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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153화 (85/489)

◈ 153화. 선을 지키거라

[숭고]의 효과는 주변에 ‘영향’을 끼치는 것이다.

그러니까 정확하게는 내 주변.

이걸 내 입으로 말하기는 뭣하지만…….

‘숭고한 자’의 주변에 영향을 끼친다는 거지.

찬란하게 빛나는 아쿠아리우 떡갈나무.

처음엔 외관만 지나치게 화려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다.

하이엘의 축복으로 어느새 잎사귀를 싹 틔운 떡갈나무에선 생명의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었으니까.

흔히 말하는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었다.

[생명력 재생력이 소폭 상승합니다.]

정말 메시지로 효과가 떠올랐거든.

게다가.

나는 쓰러진 시민들을 바라봤다.

……꿈틀.

아직 의식을 되찾기는 못했지만 미동도 않던 시민들에게서 움직임이 보였다.

상태이상과 폭우 때문에 바닥났던 생명력이 차오르기 시작하는 거겠지.

‘외관 못지 않게 효과도 거창해졌단 거야.’

이 정도 수준의 변화는 단순하게 나의 불순한 영향만으로는 불가능할 정도의 변화.

하이엘의 말대로 [숭고]의 영향이 분명했다.

‘슈레이그도 마찬가지다.’

분명, 은빛 아지랑이라고 했겠다.

확실하게 나의 검강(劍罡)을 목격했군.

직감했다.

메시지로 떠올랐던 작은 변화라는 게 슈레이그의 성장을 말하는 게 아닐까, 하고.

그러나 깊게 고민할 여유는 없었다.

찰박─

물 소리를 내며 다가오는 망령들.

나는 우산을 치켜듦과 동시에 마력을 끌어올렸다.

쏟아지는 폭우를 증발시킬 순 없어도, 너희쯤은 문제도 아니다.

나는 물의 망령들을 향해 읊조렸다.

“인간을 흉내 낸 형상이라면 그 시작부터 틀렸다.”

화르륵─!

“중요한 것은 외형이 아닌 가슴 속 긍지. 긍지까지 모방할 순 없는 법이니까.”

.

.

.

[숭고의 효과로 작은 변화가 일어납니다.]

……숭고라고?

메시지의 내용으로 봐선 버프가 분명했다.

그러나 의아한 일이다.

‘뭐지?’

숭고가 듣지도 보지도 못한 스킬인 것은 물론.

슈레이그, 자신에게 버프를 걸어줄 길드원은 주변에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그래, 주변 플레이어라고는 오직 한 사람.

호열밖에 없었단 말이다.

‘정말 뒤통수에도 눈이 달린 게 아닌 이상…….’

우산으로 망령과 전투를 벌임과 동시에.

자신에겐 버프를 걸어줬다는 말이었다.

다른 플레이어라면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부정했겠지.

하지만 저 사내라면 모른다.

우산 하나로 600레벨 몬스터를 사냥하는 호열이라면.

‘……근데 나한테 버프를 걸어줄 이유가 없잖아.’

버프, 숭고.

그 효과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어떤 특별한 효과가 있든지.

꽈악─

슈레이그는 주먹을 쥐었다.

‘내가 활약할 순 없을 테니까.’

적의 레벨은 600레벨.

그에 비해 자신은 고작 400레벨 언저리.

그것도 모자라서 클래스는 펜서.

적과의 상성마저 최악이다.

‘버프 하나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누구보다 스스로 잘 알고 있단 말이다.

하지만 슈레이그는 이를 악물었다.

다시금 현실을 직시하는 건 고통스러웠거늘.

분명, 호열은 말했었으니까.

‘……나를 믿을 수 없다면. 나를 믿는 이호열을 믿어라.’

확실히 낯설었다.

슈레이그는 그동안 언론을 통해서만 호열을 접했으니까.

무례한 질문은 가뿐히 무시하는 태도.

겸손보다는, 실력만큼 콧대가 드높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던 호열의 행보가 아니던가?

그러니까 더더욱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째서 나 같은 놈한테까지.’

거대 연합의 남태민, 히사기, 레오니.

그리고 대마법사, 제시 하인네스까지.

그들이라면 이해할 수 있었다.

‘같은 세력.’

게다가 하나하나가 어마어마한 잠재력이 있는 플레이어들이었으니까.

과거의 영광을 근근이 이어오는 게 고작인 자신과는 급이 다른 재능의 원석들이란 뜻이다.

