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4화. 피어난 것은 (1)
악마의 기척이 느껴진 곳은 다름 아닌 지부장실.
AAU 런던 지부장, 베이커 채트.
악마는 베이커의 육체에 빙의해 있다.
그렇게 추측하는 순간, 머릿속에 남아있던 의문이 풀렸다.
이 악랄한 [던전]의 구조를 비로소 이해할 수 있게 됐다는 말이지.
[던전 : 우울한 비의 도시]
[적정 레벨 : Lv.600~Lv.900]
[붕괴 진행도 : 2.3%]
긴급 업데이트.
이번 던전은 예정된 업데이트가 아니었다.
뭐, [깨진 차원의 틈] 균열부터 한두 번이 아니니까.
그쯤은 이해하고 넘어간다고 치더라도.
문제가 되는 건 그 적정 레벨이었다.
이게, 뭔가 애매했거든.
마냥 높은 것도 아니고 마냥 낮은 것도 아니다.
무엇보다 나, 이호열이 혼자 당당하게 균열에 진입한 게 애매한 균열이라는 보증 수표.
뭐, 그것도 불규칙한 던전의 특성이라고 생각하고 넘어간다고 치더라도.
‘다른 것보다 함정이 선을 넘었으니까.’
그건 플레이어가 간파할 수 있는 함정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악의가 느껴질 정도로 악랄하다.
플레이어는 물론, 던전 균열에 갇힌 일반인 모두를 죽음으로 몰고 가는 함정이었으니까.
심지어는 악마 사냥꾼, 천적이라는 나조차도 하이엘이 아니었더라면 간파하기 힘들었겠지.
‘영락없이 고위 악마라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꼭 상위 마왕이 아니라도, 고위 악마 정도.
친절하게 예를 들어볼까?
아르카나 대륙에서 봤던 [마계 서부의 패자, 락시오로스] 정도만 돼도 말이야. 기세가 등등해져선 벌써 내 앞에 모습을 드러냈을 테니까.
‘락시오로스, 그랑펠 못지않게 오만했었지. 그거.’
마왕급이 되면 그 자신감은 정말 하늘을 찌를 정도라는 것.
하지만 이 녀석은 희한했다.
함정인가, 의심이 될 정도로.
AAU 런던 지부 구석에서 한껏 움츠러들어 있었으니까.
그러나 말했다시피 의문은 사라진 상태였다.
나는 지부장, 베이커를.
아니, 악마를 바라봤다.
냉랭하게 읊조렸다.
“주제넘은 짓을 벌였군.”
“……!!”
“주제넘은 짓……? 혹시 두 분께서 아시는 사이신가요?”
슈레이그는 어리둥절한 눈치다.
내가 아는 악마라면 이쯤에서 세 치 혀를 놀렸겠지.
어떻게 해서든 슈레이그를 속여넘기고 상황을 무마해 보려고.
그러나 녀석에게는 그럴 정신조차 없어 보였다.
아주 당연한 반응이다.
“허억허억.”
악마 사냥꾼으로서 레벨이 상승.
덕분에 나와 악마의 [천적관계]는 더욱 확고해진 상태. 마왕도, 고위 악마도, 뭣도 아닌 녀석은 내 앞에서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다는 것이다.
나는 차가운 시선으로 녀석을 내려다봤다.
“다물거라.”
“……?”
“나는 네게 숨을 허락하지 않았다.”
“……!”
평소 같았으면 말이지.
이젠 남이 숨 쉬는 것까지 통제하려고 드는 거냐고.
그보다 슈레이그가 보는 앞에서 뭐라고 지껄이는 거냐고.
이놈의 내가 입방정 때문에 살 수가 없다고.
속에서 분통을 터트렸을 나였거늘.
‘딱. 오늘만큼은 그 심정에 공감한다, 그랑펠.’
이내, 나의 시선이 창 너머로 옮겨간다.
“이곳에서는 훤히 보이고, 들렸겠구나. 빗물에 잠긴 이들이 고통스럽게 신음하는 소리가.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무슨 생각을, 어떤 감정을 느꼈는가.”
