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5화. 소중한 것을 남겼군 (1)
폭풍전야.
마왕 쟁탈전을 기점으로 본격적으로 시작될 성전.
그럼에도 시간은 언제나처럼 흘러갔다.
유스라, 프로스트, 뮤온, 마탑, 마지막으로 균열까지.
플레이어들은 자신들의 위치에서 성장에 박차를 가했다.
“으아, 죽겠네 진짜!”
이제껏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일상이었다.
균열을 공략하고도 쉴 틈이 없다니.
자유로운 일과, 칼퇴, 저녁 있는 삶.
플레이어를 택한 가장 큰 이유가 사라져 버린 요즘이었다.
“그놈의 긍지가 대체 뭐길래.”
사람을 이렇게 피곤하게 만든단 말인가?
그러나 꾹 참아야만 했다.
이를 악물고 악으로 깡으로 버텨내야만 했다.
“그만 툴툴대. 너랑 엮여서 쫓겨나고 싶은 맘은 없거든?”
“뭐래. 쫓겨나긴 누가 쫓겨나? 내가 끝까지 버틴다.”
“그래, 입만 좀 다물어 봐.”
그야 이건 흔히 오는 기회가 아니었으니까.
자타공인 제국 최강의 기사단, 라이언 하트.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했던 시절이었다면.
플레이어들은 웬만한 명성으로는 사자 심장의 기사들과는 대화를 나눌 수도. 아니, 접점조차도 가질 수 없었다. 하지만 성전을 앞둔 특수한 상황.
대화나 접점이 문제겠는가?
무려 사자 심장의 기사 지도 아래에서 훈련을 받고 있었다.
“기초 체력은 모든 것의 기본. 자, 뛰게나들!”
프로스트 훈련장엔 하르콘의 호쾌한 목소리가.
“훈련 도중 잡담은 금지입니다.”
유스라 훈련장엔 예시카의 엄격한 목소리가 울렸다.
뮤온의 사정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참회 기도만 몇 시간째야, 이게.”
“하씨, 쥐 날 것 같아.”
“전 하체에 감각이 없어진 지 오래전이에요.”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리는 사제들의 입가에선 신음.
“내가 왜 성기사 같은 걸 선택해서는!”
“바바리안은 웃통이라도 깔 수 있지.”
“판금 갑옷이 원망스럽다, 진짜…….”
성기사들은 구슬땀을 쏟아냈다.
마탑의 사정 또한 크게 다르지 않았다.
마탑의 도서관.
방대한 마법 서적의 양에 플레이어들은 우선 한 차례 감탄했다.
그다음엔 그 서적의 수준에 경악했다.
고위 마법에 관련된 서적이 이렇게 많았다니.
“……근데 이게 대체 뭔 소리냐?”
“탐색, 간섭, 발현……?”
“긍지 뺨 때릴 정도로 이해가 안 되잖아.”
당연한 일이었다.
『마법』과 [스킬]은 완전히 다른 개념이었으니까.
하지만 수석 마법사, 마르셀로조차도 아직 완벽하게 이해 못 한 그 사실을. 이제 막 견습 마법사가 된 플레이어들이 이해할 수 있을 리가.
“나. 수능 공부 다시 하는 것 같아.”
“……공부하긴 하셨어요?”
“했으면 내가 아르카나에서 랭커를 찍을 수 있었겠니.”
“뭐야.”
실없는 소리가 저절로 나올 정도로 현학적인 내용.
과거의 마탑이었다면.
견습 마법사의 고뇌 따위엔 누구도 관심을 두지도 않았겠지. 각자가 잡히지 않을 진리만 보고 나아가던 게 과거의 마탑이었으니까.
뒤처지는 이들은 보살피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러나.
“뭐? 크리스탈 홀에서 비정기 학회가 열린다고?!”
마탑은 달라졌다.
더 이상 헛된 진리를 쫓지 않았다.
헛된 진리를 좇느라 자신들의 주변을 업신여기지 않았다.
드넓은 크리스탈 홀.
