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9화. 축복 (1)
미국.
AAU 서부 지부엔 비상이 걸렸다.
지부장, 짐 조슈아.
자정, 야밤에도 지부장실의 불빛이 꺼지지 않았다.
우리 보스가 저럴 사람이 아닌데…….
“야근이라고? 천하의 짐 조슈아가?”
정기 업데이트가 있는 목요일은 물론이요, 긴급 업데이트가 떠올랐을 때도 그놈의 워라벨을 운운하던 짐 조슈아였다.
더군다나 오늘은 금요일.
평소 같았으면 개인 요트에서 불금을 즐기고 계실 양반이 무슨 바람이 불어서 저러는 걸까?
“카트리나, 어떻게 생각해?”
“응? 뭐라고 그랬어?”
“아니 짐 말이야. 저럴 사람이 아니잖아.”
“보스? 하긴 웬일인가 싶긴 하네.”
“거, 반응 한번 김빠지게 싱겁네.”
쪽쪽─
사내는 빨대를 빨며 머리를 굴렸다.
분명, 저러는 이유가 있을 텐데 말이지.
“한국으로 출장 갔다 왔지? 서부, 동부 두 사람 다.”
“응, 지부장급 회의랬지.”
“……근데, 그거 좀 이상하지 않아?”
“뭐가?”
“아니, 지부장급 회의라면 그동안 화상으로도 잘만 해왔었잖아. 근데, 갑자기 해외로 출장을? 그것도 하필이면 태평양 건너 한국으로? 그럴 이유가 있느냐는 거지.”
굳이 이유를 꼽아보자면 짐작이 가는 게 하나 있긴 했다.
“……혹시 이호열 때문인가?”
한국에는 이호열.
런던 던전 균열을 클리어한 이호열이 있었으니까.
그런데, 막말로 이호열이 이런 균열을 클리어한 게 한두 번도 아니고. 출장도 모자라서 복귀해서 야근할 정도로. 호들갑을 떨 이유가 있느냐는 뜻이었다.
“혹시 회의에서 뭐, 쓴소리라도 들었나?”
“누가? 우리 보스가? 누구한테?”
“아니, 누구한테든. 애초에 근무 시간부터 놀러 나온 사람이랑 다를 바가 없잖아? 그냥 농땡이 좀 치다가 높으신 분들 비위나 맞추느라…….”
타다다닥─
상사의 뒷담화로.
자연스럽게 화제가 넘어가려던 도중.
사내의 눈빛이 달라졌다.
카트리나, 어째 영혼 없이 대답만 한다 싶었더니.
“뭐야, 또 뭘 그렇게 두들기고 있는 건데?”
“아, 이거? 별거 아니야.”
“맨날 별거 아니래. 봐봐, 봐도 되지?”
드륵─
카트리나가 의자를 뒤로 빼자 모니터가 한눈에 들어왔다.
정확하게는 모니터에 떠오른 사진들이 보였다.
사내가 되물었다.
“……잠깐만, 여기 런던 아니야?”
“응, 맞아.”
“아쿠아리우 떡갈나무 사진은 모아서 어디에 쓰려고?”
대격변 이전, 아르카나의 개발사.
AAU 덕분에 나무의 이름은 뒤늦게나마 세상에 알려진 상태였다. 사진도 모자라서 떡갈나무에 관한 정보를 타이핑하던 카트리나가 어깨를 으쓱였다.
“아니, 딱히 어디에 쓰려고 하는 건 아니고.”
“어디에 쓸 것도 아닌데, 이렇게 정성껏 정리하신다고? 뭔데, 비밀로 할게. 나한테만 말해줘. 이번에는 또 어떤 가설인데?”
“음, 그래. 좋아.”
딸깍─
드래그되는 타이핑 부분.
사내가 눈치껏 글자를 읽어나갔다.
“많은 수분을 필요로 하는 것 외엔 이렇다 할 특징이 없다……. 특징이 없는 게 특징인가? 뭐 이런 사소한 정보까지 적어놓은 거야.”
“확실히 다르니까.”
“다르다고? 뭐가?”
“런던 시민들의 증언과 일치하지 않아.”
……잠깐, 그러고 보니까.
굳이 인터넷을 켜서 인터넷 기사를 뒤져볼 필요도 없었다.