“!”
내가 거기까지 말하자 슈레이그의 눈빛이 달라졌다.
말보다는 행동이었다.
챙!
슈레이그가 곧장 검을 치켜들었다.
“이호열 플레이어 님의 말이 사실입니까? 베이커 지부장?”
녀석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못했다.
내가 숨을 허락하지 않았으니까.
그저 공포에 질려 목을 부여잡고 켁켁거리고 있었을 뿐.
물론, 대답은 필요 없다.
“허나, 네놈들의 하찮은 생각 따위 알 필요도 없겠지.”
“……!!”
“그럼에도 명심하거라.”
사냥감과는 말을 섞지 않는다.
그런 좌우명을 가진 그랑펠이, 내가.
마왕도 뭣도 아닌 악마와 대화를 나눈 이유는 간단하다.
모든 것에는 정도가 있는 법.
그러니까…….
“선을 넘지 말거라.”
마력을 끌어올릴 필요도 없었다.
우산을 치켜들 필요도 없었다.
그래, 경고면 충분했다.
[이름 없는 악마에게 ‘공포’가 발생합니다.]
[이름 없는 악마에게 ‘질식’이 발생합니다.]
[이름 없는 악마아게 ‘사망’이 발생합니다.]
털썩─
목덜미를 부여잡고 그대로 쓰러진 베이커.
슈레이그가 다급히 달려가 그의 목에 손을 올렸다.
그러고는 나를 올려다봤다.
“일단, 숨은 붙어있습니다.”
마왕의 전리품, [악에 물든 일각의 지휘봉]을 정화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름도 없는 악마를 상대로 마왕의 전리품을 제물로 바칠 필요는 없겠지.
‘제물의 급에 따라서 구마의식의 위력도 달라지니까.’
물론, [구마의식]은 진작 발동된 상태였다.
베이커의 육체에 피해가 가지 않는 게 당연하겠지.
슈레이그가 내게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베이커가 악마에게 빙의된 이유?
내가 심리학자도 아니고, 그딴 건 알 수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나 아는 데까진 설명해 줄 필요가 있겠지. 가감없이 아주 담백하게.
“그는 악마에게 몸을 빼앗겼었다.”
“……베이커 지부장님이? 그럴 수가! 빙의란 말씀이십니까?”
[빙의].
플레이어들에겐 낯설지 않은 디버프였다. 지금은 출현이 뜸해졌다고 한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균열에서 흔히 마주쳤던 악마족 몬스터였으니까.
“악마가 일반인에게도 빙의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대체 어느 틈에 사회로 숨어서…….
중얼거리던 슈레이그가 흠칫했다.
그러더니 얼굴이 하얗게 질려 말을 이었다.
“잠깐, 그렇다면 제가 어제 만난 베이커 지부장님은……!”
붙어있었으면서도.
대화를 나눴으면서도 낌새를 알아채지 못했다니.
악마의 메소드 연기에 적잖은 충격을 받은 모양이다.
그런데 진실은 더욱더 잔혹하거든, 슈레이그.
‘이건 시작에 불과하니까.’
아는 만큼 보인다고 말이 있다.
이번 일로 확실하게 깨달았다.
어쩌면 현실은 아르카나 대륙보다 악마가 날뛰기에 적합한 장소인지도 모른다는 것을. 가정해 보자. 만약, 베이커에게 빙의한 게 진명의 악마였다면…….
‘지금보다 훨씬 악랄한 던전이 출현했을지도 몰라.’
AAU 지부장.
AAU의 전신이 아르카나의 개발사 코스모였던 걸 고려한다면. 베이커의 아르카나 세계관에 대한 지식은 웬만한 플레이어보다도, 악마보다도 뛰어났을 터.
이름 없는 악마는 그 지식을 이용한 게 분명했다.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
진짜 탈출이 불가능할 수준의 던전이 출현했을 수도 있겠구나. 그러나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고. 중요한 건 위험 가능성을 알게 됐다는 것.
