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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157화 (89/489)

◈ 157화. 고개를 들어라

아르카나 상공.

아이언 캐슬 호의 드워프들은 부지런하게 움직였다.

야간 비행.

마안(魔眼)이 눈을 뜨는 탓에 악마들의 활동이 더욱 왕성해지는 밤이거늘. 평소와 다르게 아이언 캐슬 호가 밤에도 비행을 멈추지 않을 수 있는 이유?

“정말, 믿기지 않는군.”

번거롭게 말을 덧붙일 필요가 있으랴.

모든 게 악크샨 최후의 생존자.

모험가, 이호열 덕분이었다.

“어찌 다른 세계에서 이런 정보를 얻을 수 있단 말인가?”

드워프들의 지도자, 체인워커는 하이엘의 말을 떠올렸다.

-“큰 움직임은 보이지 않을 것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 그 정도 예상이야 자신들도 할 수 있었다. 극히 일부에 불과하겠지만, 비장의 무기로 수백만 악마를 쓸어버렸던 아이언 캐슬 호였으니까.

그러나.

“체인워커,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가? 지상을 내려다보고 하늘을 날고 있는 우리보다도 정확하게 대륙의 전황을 파악하는 게!”

그 말대로였다.

구름 속 항해를 이어나갈 수 있을 만큼 구체적인 정보라니.

이런 건 자신들의 기술력으로도 예측할 수 없었으니까.

“지난밤에도 그렇고. 그 능력의 한계는 대체……!”

체인워커가 미소를 머금고는 말했다.

“그저 신뢰하게나.”

믿기지 않을 정도의 활약이었거늘.

맹약 관계이기에 믿을 수밖에 없겠지.

거기에다가 지금은 이유 같은 걸 찾을 때가 아니었다.

호열의 부탁 아닌 부탁을 위해 움직이기도 벅찼으니까.

-“결전병기의 잔해를 수습하고 싶다고 부탁하셨습니다.”

악크샨의 결전병기, 퀴른베르크 기계탑.

이 순간에도 대륙 곳곳에서 악마를 사냥하고 있는 기계탑이었다.

악마들의 세력이 강성해진 만큼 모든 기계탑이 멀쩡할 순 없었다.

제작자로서 짐작해 보건대…….

적어도 대여섯 채의 기계탑은 수명을 다해 가동을 멈췄겠지.

체인워커의 미소에 씁쓸함이 깃들었다.

“……우리조차 신경 쓰지 못한 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군.”

철은 그저 철에 불과하다.

철로 만든 기계 또한 그저 기계에 불과하다.

그렇게 여겨온 자신들의 생각이 부끄러울 정도로.

호열은 악크샨의 유산, 퀴른베르크 기계탑에 대한 경의를 아끼지 않았다. 그렇기에 잔해라도 수습하길 원하는 거겠지. 그 마음을 늦게라도 깨닫게 된 지금.

만회를 위해선 서둘러 기계탑의 잔해를 수습해야 했다.

“자, 다들 서두르게나!”

철컥─!

다시금 맞물리는 기계장치.

그때였다.

차가운 아이언 캐슬 호에 온기가 돌았다.

“!”

하이엘이 모습을 드러냈다. 호열의 부름에 소환됐다가 다시금 아이언 캐슬 호로 복귀한 것이었다. 체인워커가 재빨리 하이엘에게 다가갔다.

“하이엘, 호열 경께서 무언가 말씀하신 게 있으십니까?”

하이엘이 우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하이엘의 품속에는 웬 돌덩이 하나가 들려있었다.

정확하게는.

“대장장이여, 나를 최고의 무기로 벼려내라.”

“……!”

말하는 광석(鑛石)이.

드워프가 어떤 종족인가?

아르카나 대륙 최고의 대장장이.

마탑의 마법과 비견될 정도의 기술력을 가진 이들이다. 아무리 희귀하다고 한들, 광물이라면 두들길 만큼 두들긴 광물이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체인워커의 얼굴은 경악으로 물들고 말았다.

“……이, 이건 귀철? 대체 이 귀한 걸 어디서?”

악크샨 최후의 생존자, 이호열.

그의 그릇은 깊어도 너무 깊었다.

정말, 한없이 깊다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

유스라 왕국의 집무실.