요 며칠 동안 매스컴을 뜨겁게 달구고 있는 게 런던에 관한 소식들이었으니까.
“따뜻한 생명력 같은 게 느껴졌다고 하지 않았었나?”
“단순히 느낌이 아니라 확실한 효과였어. 그건.”
“그렇지. 플레이어에겐 메시지가 떠올랐다고 했으니까.”
거기까지 생각하니까 어째서 카트리나가 나무 사진 따위를 수집하고 있었는지 알 것 같았다.
사내가 목소리를 낮추고 속삭였다.
“그니깐 이게 보통 아쿠아리우 떡갈나무가 아니란 거지?”
카트리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단계에서 말할 건 아니지만.’
생명력과 관련된 나무라면…….
적어도 카트리나의 기억 속에서.
아르카나 세계관에 그런 나무는 하나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세계수.
물론, 런던에 피어난 수백 수천 그루의 아쿠아리우 떡갈나무가 세계수란 뜻은 아니었다. 그저 생명력이란 한 가지 특징이 겹친 것뿐이니까.
그러나 접점은 또 하나가 있었다.
‘바로 이호열.’
호열에겐 세계수의 씨앗을 싹 틔웠던 과거가 있었으니까.
카트리나는 진지하게 생각했다.
이걸 단순한 우연이라고 보는 게 맞을까?
무엇보다 런던의 아쿠아리우 떡갈나무는 저절로 자라난 게 아니었다. 정령, 하이엘. 이호열의 계약 정령의 능력을 통해 피어난 것이었으니까.
우연이라 여기고 넘어가기엔 무리가 있겠지.
물론, 그렇다고 증거가 있는 건 아니었다.
이호열, 그에게 속 시원하게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러나 그때도 마찬가지였지만 한 가지 사실은 분명하다.
세계수가 관련된 지금.
언제까지 ‘그 종족’이 가만히 있진 않는다는 것.
카트리나가 방해꾼을 몰아냈다.
“자자, 이제 비켜주시고요.”
“아니, 그래서 이게 다야? 뭐, 가설 없어?”
“현시점에서 말씀드릴 게 없습니다.”
“……뭔데, 그 듣기 싫은 말투는?”
만약, 그 종족이 균열을 통해 현실에 모습을 드러낸다면.
그 파장은 감히 생각하기 힘들 정도겠지.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에도 떡밥만으로도 세상이 떠들썩할 정도의 파급력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카트리나가 다시금 어깨를 으쓱였다.
“뭐, 지금이라도 실컷 떠들어 두자.”
“그 의미심장한 대사는 또 뭔데?”
“곧 쉬고 싶어도 쉴 새가 없는 날이 올 것 같으니까.”
“……진짜 주말 앞두고 망언을!”
*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해야 했거늘.
영겁의 세월을 살아가는 엘프들에게 시간은 단지 흘러가는 것이었다. 별 대신 밤하늘에 떠오른 마안(魔眼)도 마찬가지였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계절이 바뀌듯 단지 야경이 바뀐 것뿐.
“무의미하구나.”
영겁과도 같은 세월을 살아오며 엘프들의 감정은 무뎌졌다.
마계에서 뛰쳐나온 악마들.
그런 악마에게 고통받는 아르카나 대륙의 생명들.
엘프의 시선에서는 그 또한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일상이었다.
자신들의 고고한 눈높이에서 인간과 악마는 크게 다를 것 없이 열등했으니까. 전쟁도 마찬가지다. 애초에 아르카나 대륙엔 다툼이 끊이질 않았었다.
“허나, 어머니께서는 저희와 뜻이 다르신 모양이군요.”
엘프들의 고향, 시슬리.
시선이 향한 곳엔 세계수가 있었다.
생기를 잃고 쓰러져 가는 세계수가.
당신께서 위기를 느끼고 대륙 곳곳에 씨앗을 흩뿌린 탓이겠지.
정말이지,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었다.
“그저 흘러가는 일에 불과하거늘.”
세계수, 어머니의 앞에서도 눈빛에는 겸손이 없었다.
“쇠약해지셨군요, 만물의 어머니시여.”
세계수의 주변에 남아있는 강렬한 야성의 기척.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영겁의 세월을 향유하는 드래곤의 기운이었다. 씨앗을 뿌리기 위해서. 시건방진 도마뱀 놈들에게까지 손을 벌렸단 것인가?
