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167화 (99/489)

◈ 167화. 소중한 것을 남겼군 (3)

란샤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어?”

어둠이 악마를 집어삼켰다.

거기엔 소리도 소란도 없었다.

“가드너, 무슨 일이 있는 건가?”

잠에서 깨어난 이들은 영문조차 알 수 없을 정도로.

“아무것도 아닙니다, 어르신.”

상황을 그대로 알릴 필요는 없겠지.

악마가 나타난 것도 기겁할 일이었거늘.

그런 악마를, 정체 모를 어둠이 집어삼킨 상황이었으니까.

“대체……?”

가드너는 다시금 어둠을 바라봤다.

과거 용병으로 대륙을 떠돌던 시절.

마법사도, 마법도 목격했던 가드너였지만.

사람의 말을 하는 검은 ‘무언가’라니.

저런 건 본 적이 없었다.

문득, 란샤가 중얼거렸다.

“……디엔드 크리시아드 이터널 다크니스.”

“응? 방금 뭐라고 한 거냐, 란샤.”

“아무래도 자기 이름을 말한 것 같아요!”

“이, 이름이라고?”

이름치고는 굉장히 길지 않은가?

마치 위대한 가문의 귀족님 이름처럼.

란샤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주군, 한없이 깊은 어둠에 따라서…….”

한없이 깊은 어둠?

가드너는 미간을 찌푸리고 필사적으로 기억을 되살렸다.

하지만 용병에서 은퇴한 지도 벌써 수십 년이다. 대륙에 떠돌던 수많은 이명(異名)들을 기억해 내기엔 그동안 퍼마신 포도주가 너무 많았다.

그러나 이름이나 소속 따위가 무엇이 중요하겠는가?

“분명, 드레드센을 구원하겠다고 말했어요!”

말했다시피 드레드센은 아주 작은 마을이었다.

제국령에서도 변방.

대접받기 좋아하는 높으신 분들조차도 외면하는 곳이 드레드센이란 말이다. 관심을 두고, 애써 채찍질을 해봐도 나오는 게 없었으니까.

“이해할 수가 없는 일이군.”

가드너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이런 말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주군이라 불릴 정도의 거물이 어째서 우리 같은 것들을 신경 쓴단 말인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위기에 처한 건 드레드센뿐만 아니었다.

인근의 모든 마을, 도시, 심지어는 제국 수도성까지.

아르카나, 모든 게 악마의 손에 무너지고 있는 상황이다.

그중에서 하필 아무것도 없는 우리를 구원한다고?

그러나 의문은 오래가지 않았다.

어둠, 디엔드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그대들이 가슴 속 긍지를 잃지 않았기 때문이다.”

“……긍지?”

“마지막까지 악마에게 굴복하지 않은 그 사내처럼.”

“……!!!”

모두가 알 수 있었다.

그 사내는 마테를 말하는 게 확실했다.

꾸욱─

순간, 검을 붙잡고 있던 란샤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다짜고짜 긍지라니.

단번에 알아듣는 쪽이 이상한 거겠지.

란샤가 입을 열었다.

“……마테의 최후를 어떻게 알고 계신 거죠?”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의문은 여전했다.

드레드센은 산골 마을이다.

말 그대로 하늘에서 내려보지 않는 이상, 마을에서 벌어진 일을 알 수는 없었을 텐데……. 하지만 그 순간, 하늘에서 커다란 소음이 들려왔다.

투두두─

“?!”

란샤와 가드너를 비롯한 이들이 하늘을 올려다봤다가 기겁했다.

마안으로 형형한 밤하늘.

그런 마안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모습을 드러낸 거대한 형체.

저건 분명, ‘배’였다.

“뭐야, 저거!”

“가, 가드너 아저씨?!”

“라, 란샤! 나한테 물어도 모른다. 하늘을 나는 배라니!”

경악하는 이들에게 디엔드가 말을 이었다.

“설령, 세상이 그대들을 외면했을지라도.”

“……?”

