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156화 (88/489)

◈ 156화. 피어난 것은 (3)

런던 사태의 파장은 쉽사리 진정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세계가 주목한 건 급변한 영국의 태도였다.

영국, 대격변 이후 세컨드 썬을 중심으로 독자적으로 활동하던 국가.

그런 세컨드 썬의 길드 마스터, 슈레이그가 선언한 것이었다.

“이제부터 우리는 성전에 참전합니다.”

[끝나지 않은 성전(聖戰)]에 뛰어들겠다고.

세컨드 썬은 영국 정부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으니까.

사실상 영국의 참전이라고 봐도 무방한 발표였다.

“세컨드 썬까지 움직일 줄이야.”

“진짜 이러다가 천하통일도 뛰어드는 거 아니에요?”

“좀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에이, 감독님. 농담도 못 해요? 그나저나 장관이네요.”

런던 거리에 피어난 아쿠아리우 떡갈나무들.

이 나무들이 바로 삭막하고 뻣뻣한 영국을 변하게 한 일등공신이겠지. 아니, 굳이 따지자면 그런 나무를 싹 틔운 이호열이 일등공신이려나?

“일개 플레이어의 영향력 수준을 넘어섰어.”

신비주의를 고집하던 스칼은 제쳐놓더라도.

랭킹 2위 자리를 지키던 록스만 봐도 그랬다.

플레이어로서는 명성이 드높던 록스였지만, 국가를 움직일 정도의 힘을 행사하는 건 불가능했으니까.

그러나 이호열은 달랐다.

“완력으로 꼬장을 부린 게 아니라, 이 마음부터 움직이게 만든 게 더 대단한 점이죠!”

과연, ‘런던의 기적’이라 불려도 부족함이 없는 활약이었다.

물론, 아쿠아리우 떡갈나무만큼이나 화제가 된 건 하나가 더 있었다. 하늘은 더없이 화창했건만. 거리엔 우산을 쥔 사람들이 심심치 않게 보였다.

“여기가 거기 맞죠? 이호열이 망령을 쓰러트렸던!”

호열의 우산 격투.

거리 곳곳에서 우산을 치켜들고 명장면을 흉내 내는 사람들이 보였다. 사실 전투라고 해도 우산을 한 차례 절도 있게 휘두른 것뿐이었지만.

덕분에 평범한 시민들이 흉내를 내는 데엔 무리가 없었다.

그 현장이 하나의 신드롬으로 전파를 타고 뉴스로 보도될 정도였다.

유스라 왕국.

잠자코 화면을 지켜보던 남태민이 입을 열었다.

“……진짜 장난 아니다.”

대검을 휘두르는 바바리안.

물리 공격이 먹히지 않는 망령을 상대하는 게 얼마나 피곤한 일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남태민이었다.

마찬가지로 광전사, 레오니의 감상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우산에 마력이라도 둘렀나? 뭔데.”

뭐냐고, 진짜로.

호열의 우산 격투 영상을 보면서 다시금 깨닫게 됐다.

성장했어도 호열과 자신들의 격차는 아득하게 벌어져 있다는 걸.

마창사, 히사기의 눈이 예리하게 빛났다.

날붙이에 마력을 휘감아 싸우는 것은 히사기의 주특기.

덕분에 그 특징을 누구보다 잘 알아차릴 수 있었다.

“마력을 사용하신 건 아닐 겁니다.”

그러니까 세 사람의 의문은 더더욱 깊어졌다.

“그럼, 진짜 저 우산이 유니크템이라도 되는 건가?”

“씹, 진짜 말이 되는 소릴…….”

“아니, 호열 씨가 보여주신 그 눈깔은 말이 되냐 그럼?”

“……그것도 말이 안 되긴 하는데, 하씨.”

그런 세 사람의 곁으로 인기척이 다가왔다.

프로스트에서 유스라 왕국으로.

라이언 하트 기사단의 정비를 위해 움직인 하르콘이었다.

“앗. 하르콘 단장님, 간만에 뵙습니다.”

유스라 왕국을 재건하며 라이언 하트 기사단과는 동고동락한 남태민과 레오니였다. 뒤늦게 합류한 히사기도 하르콘과는 어느 정도 통성명을 마친 상태.

덕분에 하르콘은 개의치 않고 물어왔다.

“호열 경 이야기를 하던 도중이었나 보군.”

