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158화 (90/489)

◈ 158화. 상상 그 이상

이 자리에 모인 이들은 하나같이 능구렁이였다.

누구보다 자신들의 위치를 잘 알고 있으며.

그 권력을 눈치껏 휘두를 줄 아는 자들.

전 세계의 협약으로 출발한 AAU라고 한들, 세월이 흘렀다.

아르카나의 위협으로부터 세계를 보호하겠다는 설립 목적?

그보다는 이해관계가 우선이 된 지 오래란 뜻이다.

정부와 플레이어들 사이, 선을 넘나들며 자신들의 위치를 공고히 해오던 게 AAU의 지부장들이었다. 한마디로 줄타기의 달인들이란 말이다.

덕분에 그들은 자신이 있었다.

‘기자 나부랭이들과 같은 취급하지 말란 말이야.’

‘이호열, 지나치게 건방져.’

‘사람이라면 흔들릴 수밖에 없는 제안이다.’

플레이어, 이호열.

그와 마주하더라도 기세가 꺾이지 않을 자신이.

물론, 알량한 자신감은 오래가지 않았다.

뚝─

끊겨버린 박수 소리.

뭐라고?

환대는 생략하겠다고?

처음 들었을 땐 잘못 들었나 싶었다.

사양하는 것도 아니고 생략하겠다니.

말의 뉘앙스가 미묘했으니까.

부담스러워서 거절하겠다는 뜻은 절대 아니다.

마치 지극히 받아야 할 환대지만.

부득이하게 시간 관계상 생략한다는 말투였다.

“……!”

급속도로 냉각된 분위기.

덕분에 어정쩡한 자세로 멈춰있던 지부장들.

이내, 우렁찬 소리가 그들을 움찔거리게 하였다.

쾅!

회의실의 문이 닫혔다.

마력이 일렁이는 것으로 봐선 이호열의 마법이 분명했다.

미국 서부 지부장, 짐 조슈아는 당황했다.

‘그놈의 화장실엔 왜 가서는.’

동부 지부장이 입장하지 못한 채 문이 닫혀버렸으니까.

‘……제길, 혼자서는 부담스러운데.’

미합중국 대통령을 포함.

온갖 자리에서 온갖 인물들과 독대해 본 경험이 있는 짐 조슈아였다.

그러나 그에게도 이호열은 심히 부담스러운 존재였다.

시시껄렁한 안부를 나누는 거면 몰라도 오늘은…….

‘미래에 관해 나눌 이야기가 많다고.’

이호열과 진지하게 의논하려던 제안이 있었단 말이다.

그 탓에 짐 조슈아가 애써 입을 열었다.

최대한 조심스럽게.

“그 아직 입장하지 못한 지부장님들이 계시는 것 같습니다만……. 개회를 몇 분만 늦추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돌아온 것은 단호한 대답.

“또한 시간조차 엄수하지 못한 이들과 나눌 이야기는 없다.”

“……!!!”

단 몇 분도 기다려 줄 수 없다니.

지나치게 칼 같다.

하지만 아무리 억울한 표정을 지어봤자 소용없었다.

또각─

호열은 그대로 단상으로 나아갔으니까.

호열의 시선이 좌중을 훑었다. 세계 각국에서 날고 기는 영향력을 행사하는 AAU 지부장들이다. 그들의 앞에서 조금은 위축될 법도 했건만.

조금도 움츠러들지 않은.

더없이 꼿꼿한 자세.

그리고.

“……!!!”

심상치 않은 눈빛이었다.

간혹가다 간담을 서늘케 하는 플레이어들의 시선과는 달랐다.

가진 건 힘밖에 없다는 걸 자랑하듯.

다짜고짜 살기를 뿜어대는 눈빛이 아니란 뜻이었다.

어찌 보면 평온한 것을 넘어서 무심해 보일 정도의 시선.

그러나 어째서인가?

그 눈빛이 자신들의 속내를 훤히 훑는 것처럼 느껴졌다.