……어째 귀가 심히 가렵다.

그러나 책상머리에서 귀를 후비는 것은 격식에 어긋나는 일이다.

게다가 내가 또 귀 가려울 짓을 많이 하긴 했지.

왜,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운 우산 격투부터 시작해서…….

됐다, 말하면 나만 괴롭다.

“여전히 오만하구나.”

……갑자기 웬 자기소개인가, 싶었거늘.

아르카나 대륙의 악마들을 향한 읊조림이었다.

지속 시간 끝, 다시금 눈을 감은 [마안(魔眼)의 망원경].

아르카나 대륙의 모습은 예상했던 그대로였다.

“쟁탈전.”

마왕 쟁탈전.

내전을 앞두고 악마들이 슬슬 움직이고 있었다. 떠올려 보면, 마왕의 자리에 도전할 만한 녀석들이었지. 하나같이 외관에서부터 일반적인 악마들과는 차원이 다르달까.

“왕을 자칭하는 것도 모자라 순위까지 매긴다?”

뭐, 그랑펠의 입장에서야 그것보다 우스운 일도 없겠지.

“열등한 족속답게 무의미한 짓을 골라서 하는군.”

다 똑같은 사냥감에 무슨 숫자를 붙이나, 하고.

그러나 나, 이호열은 아니다.

혈혈단신으로 아르카나 대륙에 진입했던 그날.

수백만 악마들 사이에 뛰어들었던 그날.

나는 제대로 깨달았단 말이다.

‘지금까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스케일이다.’

대형 이벤트를 넘어선 월드급 이벤트라는 거지.

그 탓에 반드시 업데이트를 통한 균열로 생성.

현실을 위협할 수밖에 없는 사건이라는 말이다.

그 사실을 알고 있으니까.

[끝나지 않은 성전(聖戰)] 퀘스트를 비롯해서 갖가지 방식으로 발버둥을 치고 있는 나였거늘.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이 바로 나, 자신의 성장이었다.

자연스럽게 상태창을 향하는 시선.

[레벨: 494]

“숫자 따위로 나를 재단할 순 없다.”

……한결같네, 진짜로.

근데, 또 틀린 말은 아니다.

레벨에 의존하는 게 아닌 근본적인 성장 또한 중요하니까.

마법적 지식을 쌓는 것은 물론.

새로운 경지에 도달한 검강을 가다듬는 것.

사격을 포함해 애써 파놓았던 우물.

살 구멍들이 막히지 않게 점검할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근데 레벨도 똑같이 중요하거든.’

[천적관계]를 떠나서 레벨이 높아서 손해 볼 건 없었으니까.

챙길 수 있는 건 미리미리 챙겨둬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몇 번이고 신세 한탄을 했다시피, 500레벨에 육박한 레벨을 올리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쓰러져 가는 고목 동산]

[적정 레벨 : Lv.400~Lv.450]

[붕괴도 : 3.1%]

[식인곤충 서식지]

[적정 레벨 : Lv.450]

[붕괴도 : 10.1%]…….

현시점에서 생성된 굵직한 균열들을 살펴본다.

뭐, 다른 플레이어들처럼 온종일 균열에서 몬스터만 때려잡는다면야. 약간은 레벨과 경험치에 변동이 생길 수도 있겠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그럴 시간이 없다.

몸이 두 개라면 모를까.

이런 수준의 균열은 시간 대비 효율이 떨어지는 게 사실이었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드디어 고이 간직했던 적금을.

깨버릴 때가 왔다는 것이다!

[결전병기 퀴른베르크 기계탑에 경험치가 축적됩니다.]

[결전병기 퀴른베르크 기계탑에 명성이 축적됩니다.]

[축적된 경험치와 명성에 대한 습득 권한을 획득합니다.]

퀴른베르크 기계탑에 축적된 경험치와 명성을 말하는 게 맞다.

그런 나의 원대한 계획을.

하이엘을 통해 체인워커에게 전달해 뒀다는 말씀.

그중 하나만 회수해도…….

‘……적어도 수십 레벨은 확 오르지 않을까?’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지만, 이번만큼은 기대해 볼 만하다.

다른 것도 아니고 악크샨의 결전병기다.

성전의 압도적인 열세 속에서도 거악과 마왕을 몰아붙였던 천하의 악크샨.

