봐봐, 내가 왜 웃으면서 돌아왔는지 알겠지?”
락키드가 넙죽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단장. 다 계획이 있구나!”
“그러니까 성질 좀 죽이라고, 락키드. 영겁의 세월을 산다는 엘프들이야. 조금만 캐도 엄청난 정보가 쏟아져 나올지 모르는 일 아니겠어?”
“그렇지! 빚이야, 그다음에 갚으면 되니까. 하하하!”
“물론, 넌 그 전에 주점 외상부터 갚아야겠지만.”
“아.”
오가는 만담 속에서 울프는 어깨를 으쓱였다.
‘다들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데요?’
이호열.
그는 아무리 봐도 우리와 같은 족속처럼 보이지 않았으니까.
분명, 단장이 멋대로 착각하고 있는 거겠지. 언제나처럼.
물론, 굳이 정정할 생각 따윈 없었다.
키치가 이내, 의미심장하게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이제부터 우리 할 일은 간단해.”
“……!”
“엄청난 정보를 위해서. 엄청난 보물을 위해서. 안락한 노후를 위해서. 고용주님에게 눈도장을 찍는 거지.”
때마침 판이 벌어져 있지 않던가?
“최선을 다해보자는 거야, 성전(聖戰)에서!”
*
전원 집결.
장소는 유스라 왕국 황금 궁전.
약속 시각은 정오.
하르콘은 프로스트에서 오전 훈련을 마치자마자 황금 궁전을 찾았다.
정오까지는 아직 몇 시간이나 남았지만, 임무를 수행 중인 예시카와 에노크를 만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어라? 늦으셨네요. 저는 아까아까아까 도착했는데.”
“……?”
그런데.
자신보다 일찍 약속 장소에 도착한 이가 있었다.
전혀 상상하지 못한 인물, 키치였다.
하르콘은 흠칫했다.
제국조차 통제할 수 없었던 그림자.
아르카나 대륙의 흑막.
그림자 용병단.
저들에게 대체 무슨 바람이 불었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