엘프의 입꼬리가 일그러졌다.
“어머니의 뜻은 알겠습니다. 하지만 그 뜻에 따를 순 없습니다.”
엘프들은 세계수 앞에서 선언했다.
“우리가 당신의 노파심에 휘둘릴 나이는 아니지 않습니까?”
그날 엘프는 세계수의 의지에 반기를 들었다.
대륙 절멸의 위기?
어쩌란 말인가.
개미집이 박살 나든, 개미들의 왕이 바뀌든.
우리들과는 조금도 상관없는 일이다.
말했다시피 시간은 우리들 앞에서 관대했으니.
훗날 되돌아보면 모든 게 무의미했던.
지나간 일에 불과할 테니까.
그랬다.
오랜 세월을 살아오며 무뎌진 감정.
남아있는 것은 오로지 오만.
엘프들에게 긍지나 숭고함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어긋난 자식의 모습을.
어머니가 가만히 지켜보고 있을 리는 없었다.
설령 생명력을 잃고 쓰러져 가는 몸이라고 하더라도.
“?!”
변화는 곧장 알아차릴 수 있었다.
관대했던 시간이 흐르기 시작한 것이었다. 생기를 잃지 않았던 육신에는 피로가 쌓였고, 휴식조차 필요치 않았던 정신력 또한 삐걱거리기 시작했단 말이었다.
엘프들은 직감했다.
“빌어먹을!”
세계수가 자신들에게서 ‘축복’을 거두어 갔다고.
어찌, 어머니가 자식을 저버릴 수 있단 말인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어째서!”
축복을 거두어 갔다는 건.
다른 누군가에게 축복을 내렸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주위를 둘러봐도 보이지 않았다.
자신들이 세계수의 의지를 거슬렀다고 하더라도.
자신들을 대신해 축복을 받을 이들은 대륙에 존재하지 않았다.
하나같이 자격 미달이었으니까.
쓰러져 가는 세계수 앞에서 엘프는 목을 놓아 외쳤다.
“어머니시여, 설마 인간을 가엾이 여기시는 겁니까? 인간이 악마들과 다를 게 무엇이란 말입니까? 그들의 본성은 악마와 다를 게 없습니다. 지금의 고통 또한 그간 쌓아온 업보에 불과하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세계수에게서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미련한 저희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축복을 빼앗겨 영생을 잃었다.
더 이상 여유를 부릴 수 없었다.
지금처럼 시슬리에 머물 수만은 없다는 뜻이다.
“우리에게서 축복을 빼앗아 간 이들이 누구인지 찾아내고야 말겠습니다. 그 축복을 거머쥘 자격이 있는지 우리들의 눈으로 지켜볼 것입니다.”
만약, 그럴 자격이 없는 이라면.
무너져 가는 세계수.
노쇠한 당신을 대신해서 다시금 거둬들이리라.
쓰레기들에겐 터무니없이 과분할 그 축복을.
“가로막는 것은 얼마든지 짓밟아도 좋다.”
엘프의 출정.
영겁의 세월 속에서도.
단 한 번도 없었던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
……갑자기 서늘한 기운이 든다.
비를 쫄딱 맞아서 돌아다닌 후유증인가.
몸살 기운이 올라오는 건가, 싶었는데.
[온기] 버프가 있는데, 그럴 리가 있나.
기분 탓이겠지, 기분 탓.
‘게다가 원한을 살만한 짓을 하고 왔으니까.’
황금 같은 주말을 앞두고 AAU엔 폭탄이 떨어진 것이나 다름없겠지. 나, 스스로 생각해 봐도 핵폭탄급 선언이긴 하다. AAU 유스라 지부라니, 다들 생각도 못 했을걸?
“무엇보다 조화가 중요한 법.”
[『기이』]의 공간, 균열.
당연하게도 기이엔 기이로 맞서야 하는 법이다.
사실 아르카나 대륙에 관한 정보야 지금으로서도 충분했다.
내 공백이 무색해질 정도로 든든한 아군이 있었으니까.
마탑.
라이언 하트 기사단.
그림자 용병단.
탐험가 연맹…….
전부 나열하기도 힘든 아르카나 세력들부터.
거대 연합을 비롯한 플레이어들까지.
그것도 분야별로 말이야.