‘……됐어. 이따위 감상에 취해 있을 때가 아니야.’

그러나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떠오르는 의문을 이겨내고.

현실과 직면하기 위해 고개를 치켜든 슈레이그.

고오오─

“!”

어째서인가?

그의 시야에 호열의 검강이 선명히 비치고 있었으니까.

……설마, 이게 바로 숭고의 효과인가?

슈레이그가 당황해 호열에게 물었다.

그러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찰박찰박.

다섯은 시작에 불과했다는 것처럼.

거리 곳곳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망령들.

‘어느 틈에?’

슈레이그는 플뢰레를 치켜들었다.

검기라는 걸 목격할 수 있게 됐지만, 정확하게 그게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물론, 망령에게 피해를 줄 수단도 없었고.

‘그렇다고 가만히 지켜보고 있을 순 없어.’

무방비하게 쓰러진 시민들이 보였다.

호열이 망령들을 쓰러트릴 때까지.

고기 방패 역할이라도 해서 시민들을 지켜야 한단 말이다.

슈레이그는 전투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바늘처럼 뻗은 자신의 검을 바라봤다.

젠장, 아무리 봐도 듬직하지 못하다.

그러나.

‘……전부 핑계에 불과하겠지.’

호열의 우산은 이것보다 훨씬 빈약하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망령에게 피해를 줬다.

슈레이그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플뢰레를 바라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책임은 부족한 내게 있는 거야.”

검기조차 호열의 버프 덕분에 간신히 목격할 수 있었다.

그런 하찮은 재능으로 검기를 흉내 내겠다고?

헛웃음이 나올 정도로.

말도 안 된다는 소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대를 믿는 나를 믿어라.”

다시금 머릿속에 맴도는 호열의 목소리.

‘그래, 나는 몰라도 이호열이라면 믿을 수 있다.’

슈레이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합류하겠습니다. 저를 이용하세요!”

클래스, 펜서.

제아무리 형편없는 클래스에게도 고유 스킬은 존재하는 법.

고유 스킬, [결투의 대가] 발동.

척─

슈레이그가 검을 세로로 치켜드는 순간.

망령들의 시선이 일제히 슈레이그를 향했다.

고유 스킬의 효과였다.

──────

결투의 대가 : 대상을 결투가 끝날 때까지 도발한다. 결투에 초대된 대상은 추가 고정 피해를 받지만, 이 효과는 사용자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

쉽게 설명하자면 대상을 펜싱 경기에 초대하는 것.

이런 말도 안 되는 짓을 하게 될 줄이야.

벌써 저질러 놓고도 또 한 번 놀랐다.

‘1대1도 벅찰 텐데, 한 번에 스물이라니.’

모든 망령에게 [결투의 대가]를 발동.

망령들의 어그로를 자신에게 집중시켜 시민들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확실히 무모한 짓이다. 효과에도 적혀있듯 추가 고정 피해 효과는 자신에게도 유효했으니까.

‘스치면 죽겠는데, 진짜.’

그러나 슈레이그에겐 믿음이 있었다.

설령, 자신이 잘못된다고 하더라도.

호열이라면 모두를 지킬 수 있다는 믿음.

척─

이내, 슈레이그가 망령들을 향해 플뢰레를 겨눴다.

그리고 흠칫했다.

“……!”

날카로운 플뢰레 끄트머리.

민망할 정도로 희미하고 흐릿했거늘.

그럼에도 피어오르고 있었으니까.

“……검기(劍氣)?”

검기는 생사의 갈림길에서 선명해지는 법.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건 슈레이그.

그의 희생에 [숭고]가 감응하기에 충분했으니까.

*

[숭고한 자여. 그대의 숭고함이 작은 변화를 이끌었다.]

다시금 점멸하는 메시지.

그러자 슈레이그가 검기를 발산하는 데 성공했다.

그 광경을 보고 나는 생각했다.

‘숭고. 역시, 이거 겉만 그럴싸한 게 아니라…….’

아무래도 상당한 효과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따지고 보면 입수 난이도부터가 말이 되지 않았다.

습득 조건을 정확하게 알 순 없다만.

일단, 한 번 죽어야 하는 건 확실했으니까.

‘최후의 모험가 효과가 없었다면.’

이런 사기적인 칭호를 획득해 놓고, 효과를 확인도 못 하고 눈을 감았단 소리잖아? 늦게라도 알게 된다면 억울하게 관짝에서 눈을 부릅뜨고 기상할 정도의 효과였다, 진심으로.

