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150화 (82/489)

◈ 150화. 눈물의 씨앗 (1)

[만물과 통하는 지도]

[등급 : 에픽]

[제한 : 없음]

[효과 : 누군가 몰래 감춰둔, 누군가 잃어버린, 어딘가에 숨겨진 무언가의 위치를 알 수 있다. 또한 단 한 번, 무언가의 위치로 순간이동 할 수 있다.

단, 순간이동 효과 발동 시 모든 효과를 그 즉시 상실한다.]

[설명 : 사용하기에 따라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가진 마도구.]

아르카나 대륙에 진입하기 위해 순간이동 효과 발동.

덕분에 모든 효과를 상실한 만.통.지였거늘.

순간이동 효과를 발동하기 전.

본전을 뽑기 위해서 해볼 수 있는 건 전부 시도했던 나였다.

혹시라도 효과를 추출하는 게 가능하지 않을까?

마법부여학 선임, 키코를 찾아가 보기도 했었지.

‘성과는 없었지만.’

기대가 크지 않아서 실망하진 않았다.

마탑의 적자를 담당하는 마법부여학.

유니크 등급 아이템에서 효과를 추출하는 것만 하더라도 감지덕지한 게 현재 마법부여학의 수준이었으니까. 에픽 아이템에서 효과 추출이 가능하면 그게 말이 안 되는 거겠지.

‘덕분에 더더욱 간절한 마음으로 사용했다.’

그 노력이 있었기에 미련 없이 순간이동 효과를 발동했었고. 만.통.지를 통해서 나머지 다섯 개 [육망성 브로치]의 출처를 특정할 수 있었단 말씀.

사실 처음 효과를 발동했을 땐 적잖이 당황했다.

-넘치는 슬픔을 감당하지 못해 하늘조차 울부짖는 곳.

……이게 뭔 스무고개나 수수께끼도 아니고.

만.통.지가 내놓은 답이 단번에 와 닿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도움이 됐던 건 요놈의 입방정이었다.

-“하늘이 울부짖는군.”

[텟퍼른 울타리] 균열.

먹구름이 잔뜩 낀 하늘을 보고 그렇게 지껄였던 내 주둥이.

하늘이 우는 것보다 내가 우는 게 빠르겠다고.

신세 한탄을 애써 삼켰던 기억이 떠올랐거든.

덕분에 런던에 생성된 [던전 : 우울한 비의 도시]를 보고 단번에 알아차렸다.

만.통.지가 알려준 장소가 바로 저 던전이라는 것을……!

내 추측을 뒷받침하듯 메시지가 떠올랐다.

[육망성 브로치가 떨리고 있다.]

과연, 살아생전 처음 영국 땅을 밟은 보람이 있다. 물론, 이 긍지 높은 발걸음이 오로지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서 움직이는 건 불가능한 일.

쏴아아아─

나는 쏟아지는 장대비, 우산 아래에서 입을 열었다.

“상태이상에 내성이 없는 이들은 되도록 자리를 피하는 게 좋겠군. 나보다는 그대의 말이 저들을 움직이게 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네만.”

영국의 자랑, 세컨드 썬.

그 수장인 슈레이그였다.

대한민국에서 온 나보다 그의 말이 힘이 있는 게 당연하다.

나, 이호열의 현실적인 관점과 더불어.

“……감사합니다.”

슈레이그의 무너졌던 긍지까지 바로 세울 수 있다는.

그랑펠의 긍지론적 관점까지 고려한 말.

슈레이그와 플레이어들이 빠르게 상황을 정리했다.

“다들 균열에서, 비안개에서 멀리 떨어지세요!”

“취재? 지금 그럴 때 아닙니다!”

“젠장, 당장 병원으로 옮겨야 할 것 같은데요?”

소란 속에서 나는 비안개를 바라봤다.

눈앞에 떠오르는 균열 정보.

확실히 균열이 맞다.

‘상태이상의 정확한 원인이 뭐지?’

가장 합리적인 추측은 역시나 악마였다.

그러나 이건 이제까지와 상황이 달랐다.

균열은 기이의 공간.

붕괴하기 전까지는 그 어떤 악마가 됐든.