“그대들의 긍지를 잊지 않겠다.”

그래, 잊지 않고 제대로 써먹어 주겠노라.

물론, 그런 나의 구구절절한 속마음을.

체인워커를 비롯한 드워프들에게 전할 순 없었으니. 최대한 간결하게 하이엘에게 말을 전달했다. 마지막으로 귀철까지 더해서 말이야.

‘더 이상 제련을 미룰 이유가 없어.’

귀철, 에고(Ego) 장비의 재료가 되는 광물.

어마어마한 잠재력을 지닌 만큼 어떻게 제련해야 하는가?

고민이 되는 게 사실이었다.

일단, 무엇보다 신경이 쓰였던 건 레벨 제한이었지.

‘아무리 좋아도 착용할 수 없으면 소용이 없으니까.’

레벨을 고려해서 제작한다면 그 성능이 모자라고.

성능을 최우선으로 제작한다면 레벨 제한이 높아질 게 뻔했으니까.

딜레마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 또한 경험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었다.

무조건 성능이 최우선이다!

800레벨 제한의 아이템 [사악한 지룡의 송곳니].

착용할 엄두조차 나지 않는 아이템을 『마법』, [심미]로 활용했던 나였으니까. 템빨 덕분인가, 위력은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귀철을 제련해서 만들 에고 장비도 마찬가지겠지.

‘……잠깐, 자아를 가지고 있으면 더 활용도가 높아지는 거 아닌가?’

순간, 그럴싸한 가능성이 떠올랐지만.

나중에 완성된 에고 장비를 앞에 두고 생각해도 늦지 않은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드워프들에게 귀철의 제련을 맡긴 건 아주 현명한 판단이었다, 호열아.

하이엘에게 덧붙였던 마지막으로 말은 그다지 현명하지 못했지만.

-“또한 그 수고비는 얼마든지 지불하겠다고 전하라.”

그놈의 얼마든지!

누가 귀족 아니랄까 봐, 청렴결백하게 모은 돈을 정승같이 써버리게 생겼구나.

어쨌거나 지껄여 버린 이상.

그저 제련 값을 하길 기도하는 수밖에 없겠지.

“나는 그대들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슬슬 자리에서 일어났다.

약속시간이 가까워졌으니까.

드워프들의 기술력과 긍지야 조금도 의심하지 않거늘.

사람 속은 또 알 수가 없는 법이거든.

직접 얼굴을 맞대봐야 알 수 있다는 말씀이시다.

그런 나의 행선지는 AAU 대한민국 지부.

가볍게 정리하는 옷매무새.

이내, 나는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마력을 끌어올렸다.

포탈을 발현했다.

“말했듯 시간은 오후에 즐기는 차와 같다.”

그 말인즉슨.

오후인 지금은 24시간 중에서도 특히 귀한 시간대라는 것.

다들, 부디 약속시각을 잘 지켜주기를 바란다.

마탑, 초인이라 불리는 선임 마법사들 앞에서도 눈치를 보지 않았던 나의 꼰대력이다. AAU 지부장들 앞이라고 자제할 수 있는 게 아니란 말이다…….

*

AAU 대한민국 지부.

대회의실.

가장 먼저 도착한 건 AAU 런던 지부장, 베이커 채트였다.

베이커가 박민재를 발견하고는 환하게 웃었다.

“미스터 박, 얼굴이 많이 좋아졌군요!”

저 양반이 저렇게 살가운 양반이 아니었는데?

AAU에 소속되어 있으면서도 협조적이지 않았던 영국이었다.

지부장인 베이커도 마찬가지였다.

적어도 박민재의 기억 속에서.

베이커가 웃는 건 처음 보는 것 같았다.

“일찍 오셨군요. 베이커 지부장 님.”

“정말 신세 많이 졌습니다.”

“신세라뇨. 설마, 이호열 플레이어 말씀하시는 겁니까?”

역시, 반가워하는 이유가 따로 있었잖아?

당사자가 참석하는 마당에 불필요한 오해를 쌓는 건 금물.

박민재가 재빨리 악수했던 손을 놓고는 말을 이었다.

“믿기지 않으시겠지만, 저도 오늘 처음 뵙는 겁니다.”