꼴깍─

곳곳에서 침 넘어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긴장감에 누구 하나 쉽게 자리에 앉지 못했다.

불과 수십 전까지 품었던 생각이 무색해질 정도의 압박감.

……크나큰 착각이었다.

이호열은 일개 플레이어가 아니었다.

지부장들의 동공에 지진이 일었다.

.

.

.

보자, 일단 [천적관계]는 발동하지 않았다.

그러나 간과할 수 없는 게 바로 악마 숭배자의 존재였다. [천적관계]만 믿고 있다가 마탑에서 크게 한 번 뒤통수를 맞은 경험이 있어서 말이야.

‘기척도 느껴지지 않네.’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AAU 런던 지부장, 베이커를 제외하면.

악마에게 빙의되거나 깊게 관련된 이들은 없는 것 같았다.

근데, 다들 표정들이 왜 그러실까.

뭐, 찔리는 거라도 있는 분들처럼.

잠깐, 찔리는 게 있는 분들이 몇 분 계시긴 하겠구나?

악마와 격식에 어긋나는 짓만 제외한다면.

한없이 너그러운 그랑펠의 마음씨와는 다르게.

나, 이호열의 속내는 그렇게 넓지 못하다.

뒤끝 때문에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는 뜻이다.

[AAU 관계자, “성전? 정말 진행 중인지 알 방법 없다.”]

그런 기사가 한두 개였다면 내가 이해를 하겠는데 말이야.

‘정말, 서로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기사가 쏟아져 나왔었지.’

특히 익명의 해외 관계자님들께선 말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오죽했으면 그랑펠 입에서 주제 파악 좀 하라는 말이 튀어나왔겠냐고.

나는 입을 열었다.

“그대들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웠군.”

……아니, 그렇다고 입방정을 떨라는 건 또 아니었는데.

자초지종도 없이 뱉어낸 말이었거늘.

곳곳에서 흠칫하는 이들이 보였다.

진짜 찔리는 게 있나 본데?

어쨌거나, 됐다.

뒤끝을 풀려다가 새로운 흑역사를 쌓게 되는 건 사양이다.

곧장 본론으로 들어가자.

“그대들에게 묻겠다.”

과연, AAU는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걸까?

AAU 내부에 악마 존재 여부.

그와 더불어 확인해 보고 싶었던 게 그것이었다.

예정된 스토리와 다르게 급변한 아르카나 대륙의 상황이야 어쩔 수 없다고 치고 넘어가더라도.

[미궁]이나 [던전] 같은 아르카나 설정들은 아직도 유효하다는 걸 확인한 참이었다.

그런 정보들을 제대로 써먹기만 하더라도 앞으로 예정된 업데이트에 큰 도움이 될 게 분명했으니까.

“그대들은 성전에 관해 아는 바가 있는가?”

일단, 사건의 발단부터 물어봐야겠지.

그런 나의 말에 몇몇 이들이 눈에 띄게 흠칫했다.

얼추 보이네.

말 많은 익명의 해외 관계자분들이 누군지들 말이야.

그쪽들은 특히 성심성의껏 대답하는 게 좋을 거다.

“알지 못했다면, 알아차리지 못한 이유가 있는가.”

나, 이호열의 뒤끝뿐만 아니라 성전(聖戰)은 악크샨의 절멸과도 관련되어 있었으니까. 그랑펠의 긍지 또한 쉽게 넘어갈 수 없다는 뜻이다.

“합당한 이유가 없다면 그것은 능력 부족이라 생각하네만.”

AAU, 이름값을 하란 말이다.

“그대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

.

.

남태민에게 연락을 받은 뒤부터 박민재는 한순간도 제대로 눈을 붙이지 못했다. 이호열, 그가 주도한 회의라고 하더라도 그 책임자는 자신이었으니까.

책임자.

말 그대로.

박민재는 모든 걸 책임을 지려고 생각했다.