나는 흥분한 속내를 가라앉히고 머릿속을 정리했다.

‘그러니까 종합하자면.’

[숭고]의 정확한 효과는 숭고한 자.

그러니까 나, 이호열 주변에 변화를 일으키는 것.

말 그대로 주변에 있다면 대상을 가리지 않는 것 같았다.

하이엘부터 떡갈나무 그리고 슈레이그까지.

정령, 사물, 플레이어에게 전부 유효했으니까.

문제는 변화의 정도였다.

‘메시지엔 분명 작은 변화라고 했단 말이지.’

허나, 결코 작다고 여길 수준의 변화가 아니었으니까.

‘하이엘이나 떡갈나무는 그렇다고 치고 넘어가더라도.’

슈레이그.

아무리 목숨을 걸었다고 하고, 그의 재능이 출중하다고 하더라도 단시간 내에 검기를 목격하고 미약하게나마 발산하게 된 데에는 ‘숭고’가 굉장히 큰 영향을 끼쳤으리라.

‘……잠깐만, 그러면 나중에.’

스탯이나 스킬 숙련도처럼.

숭고의 효과가 발전한다면.

작은 변화가 아니라 큰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게 된다면?

‘대체 어떤 일이 벌어진다는 거냐?’

어디 꽃밭 같은 머리를 굴려봐라, 그랑펠.

나 이호열의 대가리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단 말이다.

어쨌든, 뜻하지 않게 상당한 수확을 거뒀다.

숭고에 이런 효과가 숨겨져 있을 줄이야.

역시, 긍지롭게 살아야 복이 온다.

물론, 그랑펠은 몰라도 나는 긍지로만 살 수 없다.

“……검기?”

슈레이그가 검기를 목격하고, 발산하는 데 성공했으니까.

더 이상 비효율적으로 우산을 휘두를 필요는 없겠지.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속전속결이다.

긍지도 좋지만 챙길 건 챙겨야 하거든.

두 번째 [육망성 브로치]를!

혹시라도 꽁무니를 내빼면 굉장히 귀찮아질 테니까.

“벌써 오후인가.”

신속하게 이뤄지는 탐색, 간섭, 발현.

너희한테는 유감이지만 이게 또 내 전문이거든.

마법으로 물을 끓이는 거 말이야.

“허나, 빗물로 차를 끓일 순 없는 법이지.”

부글부글!

과연, 티타임을 포기한 나의 전력.

600레벨짜리 망령들 따위야 문제가 되지 않았다. 네임드나 보스 몬스터도 아니고, [천적관계]가 발동된 상태에선 무리로 덤벼도 달라지는 건 없다는 말씀.

[레벨이 올랐습니다.]

흔적도 없이 증발한 망령들.

내 쪽은 그걸로 끝이었다.

나는 슈레이그를 바라봤다.

과연, 레벨의 격차를 만회할 수 있는 검기답다.

게다가 검술 관련 스킬이라곤 전무했던 악마 사냥꾼과는 다르게. 슈레이그의 클래스는 검사 계열, 펜서였다. 근본 자체가 다르다는 거지.

슉슈슉─

또한 다른 검사 클래스와 차별화되는 펜서의 기동력까지.

다 피하고 다 때린다는 게 저런 거구나.

싶을 정도로 완벽한 움직임이었다.

‘저게 진짜 검기의 성능이겠지.’

악마 사냥꾼.

뭐든 애매할 수밖에 나로서는 도달할 수 없는 영역이기도 하고 말이야. 허나, 낙담은 없다.

그랑펠의 드높은 자존감에는 어떤 시련도 흠집을 낼 수 없을 테니까.

결투 끝.

망령을 쓰러트린 슈레이그에게 나는 태연하게 말했다.

“훌륭한 결투였네, 슈레이그.”

……스승님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하지 마라, 그랑펠.

“아닙니다. 숭고의 효과가 아니었다면 저 혼자선 절대…….”

“아니, 그대의 결단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네.”

“결단이라. 해주신 말씀, 앞으로도 명심하겠습니다.”

……장단을 맞춰주지 마라, 슈레이그.

가슴이야 언제나 당당하게 펴고 있었지만, 어째 한결 더 기고만장해진 기분이 든단 말이다. 그러나 의식하면 나만 괴로워질 뿐이다.

