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9화. 우울한 비의 도시
대격변 초창기, 균열은 재앙이었다.
세계가 힘을 모아 달려들지 않는다면 해결할 수 없던 대재앙.
상대적으로 각성한 플레이어의 머릿수가 적었던 건 기본.
지금처럼 체계적인 시스템이 확립되지 않았었으니까.
덕분에 세계는 국가 간의 무의미한 경쟁을 그만두고 균열에 대응하기 위해 협력했다. 그를 바탕으로 창설된 게 국제 협력 기관 AAU였단 말이다.
“나 때는 말이야. 이런 엿 같은 꼬라지가 없었다고.”
덜그덕─
AAU 대한민국 지부장, 박민재.
그는 휴게실에서 캔 커피를 뽑았다.
마찬가지로 캔 커피를 손에 쥔 두 사내, 성현준과 윤수겸.
성현준이 작게 속삭였다.
“……아니, 선배. 요즘 시대에 차 한잔 대접한다고 하고 300원짜리 캔 커피 쏘는 사람이 어디 있대요? 지부장님, 그렇게 안 봤는데 완전 짠돌이.”
쓰읍.
윤수겸은 입맛을 다시는 걸로 말을 대신했다.
얼마 만에 뽑아보는 자판기 캔 커피인가?
그러나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게 커피의 종류를 논할 때가 아니었다.
칙─
“다들 뉴스 쏟아지는 거 봤지?”
“네, 봤습니다.”
“저는 지금도 보고 있는데, 진짜 열받네요.”
성현준의 미간이 사정없이 찌푸려졌다.
“이거 다 알면서 저러는 거잖아요? 애초에 돈이나 권력을 위해서라면 이렇게 대놓고 퀘스트를 띄우겠냐고요! 호열 님이 바보도 아니고!”
“내 말이 그 말이야.”
보자, 더러운 사회에서 구른 게 벌써 몇 년째더라?
AAU 지부장 직함을 달고 정부 측 인사와도 자연스럽게 면을 트게 되면서 알게 된 사실 하나가 있다면. 저런 모르쇠가 진짜 사람을 돌게 하는 일이란 것이었다.
“하나같이 명문대를 졸업하신 똑똑한 양반들이 우리 같은 소시민들도 뻔히 아는 걸 모르겠어? 그냥 모르는 척하는 거지. 욕 처먹는 거야 하루 이틀도 아니니까. 끝까지 시치미 떼겠단 거거든.”
항상 느끼는 거지만, 인간은 참 영악하다.
“어쩌면 인간이나 악마 새끼들이나 다를 게 없을지도.”
“에이, 지부장님 말씀을 하셔도…….”
“농담 아니야. 진심으로 하는 말이거든.”
플레이어들의 머릿수가 늘고, 시스템이 확립된 지금.
평범한 적정 레벨의 균열은 인류에게 큰 문제가 되지 못했다.
그러나 균열로 인한 피해가 전무하냐고 묻는다면.
당연하게도 아니었다.
“대격변 초창기 때만큼은 아니더라도 사람들이, 무고한 시민이 매일같이 사망하고 있어. 그런데 높으신 분들이라는 양반들은 이제 좀 살 만해졌으니까. 아주 좆 같은 방향으로 머리를 굴리시네?”
지난밤, 그러니까 황금 같은 일요일 저녁.
박민재는 정부 측 관계자의 전화를 받았다.
“이 양반들은 사람 대 사람으로서 격식이 없어. 격식이.”
주말에 전화를 해?
다시 생각해도 성질 뻗치는 통화를 요약하자면 간단했다.
박민재가 이죽거렸다.
“이호열을 본격적으로 컨트롤하고 싶으시단다.”
“……네?!”
“왜? 지금 돌아가는 꼴을 보니까 심상치 않거든.”
이호열, 그동안 그가 보여준 행보가 어땠는가?
정점으로 불릴 정도의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부와 명예를 추구하지 않는다.
그저 대격변 초기, 영웅이라 불렸던 플레이어들처럼 묵묵하게 균열을 클리어할 뿐.
그런 이호열의 덕을 누구보다 많이 본 것?
당연하게도 대한민국 정부였다.