“나의 주군은 그대들을 외면하지 않는다.”

어째서인가, 그 목소리가 더없이 너그러웠다.

“나 또한 주군께 구원받은 것처럼.”

*

마탑.

계단을 오르며 머릿속으로 끝없이 되뇌었다.

……외면하고 싶었거늘, 이런 날이 오고야 말았다.

‘주둥이가 결국 일을 냈구나.’

다른 것도 아니고 ‘어둠’의 정령이시다.

나의 빌어먹을 작명 센스가 이런 식으로 발현될 줄 짐작했다는 말이다. 하이엘 때와 마찬가지로……! 너그럽게 퍼스트 네임까지는 봐줄 만했다.

‘디엔드.’

하지만 역시나 뒤가 문제였다.

[디엔드 크리시아드 이터널 다크니스].

뭐든 적당히 해야지, 진짜로!

이터널 다크니스라니.

영원한 어둠이라니.

정말이지, 떠올릴 때마다 눈을 감고 영원한 어둠에 파묻히고 싶을 정도의 수치심이 샘솟는구나……. 하지만 이 또한 내가 감당해야 할 무게이다.

그래, 정령이 둘로 늘어났으니 무거운 게 당연하단 뜻이다.

‘그게 전부터 고맙긴 한데.’

정령학 선임 마법사, 페이얀은 양피지를 통해 서신을 전달해 왔다.

{고유 정령}은 계급도, 정령 계약조차도 초월한 존재. 그렇기에 기존의 계약은 파기된다고.

‘왜, 하이엘이 자연 능력을 사용해도.’

내 마력량에는 변화가 없었으니까.

고유 정령이 뭔가 특별하긴 하구나, 나도 짐작하긴 했었지.

그런데 새로운 정령과 새로운 계약이 가능할 줄이야.

당연하게도 나는 망설이지 않았다.

어둠의 정령.

그 기세는 등장만으로 페이얀의 계약 정령이자 상위 정령, 파이어 드래이크를 긴장하게 할 정도.

게다가 텟퍼른 미궁에서 어둠의 정령의 능력을 확인했던 나였으니까.

[어둠의 정령왕, 아케인 계약을 축복합니다.]

나는 계약을 맺고, 맺은 김에 이름까지 붙여줬다.

그 이름이 더없이 해괴해서 문제였지만 말이야…….

그러나 후회는 없다.

‘하이엘과 디엔드는 달라.’

고유 정령으로 각성.

[숭고]의 영향으로 보다 성장한 하이엘이었지만, 애초에 태생이라는 게 있다. 하이엘은 숲의 정령으로 전투에 특화된 정령이 아니라는 것이다.

뭐, 누굴 닮아서인지는 몰라도…….

‘그런 것치곤 잘 싸우는 편이지만.’

줄기를 솟아나게 했다가 사라지게 했다가 요령껏 몬스터를 상대하기도 했다만.

어둠의 정령에 비할 바는 되지 못한다는 것.

그러니까 나는 디엔드에게 드레드센을 맡겼다.

[퀘스트 : 깨어난 결전병기의 의뢰]

악크샨의 결전병기 퀴른베르크 기계탑.

의문에 대한 대답 대신 선택한 것은 긍지였다.

기계 장치의 기억은 남겨진 생존자들을 지키길 원한다.

─드레드센 마을 생존자를 구원하라. (성공)

그 결과가 메시지로 나타나 있었다.

과연, 수치심을 이겨내고 부른 보람이 있구나.

보란 듯이 성공할 줄 알았다, 디엔드.

‘마력 소모량도 그럭저럭 괜찮았지.’

[첫 세계수의 축복]이 상시 발동 중인 지금.

마력 소모량에 쩔쩔매던 과거의 내가 아니란 말씀.

혹시나 디엔드가 강적과 마주해 내 마력을 사용해도 괜찮다는 뜻이었다. 뭐, 마력이 멀쩡한 걸 보면 그런 일은 없었던 것 같았지만.

또각─

나는 크리스탈 홀에 다다랐다.