그렇다면 문제가 될 건 없다.
모든 건 바로 잡으면 되는 일이니까.
나는 슈레이그에게 말했다.
“놀란 모양이군.”
“……죄송합니다. 상당히 놀랐습니다.”
“그러나 이건 시작에 불과하네, 슈레이그.”
“시작에 불과하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말했다시피 마왕 압살은 계기에 불과했다.
폭풍전야.
현재 악마들이 조용했던 이유가 [마왕 쟁탈전]을 앞두고 서로 눈치를 보기 때문이었다는 걸. 아르카나 대륙에 진입했던 나는 깨닫게 됐단 말이다.
본격적으로 쟁탈전이 시작되는 순간, 악마들의 활동은 지금까지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스케일이 커지겠지.
“이번 사태는 예고에 불과할 정도의 사건이 올 테니.”
“……!”
“그러나 걱정할 필요는 없다.”
또각.
나는 그렇게 말하며 걸음을 옮겼다.
던전 심층부, 사태의 원흉인 악마가 사망한 지금.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균열, ‘던전 : 우울한 비의 도시’를 클리어하셨습니다.]
“시련 끝에 피어난 긍지는.”
그와 동시에 비안개가 걷혔다.
우울한 비의 도시라고 했던가.
런던을 잠기게 한 눈물이 메마른 것이다.
“그 무엇보다 찬란할 테니.”
언제나처럼 말만 거창하게 지껄인 게 아니다.
런던의 거리거리가 물기를 머금은 나무로 가득했다.
눈물을 양분으로 삼아 피어난 아쿠아리우 떡갈나무로. 그래, 먹구름이 걷히고 내리쬐는 햇빛을 반사하는 나뭇잎들은 정말로 찬란했으니까.
그리고 찬란한 게 하나 더 있지.
[던전 클리어 기여도에 따라 전리품을 습득합니다.]
굳이 인벤토리를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육망성 브로치가 빛나고 있다.]
찾았다, 두 번째 [육망성 브로치].
.
.
.
투두두두─
시끄러운 헬리콥터.
기자가 다급한 목소리로 상황을 전한다.
“머, 먹구름이 걷혀가고 있습니다. 여러분!”
외부인의 접근은 허용하지 않겠다는 것처럼.
비안개에 휩싸여있던 런던의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외곽부터 서서히 걷혀가는 비안개.
가장 먼저 앵글에 포착된 건 플레이어들이었다.
“세컨드 썬의 길드원들입니다. 방금까지 전투 도중이었던 것처럼 보이는데요! 자, 잠시만요. 플레이어들 뒤에 쓰러져 있는 건……!”
정확하게는 시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사투 중이던 플레이어들.
예고되지 않은 긴급 업데이트였지만, 실시간으로 추가되는 추가 업데이트 내역은 모두가 확인할 수 있었다.
덕분에 지켜보던 이들은 경악하고 말았다.
“600레벨 몬스터, 그것도 망령들이 등장했잖아.”
“웬만한 물리 공격엔 끄떡도 안 할 텐데?”
“그런 몹들을 앞에 두고 시민들을 보호했다는 거야?”
“대체 어떻게 지금까지 살아있는 거지, 쟤네?”
세컨드 썬.
길드 마스터, 슈레이그의 실력이야 의심할 바가 없다.
그러나 간부, 재커리를 비롯한 길드원들의 평균 수준은 다른 길드와 비교해서 특출날 정도는 아니었으니까.
분명, 길드원 모두가 무사하지는 못하리라.
꼴깍!
본능적으로 알아차린 이들이 긴장감에 마른침을 삼켰다.
“!”
그러나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크게 부상을 입은 플레이어도, 쓰러진 이들도 없었으니까. 더 나아가서 쓰러졌던 시민들조차 하나둘씩 정신을 차리고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투두두두─
런던, 어느 거리를 비춰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균열, 그것도 여태껏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았던 던전.
