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4화. 또 하나의 천적관계 (2)
엘프.
세계수에서 태어나는 존재들.
아무래도 그들에게 세계수의 축복은 태생적으로 거부할 수 없는 규율인 모양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나는 내 앞에 무릎을 꿇은 엘시도어를 바라봤다.
‘싸가지 없는 성격에 이런 수치를 참고 있을 순 없겠지.’
아무리 그랑펠에게 물들었다고 한들.
다짜고짜 엘프에게 꿇어라.
말할 정도로 중증 환자는 아니다, 내가.
격식을 강요하는 거라면 또 모를까.
그랬다, 내가 엘시도어에게 건넨 말은 그저 한마디.
“우물 안 개구리에겐 예절 교육이 필요하겠군.”
……순간, 꿇어라보다 개구리가 모욕적인 말인가 싶었지만.
그래도 틀린 말은 아니잖아?
엘프의 땅, 시슬리에만 머물다가 밖으로 나와서 그런가.
엘시도어에게선 격식은커녕.
상식 수준의 화법도 찾아볼 수 없었으니까.
[엘프, 엘시도어에게 ‘축복의 위계질서’가 발생합니다.]
그러더니 한 차례.
메시지가 점멸하고.
지금이었다.
“……감히 나를.”
털썩─
엘시도어가 무릎을 꿇었다.
그것도 모자라 손에서 검을 놓쳤다.
이것이 바로 [축복의 위계질서]의 효과였다.
‘내 말에 거역할 수 없다는 건가?’
세계수가 얼마나 심하게 군기를 잡았길래!
얼핏이나마 사연을 짐작하고 있는 나조차도 흠칫할 정도의 광경이었는데. 지켜보는 이들의 시선은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아무래도 너무 놀라면 말조차 나오지 않는다는 말이 사실이었나 보다.
“…….”
그래서 그런가, 플레이어들 쪽은 오히려 고요했다.
“이 수석님. 이건……?”
천하의 마티스가 말꼬리를 흐렸으니.
슬슬 내가 어떤 짓을 저지른 건지 실감이 난다.
어쨌거나 다행이다, 정말로.
나는 락키드 쪽을 바라봤다.
‘일단, 무사해서 다행이고.’
마탑의 선임 마법사 정도 되면 다른 분야의 마법이더라도 중급 수준까지는 발현할 수 있다. 마티스라면 응급처치쯤이야 어렵지 않게 해낼 수 있었겠지.
꾸벅─
동료를 구하기 위해서 전부 달려온 건가?
어느샌가 모습을 드러낸 그림자 용병단.
보이지 않는 단장, 키치를 대신해 울프가 내게 고개를 숙였다.
동료가 왔으니 더 이상 락키드 쪽을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
그렇다면.
“……나를, 이 엘시도어를 이런 꼴로 만들고 무사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마라.”
남은 건 잘나신 엘프의 처분뿐이겠군.
그런데 이런 꼴이라니.
유감스럽게도 한참 착각하고 있군.
‘아직 본격적인 처분은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말이지.’
무엇보다 [축복의 위계질서]가 어떤 효과를 가지고 있는지 알게 된 지금. 내 자신감에는 근거가 생겼다는 말이다. 나는 그 어느 때보다 당당한 목소리로 말했다.
“대화를 나누기에 이런 장소는 적합하지 않군, 엘시도어.”
“감히 내 이름을……!”
“몰상식한 발언부터 자제하도록.”
“……!!!”
[엘프, 엘시도어에게 ‘축복의 위계질서’가 발생합니다.]
일단, 그 주둥이부터 좀 다물고 시작하자.
*
AAU.
이번에야말로 변명은 없었다.
미국 서부 지부장.
짐 조슈아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우리는 이 사태를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
엘프는 먼 훗날 등장할 미완성 콘텐츠였다.
확정된 설정은 단지 몇 가지 배경 설정에 불과했으니까.
그 설정에서 비롯된 엘프가 다짜고짜 인류에게 노골적인 적의를 드러낼 줄은 예상조차 할 수 없었단 뜻이었다.
나비효과라고 하던가?
몇 안 되는 배경 설정 중 하나.