수석, 마르셀로가 크리스탈 홀 중앙에 섰다.
플레이어들 덕분인가, 평소보다 홀이 가득해 보였다.
‘어느 누구보다 많은 생각을 한다고 자부하지만.’
이론마법학의 창시자.
모든 마법을 이론으로 정리하기 위해서.
평소 모든 것을 다양한 관점으로 바라봤던 마르셀로였다.
그 과정에서 다양한 생각이 뒤따르는 건 자연스러운 일.
하지만 그 수많은 상상 속에서도.
모험가들 앞에서 학회라니.
지금과 같은 풍경은 없었다.
‘물론, 지금과 같은 내 모습도.’
육체는 여전히 앙상했지만 더 이상 삐걱거리지 않았다.
입으로 피가 역류하지도, 통증이 느껴지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정신이 맑았다.
원래 머릿속이 이렇게 또렷한 것인가.
새삼스럽게 깨닫게 될 정도로.
그쯤 되니 다시금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정말 시한부의 저주가 사라졌다는 건가?’
호열 경이 처치한 수백만의 악마 중 저주와 관련된 녀석이 있어서? 말도 안 되는 우연이다. 그렇기에 진지하게 고려하지도 않았거늘.
헛된 기대를 품지 않았거늘.
‘그런 행운을 제가 거머쥐어도 되는 겁니까?’
시무아르드가의 저주.
먼저 떠난 이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가듯 떠올랐다.
“…….”
잊고 있던 감정을 떠오르게 하였다.
이내, 마르셀로가 어깨를 으쓱였다.
‘아니, 지금은 감상에 빠져있을 때가 아니다.’
그래, 감상에 빠져있기에는 나아갈 길이 멀고도 험하다.
게다가 호열 경이 아르카나 대륙에서 가져다준 행운을.
단, 한순간도 헛되이 낭비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런 마르셀로가 입을 열었다.
“이론마법학은 추상적인 마법 구조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정립되었습니다. 탐색이 무엇이며, 간섭은 무엇인가, 어떻게 마력에서 마법을 발현할 수 있는가…….”
.
.
.
유스라 왕국, 황금 송아지 주점.
락키드가 부상으로 치료 중인 지금.
주점엔 때아닌 평화가 찾아왔다.
크으─
피로를 씻어내는 술.
술을 목구멍으로 넘김과 동시에.
플레이어들은 경쟁하듯 엄살을 뱉어냈다.
“농담 아니고, 너희가 하르콘 단장 성격을 몰라서 그렇다니까? 괜히 사자가 아니야. 눈을 시퍼렇게 뜨고 노려보는데……!”
“차라리 뛰는 게 낫지.”
“뭐래?”
퍽퍽퍽.
자신의 허벅지를 거칠게 두들기는 사제.
그러나 표정엔 걱정스러울 정도로 미동이 없었다.
“새벽부터 조금 전까지. 무릎 꿇고 기도만 하다 왔다. 이거 봐, 하체에 감각이 없어. 아니, 그걸 떠나서 피가 안 통해서 머리가 핑글핑글 돌 정도였다니까?”
내가 불쌍하네.
아니, 내가 더 불쌍하네.
엄살이 오가던 와중에 들려온 소리.
쾅!
일단, 락키드는 아니었다.
“……넌 또 왜 테이블에 머리를 박고 그래?”
“마탑에서 무슨 일 있었어?”
“있었지. 내가 돌대가리라는 걸 깨달았지. 이거 봐. 이렇게 세게 머리를 박았는데도 멀쩡하잖아? 진짜 자괴감 든다. 탐색은 개뿔. 내 머리에 뭐가 들었나 탐색부터…….”
마탑에서 어떤 고생을 했길래.
상태가 아주 심각해 보였다.
그래, 세상에 쉬운 일이 어디 있을까.
서로서로를 위로할 시간도 부족했으니까.
“됐다. 한잔해.”
짠─
술잔을 마저 기울이던 세 플레이어.
그중 한 사내가 문득 운을 떼었다.
“근데, 이호열 말이야.”