“VIP부터 아랫선까지. 뒤쪽에서 있는 뻥카, 없는 뻥카 다 치고 다닌 거겠지. 이호열이 제멋대로처럼 보여도 다 우리랑 연줄이 있다. 뭐, 다른 국가가 속아 넘어가는 것도 이해할 수 있어. 왜? 자기네들부터가 상부상조, 돕고 사는 협력 관계를 갖추고 있으니까.”
……예상은 했지만, 진짜였나?
AAU 지부장의 입에서 쏟아지는 고급 정보.
혹시라도 누가 엿듣고 있을라.
조심스럽게 주위를 살피던 윤수겸이 속삭였다.
“하긴 이나즈마부터가 그랬었죠?”
이나즈마의 길드 마스터, 히사기 카즈마.
홋카이도 프로스트 사태 직후.
그는 취재진 앞에서 일본 정부와의 관계를 끊겠다고, 공식적으로 선언했었으니까.
AAU 국제 협약을 위반한 것도 모자라 뒤편에서 구린 짓까지 하고 다닌 일본 정부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장난이 아니었었지.
박민재가 코웃음을 쳤다.
“잘 생각해 봐라. 그때도 떠올려 보면.”
“……?”
“일본 정부를 욕한 건 일반 시민이나 네티즌들뿐이었지. 가장 민감해야 할 국가들이 나서서 비판한 적은 없거든. 그 말이 뜻하는 게 뭐겠어? 드러나지만 않았을 뿐. 자기네들 사정도 똑같단 말이지.”
거기에 또 하나의 연결고리, AAU까지.
“그러니까 높으신 분들께서는 그 연결고리를 개목걸이로 바꿔 채우고 싶으신 거다. 정말 간덩이도 크시지들 않냐? 막말로 플레이어가 손가락 하나만 까딱해도 한 트럭으로 죽어나갈 양반들이.”
……이 정도면 사이다가 아니라 염산 아닐까?
듣고 있는 입장에서 속이 시원하긴 했다만.
누가 듣고 있을까 봐, 계속해서 눈치를 보게 될 정도로.
발언의 수위가 상당했다.
팅─
그러나 신경 따윈 쓰지 않는다는 듯.
박민재는 말끔하게 비운 캔을 쓰레기통에 던졌다.
그러고는 말을 이었다.
“그래서 제안을 받았다는 거지.”
“제안이요?”
“이호열하고 좋은 자리를 마련해 보란다. 나한테.”
윤수겸과 성현준은 박민재의 눈치를 살폈다.
‘……엄청난 제안을 내걸었을 게 분명하다.’
다른 국가의 지부장들이 AAU 협약을 위반하면서까지 정부와 협력한 데엔 전부 이유가 있겠지. 분명, 박 지부장님도 엄청난 제안을 받으셨으리라.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의문이었다.
성현준이 마른침을 삼키고 물었다.
“근데, 저희한테 이런 것까지 말씀해 주셔도 되는 겁니까?”
박민재가 피식 웃었다.
“그래, 나쁜 짓을 할 거면 은밀하게 하는 게 기본이지.”
그가 휴게실 문을 활짝 열어 재꼈다.
“나야 뭐, 당연히 거절할 거니까 말해준 거고.”
“?!”
성현준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사람이라면 압박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제안이리라. 굳이 말씀은 하지 않으셨겠지만, 협박 아닌 협박도 섞여 있을 게 뻔했으니까. 게다가 물질적인 유혹까지.
박민재가 휴게실을 빠져나가자 성현준이 입을 열었다.
“선배, 선배는 안 놀랐어요?”
“놀라긴 했지. 지부장 자리를 다셨어도 예전 그대로셔서.”
“……예전 그대로시라고요?”
“아, 넌 경력이 짧아서 모르겠구나?”
새록새록 떠오르는 코스모 재직 시절.
“우리 박 지부장님, 평사원 때부터 유명했거든.”
“유명하셨다고요? 대체 뭘로요? 짠돌이로?”
“뭐, 그것도 반박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윤수겸은 다시 생각해도 웃음이 나왔다.
“전 세계 수십만 명의 코스모 사원 중에서 유일하게. 천하의 레이먼 션한테 정식으로 개겼던 사람이거든. 우리 박 지부장님.”
“……네, 네?!”
.
.
.
박민재는 답답한 넥타이를 잡아당겼다.
빌어먹을, 개발자가 언제부터 정장을 입고 다녔는지.