나는 얼른 시선을 옮겼다.

“근본적인 원인을 제거하지 않는 이상, 망령들의 계속해서 생성되겠지. 서두르는 게 좋겠군, 슈레이그. 하이엘, 이곳을 부탁하겠다.”

뭐, 악마 사냥꾼이 검사보다 검기를 잘 다룰 필요가 뭐가 있겠어?

그냥 악마 사냥만 잘하면 장땡이지.

나의 말에 하이엘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부디 맡겨주시길.”

물과 식물.

{자연} 능력을 다루는 하이엘이 상성 상 유리하다는 걸 눈으로 확인했던 찰나. 노파심을 덜고 쓰러진 시민들을 맡길 수 있었다.

무엇보다 숭고의 효과는 하이엘에게도 여전히 유효했으니까.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하이엘 님.”

꾸벅─

슈레이그가 정령왕이라도 본 것처럼 하이엘에게 고개를 숙이고는 발길을 서둘렀다.

과연, 현지인답게 지름길을 가로지르니 얼마 가지 않아 커다란 빌딩 하나가 시야에 들어왔다.

저게 바로 AAU 런던 지부인가.

일대가 폭풍의 눈처럼 고요했다.

마치 잠자코 숨을 죽이고 숨어있는 것처럼.

[던전, ‘우울한 비의 도시’ 심층부에 진입하셨습니다.]

AAU 빌딩 내부에 진입하자 떠오르는 메시지.

슈레이그가 곤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맨 위층부터 내려오면서 조사하는 쪽이…….”

“아니, 그럴 필요 없네. 슈레이그.”

“……?”

그러나 아무리 숨을 죽여도 소용없다.

나한테는, 악마 사냥꾼의 감에는 훤히 보이니까 말이야.

천적관계, 발달한 악마 사냥꾼의 감각으로.

나는 빌딩의 층별 안내도를 훑었다.

“거기로군.”

비로소 이 사태의 원흉이 보였다.

*

비가 그쳤다.

믿기지 않아서 몇 번이고 눈을 비벼봤거늘.

유리창 너머의 풍경은 바뀌지 않았다.

“어째서?”

완벽했다.

더없이 완벽한 계획이었다.

이름조차 없는 하급 악마는 이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

빙의한 인간 녀석.

자신은 가져보지도 못한 이름을.

녀석은 가지고 있는 것도 모자라 세상에 널리 알리고 있었다.

처음에는 빙의하고도 이해할 수 없었다.

어떻게 모험가도 아닌 하찮은 인간 따위가.

아르카나 대륙에 대해 이 정도 수준의 지식을 가지고 있단 말인가?

그건 아르카나 대륙에서 태어난 자신도, 아니 웬만한 상급 악마도, 마왕도 모를 정도의 지식량이었다.

그래서 욕심이 생겼다.

녀석의 지식과 빌어먹게 우울한 도시의 분위기라면.

도시를 통째로 집어삼키고 마왕, 그 이상의 힘을 손에 넣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균열이 던전으로 변한 순간, 생각은 확신이 됐다.

그렇기에 이해할 수 없었다.

“……말도 안 된단 말이다!”

거리 곳곳에 솟아난 낯선 나무들.

소름 끼칠 정도로 찬란하게 빛나는.

저 나무들은 대체 무엇이란 말이냐?

나무가 솟아난 뒤로 비가 그치고, 비 안개가 사라졌다.

계획에선 없었던 변수였다.

그 영향일까?

“!”

두근.

아까부터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었다.

틀어진 상황을 탓해도 부족할 정도로 격하게.

물론, 그 의문은 오래가지 않았다.

끼긱─

얼마 가지 않아 문이 열렸으니까.

그와 동시에 들려오는 사내의 목소리.

“베이커 지부장님? 정신을 차리신 겁니까?”

다행이다.

모험가, 슈레이그였다.

아직도 겉껍데기에 속고 있는 아둔한 인간 녀석이었다.

‘……미련을 버리자. 다음 기회를 노리면 된다.’

멍청한 놈을 속이는 것쯤이야 어렵지 않다.

‘방금 깨어난 척을 해서…….’

그러나 안도하고 다음 수로 넘어가기엔 지나치게 일렀으니.

또각─

또 하나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이내, 베이커의 시야에 검은색 장우산이 들어왔다.

“……!!!”

그와 동시에 심장이 고장 났다.

두근두근두근두근두근두근두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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