그런 던전 균열 속에 런던 전역이 뒤덮였거늘.
사상자는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보고 계십니까? 기적입니다. 기적이 벌어졌습니다, 여러분!”
영국.
아니, 전 세계가 안도의 한숨을 뱉었다.
이윽고 대기 중이던 구조대원, 군병력까지 투입된 순간.
런던에 발을 들인 이들은 목격할 수 있었다.
“……잠깐만, 여기에 이런 가로수 길이 있었나?”
눈물의 씨앗에서 피어난 숭고한 나무들을.
.
.
.
[런던 거리 곳곳에 의문의 나무 출현……!]
[세컨드 썬 길드원 曰, “나무가 생명력을 회복시켜 줬다.”]
[생존자들, “정신을 잃은 와중에도 따스한 온기를 느낄 수 있었다. 우리를 위해 희생한 플레이어들에게 감사하는 마음 전하고파…….”]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나무였다.
다른 이들처럼 나무의 이름까진 알 수 없어도.
정체를 알고 있는 슈레이그였다.
AAU 런던 지부.
“잠깐, 슈레이그다!!”
그곳에서 슈레이그가 모습을 드러내자 분주하게 움직이던 취재진들의 시선이 집중됐다.
모두가 슈레이그를 향해 몰려들었다.
“슈레이그 씨,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혹시 AAU 런던 지부가 던전의 심층부였던 건가요?”
“이호열 플레이어는 어디에 있는 겁니까?”
슈레이그는 작게 웃음을 삼켰다.
‘내가 설 자리가 아닌데 말이야.’
주인공인 호열은 균열을 클리어하자마자 포탈 발동.
자리를 뜨고 말았으니까.
정식으로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다고 애원해도, 마땅히 감당해야 할 일이었다는 말만 남긴 채. 그러니까 슈레이그가 할 수 있는 건 하나뿐이었다.
‘오늘 일은 그저 예고에 불과하다.’
미련하게도 이제야 호열의 뜻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가 어째서 유스라 왕국, 프로스트, 뮤온, 그리고 마탑을 움직이면서까지 성전에 뛰어들었는지를 말이다.
그 뜻을 알게 된 이상, 슈레이그는 머뭇거릴 수 없었다.
‘자신감? 한계? 그딴 건 아무래도 좋아.’
스스로에 대한 믿음은 없을지라도.
호열에 대한 믿음은 흔들리지 않을 테니까.
그렇게 다짐한 슈레이그가 기자들 앞에서 입을 열었다.
“오늘 런던은 이호열 플레이어. 그에게 구원받았습니다.”
“!!!”
*
지독한 격식과 절차.
심지어는 요놈의 입방정에도 조금은 적응이 된 참이거늘.
그럼에도 나, 이호열은 어쩔 수 없는 자본주의 노예였다. 청렴결백이고 뭐고 [육망성 브로치] 효과를 확인하고 싶어서 서둘러 포탈을 발현한 걸 보면……!
유스라 왕국, 집무실.
나는 인벤토리에서 육망성 브로치를 꺼내 들었다.
과연, 세트 아이템이라는 건가.
두 개의 브로치가 서로를 끌어당기는 게 느껴진다.
……두 개를 결합하면 뭔가 추가 효과가 발동되는 건가?
어렸을 적 변신 합체 로봇에 흥분했던 것처럼.
기대감에 가슴이 웅장해진다.
그러나.
“모든 일엔 순서가 있는 법이다.”
그래, 다짜고짜 합체하기 전에 원래의 아이템 정보를 살펴볼 필요가 있었다. 물론, 정보를 확인하기 전에 찻물을 끓이는 게 우선이겠지만.
부글부글─
하루라도 녹차를 거르면 입에 가시가 돋는 혓바닥도 참…….
달칵─
어쨌거나, 나는 녹차 티백 담긴 찻잔을 기울이고 나서야 새로운 육망성 브로치의 효과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고는 나도 모르게 입을 열고 말았다.
“더없이 훌륭하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