‘회의 끝에 어떤 결과가 벌어지든지 상관없다.’

그렇지 않아도 이호열의 발목을 붙잡을 생각이라면 발목을 내놓을 각오를 하라고, 경고도 했겠다.

더러운 사회의 구정물 같은 건 자신이 얼마든지 뒤집어쓰겠다, 다짐까지 않았던가?

‘또 샌드백 역할은 익숙하거든.’

하지만 회의는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오히려 호열이 자신들을 추궁하고 있었으니까!

하늘을 치솟던 기세는 어디 가고 다들 입만 꾹 다물고 계신다들.

이 광경을 영상으로 남길 수 있었다면.

평생 소화제가 필요 없었을 텐데.

비공개회의로 진행한 게 안타까울 정도였다.

문득, 옆자리의 도쿄 지부장 오카자키가 말을 건네왔다.

“다들 할 말이 없는 모양입니다.”

호열의 말을 요약하자면 간단했다.

AAU, 터무니없는 능력 부족이다.

능력도 없으면서 불필요하게 시끄럽기만 하다.

정말이지, 촌철살인이 따로 없다.

자신이라고 예외는 아니겠지.

하지만 나는 일찌감치 주제 파악을 끝내고 입을 다물었거든.

주제도 모르고 설쳐댔던 그쪽들과는 다르게.

“양심이 있다면 잠자코 있어야죠. 저처럼요.”

간혹가다 양심에 털이 난 사람처럼.

뻔뻔하게 입을 놀리는 이들도 있었다.

“사실 이해관계라는 게 상당히 복잡한 일이라.”

“정보 공유 이전에 윗선에 보고하고 컨펌이 내려와야…….”

“누구보다 잘 아시다시피 균열에는 언제나 위험이 따르지 않습니까? 플레이어 이전에 국민 아니겠습니까? 그들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어쩔 수 없이 규제를…….”

다들 말 한번 그럴싸하게 잘하신다.

하긴 저런 처세술이 있으니까.

여태까지 지부장 자리에서들 버텨온 거겠지, 다들.

하지만 혓바닥도 상대를 봐가면서 놀려대야지.

“옳지 못한 절차는 없으니만 못하다.”

몇 안 되는 인터뷰 영상, 기자 회견에서도 느낀 거지만.

호열의 화법에 돌려 말하기란 존재하지 않았다.

직설적으로 파고드는 것은 오직 핵심.

무엇보다 틀린 말이 없었다.

결국, 더 이상의 변명은 없었다.

무거운 침묵 속에서.

호열의 말이 이어졌다.

“진정으로 묻겠다. 그대들에겐 긍지가 남아있는가?”

“…….”

누구도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박민재는 쓴웃음을 머금었다.

‘넙죽 대답하고 싶어도.’

이제와서 긍지를 쫓기에는.

자신은 사회의 구정물을 뒤집어써도 흠뻑 뒤집어썼다.

‘증명조차 할 수 없는 꼬락서니군.’

플레이어들처럼 목숨을 걸고 성전 퀘스트에 참전할 수도 없었으니까. 말로만 긍지가 남아있다고 대답해 봐야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계속해서 이어지는 정적.

질문을 던진 호열이 무안해할 정도로 조용하다.

박민재는 슬쩍 호열의 안색을 살폈다가 흠칫했다.

“……!”

여전히 변함없는 표정과 눈빛이었거늘.

어째서인가, 호열의 감정이 전해져 오는 듯했다.

그가 인자하게 대답을 기다리는 것만 같았다.

‘아니, 그럴 리가 없는데……?’

천하의 이호열이다.

때로는 감정이라는 게 존재하는 걸까, 싶을 정도로 단호한 이호열이란 말이다. 멋대로 착각하고 있는 게 분명해. 박민재가 애써 시선을 돌리던 순간이었다.

좌석 저편에 앉은 베이커와 눈이 마주쳤다.

‘……뭐야, 뭘 보는데?’