“씁! 이호열이 뭐야. 우리 성전 총대장님한테.”
“우리끼리만 있는데, 쫌. 하여튼 호열 님 말이야.”
그놈의 호칭 때문에 말 한마디 하기가 힘들어서야.
사내가 멋쩍게 입맛을 다시곤 말을 이었다.
“어떻게 살아있는 계시는 거지?”
그 어느 때나 당당한 호열이었다.
행보에 거침도 숨김도 없었으니.
유스라 왕국, 프로스트, 마탑을 오가는 호열의 일과는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러니까 이해가 되지 않았다. 분명, 하르콘은 말했었다.
“천하의 호열 경조차도 체력 단련은 하루도 빠지지 않고 수행한다고…….”
하르콘뿐만 아니었다.
“……잠깐만, 너넨 아직 그 소식 못 들었지? 마탑에 자자한 이호열 총대장님의 소문. 진짜 듣고도 믿기지 않아서 몇 번이나 확인했는데.”
마탑에도, 뮤온에도 자자한 호열의 영웅담.
대화를 나누고 나니까 더더욱 이해가 되지 않았다.
“체력 훈련도 모자라서 마탑에 복귀해서는 수석 업무를 처리하느라 집무실에서 꼼짝도 않는다고? 그러면서 균열이 생성되면 누구보다 먼저 나타나고? 그런 생활을 쭉 반복하고 있다고?!”
그게 정녕 사람이 맞단 말인가?
.
.
.
나, 이호열은 선언한다.
[첫 세계수의 축복]이 필요 없다고 했던 발언은 전격 철회다.
이건 사람 사는 게 아니다……!
‘세계수의 축복이라도 없었으면.’
나 진짜 과로사로 황천을 건넜겠구나.
일단, 무엇보다 급격하게 늘어난 체력 단련량이 문제였다.
축복 버프 덕분에 육체에 피로도는 쌓이지 않았지만, 양이 늘어나니 투자되는 시간도 늘어날 수밖에.
지금도 봐라.
벌써 몇십 분 째 팔굽혀펴기만 하고 있다.
나는 떠오르는 메시지를 응시했다.
─나약해진 육체를 단련하라. (반복) ▲
●40KM 달리기 (성공)
●팔굽혀펴기 3,500회 (성공)
●턱걸이 2,000회 (성공)
●버피 테스트 1,200회 (성공)
드디어 성공.
오늘도 버텼구나, 한시름 놓았구나.
하지만 입에서는 속내와 다른 말이 튀어나온다.
“고통 없이는 없는 것도 없는 법이거늘. 이런 게 축복이라니.”
……진짜 그놈의 똥고집!
그래 뭐, 어느 정도는 공감한다.
왜, 가끔은 팔과 다리가 후들거려야 제대로 훈련을 한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다음 일과를 떠올리면 이것만큼 배부른 투정도 없다.
스륵─
쉴 새 없이 책상에 반듯한 자세로 착석.
넘기는 것은 서적이었다. 파놓은 살 구멍, 우물이 한두 개가 아니었으니까.
날마다 읽어야 하는 책의 분야도 정말이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구나.
‘내 대가리로는 평생 붙들어도 이해를 못 했겠지.’
그러나 그랑펠의 두뇌가 있었으니까.
나는 보기만 해도 기겁할 양의 서적 지식을 머릿속에 차곡차곡 새겨넣었다.
물론, 배움엔 끝이 없다고 하던가? 도무지 끝이 보이질 않았지만 말이야.
또한 수석으로서의 업무까지.
그래도 다행인 건 마르셀로가 완전히 회복한 덕분에 업무량이 적어졌다.
게다가 마르셀로는 마탑에 입성한 플레이어들의 적응을 위해 애쓰고 있었지.
‘내가 플레이어들을 상대해야 했었으면…….’
그것만큼 끔찍한 일이 또 없다.
마탑의 견습, 숙련 마법사들에게 쏟아낸 것보다 더한 독설을 쏟아낼 게 뻔했으니까. 인터넷에 이호열 독설, 인성 논란으로 속보가 떠오르지 않았을까.