“아, 혹시 소식 들으셨을까요?”

“경의 소식이라면 던전 균열 이야기를 하는 것인가?”

“역시, 프로스트에도 호열 씨 소문이 자자했군요?”

굳이 알려고 들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호열 경이 움직였다, 균열을 클리어했다, 맹활약했다.

가만히 있어도 들려오는 소문들이 있었으니까.

그런데 잠깐만……?

하르콘의 눈이 남태민이 들고 있던 스마트폰을 향했다.

“……경?”

난데없는 하르콘의 혼잣말.

혹시 스마트폰을 처음 보시는 건가.

아니면 우리처럼 우산 격투에 놀라신 건가.

나름대로 머리를 굴리던 세 사람.

“이건!”

그러나 아는 만큼 보인다고.

그중 정답은 없었다.

하르콘은 정말 세 사람과 다른 걸 보고 있었으니까.

칠흑처럼 검게 물든 장우산.

그런 장우산을 타고 오르는 은빛 기백.

틀림없었다.

“……그런가. 그것이 경, 고유의 빛인가?”

하르콘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대체 어느 틈에 검강(劍罡)의 경지에 이르렀단 말인가!”

……검강?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랭커가 괜히 랭커가 아니다.

수많은 경험을 통해 쌓인 눈치가 있다는 말이다.

검강이 바로 우산으로 망령을 쓰러트린 능력의 이름이구나.

세 사람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하르콘 단장님, 그 검강이라는 게 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

마탑의 집무실.

“불합격이다. 벤쉬 윌리엄.”

언제나처럼 수석의 업무에 시달리고 있던 나를 일깨운 건 진동이었다.

쉬지 않고 울리는 허벅지의 스마트폰.

확인하지 않아도 알고 있다.

애증의 존재들이 확실하다.

……진심으로 무시하고 싶었건만.

이놈의 예절이 연락을 무시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쌓인 단톡방 메시지가 떠올랐다.

나를 ‘한없이 깊은 어둠’이라 저장한 웬수는 말할 것도 없고, 하고 싶지도 않다. 마찬가지로 2호의 메시지도 최대한 흐린 눈을 뜨고 살폈다.

그런데…….

큰누나, 누나까지 나한테 그러면 안 되지 진짜로!

단톡방에 올라온 동영상 하나.

아랑이다.

정확하게는 분홍색 우산을 들고 있는 하나뿐인 내 조카.

세상 사람들이 다 우산을 휘둘러 대도 참을 수 있다. 나한테 통제할 명분도 없으니까.

그러나 하나뿐인 내 조카가 나의 흑역사에 물드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단 말이다……!

“과연, 훌륭한 자세로구나.”

아랑이를 진지하게 평가하지 마라, 그랑펠.

물론, 동영상이 전부는 아니었다.

웬수라도 혈육이라고.

놀림 끝엔 결국, 다들 내 안부를 물어왔으니까.

‘물론, 뉘앙스가 좀 그렇긴 한데.’

성전 퀘스트에 대해서도 소식을 들은 모양.

혼자 다니다가 친구들이랑 같이 활동하게 된 거냐며.

그래도 친구들이 있다니.

전보다 마음이 놓인다는 말이나 하고 말이야들.

“우려하실 것 없습니다.”

물론, 예절에 따라서 정중하게 답장을 보낼 수밖에 없었으니.

이쯤에서 그만하자.

더 이상 웬수들과 말을 섞었다가는.

나, 이호열의 정신력이 버티지를 못한다.

나는 다시금 업무로 눈을 돌렸다.

[퀘스트 : 끝나지 않은 성전(聖戰)]

아르카나 대륙에서 현실로.

악마와의 성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 전쟁의 끝엔 보상도, 전리품도 존재하지 않는다.

남는 것은 오직 긍지뿐.

스스로의 긍지를 증명하라.

다른 플레이어들과 달리.

내 성전 퀘스트엔 ‘해당 지역에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라’는, 퀘스트 목표가 존재하지 않았다. 솔직하게 내가 누군가에게 평가받을 위치가 아니긴 하지.

물론, 플레이어들의 퀘스트는 현재도 진행 중이었다.

웅성웅성─

집무실, 문밖에서 들려오는 소음이 증거겠지.

마탑에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몰려든 플레이어들이었다.