앞으로는 복장부터 편하게 해야겠군.
“언제 어디서 옷에 똥물을 튀길지 모르니까.”
박민재는 지난번의 다짐을 떠올렸다.
이호열, 그와 같이 걸을 수 없다면.
그의 앞길에 끼어드는 방해꾼들이라도 쳐내겠다.
AAU?
높으신 분들?
오히려 좋다.
박민재의 입꼬리가 한껏 올라갔다.
“내 전문이거든. 윗선에다가 들이받는 거.”
지금보다 쥐뿔도 없던 과거에도 하늘 같은 CEO 레이먼 션을 들이받았던 게 나란 말이다.
박민재는 가볍게 몸을 풀었다. 그래, 좋아. 어디서부터 시작하면 좋을까. 박민재가 지부장실 책상 앞에 착석했다.
“이호열 대신 내가 얼마든지 어울려 줄 테니까.”
딸깍─
“……뭐야, 이거?”
그러나 당장 박민재가 나서야 할 일은 없었다.
아니, 어쩌면 앞으로도 영영 없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모니터를 바라보던 박민재가 중얼거렸다.
“이, 이게 뭔 개소리야?!”
화면에서 재생 중인 건 실시간 보도 영상.
앵글은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안개를 비추고 있었다.
이내, 화면에 자막이 떠올랐다.
[목격자 曰, 균열 생성과 동시에 런던이 사라져……!]
말 그대로.
보는 그대로.
런던이 비 안갯속으로.
감촉같이 사라진 것이었다.
*
비상사태.
직전까지의 사소한 알력 다툼이 무(無)로 돌아갔다.
대격변 초창기로 돌아갔다.
이제까지와의 균열과는 차원이 달랐으니까.
그래, AAU가 예고했던 아포칼립스의 시작을 보는 듯했다.
길드 랭킹 7위, 영국의 세컨드 썬.
길드 마스터, 슈레이그는 침묵했다.
뚝뚝─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런던을 바라봤다.
……아니, 이제 이곳을 런던이라고 할 수 있을까?
맑은 날이 드문 런던이라고 하더라도 이건 차원이 달랐다. 정말,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비안개였다. 넓게 퍼진 안개 전부가 균열의 영역이었다.
윙윙─
진동은 아까부터 끊이지 않고 있었다.
해결책을 내놓으라는 상부의 연락이겠지.
그러나 슈레이그의 머리는 아까부터 회전하기를 멈췄다.
“……대체 나더러 어쩌라는 건데?”
런던, 전체가 균열이 되어버렸다.
그 말이 뜻하는 바는 간단했다.
런던과 함께.
런던의 시민들이 균열 속으로 사라졌다는 것.
세컨드 썬의 간부, 재커리는 이성의 끈을 붙잡았다.
“……균열 내부엔 시민들만 있는 게 아니야. 플레이어들, 그중에서도 우리 세컨드 썬의 길드원들도 있다고. 크게 걱정할 것 없어. 잘 대처하고 있을 거야.”
슈레이그는 헛웃음을 뱉었다.
“……하하, 정말 그렇게 생각해?”
“뭐?”
“이건 우리가 대처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어. 알잖아?”
눈앞에 떠오른 메시지.
균열의 정보.
[던전 : 우울한 비의 도시]
[적정 레벨 : Lv.600~Lv.900]
[붕괴 진행도 : 0.1%]
날뛰는 적정 레벨까진 이해할 수 있었다.
[깨진 차원의 틈] 균열부터 [텟퍼른 미궁]까지.
이것보다 한술 더 뜬 적정 레벨을 자랑하던 균열도 있었으니까.
그래, 문제는 [던전]이었다.
균열 이름 앞에 붙어있는 저 두 글자.
슈레이그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던전이야. 단순하게 몬스터를 사냥한다고 클리어할 수 있는 게 아니란 거잖아. 빌어먹게도. 클리어 조건을 찾기 위해선 하나씩 부딪혀 가며 찾아봐야 한다고!!”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의 던전.
던전은 극악 난이도로 악명이 높았다.
쉽게 설명하자면 [포식자 구역]급으로 강력한 몬스터가 넘쳐나고, [미궁]급으로 위협적인 함정들이 가득한 곳. 그게 바로 [던전]이었으니까.