“타인의 시선과 평가 따위 의미 없다.”
당사자께서는 어련하시겠느냐마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퀘스트 : 끝나지 않은 성전(聖戰)].
나는 성전의 총사령관이나 다름없었다.
유스라, 프로스트, 뮤온, 마탑. 거기에다가 플레이어들까지 가세한 성전의 총사령관. 정말이지, 미치도록 부담스러운 감투가 아닐 수 없다.
‘그런 중책을 떠맡을 짬밥이냐고 내가.’
마탑까지 갈 것도 없겠지.
하르콘만 하더라도 그 레벨이 무려 600레벨.
전투나 전쟁 경험 또한 나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으니까.
그러나 핑계는 대지 않겠다.
적어도 [마왕 쟁탈전]이라는 대사건을 앞둔 지금은 그럴 시간조차 부족하거든.
“숫자는 숫자에 불과하다.”
그래, 뻔뻔하게.
짊어진 무게를 감당하겠다는 뜻이다.
내가 또 그런 거라면 자신이 있거든.
왜, 절대 꺾이지 않는 그랑펠의 설정이 있었으니까.
『과소평가에는 증명을. 과대평가는 기어코 현실로 만들어 내고야 말았으니까.』
물론, 덕분에 죽어나는 건 나였다.
독서가 끝나면 곧장 유스라 왕국으로 넘어가서 성전에 관한 대비를 해야 한다. 내가 괜히 세계수의 축복에 감사한 게 아니란 말이다.
“그러나 실전감각을 유지하는 것 또한 중요한 일이겠지.”
또 시간이 날 때마다 균열에 진입해서 검강 발산, 마법 발현, 티끌 모아 태산이라고 사냥을 통해 경험치까지 적절하게 챙겨줘야 했으니까.
정말, 쉴 틈이 없잖아.
오죽했으면 녹차가 그리워서 입이 마르고.
티타임이 기다려질 정도다.
탁─
나는 책장을 덮고 나서 현재 생성된 균열의 정보를 살폈다.
보자, 현재 가장 높은 적정 레벨의 균열은…….
……그런데, 뭔데.
뭐냐, 이 기사는?
[생생취재 : 마탑에 떠도는 소문……. 이호열, 수백만 악마를 고작 두 시간 만에 처치하다?]
틀린 말은 아닌데.
누가 봐도 오해의 소지가 분명하잖아?!
지금도 쏟아지는 과대평가에 다가가기 위해서 죽어라 발버둥 치고 있는 나였거늘.
거품이 꺼지기는커녕 더욱더 늘어나다니.
그러나.
“발 없는 말치곤 느리구나.”
누구를 원망하겠냐?
모든 건 내 입방정이 자초한 일이었다.
결국, 부지런히 발버둥 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나는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단정하고 꼿꼿한 차림새.
짊어진 무게에 가라앉지 않기 위해서라도.
.
.
.
휘청거리지 않겠다고 다짐했건만.
다짐이 무색하게도.
균열에 진입한 나는 내색하지 않은 채 긴장하고 있었다.
하이엘이 내게 고개를 숙인다.
“말씀하셨던 퀴른베르크 기계탑 심장부의 잔해입니다.”
고개를 숙인 채로 말을 덧붙인다.
“그 손상 정도가 심각해 드워프들이 조금이라도 상태를 복원하려 노력했지만, 성과가 없었습니다. 저 하이엘, 호열 님의 부탁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해 면목이 없습니다.”
지나치게 공손하다, 하이엘.
누가 보면 내가 세계수처럼 빡빡하게 군기라도 잡는 줄 알겠어.
나는 너그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고개를 숙일 필요 없다.”
“……?”
“이것으로 충분하다.”
처참하게 박살이 난 퀴른베르크 기계탑의 심장부.
그 제작자인 드워프들조차 고칠 수 없는 상태라고 한들, 문제없다.
나에게는 과거부터 지금까지.
애용해 오던 꼼수가 있었으니까.
『반전 마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