마법사 계열 플레이어들은 약간 들뜬 모양이었다.

나와 제시 하인네스를 제외하고, 마탑에서 직위를 가진 플레이어는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기회라고 생각하겠지.’

가치를 증명하고 인정받는다면.

마탑에 입성해 직위를 받게 되는 것도 모자라서.

마탑의 지식을 전수받을 수 있단다.

기대감을 가지는 것도 충분히 이해가 된다.

그러나.

“그 기준은 엄격할 것이다.”

다른 것도 아니고 여태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악마와 맞서게 되는 성전 퀘스트다. 플레이어의 능력, 높은 레벨이 필수적으로 요구된다는 뜻이다.

그래도 불행 중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게 좋을 거다.

‘만약에 내가 평가하겠다고 나섰어 봐.’

마탑의 숙련 마법사들은 기본이요.

벤쉬 윌리엄에게 그랬던 것처럼.

경우에 따라선 선임 마법사에게도 퇴짜를 남발하는 내가 아니던가?

그래서 진심으로 우려하기도 했었다. 내가 플레이어 평가까지 도맡았다가는 단 한 명도 마탑에 입성하지 못하는 불상사가 생기는 게 아닐까, 하고.

“아쉬운 일이군.”

아쉽기는 개뿔.

너는 매사에 감사할 필요가 있다, 그랑펠.

뭣보다 평가에까지 손을 벌렸다간 진짜 죽는다, 죽어.

─나약해진 육체를 단련하라. (반복) ▲

●40KM 달리기 (진행 중)

●팔굽혀펴기 3,000회 (진행 중)

●턱걸이 2,000회 (진행 중)

●버피 테스트 1,000회 (성공)

……진짜 피곤해서 죽는다는 말이다.

[근력]과 [민첩]에 스탯을 투자한 이후로 클래스 퀘스트의 요구치가 급격하게 상승했다.

정말 보는 것만으로도 아찔해지는 수치들이다.

물론, 내색은 조금도 할 수 없었으니.

나는 그저 태연하게 읊조릴 뿐이었다.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르는 법.”

큰 힘이라고 하기에 내 [근력] 스탯은 일백도 되지 않거늘. 어쨌든, 클래스 퀘스트부터 시작해서 평가 말고도 할 일이 과분하게 많다는 뜻이다.

지이잉─

별안간, 또 한 번 진동하는 스마트폰.

이번에는 전화였다.

웬수, 이예림이 하다 하다가 이젠 말로 내 정신을 공격해 오려는 건가? 다짜고짜 의심부터 했는데, 미안하게도 아니었다. 그렇지 않아도 연락하려고 했던 남태민이다.

“듣고 있다.”

……여보세요라고.

좀 평범하게 인사하면 입에 가시라도 돋아나는 거냐.

이래서 되도록 통화를 피하고 싶은 건데.

다행스럽게도 남태민은 대수롭지 않게 반응했다.

-“허억. 허억. 호열 씨, 통화 괜찮으세요?”

반응과 별개로 어째서인가, 숨이 넘어가려고 하는 목소리였지만.

나의 궁금증은 오래가지 않았다.

남태민이 곧장 말을 이었기 때문이었다.

-“갑자기 죄송한데, 그 검강이라는 게 진짜 존재하는 건가요?!”

……검강(劍罡)이라고?

그 말에 직감할 수 있었다.

하르콘에게 체력 단련을 받고 있구나.

듣던 중 반가운 소리다. 이거.

“그렇다.”

역시, 나만 체력 단련으로 개고생 하는 건 억울하단 말이지.

*

“검강은 그대들이 넘볼 수도 없을 정도로 아득한 경지라네. 그 이전에 검기라는 또 하나의 산, 그 정상에 반드시 올라서야 하니까 말일세.”

하르콘은 말을 이었다.

“그런 검기를 깨우치기 위해선 그에 걸맞은 육체가 필요하지.”

그런 육체를 만들기 위해서 뛰어라!

호열과 통화 중인 남태민.

레오니는 남태민이 통화를 끝내자마자 물었다.

“……뭐래. 아니, 뭐라고 그러시냐?”

제발, 검강 같은 건 없다고.

하르콘이 헛소리를 한 거라고 말해주면 좋겠다.

‘전투랑은 다른 체력 소모야.’

폐가 비명을 지른다.

