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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147화 (79/489)
  • ◈ 147화. 긍지를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3)

    [정순한 지식의 오망성].

    [만물과 통하는 지도].

    마지막으로 [마안(魔眼)의 망원경]까지.

    마왕의 전리품쯤 되면 그 효과가 현실이나 아르카나 대륙, 한 곳에 얽매이지 않는 듯했다. 에픽 등급이 괜히 에픽 등급이 아니라는 거겠지.

    ‘물론, 효과가 사기적인 만큼 조건도 까다롭지만.’

    만.통.지처럼 일회용까진 아니어도 망원경에도 조건이 붙어있었다.

    재사용 대기 시간, 즉 쿨타임이 존재했거든.

    굳이 설명을 덧붙일 것도 없었다.

    크리스탈 홀.

    허공에 아르카나 대륙의 모습을 비추던 눈동자가 눈을 감았다.

    효과 지속 시간은 10분 남짓이면서 쿨타임은 6시간이라니…….

    어째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 것 같았다만.

    ‘그래도 이게 어디냐?’

    이 두 눈으로 대륙을 목격했던바.

    언제까지고 하이엘을 정보원으로 사용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막말로 하이엘이 정령왕급으로 강하다면 또 모를까.

    누굴 닮아서 허우대만 심하게 멀쩡하다는 걸 나는 알고 있었으니까.

    나는 망원경을 회수하며 말했다.

    “이것이 현재 아르카나 대륙의 모습이다.”

    과연, 수백만조차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는 악마들의 말은 진실이었다.

    어딜 둘러봐도 악마, 또 악마.

    진짜로 같이 죽었으면 억울한 죽음이 됐겠는데, 이거?

    그런 악마들만큼이나 흔히 보이는 게 있다면.

    짓밟힌 아르카나의 도시와 주민들이었다.

    “…….”

    정적이 흘렀다.

    충분히 이해가 된다.

    짐작은 하고 있었겠지만 충격이겠지.

    침묵 속에서 점차 수군대는 소리가 커졌다.

    “……말도 안 돼.”

    “저래서 멀쩡한 도시가 있긴 한 걸까?”

    “나 확실히 봤어. 제국 수도성 방향에서도 연기가……!”

    마탑에 입성하는 순간.

    속세와의 인연은 끊어진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마르셀로만 봐도 알 수 있겠지.

    마탑의 마법사들은 마탑 외부의 일에 깊게 관여할 수 없는 것이 규율.

    설령 그것이 자신의 가문과 관련된 일이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그러나.

    “……젠장.”

    선임 마법사, 뱅그릿이 이를 갈았다.

    자연스럽게 드는 걱정까지 어찌할 순 없는 거겠지.

    더 나아가서 뱅그릿은 평범한 가문의 자제였으니까.

    다른 이들보다 불안해하는 게 당연하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저 처참한 모습이 반격을 시작한 아르카나 대륙이다.”

    “……!!!”

    그랬다.

    지금도 희망이라곤 한 포기도 보이지 않는 광경이었거늘.

    지금 이 순간에도 저 악마와 맞서는 아르카나인들이 있었다. 악크샨의 유산, 퀴른베르크 기계탑이 있었다. 드워프의 비행정이 있었다.

    “내가 가감 없이 대륙의 모습을 보여준 이유는 간단하다.”

    단순하게 말로 설명하기 힘들어서가 아니었단 말이다.

    “아르카나는 최후의 최후까지, 긍지를 지키고 있다.”

    계속 말해왔듯, 시스템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부터 대격변 이후에도.

    자타공인 아르카나 최강의 무력 집단인 마탑은 그 어떤 사건에도 움직이지 않았었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몰랐어도 경험을 통해 알게 됐거든.

    설령 시스템은 여전할지 몰라도, NPC는 과거의 NPC가 아니라는 것을. 더 이상 시스템에 얽매인 NPC가 아닌 아르카나인이라는 것을.

    그러니까 내겐 확신이 있었다.

    마탑에서의 권한 기능 활성화?

    아니, 그것까지 들먹일 필요도 없다.

    아르카나인들에겐 아르카나인으로서의 긍지가 있을 테니까.

    저벅─

    그 순간, 누군가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현시점 마탑 유일의 원로 마법사, 유그위드 뤼펭.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난 것이었다.

    *

    [퀘스트 : 끝나지 않은 성전(聖戰)]

    아르카나 대륙에서 현실로.