별안간 마주친 시선.

눈이 마주친 것도 모자랐는지 베이커가 입꼬리를 올렸다.

그 순간, 박민재의 머릿속을 스쳐 가는 대화.

-“긍지에 따라서 움직이겠단 말입니다.”

……설마?

박민재의 설마 하는 생각은 현실이 됐다.

베이커가 입을 열었다.

“남아있다고 믿고 싶습니다. 하지만 설령 가슴 속에 긍지가 남아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그의 얼굴에 비장감이 서렸다.

“잃어버린 긍지를 되찾기 위해 행동하겠습니다.”

“……!!!”

소리 없는 경악─

영국을 대표하는 런던 지부장의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올 줄이야.

런던 사태가 영국에 미친 영향력이 저리도 컸단 말인가?

모두가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한 사람, 이호열을 제외하고는.

“그런가. 그렇다면 바꿔 묻겠다.”

“……?”

“그대들에겐 긍지를 되찾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가?”

“……!!!”

박민재는 그제야 깨달았다.

얼핏 느껴졌던 따스함은 착각 같은 게 아니었다.

돈과 명예를 좇지 않는다.

오직 인류의 평화를 위해서.

버그 수준에 가까운 균열에 진입하고, 공략해 온 이호열.

박민재는 그제야 따스함의 정체를 깨달을 수 있었다.

그래, 저건 영웅에게서 흘러나오는 ‘숭고’함이었다.

박민재는 피식 웃고 말았다.

‘우리 같은 놈들이 긍지를 쫓을 자격이 있는 건가.’

글쎄, 그 판단은 스스로 할 수 있는 게 아니겠지.

말했다시피 갑은 언제까지나 이호열이니까.

“후우─”

한 차례 심호흡한 박민재가 입을 열려던 순간이었다.

“저희 일본은…….”

“그렇다면……!”

“아니, 저희도……!”

변화가 일어났다.

*

[숭고의 효과로 작은 변화가 일어납니다.]

세계 각국의 AAU 지부장들을 모아두고 긍지론을 설파한 보람이 있구나. 싸늘한 정적이 흐를 땐, 정말 심히 뭣 된 것 같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거늘…….

‘여러모로 다행이다.’

역시, 칭호의 효과다.

괜히 습득 조건이 까다로운 게 아니라니까?

그나저나 또 한 번 그랑펠의 긍지에 감사하게 된다.

아무리 사기적인 칭호라고 해도 발동 조건은 존재한다.

[숭고] 또한 마찬가지였다.

내가 변화를 일으킬 정도의 행동을 해야만 그 효과가 발동된다는 뜻이다.

‘이놈의 긍지가 도움이 되기도 하는구나.’

그런 의미에서 그랑펠의 긍지는 어찌 보면 숭고함.

그 자체라고 볼 수 있었으니까.

한결같은 행동에 효과가 발동되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겠지.

물론, 지금의 시선은 굉장히 부담스럽다.

나의 흑역사에게 감동의 눈빛을 보내지 말란 말이다.

너도 마찬가지다, 그랑펠.

괜히 당당해져서는 가슴을 더욱 활짝 펴지 말란 말이다.

‘아니, 됐다.’

하지만 과정이 뭐가 중요하겠는가?

이 변화의 흐름을 놓치지 않는 게 중요하지.

그래, 쐐기를 박을 타이밍이다.

아니, 정확하게는 말뚝을 박는다는 게 맞는 표현이려나.

‘원래 신뢰는 쉽게 쌓을 수 있는 게 아니거든.’

머릿속이 꽃밭인 그랑펠은 몰라도.

사회인이었던 나는 인간이 어떤 동물인지 잘 알고 있었으니까.

런던 사태와 같은 불상사를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동등한 위치에서 AAU를 주시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대들에게 제안하겠다.”

물론, 나의 ‘권한’ 아래에서 말이지.

“나는 AAU 유스라 지부 창설을 원한다.”

“!!!”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