막말로 상위 마왕이 부활했다고 하더라도.

균열 외부에 영향을 끼칠 순 없었으니까.

“열등한 족속에게 그런 힘은 없겠지.”

말 한번 잘했다, 그랑펠.

이건 입방정이 아니다. 애초에 악마들에게 그럴만한 능력이 있었으면 말이야. 귀찮게 인간에게 빙의하고, 연기하면서까지 현실로 숨어들지 않았을 테니까.

그러므로 가능성은 하나.

“던전의 특수성인가.”

[던전]이기 때문에 균열 외부에도 영향을 끼친 것이다.

정말 가면 갈수록 가관이다, 아르카나 세계관.

악마와의 성전(聖戰).

하나만 신경을 써도 모자랄 상황에 던저어어언?!

‘제발 흔치 않은 경우라고 믿고 싶다.’

[미궁]도 모자라서 [던전]까지.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런던의 시민들이 균열 속에 갇혀있다는 거겠지. 그러니까 내가 이렇게 부리나케 런던으로 포탈을 타고 넘어온 거고.

정말로 피곤하신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이다…….

‘오지랖하고는.’

던전 균열이 아니더라도 처리할 게 얼마나 많았던가?

뭣보다 귀찮은 그림자들에게 처지를 자각시켜 주겠다고 다짐했었단 말이다.

그러나 그랑펠의 주둥이는 단 한 마디도 지지 않았다.

“비가 오는 날에 그림자는 존재하지 않는 법이지.”

쏴아아아─

“결국, 그것밖에 안 되는 존재라는 것이다.”

……빗소리가 우렁차서 다행이다.

혹시라도 누가 들을까 봐, 무섭다 정말로.

해석하자면 우선순위가 다르다는 거겠지.

하여튼, 절차 하나만큼은 기가 막히게 잘 지켜주신다.

그러나 무거운 긍지에 반박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사실 나도 같은 생각이었거든.

균열과 악마를 상대하기도 벅차다.

추잡한 사회에서 구르는 직장인 시절은 이미 졸업한 지 오래.

그림자고 뭐고, 귀찮은 건 피하고 싶었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던 와중.

슈레이그가 다가왔다.

한 손에는 우산.

다른 한 손에는 웬 김이 피어오르는 종이컵을 들고서는.

“죄송하게도 제대로 대접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

종이컵에 그려진 녹색 로고가 익숙하다.

슈레이그가 내게 종이컵을 내밀었다.

“그……. 차를 좋아하신다는 건 소문으로 들어서 알고 있었는데. 어떤 차를 좋아하시는지는 몰라서 무난한 아메리카노로 준비했습니다.”

슈레이그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하겠습니다.”

그의 눈빛이 결연하게 빛났다.

“부디 제게 런던의 안내를 맡겨주십시오. 부탁드리겠습니다.”

슈레이그에게 안내를 부탁한 이유는 간단하다.

던전이라고 하더라도 균열.

현실과 아르카나 대륙이 절반씩 섞인 공간이라는 것. 당연하게도 현실의 지리라도 완벽하게 알고 있다면 공략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 같았으니까.

나는 잔을 받아 들며 대꾸했다.

“결단을 내려줘서 고맙군.”

“아닙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이곳까지 와주셔서…….”

“아니, 마땅히 짊어져야 할 무게다.”

“……!”

흠칫한 슈레이그에게 나는 태연하게 물었다.

“그대도 알고 있지 않은가?”

……제발.

21세기에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을 설파하지 마라, 그랑펠.

그나마 내 입으로 귀족이란 단어까지 꺼내지는 않아서 다행이다.

그나저나.

나는 물끄러미 아메리카노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준비는 되었는가?”

“물론입니다.”

“그럼 진입하도록 하지.”

……마시기 싫다고 다급하게 말 돌리지 마라, 그랑펠.

하긴 비약초면 몰라도, 티백 녹차에 절여지다시피 한 나의 미각이 아메리카노를 받아들일 수 있을 리 없겠지. 비가 오는 날 따뜻한 아메리카노만 한 게 없거늘.

변해버린 나의 미각이 심히 원망스럽구나.

