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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163화 (95/489)
  • ◈ 163화. 또 하나의 천적관계 (1)

    나는 마티스와 마탑을 거닐었다.

    거닌다고 해도 고작 계단 몇 개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한가하게 앉아서 대화를 나눌 새가 없다.

    “이호열 수석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대화 주제는 당연하게도 엘프였다. 유그위드나 마르셀로 못지않게 마티스도 엘프에 관해서 많은 걸 알고 있는 눈치였다. 거기엔 이유가 있었다.

    “흑마도학의 정립을 위해 대륙을 떠돌던 시기였습니다.”

    마티스는 다른 마법사들보다 출탑이 잦았던 모양이었으니까.

    내가 출탑의 전권을 맡게 된 지금이야, 이유만 그럴싸하면. 그러니까 벤쉬 윌리엄처럼 헛소리만 적어놓지 않으면 출탑은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과거의 마탑에선 출탑은 흔히 있는 일이 아니었지.’

    마탑이 마티스에게 걸었던 기대가 컸다는 증거겠지.

    마르셀로 등장 이전.

    유력한 차기 수석 마법사 후보로 여겨지던 마티스였으니까.

    “고대의 서적에서 종종 엘프에 관한 글귀를 접했었습니다.”

    “그 내용을 기억하고 있는가?”

    “그렇습니다.”

    이어지는 마티스의 말을 요약하자면 간단했다.

    ……엘프, 장난이 아니잖아?

    한마디로 아르카나 세계관에서 엘프들은 선택받은 유이(唯二)한 종족이었다. 명실상부 아르카나 최강의 생명체, 드래곤과 함께 말이다!

    흠잡을 곳 없는 용모는 기본.

    세계수에서 성년의 모습으로 태어난다.

    육체적, 정신적 능력은 인간으로선 범접할 수 없는 수준이다.

    쉽게 말하자면 좋은 건 다 가져다가 붙인 종족이 바로 엘프였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거늘.

    있는 놈들이 더한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라니까?

    “드래곤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영겁의 세월을 향유하는 존재들이라 전해졌습니다. 물론, 전설에 불과하기에. 진실은 누구도 알 수 없지만 말입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목덜미가 싸늘해졌다.

    ……그러니까 저런 능력을 가진 엘프들이 싸가지가 없다는 거잖아? 얌전하게 시슬리란 곳에 머물다가 갑자기 아르카나 대륙, 그것도 모자라서 현실에 튀어나온 거고.

    머리가 지끈거렸건만, 내색은 할 수 없었다.

    나는 태연하게 지껄였다.

    그러고는 마티스가 발현한 포탈로 진입했다.

    “그렇다면 진실을 확인할 좋은 기회겠군.”

    싸가지…….

    아니, 엘프와 마주하게 되는 마당에 쓸데없이 마력을 소모해서 좋을 건 없겠지. 이내, 순식간에 뒤바뀌는 시야. 이내, 나는 나의 판단에 감탄하고 말았다.

    후각을 파고드는 피비린내.

    상처투성이의 거구, 락키드.

    마지막으로 플레이어들까지.

    역시, 마력을 아껴놓길 잘했군.

    “멈춰라.”

    무엇보다 먼저 이놈의 주둥이가 뛰쳐나갔다.

    ……언제나처럼 내뱉고 생각하니까 말이야.

    이거 아무래도 큰일 난 것 같다.

    [천적관계]가 발동되지 않는 걸로 봐서 악마는 처치된 거겠지.

    문제는 그 수많은 악마를.

    누가, 이 찰나의 시간 만에 쓰러트렸냐는 말이다.

    분위기만 봐도 짐작이 가는데.

    일단, 플레이어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겠지. 900레벨 악마족 몬스터를 상대할 수 있는 플레이어는 현시점에서 나 빼고는 없을 테니까.

    그리고 락키드도 아닐 거다.

    미래를 예측하고 움직인 게 아닌 이상.

    시간상 불가능한 일일 테니까.

    그렇다면 가능성은 하나뿐이다.

    저 엘프가 혼자서 모든 악마를 처치했다.

    그것도 모자라서 락키드를 저 꼴로 만들었다.

    이유?

    그딴 건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랑펠의 긍지가 저런 꼴을 가만히 보고 있을 순 없는 게 당연하다. 그러니까 다짜고짜 말부터 내뱉은 거겠지.

