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162화 (94/489)
  • ◈ 162화. 엘프 (2)

    그림자 용병단.

    그들의 강함은 오히려 대격변 이후에 널리 알려졌다.

    과거엔 그림자 용병단의 명성을 소문으로만 짐작할 수 있었다면, 지금은 현실에서 그들의 능력을 지켜볼 수 있었으니까.

    그중에서도 락키드는 유명인사였다.

    “왜, 어제도 한 명 기절했잖아요.”

    유스라 왕국.

    황금 송아지 주점에선 락키드의 술주정이 명물로 여겨졌다.

    간혹가다 오지랖이 넓거나, 불의를 참을 수 없는 플레이어들이 락키드에게 시비를 걸었다가 그 값을 호되게 치르곤 했다.

    “말로는 고막이 터졌다나 뭐라나?”

    그저 고함만으로 300레벨이 훌쩍 넘는 플레이어를 기절시켜 버리다니!

    락키드를 둘러싼 소문은 거기서 끊이지 않았다.

    주목받는 걸 즐기는 락키드가 아니던가?

    락키드의 전투 영상은 인터넷상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다.

    -그냥 무식하기만 한 줄 알았는데 ㄷㄷ

    -괜히 그림자 용병단 소속이 아니잖음;;

    -저 몸으로 이렇게 빨리 움직인다고? 말도 안 되네ㄹㅇ

    그런 락키드에게 매스컴의 관심이 쏟아지는 건 당연했다.

    역시나 관심이 고팠던 락키드였기에.

    락키드는 기자들 앞에서 자신의 과거를 자랑스럽게 늘어놓았다.

    -ㄹㅇ? 콜로세움의 무법자가 락키드였다고?

    -그 100승 무패의 검투사?

    -아니 잠깐, 뇌까지 근육인 사내도 락키드라는데?!

    -뭐야뭐야 인간의 탈을 쓴 오우거도 락키드였어?!!

    간만에 들어도 뭣 같은 이명들이었지만.

    락키드는 썩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비로소 자신의 강함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는 것 같았으니까.

    그런데.

    콰콰콰콰쾅!

    “이런 미친!!”

    믿을 수 없는 일이 펼쳐졌다.

    카가가각!

    튀기는 불씨.

    락키드는 양손 도끼를 치켜들어 간신히 검격을 막아냈다.

    그럼에도 전달되는 충격.

    콰득!

    밟고 있던 지반이 뭉개지는 것도 모자라서.

    자신의 몸뚱이가 몇 발자국이나 뒤로 밀려났다.

    락키드의 입꼬리가 비틀어졌다.

    “엘프, 뭔지는 몰라도 빌어먹게 싸가지가 없군. 그래?”

    다짜고짜 칼을 들이댈 줄이야.

    그나저나, 한잔 걸쳐서 취하기라도 했더라면…….

    정말 목숨이 위험했을 수도 있었겠는데.

    척─

    락키드는 도끼를 치켜들고 녀석과 눈을 맞췄다.

    다시 봐도 이질적인 시선이다.

    전장에서, 또 생사결의 결투에서.

    수많은 이들의 눈빛을 지켜봤건만.

    저런 시선은 처음이었다.

    예를 들어 비교 대상을 꼽자면…….

    자신에게 노골적인 살기를 뿜어대던 단장, 키치를 예로 들어볼까.

    ‘……저딴 걸 살기라고 볼 수 있을까?’

    그녀와 다르게 녀석에게서 살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벌레에겐 살기조차 내뿜을 필요조차 없다는 것처럼.

    업신여기는 눈빛이 분명했으니까.

    “곱상한 쌍판부터 여러모로 마음에 안 드는데?”

    싸움은 절대 금지.

    신신당부한 단장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아무래도 약속은 지키지 못할 것 같았다. 걸려온 싸움을 피하는 것? 천하의 락키드 님 사전에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콰득─!

    락키드의 근육이 순식간에 수축.

    콰쾅!

    그대로 땅을 박차고 튀어 나갔다.

    첫 합으로 깨달았다.

    저 엘프 녀석 앞에서 힘을 숨길 필요는 없었다.

    락키드의 도끼가 엘프의 머리 위에 드리웠다.

    다시금 마주친 시선.

    눈매가 여전히 오만하다.

    ‘건방짐이 어디까지 갈 수 있나 보자고!’

    락키드가 함성을 질렀다.