나는 애써 미련을 버리고 걸음을 옮겼다.

[균열, ‘던전 : 우울한 비의 도시’에 진입하셨습니다.]

*

쏴아아아─

쏟아지는 폭우.

빗소리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요란스러운 앵커의 목소리.

지켜보는 이의 시선은 확실히 브라운관을 향하고 있었다.

-“속보입니다. 이호열 플레이어와 세컨드 썬의 길드 마스터, 슈레이그가 런던에 생성된 최초의 던전 균열에 진입했다고 합니다. 세계 각국이 우려를 표하던 가운데…….”

스쳐 지나가는 자료화면들.

이상하다고 느껴야만 했다.

그야 자료화면 속 풍경이 바로 자신들의 거주지.

런던이었으니까.

그러나.

쏴아아아아─

쏟아지는 빗소리를 듣는 모두가 자각하지 못했다.

화면에서 송출되는 전경이 자신들이 갇힌 런던, 균열 속이라는 사실은 물론.

자신들이 상태이상에 빠졌다는 사실까지도.

“…….”

느껴지는 건 오직 무력감과 우울감뿐.

영국, 런던.

아니, [던전 : 우울한 비의 도시]에 갇힌 이들이 점차 수면 아래로 가라앉고 있었다. 혼자의 힘으로는 아무리 발버둥 쳐도 빠져나올 수 없는 깊은 물 속으로.

*

쏴아아아아─

쏟아지는 비를 보고 있자니.

격식도 도움이 되는 때가 다 있구나, 생각하게 된다.

무식하게 커다란 장우산을 챙겨온 보람이 있다는 것이다. 봐라, 옷에 비 한 방울이 튀지 않고 있다. 한 치의 흔들림 없이 꼿꼿하게 우산을 치켜든 자세 덕분이었다.

‘……아니, 이런 사소한 거에 흡족해할 때가 아니라.’

나는 주위를 둘러봤다.

시야가 제한적이다.

짙은 비 안갯속에서 언뜻 건물의 형체가 보일 뿐이었다.

그런 의미에선 다행이었다.

마찬가지로 주위를 살피던 슈레이그가 말했다.

“다행히도 런던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는 것 같습니다.”

역시 가이드는 현지 가이드가 최고라니까?

슈레이그와 세컨드 썬 길드원들은 빠르게 지리를 파악했다.

그들이 나누는 브리핑엔 나도 귀를 기울였다.

“핵심은 던전 심층부의 위치를 파악하는 거야.”

다른 플레이어들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아르카나의 경험.

때문에 던전에 관해서는 아는 점이 별로 없는 게 나였다.

그래도 나누는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슬슬 감이 왔다.

‘말 그대로 심층부만 찾아내면 되는 건가?’

[던전].

규모에 따라서 수십 개의 갈림길이 존재하기도 하고, 수백 개의 함정, 수천 마리의 몬스터가 존재하기도 하는 위험한 장소. 그러나 심층부의 위치를 알기만 한다면…….

“우리의 목적은 경험치나 전리품이 아니야. 최대한 빠르게 심층부를 찾아내고, 보스 몬스터를 제압해서 던전을 클리어하는 게 최우선이다!”

몬스터나 함정 같은 다른 방해요소는 전부 무시해도 된다는 말이었다. 물론, 쉽지 않겠지. 시야를 가리는 자욱한 비안개가 아무래도 보통 안개가 아닌 것 같았으니까.

“……그런데 이상하지 않아요?”

세컨드 썬의 길드원 중 하나가 그렇게 말했다.

“조용해도 너무 조용하잖아요.”

그것은 위화감.

런던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균열 내부였거늘.

어째서인가,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흔적은 보이는데 사람만 보이지 않아요.”

시동이 켜진 채 멈춰 선 자동차들.

사람의 온기가 느껴지는 상가 건물들.

거리 곳곳에 떨어진 우산까지.

모든 게 그대로거늘.

사람만 사라져서 보이지 않았다.

말을 잇던 플레이어의 목소리가 점차 떨렸다.

“대체 이 짧은 시간 만에 다들 어디로 사라진 거죠……?”