    ‘……뒷감당은 내가 하게 생겼고.’

    냉정하게 생각해 보자.

    내가 저 엘프와 맞서 싸울 수 있을까?

    그림자 용병단의 락키드조차 저런 꼴이 됐는데.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있겠냐.

    [천적관계]라도 발동된 상태라면 모를까.

    특기가 주제 파악인 만큼.

    절대 이길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단 말이다.

    그렇다면 나의 믿을 구석, 마티스는 어떤가?

    솟구치는 이질적인 마력.

    강자는 강자를 알아본다는 건가.

    마티스는 시작부터 전력을 다하려는 눈치였다.

    순간, 머릿속에 떠오르는 용마대전.

    천하의 마탑에게 패배를 선사했던 드래곤이다.

    그런 드래곤과 비슷한 취급을 받는 존재가 엘프고.

    비로소 내가 무슨 짓을 벌인 건지 실감이 된다.

    하여튼 말로 매를 버는구나……!

    그러나 더 이상의 자책은 없다.

    그랑펠을 탓하기엔 눈앞의 엘프가 부담스러워도 상당히 부담스러웠으니까. 일단, 마력부터 장전하자. 검강의 경지에 올랐다고 해도, 상대가 원하는 접근전은 해줄 필요가 없…….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던 순간이었다.

    [엘프, 엘시도어에게 ‘축복의 위계질서’가 발생합니다.]

    눈앞에 메시지가 떠오르더니.

    ……움찔!

    “!”

    엘프가 그대로 멈춰버렸다.

    누구보다 놀란 건 나도, 마티스도 아닌 당사자였다.

    엘프, 메시지에 떠오른 정보에 따르면 엘시도어겠지.

    엘시도어가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너는 대체 무엇이냐?”

    이호열이다.

    이름 정도 대답해 주는 거야 어렵지 않은 일이겠지.

    하지만 ‘당신’도 아니고 ‘너’라니.

    격식 없는 질문에 대답할 리가 없는 나였다.

    그런데, 어째 궁금한 게 내 이름이 아니었나 보군.

    “어떻게 네까짓 인간이 어머니의 축복을……!!”

    순간,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는 단어들.

    [첫 세계수의 축복].

    [축복의 위계질서].

    [엘프].

    비로소 나는 깨닫고 말았다.

    ‘첫 세계수의 축복이 엘프와 관련된 거였나?’

    추측이 확신이 된 건 축복의 효과 때문이었다.

    생명력, 마력 재생력 효과는 그럴 수 있다고 치고 넘어가더라도. ‘거절’이라는, ‘친화력’보다 상위 개념의 효과는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였으니까.

    [첫 세계수의 축복이 노화를 거절합니다.]

    엘프가 영생을 살아가는 이유가 따로 있는 게 아니었군.

    엘시도어가 나를 향해 살기를 뿜어댔다.

    “나는 용납할 수 없다. 인정할 수 없다.”

    “……?”

    “네놈에게서 어머니의 축복을 거둬가고 말 것이다.”

    곁에서 잠자코 듣고 있는 마티스는 어리둥절한 눈치였다.

    그럴 만도 하겠지.

    한껏 이질적인 마력을 끌어올렸는데.

    엘시도어가 굳어버린 것도 모자라서.

    축복인가, 뭔가 하는 말만 지껄이는 꼴처럼 느껴질 테니까.

    나는 엘시도어에게서 시선을 옮겼다.

    주위를 둘러봤다.

    그러고는 엘시도어에게 말했다.

    “목적은 오직 축복뿐이었는가.”

    “뭐라고?”

    “축복 때문에 이런 만행을 벌인 것인가.”

    사방이 락키드의 피로 흥건하다.

    공포에 하얗게 질린 플레이어들의 얼굴까지.

    그러나 엘시도어는 조금도 자각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이해할 수 없는 말을 지껄이는군.”

    이해할 수 없다고?

    “가로막았기에 짓밟았을 뿐이다. 악마든, 인간이든.”

    나, 이호열은 참을 수 있는 말이었다.

    그러나 그랑펠은 아니었다.

    나는 마티스에게 말했다.

    “마티스, 락키드의 치료를 부탁해도 되겠는가?”

    “말씀에 따르겠습니다.”

    “고맙군.”

    모든 것엔 절차가 있다.