원탁 회의.

플레이어들이 마탑에 입성한 뒤론 첫 원탁회의인가?

어째, 다들 긴장한 기색이 역력하군.

물론, 내가 할 일은 없다.

나는 나를, 정확히는 내 입방정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

‘독설만 쏟아낼 게 뻔하지.’

개구리 올챙이 시절 생각 못 하고 말이야.

탐색, 간섭, 발현조차 모른다고.

잔소리를 쏟아낼 미래가 뻔히 보였단 말이다.

그러니까 오늘은 가만히 입 꾹 다물고 있자.

그저 바지 수석으로서 회의에 참석만 하자.

다짐하는 와중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오랜만에 뵙네요, 이 수석님.”

벨리에였다.

인사에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격식이란 무엇인가?

정중한 인사에는 성심껏 화답하는 것.

마르셀로 걱정을 덜어서 그런가.

얼굴이 전보다 훨씬 밝아진 것 같군.

내가 대꾸하려던 순간이었다.

“……어라?”

별안간 벨리에의 시선의 나의 가슴팍을 향했다.

정확히는 라펠의 브로치를.

벨리에의 동공이 휘둥그레졌다.

“브로치가 하나 늘어나셨네요, 수석님? 그런데 뭔가 원래 착용하셨던 브로치랑 하나처럼 잘 어울리네요! 아니, 그런 걸 떠나서 아름다워요.”

작은 변화까지 알아차리는 눈썰미는 물론.

심미적인 관점 또한 모자람이 없군.

합격이다, 벨리에 선임.

그랑펠은 물론이요, 나도 살짝은 우쭐거리고 말았다.

‘알아봐 줘서 섭섭하지 않네.’

[이름 :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

[칭호 : 최후의 모험가, 숭고]

[클래스 : 악마 사냥꾼]

[레벨: 544]

[능력치]

근력 : 90 / 민첩 : 100 / 마력 : 423 / 행운 : 10 / 심미 : 中

[보유 포인트 : 50]

퀴른베르크 기계탑에 축적된 경험치는 예상대로였다.

최대치, 50레벨이 단번에 상승했으니까.

덕분에 가뿐하게 500레벨 돌파.

두 번째 육망성 브로치를 착용할 수 있었다는 거지.

[육망성 브로치 2/6]

[등급 : 유니크]

[제한 : Lv.500]

[효과 : 모든 물리 공격 피해량 10퍼센트 상승.]

[설명 : 여섯이 모여 하나가 되는 브로치 중 일부이다. 극히 일부에 불과하기에 그 효과가 상당히 손실되었다.]

마탑에서 대여한 마도구들 없이 [심미]도 [中]으로 상승했다.

그러니까 아무리 내색하지 않으려고 해도 가슴이 벅찰 수밖에.

그야 나는 이제 고작 한 개의 적금을 깼을 뿐이었으니까.

‘보자, 아르카나 대륙에 기계탑이 몇 개더라?’

못해도 일백 개는 될 터.

머릿속에 숫자가 둥둥 떠다닌다.

어째 최근 들어 부탁하는 게 많아 염치가 없었지만.

‘그럼에도 부탁한다, 아이언 캐슬 호야.’

산산조각 났어도 상관없다.

부디, 기계탑의 잔해를 최대한 많이 찾아주길 바란다. 물론, 나의 복잡하고도 세속적인 속마음이 겉으로 드러날 일은 없었으니.

나는 간결하게 대꾸했다.

“고맙네, 벨리에 선임.”

우당탕─

별안간 요란한 소리와 함께 가까워진 얼굴 하나.

화염마법학 선임, 벤쉬 윌리엄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저도 말씀드리려고 했었는데!”

무엇을 말인가?

출탑 신청서에 관한 이의제기인가?

나는 벤쉬를 빤히 쳐다보았다.

“역시, 새 브로치도 잘 어울리십니다!”

그 이야기였나.