    “내 이름은 락키드! 네 목을 취할 사내다!!”

    그림자 용병단의 말석.

    그러나 락키드가 그림자 용병단에서 최약체란 뜻은 아니다.

    근력에서 나오는 일격의 파괴력.

    그 공격 하나만큼은 용병단 내에서도 락키드가 최고로 꼽힐 정도였으니까. 그런 일격이 코앞에 드리운 순간이거늘. 녀석에게는 동요가 없었다.

    “가엾구나.”

    단지 그렇게 지껄였을 뿐.

    가엾다니?

    아까부터 뭔 개소리를 하는 건지는 모르겠는데 말이야.

    혹시라도 개소리로 내 정신을 흔들 생각이라면.

    ‘어림도 없다고 대답해 주마!’

    스와아아악!

    락키드가 이를 악물고 도끼를 내려찍었다.

    그 순간 녀석의 검이 느릿하게 움직였다.

    웬만한 마법으로도 막아낼 수 없는 일격을 달랑 검 한 자루로 막아내겠다는 건가?

    ‘건방진 새끼가.’

    쾅!!!

    거대한 도끼와 검이 맞닥뜨리는 순간.

    부들부들─

    무너진 건 오히려 락키드의 육체였다.

    ……막혔다?

    나의 일격이?

    고작 검 한 자루에?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보고 있으면서도 믿기지 않았다.

    락키드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검기조차 두르지 않은 검으로 어떻게?”

    오만한 시선이 다시금 락키드를 향했다.

    “이것이 바로 태생의 차이라는 것이다.”

    “……태생의 차이?”

    “축복받은 자와 그렇지 못한 것들의 차이.”

    다시금 튀어나온 ‘축복’이라는 개소리.

    공격이 막힌 것도 빌어 처먹을 일인데.

    정작, 눈앞의 녀석은 전투에도 진지하게 임하지 않고 있었다.

    천하의 락키드 자존심이 용납할 수 없었다.

    락키드가 다시금 완력을 끌어올리던 때였다.

    “뭐, 이제는 옛날이야기가 되어버렸지만.”

    “……?”

    “그렇기에 하찮은 것들에게 낭비할 시간이 없단 뜻이다.”

    어디냐?

    단 한 순간도 방심하지 않았거늘.

    시야에서 놈을 놓치고 말았다.

    빠르다, 신속하다를 넘어서.

    저게 살아있는 것의 움직임이 맞기는 한 건가?

    ‘차원이 다르다.’

    락키드의 머릿속에 불현듯 스쳐 지나가는 말.

    -“이것이 바로 태생의 차이라는 것이다.”

    그런 뜻이었나?

    인간이 아닌 엘프이기에 저런 나약한 육체로 괴력을 내뿜을 수 있고. 인간을 초월한 속도를 낼 수 있다는 건가? 락키드는 이를 악물었다.

    “역시 세상은 빌어먹게도 불공평ㅎ……!”

    푹!

    “컥!”

    가슴팍을 파고드는 검.

    수많은 전투 경험 덕분인가.

    먼저 몸이 반응했다.

    덕분에 검격은 아슬아슬하게 심장을 피해 나갔다.

    울컥!

    “……미친 새끼. 그 개소리가 진심이었구나.”

    목구멍에서 피가 솟구쳤다.

    이로써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엘프, 저 녀석의 공격에는 생명을 빼앗는다는 희열도, 고뇌도, 심지어는 자각도 없었다. 그저 작은 벌레를 짓밟듯 자신의 심장을 노린 것이었다.

    직감할 수 있었다.

    ‘괴물.’

    엘프, 저들이야말로 진정한 괴물이다.

    락키드는 고꾸라지는 몸을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머릿속으로 수십 가지 전투를 그려봤지만.

    젠장, 승리하는 그림은 단 한 장도 없었다.

    죄다 패배다, 빌어먹을.

    “거 미안하게 됐수다, 단장.”

    락키드는 머릿속으로 더듬더듬 숫자를 떠올렸다.

    보자, 주점에 달아놓은 외상만 따져도 내가 받을 의뢰비 몫보다 많을 텐데……. 단장이 내 몫까지 채우려면 성전에서 부리나케 고생 좀 해야겠군.

    생각을 끝마친 순간.

    락키드의 눈빛이 돌변했다.

    갑작스럽지만, 강자와의 전투에서 숨을 거두는 건.