    엘시도어를 상대하는 것도 좋지만, 치명상을 입은 락키드의 부상을 치료하는 게 우선. 고용 관계라고 하더라도, 그 또한 성전에 참전한 귀중한 전력이었으니까.

    나는 엘시도어에게 말을 이었다.

    “이유와는 별개로 이 행동에 관한 책임은 엄중히 묻겠다.”

    “오만하구나. 당장에라도 숨을 끊어놓고 싶을 정도로.”

    “격식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태도 또한 반영하겠다.”

    “……격식?”

    “내 오후 시간을 빼앗은 것 또한 반영하겠다.”

    “……?”

    엘시도어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뭔 개소리를 하는 건가, 싶겠지.

    그래, 다른 건 그렇다고 치더라도.

    티타임 때문에 화났다는 건 조금도 짐작할 수 없을 테니까 말이야.

    그런데, 입장을 바꿔 생각해 봐라.

    “이깟 축복이 그렇게도 탐이 났단 말인가.”

    다짜고짜 개소리를 지껄인 건 너도 마찬가지잖아.

    축복에 대해 알지 못한다고.

    검을 휘두른 건 선을 넘어선 방종이었단 뜻이다.

    나의 물음에 엘시도어의 얼굴이 더욱더 일그러졌다.

    “어떻게 우리의 축복을 가로챈 건지 알 수 없지만, 원래부터 네 것이었던 것처럼 우쭐대지 마라. 너는 알지 못한다. 어머니의 축복이 어떤 의미를 가졌는지.”

    말은 똑바로 하네.

    그래, 내가 세계수의 축복의 효과는 알아도 의미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세계수의 축복이 아무리 뛰어난 효과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너처럼 축복 때문에 아무 관련도 없는 사람을 찌를 생각은 없거든.

    이 가슴 속에 긍지가 존재하는 이상.

    “내게 축복 따윈 필요 없다.”

    더 나아가서 드높은 자존감을 가진 그랑펠에게 축복 같은 건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었으니까. 엘시도어의 목소리가 거칠게 떨리기 시작했다.

    걷잡을 수 없는 살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축복의 위계질서.

    정확한 효과를 알 순 없어도 일단 감사하자.

    엘시도어의 움직임을 완전히 제압한 덕분에 이렇게 뻔뻔하게 지껄일 수 있었으니까. 물론, 안도의 속마음이 겉으로 내비치는 일은 없었으니.

    나는 언제나처럼 태연하게 읊조렸다.

    “그러나 이해가 되는군.”

    “……?”

    축복을 빼앗겨 천불이 난 엘프, 엘시도어.

    “긍지를 잃은 그대들에게 축복은 있으나 마나 한 것일 테니.”

    “……!”

    그 속에 부채질도 모자라서.

    “그대들이 세계수에게 버림받은 건 당연한 절차란 뜻이다.”

    “!!!”

    기름을 쏟아부었다.

    .

    .

    .

    참상.

    락키드가 엘프에게 난도질을 당하는 모습은 잔혹하기 그지없었다.

    정규 방송에서는 차마 송출되지 못할 정도로. 술에 취해 테이블에 엎어진 키치를 대신해, 울프가 입을 열었다.

    “전원 준비하도록. 이번에도 신세 좀 지겠습니다, 영감님.”

    “잠잠하다 싶었더니 일이 터졌구만, 그래.”

    “……저저 내가 나대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아, 귀찮아.”

    계약 혹은 돈으로 맺어진 관계.

    그림자 용병단 단원들 사이에 우정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단원의 사망은 곧 그림자 용병단의 명예 실추.

    락키드가 당하는 꼴을 보고만 있을 순 없다는 뜻이었다.

    꼴깍─

    알카리가 포션을 들이켜며 마력을 끌어올렸다.

    그 와중에도 스크린에선 영상이 떠올라 있었다.

    마찬가지로 전장에 있는 넷튜버 플레이어의 중계였다.

    3석, 핸더슨이 냉정하게 전투를 평가했다.

    “승산이 없군, 그래!”

    핸더슨.

    락키드가 도끼라면, 핸더슨은 거대 망치를 휘두르는 무투파였다.

    그렇기에 누구보다도 락키드의 완력을 잘 알고 있는 핸더슨이었다.

    “어쩌면 우리로도 부족할 수 있겠어!”

    보잘것없는 검 한 자루로 락키드의 일격을 막아내다니.

    그것만으로도 놀라운 일인데.