엘프는 영겁의 세월을 산다.
그 짧은 설정에서 저런 괴물이 태어날 줄이야.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너무나도 압도적이기에.
미지의 공포로 다가올 수밖에 없는 무력(武力).
마왕을 포함해서 여태껏 봐온 것과는 차원이 다른 강함이었다.
그러나 인류에겐 한 명의 플레이어가 있었다.
마왕의 앞에서도.
미지의 공포 앞에서도.
한결같이 꼿꼿한 영웅이 있었다.
“그리고 이호열 플레이어에게 다시금 빚을 졌습니다.”
이호열.
그는 흉신악살처럼 날뛰던 엘프를 멈춰 세운 것도 모자라 무릎을 꿇게 만들었다.
그 과정에서 무력을 사용했는가?
그것도 아니었다.
단지 엘프와 몇 마디 대화를 나눴을 뿐.
한 차례 고개를 숙인 짐 조슈아가 선언했다.
“이제부터 미국은 성전에 참전.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겠습니다. AAU 유스라 지부 창설 반대 의견 또한 전격으로 철회하며 유스라 지부의 발전을 돕기 위해서…….”
드디어 고집이 좀 꺾이셨나?
“이걸로 만장일치군.”
박민재는 어깨를 으쓱였다.
물론, 깊은 물 속은 알아도 사람 속은 모른다고.
저 행동이 긍지에서 우러나온 행동인지.
아니면 철저한 계산에서 나온 행동인지.
아직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했다.
화상회의 끝.
박민재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모든 게 변하고 있어, 이호열. 그를 중심으로.”
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레이먼 션, 당신도 이런 전개는 예상하지 못했겠지?”
*
유스라 왕국.
황금 궁전.
나는 엘시도어를 궁전의 별실에 머물게 했다.
‘이런 싸가지가 뭐가 예쁘다고 이 호화 궁전에.’
마음 같아서는 마탑의 지하.
무간에 가둬두고 싶었거늘.
무간이 어떤 공간인지는 원로 마법사.
아니, 악마 숭배자들의 몰골을 봐서 잘 알고 있었다.
엘시도어에게는 아직 물을 게 많았으니까.
폐인이 되어버리면 골치가 아파진다.
그러나 아무리 심문이 급하다고 한들.
모든 일에는 순서와 절차가 있는 법.
나는 마탑에서 수석의 업무를 처리하고 난 뒤에야 별실을 찾았다. 별실 입구를 지키고 있는 건 라이언 하트 기사단, 예시카와 에노크였다.
‘나 때문에 야근이라니.’
까라면 까야 하는 사회인의 비애를 잘 알고 있는 내가 아니던가?
특히나 예시카는 서큐버스 때도 그렇고, 일복이 넘쳐나는구나.
나는 두 사람에게 심심찮은 위로를 건넸다.
“고생이 많군.”
“아닙니다.”
“그보다 하르콘 단장님을 통해 경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소식, 무슨 소식?
에노크의 말에 나는 흠칫했다.
머릿속에 스쳐 가는 갖가지 기행.
설마, 나의 우산 격투 소식을 들은 건가?
그게 아니라면 한없이 깊은 어둠 속 뭐시기?
그것도 아니라면 악룡 사냥꾼?
그보다 하르콘 씨, 그런 소문을 왜 부하직원에게!
“한 차례, 더 높은 경지에 이르셨다니. 정말 대단하십니다!”
아, 검강(劍罡) 말하는 거였어?
젠장, 이 정도면 도둑이 제 발 저린 걸 넘어서 부러지는 정도 아닐까. 흑역사의 업보치고는 너무 가혹하다……. 순간, 수치심이 솟구쳤지만 철면피에 변화는 없다.
나는 뻔뻔하게도 지껄였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검기는 더욱더 짙어지는 법.”
“……!”
“그대들에게도 깨달음을 얻게 될 날이 올 것이네.”
그저 [최후의 모험가] 효과 덕분이었거늘.
의미심장하게 포장하지 마라, 그랑펠.
가만히 있으면 절반이라도 건진다고.
그냥 입 좀 다물자, 제발.
“그 말씀 명심하겠습니다.”