    언제나 바라오던 죽음이 아니던가?

    그리고 가능하다면…….

    “그 빌어먹을 새끼한테 평생 갈 상처 하나를 남겨주는 것.”

    단장이나 울프 녀석이면 몰라도.

    저딴 귀 큰 놈에게 이런 다짐을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도끼를 뽑았다면 말이야.

    그럴싸한 상처 하나쯤은 남겨주겠다는 말이다.

    “으아아아아!”

    기합과 함께 힘을 끌어올렸다.

    입에서, 가슴팍에서.

    피가 솟구쳤지만 락키드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간다. 재수 없는 쌍판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겨주마.”

    어차피 꺼져가는 생명이라면 짧고 굵게 불사르리라!

    .

    .

    .

    플레이어들은 전장을 바라봤다.

    “그래, 이게 바로 전장의 냄새지!”

    퀘스트와 전리품이 존재하는 전장이다.

    게다가 전장에 있는 게 전설 속 존재인 엘프라니.

    플레이어가 몰려드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시작부터 예상과는 달랐다.

    ──────

    ‘고통을 먹는 산짐승 우두머리’ : Lv.900

    ‘고통을 먹는 산짐승 성체’ : Lv.700

    ‘고통을 먹는 산짐승 새끼’ : Lv.500

    ──────

    최소 500레벨부터 최대 900레벨까지.

    전장에서 놈들과 마주치는 순간.

    플레이어들은 기겁했다.

    ‘크다’를 넘어서.

    거대하다.

    지나칠 정도로 거대하다.

    “아, 아니. 뭔 몬스터가 저렇게 커!!”

    크게는 수십 미터.

    새끼로 보이는 녀석조차 3층 높이는 될 정도의 크기였다.

    게다가 머릿수도 지나치게 많았다.

    전장 지역이 허허벌판에 생성됐기에 망정이지.

    재수 없게 도심 한복판에 나타났다고 생각하면…….

    “끔찍하다. 진짜.”

    악마의 규모에 압도되기도 잠깐.

    플레이어들은 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머릿수를 맞추려면 엘프의 숫자도 그에 못지않게 많아야 할 텐데.

    어째서인가, 시야에 들어온 건 고작 한 명의 엘프뿐이었다.

    “설마, 저게 다?”

    거대한 악마 대군에 맞서는 단 한 명의 엘프.

    누구보다 빠르게 전장에 뛰어들려고 생각한 이들조차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이거, 어떻게 해야 되냐?”

    [끝나지 않은 성전(聖戰)] 퀘스트가 진행 중인 지금.

    아무리 전리품이 좋다고 하더라도 악마의 편에 설 플레이어는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결국, 선택지는 하나. 엘프에게 합류하는 것뿐이었다.

    “……아니, 우리가 가세한다고 뭐가 달라질까?”

    패색이 짙은 전장에 뛰어든다?

    망설여지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그건 기우에 불과했다.

    슥─

    “어, 어라?”

    길게 늘어진 금빛 머리카락.

    샥─

    “잠깐만.”

    금빛 잔상만을 남긴 채.

    엘프가 악마들 사이로 뛰어들었다.

    푹─

    “……엥?”

    그것으로 전투는 끝나버렸다.

    헛것을 본 게 아니라는 듯.

    플레이어들의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전장 : 고통을 먹는 산짐승 vs 엘프’이 종료되었습니다.]

    보는 것도 모자라 동영상으로까지 기록된 결과였거늘.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혼자서 수많은 악마 사이로 뛰어들어 승리를 쟁취할 수 있었단 말인가? 모두가 경악하던 도중 몇몇 플레이어들이 눈빛을 교환했다.

    “……이거, 잘하면 관계도 쌓을 수 있는 거 아니냐?”

    “이제 막 현실로 소환된 참이니까.”

    “친절하게 안내해 주면서……!”

    엘프, 상상조차 못 했을 수준으로 강하다.

    겨우 검을 몇 번 휘두른 것만으로 900레벨 악마족 몬스터를 도륙 내버릴 정도로. 친분을 쌓아둔다면 어떤 식으로든 도움이 되겠지.

    플레이어들이 엘프 쪽으로 향하려던 순간이었다.

    “!”

    범상치 않은 눈빛과 마주했다.

    엘프의 싸늘한 시선이 자신들을 향한 것이었다.

    악마를 바라볼 때와 크게 다를 것 없는 눈빛이.