그러니까 나는 AAU에 많은 걸 바라지 않았다.
애초에 AAU는 자신들의 한계를 진작 인정했었으니까.
내가 원하는 건 그저.
‘아르카나 대륙 전기’에 관한 정보.
더 정확하게는 아르카나 시스템에 관한 정보였다.
‘시스템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좋으나 싫으나, 목숨을 걸고 그 사실을 증명했던 내가 아니던가? [칭호] 시스템 덕분에 아르카나 대륙에서 죽었다가 현실에서 되살아난 것보다 확실한 증거도 없겠지.
“그러니 무엇 하나 소홀히 할 수 없다.”
간만에 맞는 말이다, 그랑펠.
성전(聖戰)은 물론이요.
아르카나의 침식에서 현실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시스템 또한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
그런 의미에서 과거 아르카나의 개발진이었던 AAU의 정보는 큰 도움이 되리라.
‘사실 유스라 지부까지 갈 필요가 없긴 했는데.’
이놈의 드높은 긍지께서 편한 길을 택할 리가 있나.
“동등한 위치에서 바라볼 때 비로소 있는 그대로를 볼 수 있다.”
……근데, 또 마냥 틀린 말은 아니라 투덜댈 수가 없다.
만약, AAU를 통해서 정보를 전달받는다고 가정해 보자.
누군가가 왜곡된 정보를 전달해 올 가능성?
차고도 넘친다.
왜, 회의에서 보내오시던 눈빛들이 아직도 기억 속에 선명하거든.
내가 조금만 어리숙하게 굴었어도 온갖 개소리를 지껄였겠지.
하지만 그들과 마찬가지로 AAU 유스라 지부.
그러니까 내가 지부장급이 된다면.
그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세계 각국의 이해관계가 얽힌 AAU가 지금까지 유지되는 이유가 바로 지부들의 상호견제 덕분이었으니까.
‘게다가 AAU에도 아군이 좀 생겨서 말이야.’
런던 지부장, 베이커를 시작으로.
그랑펠의 긍지론에 마음을 바꿔먹은 분들이 계시단 말씀.
당연하게도 나의 제안이 거부될 명분은 없었다.
모든 일에는 주고받음이 있는 법.
나 또한 AAU 측에 아르카나 대륙의 정보를 제공할 생각이었거든.
“그들뿐만이 아니다.”
아니, 정확하게는 성전에 참여하는 모든 이들에게.
실상은 당당하기에 무엇 하나 숨기지 않는다는, 피곤한 긍지 때문이었지만. 뭐, 이유는 덧붙이기 나름이지. 그나저나 이렇게 시간을 허비할 때가 아니었다.
─나약해진 육체를 단련하라. (반복) ▲
●40KM 달리기 (성공)
●팔굽혀펴기 3,000회 (성공)
●턱걸이 2,000회 (진행 중)
●버피 테스트 1,000회 (진행 중)
늘어난 체력 단련 요구량!
날마다 훈련량을 채우긴 위해선 멀티태스킹이 필요한 지경까지 왔다. 왜, 운동하면서도 머릿속에 마법 서적의 지식을 쑤셔 넣어야 한다는 뜻이다.
젠장, 시작하기도 전에 눈앞이 아득해진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근력], [민첩]에 포인트 투자도 안 했을 텐데.
그러나 투덜대 봤자 소용없다.
가슴 속에 긍지가 존재하는 이상.
나는 그 어떤 체력 단련 퀘스트라도 뜨거운 녹차를 들이켜면서 해내고 말 테니까.
그러니까 잔말 말고 시작하자.
하나, 둘…….
“마법진이라. 흥미로운 간섭 형태로군.”
……일천(一千).
●버피 테스트 1,000회 (성공)
……그런데 뭐냐, 이거.
체력 단련도 모자라서 마법 서적의 내용까지 꾸역꾸역 훑었거늘.
몸에도, 두뇌에도 피로가 느껴지지 않는다고……?
상승한 스탯 때문인가, 생각해 봤는데.
고작 스탯 몇 포인트 상승했다고 가능한 변화가 아니었다, 이건.
‘분명 이유가 있을 텐데……?’
그런 나는 상태창을 확인했다가 기겁하고 말았다.
[첫 세계수가 당신을 축복합니다.]
……잠깐만, 그 말도 안 되는 축복이 영구 버프였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