세상에 칭찬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

게다가 새로운 육망성 브로치는 나의 노력을 증명하는 훈장과도 같았으니. 기분이 나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냉랭하게 대꾸하고 말았다.

“불필요한 대화는 삼가도록 하지, 벤쉬 윌리엄 선임.”

“……네? 네에에?”

나와 벨리에를 번갈아 가며 쳐다보는 벤쉬.

굉장히 억울한 모양이다.

사실 나야 벤쉬가 원망스럽긴 하다.

그놈의 출탑 신청서!

그따위로 적어서 제출할 거면 뭣 하러 매일같이 작성한단 말인가? 하지만 공명정대한 그랑펠에게 그런 사사로운 감정은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그랬다.

모든 것은 단지 절차에 따라서.

마르셀로가 단상에 올라선 참이었으니까.

“회의 도중에 잡담은 금지다.”

“……!!!”

크리스탈 홀을 봐라, 벤쉬.

아직 마탑이 어떤 곳인지도 잘 모르는 플레이어들조차 조용하게 침묵하고 있지 않은가? 심지어 누구 하나 잔소리를 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내가 이런 말까지는 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벤쉬 윌리엄.

그대는 눈치가 없어도 너무 없다.

출탑 신청서 그렇게 쓸 때부터 내가 알아봤다.

진짜로.

.

.

.

“나 진짜 숨소리라도 들릴까 봐, 숨 막혀 죽는 줄 알았잖아!”

“벤쉬 윌리엄이면……. 화염마법학 선임 마법사 아니야?”

“선임한테 그렇게 말한 거야? 진짜 무섭다, 이호열!”

“근데 이해가 되지 않아?”

“……엥? 뭐가?”

“아니, 아르카나 대륙에 진입한 것도 모자라서 수백만 악마를 사냥하고 돌아왔다고 하잖아? 그것도 모자라서 다친 곳도 하나 없었다고 하고……!”

*

원탁회의가 끝나고 나는 균열에 진입했다.

[그리핀의 절벽]

[적정 레벨 : Lv.500]

[붕괴 진행도 : 14.7%]

500레벨을 훌쩍 넘어선 지금.

웬만한 균열의 적정 레벨은 내게 의미가 없었다.

위험하지 않다기보다는, 어떤 균열에서 사냥해도 레벨 업은 무리라는 뜻에서 말이지. 지난번에 말했던 것처럼 시간 대비 효율이 떨어졌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균열에 진입한 이유?

뭐, 여러 가지가 있다.

가장 먼저 긍지에 따라서.

‘드레드센의 주민들이 무사한지부터 확인해야겠지.’

그 과정에서 수치심을 무릅쓰고 디엔드를 소환해야겠고, 하이엘을 통해서 아이언 캐슬 호의 상황도 알아둬야 한다. 겸사겸사 에고 장비의 진척도도 물어보자고.

하지만 그 전에…….

순식간에 뒤바뀐 풍경.

전봇대 위엔 어느샌가 독수리 머리.

맹수의 몸통을 가진 그리핀이 있었다.

[날카로운 발톱의 그리핀 : Lv.500]

내 존재를 알아차린 것일까.

끼에에엑─!

시끄럽게 울부짖자 균열 곳곳에서 그리핀이 몰려들었다.

머릿수가 어림잡아 십수 마리.

나는 입을 열었다.

“불필요한 방해로군.”

그런데 뭐, 나쁘지 않다.

‘그렇지 않아도 궁금했던 참이었거든.’

지원자는 새든, 짐승이든, 뭐가 됐든 환영이다.

나는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꼬리를 흔들며 얌전히 굴어도 부족하거늘. 날개를 펼치고, 발톱을 세우고, 소란스럽게 떠들기나 하다니. 맹수와 새의 좋지 않은 점만 닮았구나.”

특히 육망성 브로치의 방향을 신경 써서 정렬했다.

“허나 유감스럽게도 오늘 훈육은 원탁회의에서 끝난 참이다.”

그랬다.

지금이야말로.

육망성 브로치의 세트 효과를 확인할 기회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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