비장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이지 마라, 예시카.
그 이상의 대화는 정신적 자해와 다름없었다.
나는 곧장 별실의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마자 열렬한 시선이 쏟아졌다.
엘시도어가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 □□□. □□□□.”
정확히는 입을 뻐금거렸다.
[축복의 위계질서] 발동.
나는 엘시도어가 별실에서 벗어날 수 없도록.
그리고 정숙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명령이라고 거창하게 표현한 이유는 간단했다.
정말로 명령에 복종하듯.
엘시도어는 내 말을 거스를 수 없었으니까.
위계질서의 효과에 감탄하는 건 그쯤 해두고.
‘엘프, 영겁의 세월을 사는 존재라고 했겠다…….’
시슬리에만 머물렀다고 해도 짬밥이라는 게 있는데.
왜, 알고 있는 아르카나 대륙 관련 정보도 상당하지 않을까? 그중에서 고급 정보가 섞여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천천히 하나씩 물어보자.
“이제부터 질문에 대한 답변을 허가하겠다.”
“……?”
“그대들, 엘프는 성전에 관련되어 있는가?”
물론, 우선이 되는 것은 그랑펠의 긍지겠지.
엘프가 성전에, 악크샨의 절멸에 관련되어 있었는지.
그 여부에 따라 그랑펠의 심문 강도는 달라질 수밖에 없을 터.
“그까짓 벌레들의 일에 관심 따위…….”
스탑.
저기요, 아직 상황파악이 안 되시나 본데.
나는 엘시도어의 말을 끊고 냉랭하게 말했다.
“그렇다. 혹은 아니다로만 답하도록.”
“……아니다.”
봐봐, 공손하게 대답하니까 얼마나 좋아?
빠득─
이 가는 소리.
엘시도어는 제멋대로 튀어나오는 말 때문에 성질이 난 모양이었다.
물론 나, 이호열의 시선에서는 저것보다 심한 엄살도 없었다.
‘나보다 훨씬 낫구만.’
과거의 흑역사도 모자라서.
실시간으로 흑역사를 더해가는 내 처지에 비하면 양반이네.
덕분에 나는 위계질서를 양심에 가책 없이 활용.
대충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결국, 모든 게 세계수의 축복 때문이었다는 것인가?”
“……그렇다.”
“아르카나 대륙도, 악마 때문도 아니라.”
“……그렇다.”
엘프.
그들이 첫 세계수가 뿌리를 내린 땅이자 자신들의 고향.
시슬리에서 아르카나 대륙으로 모습을 드러낸 이유는 단 하나.
첫 세계수가 자신들에게서 거둬간 축복.
그 축복의 행방을 알아내기 위함이었다.
“그 행보에 방해되는 것은 모조리 짓밟았다.”
“……그렇다.”
나는 나도 모르게 생각했다.
진짜 긍지라고는 코딱지만큼도 없네, 얘네!
관심사가 오직 자신들의 영생뿐이라니.
그저 입방정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랑펠의 말에 틀린 말이 없었다. 내가 세계수였어도 말이야. 너희들에게서 축복을 거둬갔겠다, 진심으로.
‘그나저나 축복이 원래는 엘프의 축복이었을 줄이야.’
나는 그냥 버프인 줄로만 알았지.
첫 세계수의 축복에 이런 뒷사정이 엉켜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사정을 알고 나니까 나를 향해 적대감을 드러내는 이유도 짐작되는걸.
‘내가 빼앗았다고 생각하는 거겠지.’
그러나 착각도 그런 착각이 없다.
나는 또 한 번 엘시도어를 향해 선언했다.
“내게 축복 따윈 필요 없다.”
“……아니다.”
……내가 필요 없다는데 뭐가 아니라는 거야.
순간, 의문이 들었다가 뒤늦게 이해했다.
맞다, 위계질서.
실수하지 않는 걸 보니까 군기가 바짝 들어있네.
“긍지와 맞바꾼 축복 따위.”
“……?”
“무의미하다는 뜻이다.”
그랑펠에게 첫 세계수의 축복?
말했다시피 단순한 버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힐러들의 버프도 냉랭하게 거절했던 내가 아니던가?