끊었던 욕지거리가 다시 튀어나올 만큼 고통스러웠으니까.

하지만 바람이 무색하게도.

도리도리─

남태민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하르콘 단장님 말이 맞았어. 하셨대.”

“이런 걸? 진짜?!”

“레오니 양, 더 이상 변명의 여지는 없습니다.”

히사기의 얼굴에 비장감이 깃들었다.

남태민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에는 하르콘이 농담을 하는 건가, 싶었다.

그야 검강이라니.

아르카나에서 그런 스킬은 듣지도 보지도 못했으니까.

“검강도 검기도, 호열 상이 있다면 있는 겁니다.”

그런데 있단다.

“호열 씨도 체력 단련을 하셨다니. 따라야지.”

그리고 했단다.

미친 광신도들이야, 뭐야.

레오니가 두 사람의 광기에 혀를 내두르는 사이.

두 사내가 이를 악물고 달려나갔다.

젠장, 이해는 안 되지만 뒤처질 수는 없다.

균열이 그리워질 줄이야.

레오니가 이를 악물고 다리를 움직였다.

그나저나…….

“야, 남태민! 근데 AAU 얘기는 뭔 얘기야?!”

.

.

.

띠링─

박민재는 메시지의 발신인을 확인했다.

[남태민].

대한민국 최고의 길드 가온.

길드 마스터, 남태민이 AAU 대한민국 지부장과 면식이 있는 건 당연한 일. 그러나 남태민 측에서 먼저 연락을 해오는 건 흔치 않은 일이었다.

“보자.”

슬쩍.

달력을 향하는 박민재의 시선.

아무리 봐도 예정된 행사 같은 건 없는데. 공적인 일이라면 몰라도 사적으로 연락을 주고받을 정도의 사이는 아니었으니까. 이내, 박민재가 메시지를 확인하고는 눈을 끔뻑였다.

믿기지 않아서.

“……뭐?!”

다시 봐도 그 내용이 믿기지 않아서.

몇 번이나 메시지를 다시 살펴보고 난 뒤에야.

비로소 내용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플레이어 이호열. AAU 회의 참석 요청]

이호열이 AAU 회의에 참석한단다……!

그동안 AAU 대한민국 지부에서.

아니, 지부를 떠나서 AAU가 이호열.

그에게 얼마나 많은 구애를 보냈던가?

그러나 단 한 번도 응답하지 않았던 이호열이었다.

그래서 모두가 포기한 지가 오래전이었단 말이다.

그런데 그 천하의 이호열이.

먼저 자신을 통해서 접촉 의사를 밝혀오다니.

“오케이. 무조건 오케이!”

AAU 각 지부의 일정을 조율할 필요도 없었다.

지금이 시차 같은 걸 따질 때인가?

갑은 언제까지나 이호열이다.

을은 그저 따를 뿐.

박민재가 허겁지겁 답장을 보냈다.

“이, 이게 무슨 일이냐?”

벅찬 가슴을 억누르기도 잠깐.

문득, 박민재에게 떠오른 격식과 예절.

우당탕!

박민재가 다급하게 지부장실을 뛰쳐나갔다.

재수가 없게도 그와 마주친 건 다름 아닌 성현준이었다.

박민재가 성현준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야, 현준아. 나, 그래도 꼰대 티 좀 벗겨지지 않았냐?”

“……네? 아, 네. 그렇죠?”

“그치? 근데 아무리 내가 편해도 주머니에서 손은 좀 빼고…….”

*

마왕 쟁탈전이라는 초대형 업데이트 예정된 지금.

불필요한 사건 휘말리는 건 극구 사양이다.

그런 의미에서 런던 사태와 같은 일을 되풀이할 순 없다.

말했다시피 AAU의 면면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것.

하지만 그전에.

유스라 왕국 집무실.

나는 책상 위에 놓인 서류를 싸늘한 시선으로 훑었다.

서류의 목적은 면담 요청.

서류의 제출자야 과거에도, 지금에도 잘 알고 있다.

플레이어 랭킹 1위, 스칼.

하지만 그 절차가 잘못됐다.

“불합격이다. 스칼.”

한없이 깊은 뭐시기만으로도 충분했거늘.

악룡 사냥꾼이라는 또 다른 내 이명을.

세상에 퍼트린 데에 대한 사과가 우선이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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