    죽음을 각오한 락키드와 달리 엘프는 전력조차 내지 않고 있었다.

    철컥─

    울프가 석궁을 장전하며 말했다.

    “뭐든, 해보기 전까지는 모르는 법이지.”

    “하핫! 그건 맞는 말이지만!”

    “그나저나 영감님, 재촉하는 건 아닌데 말입니다…….”

    고위 마법, 포탈.

    발현하기 쉽지 않다는 건 알고 있다.

    그래도 더 이상 시간을 끌었다가는 락키드가 위험했다.

    알카리가 가쁜 숨을 내뱉었다.

    “마법사도 아닌 늙은이에게 바라는 게 지나치게 많아. 마탑 마법사들, 그리고 호열 경을 봐서 눈이 높아진 탓이겠지. 포탈 발현은 탐색 과정부터 엄청난 집중을 요구하는 마법이라고. 알고 있는가들?”

    쏟아지는 잔소리.

    어쨌거나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소리였으니까.

    울프가 다리를 떨며 인내하던 순간이었다.

    “어, 어어어?!”

    정적에 빠진 황금 송아지 주점.

    곳곳에서 설마 하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스크린 속에서 일렁거리는 마력의 움직임.

    포탈 때문에.

    “……영감님?”

    하실 수 있으면서, 영감님 괜히 엄살을 부렸던 건가.

    울프는 알카리 쪽을 바라봤다가 흠칫했다.

    “이제야 간섭 과정이야. 아직 멀었네. 기다리게.”

    저건 알카리의 포탈이 아니었다.

    마력의 빛무리 속에서.

    그 정체를 먼저 알아본 건 플레이어들이었다.

    “이, 이호열이다!!”

    ……호열 경이라고?

    악마가 나타난 곳에 호열이 나타나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거악부터 마왕까지.

    악마가 나타나는 곳에는 그가 있었으니까.

    그러나 이상한 일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울프, 보고 있는가! 저 괴물이 멈춰 섰네!”

    락키드에게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문답무용.

    호열에게 달려들던 엘프가 그대로 멈춰버린 것이었다.

    마법인가 싶어서 6석, 이자벨마를 바라봤거늘.

    도리도리─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마력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소리였다.

    곳곳에서 원성이 터져 나왔다.

    “뭐라는 거야? 하나도 안 들려!”

    “멀리서 찍어서 그런가 본데.”

    “……하긴 이걸 가까이서 찍길 바라는 건 너무한 거겠지?”

    호열과 엘프.

    두 사람이 뭐라 대화를 나누는 것 같았는데, 소리가 들리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그림자 용병단에는 입 모양만으로 대화 내용을 추측할 수 있는 우수한 정보원이 있었다.

    9석, 드쉐브가 입을 열었다.

    “동행한 마법사에게 락키드의 치료를 부탁했어.”

    “!”

    “그리고……. 그 책임을 엄중히 따져 묻겠다는데?”

    화면조차 고르지 않아 모든 대화를 알아들을 순 없었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울프가 자신도 모르게 작게 웃음을 흘렸다.

    “용병을 걱정해 주는 외뢰인은 오랜만인데.”

    그 순간, 알카리가 외쳤다.

    “됐네, 다들 서둘러!”

    포탈 발현.

    더 이상의 인내는 없었다.

    울프를 비롯한 그림자 용병단 전원의 눈빛이 돌변했다.

    ‘제아무리 호열 경이라고 하더라도.’

    울프는 호열의 육체적 능력을 파악하고 있었다. 사격을 비롯해서 무언가를 습득하는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였지만, 현시점에서 단순한 육체 능력만을 비교하자면…….

    ‘분명하게 락키드보다 아래였다.’

    그런 락키드를 압도한 엘프를 상대하는 것?

    호열 경이라고 하더라도 절대 호락호락하지 않을 것이다.

    울프는 머릿속으로 판단을 내렸다.

    울프만큼이나 많은 실전 경험.

    다른 단원들의 생각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속전속결로 제압하는 게 좋겠군!”

    시작부터 전력으로 임한다.

    그림자 용병단이 무기를 치켜든 순간.

    전장이 시야에 들어왔다.

    정확하게는.

    “……호열 경?”

    엘프를 무릎 꿇게 한 호열이 보였다.

    .

    .

    .

    나는 자각하고 말았다.

    [축복의 위계질서].

    이거 [천적관계]보다 더한 천적 전용 스킬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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