“네, 초면이죠? 미스터 박과 얼굴을 맞대는 건 처음이군요!”

“……아니, 그쪽이 아니라 저조차도 이호열 플레이어를 직접 보는 건 처음이라는 뜻입니다.”

“아아, 그런 말씀이셨군요!”

베이커는 그제야 박민재가 안절부절못하는 이유를 알아차렸다.

그러나 방금의 인사는 호열을 향한 감사 인사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사양하실 것 없습니다.”

“……?”

“제 마음을, 지금처럼 말 몇 마디로 대신할 생각은 없거든요.”

악마에게 빙의당했다.

베이커가 그 사실을 자각한 건.

슈레이그에게 자초지종을 전해 듣고 난 다음이었다.

일반인, 플레이어들보다 정신력이 낮을 수밖에 없었으니까.

악마에게 완전히 주도권을 빼앗겨 의식조차 남아있지 않았던 상태였던 것이었다.

‘이호열이 그런 나를 구원해 줬다.’

아니, 그걸 넘어서 런던을 구해냈다.

신세를 졌다, 인사 한마디로 은혜를 갚는다는 거야말로 신사답지 않은 행동이겠지.

그건 자신뿐만 아니었다.

같은 날, 균열에 휘말린 총리께서도.

여왕께서도 자신에게 같은 뜻을 전해오셨으니까.

“미스터 박.”

“네, 듣고 있습니다. 베이커 지부장님.”

“이제부터 우리 영국은 행동할 겁니다.”

“……행동이라면?”

중국처럼 본격적으로 독자적인 노선을 타겠다는 말인가?

순간, 긴장한 박민재였거늘.

기우에 불과했다.

베이커의 입에서 익숙한 단어가 튀어나왔으니까.

“긍지에 따라서 움직이겠단 말입니다.”

“……!”

두 사내가 의미심장한 대화를 끝마친 순간이었다.

임박한 시간에 맞춰 세계 각국의 지부장들이 모여들었다.

과연, 박민재의 예상대로였다.

‘다들 부리나케 달려올 수밖에 없었겠지.’

외부에 알려지지 않는 비공개 긴급회의.

참석하지 않는다면.

회의에서 어떤 이야기가 오고 갔는지 알 방법이 없었다.

다른 플레이어도 아니고, 이호열이 참석하는 회의에 불참한다?

어떤 극비 정보를 놓치게 될지 알 수 없는 일.

물론, 더 나아가서 각자의 꿍꿍이속도 있겠지.

‘특히 미국.’

미국은 동부와 서부에 두 개의 AAU 지부가 존재하는 유일한 국가였다. 둘 중 하나만 참석해도 됐을 텐데. 굳이 두 지부장님께서 참석 의사를 밝히신 걸 보면…….

어째 그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것 같았다.

덜덜덜.

‘내가 억울할 건 없지만, 괜히 신경 쓰이잖아.’

박민재가 긴장감에 다리를 떨기도 잠시.

어느덧 정각, 약속 시간이 되었다.

그 순간, 모두가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공기가 달라졌다.

고오오오─!

허공에서 마력의 빛무리가 일렁였다.

포탈에서 이호열이 모습을 드러냈다.

사전에 말을 맞춘 것도 아니었거늘.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베이커를 시작으로.

짝짝짝─

곳곳에서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랬다.

이해관계를 떠나서 호열이 보여준 활약은 AAU의 창설 목적과 더없이 부합하는 행동이었으니까. 진짜 영웅의 등장에 찬사를 보내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박수 소리는 길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박수가 부담스러울 법도 하건만.

조금의 변화도 없는 표정으로 호열이 입을 열었으니까.

“시간 관계상 환대는 생략하겠다.”

차가운 목소리로.

그 탓에 분위기가 급속도로 냉각됐다.

그보다 더욱 냉랭한 호열의 시선이 회의실 시계를 향했다.

이내, 누구도 예상치 못한 말이 이어졌다.

“또한 시간조차 엄수하지 못한 이들과 나눌 이야기는 없다.”

“……!!!”

그와 동시에.

누구도 손을 대지 않았거늘.

회의실 문이 굳게 닫혀버렸다.

쿵!

.

.

.

좋아.

이제 퇴로는 없다.

악마는 고개를 들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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