    압박감에 모두가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단 한 사람, 락키드를 제외하고는.

    “그대는 우리의 축복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나?”

    “……축복? 갑자기 뭔 개소리를.”

    “미련하게도, 축복이 뭔지도 모르는 모양이군.”

    저런 압박감에도 평소처럼 말을 뱉을 수 있다니.

    과연, 그림자 용병단원다운 담력이었다.

    그러나 감탄은 오래가지 않았다.

    쾅!

    엘프가 락키드에게 쇄도했으니까.

    “역시 착각이 아니었어!”

    “저거 완전 미친놈이잖아?”

    “우, 우릴 진짜 죽이려고 한 거라고?!”

    지켜보던 모두가 마른침을 삼켰다.

    세상에 락키드를 응원하게 되는 날이 올 줄이야.

    그러나 응원이 무색하게도.

    고작 두 합 만에 엘프의 검이 락키드의 가슴을 꿰뚫었다.

    “컥!”

    바닥에 흩뿌려지는 혈액.

    “……야씨, 이거 보고만 있는 게 맞냐?”

    “아니, 말려야 하는 거 아닌가?”

    “아무리 봐도 뭔가 오해하는 거 같은데요?”

    엘프.

    미지의 존재.

    미지의 강함.

    미지에서 오는 공포감에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콰드드득!

    굉음과 함께 점차 둔해지는 락키드의 움직임.

    몇 방울에 불과했던 피가 어느새 주변을 흥건하게 만들었다.

    모두가 직감할 수 있었다.

    “저, 저러다가 진짜 죽겠어!”

    락키드가 쓰러지면, 그다음에는?

    엘프의 칼날이 자신들을 향하지 않으리라는 법이 없었다.

    무엇보다 엘프에게는 이유가 없었으니까.

    그야 엘프가 락키드와 나눈 대화라고는 고작…….

    “축복인가, 뭔가를 물어본 게 전부였잖아?”

    축복에 대해 알지 못하는 건 락키드나 자신들이나 피차일반.

    도망쳐야 하는가?

    아니면 지금이라도 락키드에게 합류해야 하는가?

    패닉에 빠진 플레이어들이 머뭇거리던 순간이었다.

    “……거 지랄 맞게 강하군.”

    쿵!

    피투성이가 된 락키드가 그대로 꼬꾸라졌다.

    어차피 꺼질 숨에 더 이상 관심 따윈 없다는 것인가.

    엘프의 시선이 옮겨갔다.

    락키드에게서 플레이어들 쪽으로.

    누군가 용기를 내서 소리쳤다.

    “도망치기엔 늦었어요. 그리고 이대로 도망치면……!”

    저 칼날은 취재진, 일반인들을 향하게 된다.

    사실 예전 같았으면 말이야.

    고민조차 하지 않고 줄행랑을 쳤었겠지.

    그러나 빌어먹을 퀘스트가 자꾸만 눈에 걸렸다.

    ─해당 지역에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라. (성공)

    그놈의 긍지 때문인지 뭣 때문인지는 모르겠다만.

    적어도 저런 싸이코 엘프에게서 내빼는 걸 몸이 거부했다.

    물론, 모든 플레이어가 같은 심정은 아니었다.

    “저, 전 몰라요! 저런 괴물을 어떻게 막겠다고!!”

    “……합류하겠습니다.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요.”

    “어쩐지 후원이 많이 터지더라니! 젠장, 형님들 저 먼저 갑니다!”

    소란 속에서.

    엘프가 걸음을 옮겼다.

    검을 바로 쥐고는.

    여전히 오만한 시선으로.

    플레이어들에게 접근.

    “……!!!”

    ……하려던 순간이었다.

    고오오─

    허공에서 마력이 일렁거렸다.

    고위 마법, 포탈.

    넘실거리는 마력 너머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또각─

    미지의 존재.

    미지의 공포 앞에서도.

    언제나처럼 긍지 높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멈춰라.”

    그저 말을 내뱉었을 뿐이거늘.

    보고 있으면서도 믿지 못할 일이 벌어졌다.

    “……?”

    멈춰라.

    그 말에 복종하듯.

    순식간에 멈춰버린 엘프.

    “……!”

    변화 없던 엘프의 얼굴에 동요가 번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

    .

    .

    [엘프, 엘시도어에게 ‘축복의 위계질서’가 발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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