슈레이그의 목소리가 더욱 격해졌다.
“이게 게임이었다면 기뻐했을 거야. 경험치 페널티를 감수하더라도. 던전의 보상을 생각하면 몇 번 정도는 죽어도 이득이니까. 그치만, 아니잖아? 목숨이 걸려있다고, 다들.”
던전을 클리어하기 위해선.
반드시 [던전 심층부] 찾아야만 했다.
하지만 강력한 몬스터와 함정으로 가득한 던전이다.
그것도 모자라서 그 규모는 어떠한가?
최소 런던이었다.
“……미안하다, 재커리. 나는 자신이 없어.”
슈레이그는 떨리는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두려움.
균열이 플레이어도 아닌 일반인을 집어삼킨다?
그동안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애초에 일반인들은 균열에 진입할 수도, 목격할 수도 없었으니까. 그러나 던전이어서일까. 런던도 모자라 시민들까지 집어삼킨 것도 모자라서.
“저 안에, 저 안에 내 아내가 있다고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이질적인 비안개를 일반인들도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끊이질 않는 고함.
슈레이그는 이를 악물었다.
“……빌어먹을.”
심정 같아서는 몇 번이고 균열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자신은 혼자가 아니었다.
자신의 뒤를 따를 길드원들이 있었으니까.
마땅한 계획도 없이 던전에 뛰어든다?
경험치를, 아니, 목숨을 버리는 꼴밖에 되지 않는다는 걸.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의 경험을 통해 숙지하고 있단 말이다.
나 같은 게 뭐가 조국의 영웅이고 희망이란 말인가?
느껴지는 무력감.
쏟아지는 비가 몸을 축 가라앉게 하였다.
슈레이그뿐만 아니었다.
쏴아아아─
비안개에 휩싸인 런던을 지켜보던 모든 이들을 무겁게 짓눌렀다.
우울하게 만들었다.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이상할 정도로.
슈레이그, 아니 비를 맞는 모두가 중얼거렸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쏴아아아─
그들의 몸이 차갑게 식어갈 때쯤이었다.
사정없이 퍼붓는 빗속에서.
구두 소리가 들려온 것은.
또각─
수많은 인파 속.
펼쳐진 단 하나의 검은색 우산.
마치 빗방울이 단 한 방울이라도 옷에 튀는 걸 용납하지 않겠단 것처럼.
꼿꼿하고 바른 자세로 우산을 들고 있는 것은 한 사내.
이내, 그가 입을 열었다.
“들리는가, 슈레이그.”
“……?”
그와 동시에 슈레이그 시야가 점멸했다.
[상태이상, ‘무력’이 해제됩니다.]
슈레이그는 그제야 자각했다.
‘……나, 어느 틈에 상태이상에 걸렸던 거지?’
이내, 반사적으로.
자신을 상태이상에서 깨어나게 해준 사내를 바라봤다.
검은색 장우산, 그와 대비되는 은색의 머리카락.
호열과 마주했다.
슈레이그가 무어라 입을 열기도 전에 호열이 말을 이었다.
“그대에게 런던의 안내를 부탁하고 싶네만, 가능하겠나?”
.
.
.
이 정도로 광범위한 상태이상이라.
적정 레벨만 봐도 최소 마왕급은 된다는 거겠지.
그래, 이 정도는 돼야 던전 주인이라고 할 수 있겠지.
당연하게도 나는 던전을 목격하는 게 처음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평온할 수 있느냐고 묻느냐면.
이번엔 그랑펠의 철면피보다는 나의 준비성 덕분이라고 당당하게 답해주리라. 정확히는 본전을 뽑고야 말겠다는 나의 처절함이 빛을 발한 거겠지.
맞다.
계획적으로 활용한 [만물과 통하는 지도]를 말하는 거다.
자켓의 라펠에서 존재감을 발하는 브로치.
[육망성 브로치 1/6]
[등급 : 유니크]
[제한 : Lv.100]
[효과 : 마법 사용 시, 소모한 마력 10퍼센트 회복.]
[설명 : 여섯이 모여 하나가 되는 브로치 중 일부이다. 극히 일부에 불과하기에 그 효과가 상당히 손실되었다.]
그래, [우울한 비의 도시].
저 비안개 너머에 두 번째 [육망성 브로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