“혈흔이나 공격받은 흔적 같은 건 보이지 않아.”

“슈레이그, 아까부터 계속 연락을 해보고 있는데……. 단 한 명도 연락이 되지 않아. 신호는 가는데 아무도 받질 않아. 젠장, 뭐냐고 대체!!”

감정이 흔들리는 게 당연하다.

영국, 런던의 수도.

사라진 이들 중에 플레이어들의 동료 혹은 가족이 있는 건 당연한 일이겠지. 내색하지 않으려고 하더라도 인간인 이상,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다시금 무거워진 분위기.

이래서 [우울한 비의 도시]라는 건가.

진입하자마자 사기를 사정없이 짓밟아 놓는군.

그러나 나는 입을 열었다.

“모두 걱정할 것 없다.”

“……?”

말했다시피 영국 땅을 밟는 건 처음.

당연하게도 내가 영국에 아는 사람이 있을 리가 만무하다.

허나 나는, 그랑펠은 남 이야기를 하듯 지껄이고 있는 게 아니었다.

그래, 가슴 속의 긍지도 진심이며.

내뱉은 말도 더없이 진심이었거든.

나는 알고 있었으니까.

“이곳은 진정한 [우울한 비의 도시]가 아니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무래도 우리는 함정에 갇힌 모양이군.”

“하, 함정에 갇혔다고요? 아니,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겠지.

우리가 한 거라곤 그저 걸어서 비 안갯속으로.

균열에 진입한 것밖에 없었으니까.

“그대들은 확신할 수 있는가?”

“화, 확신이요?”

“이곳은 던전, 무엇 하나 정해진 규칙이 없는 공간.”

“……!”

내 속사정을 알고 있는 누군가는 말하리라.

방금까지도 던전 심층부가 뭔지도 몰랐으면서 뻔뻔하게 말은 잘한다고.

과연, 반박할 수 없다.

이놈의 두꺼운 철면피엔 뒤집어쓰고 있는 나조차도 감탄을 금치 못할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꼭 지식이 있어야만 알아차릴 수 있는 건 아니거든.

때론 뻔뻔함이 실전에 도움이 되는 법.

내가 함정을 간파할 수 있던 이유는 간단했다.

-“하이엘.”

읊조리던 순간, 분명히 빠져나갔던 마력.

그러나 하이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으니까.

그 말이 뜻하는 바는 간단했다.

이곳이 균열 내부가 맞고, 하이엘이 소환된 것도 맞지만,

나와 하이엘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벽이 존재한다는 소리였다.

그 사실을 알기에 살짝 머리를 굴려봤다.

어째서인가?

모든 게 그대로인데, 어째서 사람만 감촉같이 사라졌는가.

그에 관한 대답은 쏟아지는 ‘비’에서 찾을 수 있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바닥에 고인 비 웅덩이에서.

그랬다.

나와 하이엘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벽은 수면(水面).

나는 우산을 가지런히 접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

“……?”

나를 따라 고개를 들어 올려 하늘을 바라본 슈레이그와 플레이어들.

그들이 목격한 것은 하늘에 비친 또 다른 런던의 풍경.

이내, 그들의 경악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저게 뭐야? 마치 거울처럼 하늘에 런던이?!”

“똑같아. 근데, 저쪽엔 사람이 있어!!”

“뭐, 그게 정말이야?!”

맞은 편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는 하이엘.

하늘과 땅.

어디가 수면 위이고, 아래인지는.

지금으로선 알 수 없다.

그러나 한 가지 사실은 분명하다.

뚝.

나는 턱 끝을 타고 흐르는 빗물을 훔쳤다.

“옷을 젖게 만든 책임을 엄중히 묻겠다.”

물이 문제라면, 그 물을 전부 없애버리면 되는 일이다.

물론, 쏟아지는 비를 증발시켜 버리는 건 불가능한 일.

마력이 넘쳐나도 『마법』만으로는 불가능하다, 이건.

그러니까 나는 하이엘에게 텔레파시를 전달했다.

물은 ‘식물’의 양분이 되는 법.

그래.

고유 정령, 하이엘의 {자연} 능력을 발휘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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