신 따위 믿지 않는다는, 종교적 이유를 들어가면서 말이야.
물론, 나도 마찬가지다.
축복의 효과?
엄청나다.
마왕 쟁탈전도 모자라서, 상위 마왕들과 맞붙을 미래를 생각하면 절대 포기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대단하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끔찍하다.
‘영생이라니.’
……그거 평생 그랑펠에게 시달리며 살아가야 한다는 말이잖아!
나이를 먹고 철이라도 들면 모를까.
어디, 그랑펠의 긍지가 세월이 흐른다고 꺾일 긍지란 말인가?
“……아니다!”
허나, 엘시도어는 언성을 높였다.
자신들에게서 축복을 빼앗아 간 녀석이.
정작 축복 따윈 필요 없다는 소리를 하는 꼴이었으니까.
‘열이 받는 것도 이해가 되긴 하네.’
그래도 뭐 좋다.
모든 것엔 주고받음이 있는 법이니까.
그러니까 나도 필요한 정보 하나 정도는 말해주지.
달칵─
나는 찻잔을 내려놓고 말을 이었다.
“세계수의 축복을 돌려받길 원하는가?”
찰나지만, 엘시도어의 표정이 움찔거렸다.
“……그렇다.”
그렇겠지.
하지만 나에게는 필요 없는 축복이라고 해도, 그걸 남에게 넘겨주는 방법? 유감스럽게도 나는 그런 거 모르거든.
나 또한 첫 세계수에게서 축복을 넘겨받은 것뿐이었으니까.
그러니까.
“원한다면 가져가 보는 게 어떻겠나?”
“……?”
“내가 세계수에게 선택받은 것처럼.”
“……!”
“그대들 또한 세계수 앞에서 긍지를 증명해 내란 뜻이다.”
나도 맨입으로 내어줄 생각은 없다는 말씀이시다.
*
마탑.
─해당 지역에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라. (성공)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 낸 플레이어들에겐 기회가 주어졌다.
마탑의 견습 마법사로서 능력을 발전시킬 절호의 기회가.
물론, 마탑에서는 첫걸음을 떼기조차 쉽지 않았다.
삐끗!
“으허억!”
“조심하세요!”
“아, 감사합니다.”
세상에 이런 걸 계단이라고 만들어 놓다니!
허공에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마탑의 계단.
적응을 논하기 이전에 감탄이 들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그렇게 반듯하게 왔다 갔다 한 거야?”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발을 헛디딜 만도 했건만.
마탑을 오르내리는 호열에게서는 일말의 흔들림도 없었으니까.
“그냥 호멘이다. 호멘이야.”
중얼거리던 플레이어에게 불쑥, 누군가 다가왔다.
“까, 깜짝이야!”
“호멘이라. 그게 무슨 뜻인지 여쭤봐도 될까요?”
경쾌하게 흔들리는 땋은 머리.
“……네?”
“흠흠, 참고로 저는 ‘숙련’ 마법사 지브릴이라고 합니다.”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
“숙련 마법사면……?”
선배님이시다.
곧장 지브릴의 요지를 파악한 플레이어가 대답했다.
“그러니까 호멘은 이호열 플레이어. 아니, 이호열 수석…….”
지브릴은 잠자코 호열과 호멘에 얽힌 이야기를 경청했다.
그런 지브릴의 눈이 점차 휘둥그레졌다.
이거, 아무래도 제대로 착각하고 있었군요?
“위대한 가문의 수준이 아니라…….”
모험가들의 세계에서 신과 같은 위치에 계셨잖아요!
햇병아리 모험가에게 이런 귀한 소식을 얻게 될 줄이야.
이대로 입을 닦는 건 귀족답지 못한 행동이겠지.
지브릴이 흡족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이호열 수석께서 마탑에서는 어떤 존재이신지. 아직 짐작조차 못 하고 계실 당신을 위해서. 저, 숙련 마법사 지브릴이 하나부터 열까지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아, 넵! 부탁드리겠습니다.”
“우선 이호열 수석님께선 수백만 악마를 두 시간 만에…….”
“네? 바, 방금 뭐라고요?!”
발 없는 말이 날개를 달고 활강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