    악마와의 성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 전쟁의 끝엔 보상도, 전리품도 존재하지 않는다.

    남는 것은 오직 긍지뿐.

    스스로의 긍지를 증명하라.

    ─해당 지역에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라. (진행 중)

    유스라 왕국, 프로스트, 성지 뮤온.

    플레이어들 사이에선 토론이 끊이질 않았다.

    이유야 간단했다.

    “그래서 이걸 참전해, 말아?”

    이름부터 거창한 성전(聖戰)이시다.

    그것도 모자라서 퀘스트 내용에 명시된 악마라는 구체적인 적까지.

    악마족 몬스터의 출현이 줄어든 지금.

    아이러니하게도 플레이어들은 다시금 악마족 몬스터의 위험성을 느끼고 있었다.

    “보이질 않으니까 더 와 닿는 거 알지?”

    “당연히 무슨 말인지 알지.”

    “진짜 다시는 꼴도 보기 싫었는데.”

    퀘스트로 떠올랐다는 건 언제가 됐든, 놈들이 다시 등장한다는 소리겠지.

    플레이어 이전에 사람이니까.

    고뇌할 수밖에 없었다.

    “막말로 아르카나 대륙 전기 시절 때였으면 몰라.”

    이건 게임이 아닌 현실, 목숨이 걸린 일이 아니던가?

    보상과 전리품을 떠나서 쉽사리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근데, 피할 수가 없잖아? 예정된 현실이라고 악마들이 균열을 통해 현실로 넘어오는 건……. 그리고 그 균열에 진입할 수 있는 건 우리 플레이어들뿐이고.”

    “아니, 플레이어가 우리만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서로한테 미루면 뭐가 해결되는데? 균열 붕괴밖에 더 되겠어? 악마, 마왕이 현실에 풀려나는 꼴밖에 더 되겠냐고!”

    “아니, 왜 나한테 성질을 내고 그래?”

    “나도 답답해서 그런다! 답답해서!”

    어떤 결정을 내려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북부의 철벽, 프로스트를 무너트린 놈들이야. 플레이어들이 단합해도 모자랄 판에 벌써 이렇게 의견이 갈린다면…….”

    “아르카나도 막아내지 못한 악마의 침공을 겨우 우리만으로 막아낼 수 있긴 한 거야?”

    “프로스트가 옛날 프로스트도 아니고…….”

    그러나 고민 따윈 할 필요도 없다는 듯.

    움직인 이들이 있었다.

    바로 거대 연합이었다.

    “……쟤네 미친 거 아니야?!”

    가온, 이나즈마, 버서커.

    어떤 면에서 보면 이해할 수 있었다.

    저 세 길드는 유스라 왕국 설립 초창기 때부터 적잖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길드였으니까.

    그럼에도 의외였다.

    “잃을 게 너무 많잖아?”

    가진 게 많을수록 잃을 것도 많은 법.

    유스라 왕국 때처럼 얻을 게 있다면 모를까, 이번 퀘스트엔 보상이나 전리품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고 똑똑히 명시되어 있었으니까.

    “그동안 받은 게 있으니까. 은혜를 갚는 거 아닐까?”

    유스라 왕국, 국왕 하쿠나.

    그와 동등한 [권한]을 가진 플레이어, 이호열.

    호열에게 진 빚을 갚기 위해서 움직인 게 확실하다.

    플레이어들은 추측했다.

    -“가슴 속 긍지를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툭툭─

    남태민이 가슴팍을 두들기기 전까지는.

    “……긍지? 저게 뭔 개 풀 뜯어 먹는 소리냐?”

    그러나 거대 연합은 시작에 불과했다.

    프로스트에서 포착된 또 하나의 움직임.

    “자극이 될 것 같아서요.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천하통일과 더불어 유이(唯二)의 초거대 길드, 샤이닝.

    그들 또한 성전에 참전을 결정한 것이었다.

    아니,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여신교단 성지 뮤온.

    유럽 연합 최강의 길드, 보헤미안.

    길드 마스터, 가이버는 카메라 앞에서 능청을 떨었다.

    “뭐, 사실 아직도 화살 맞은 데랑 뒤통수가 얼얼하지만. 성전에 성기사가 빠지는 건 말이 되지 않는 일이죠. 게다가 빚은 악마 놈들에게 되갚아 주면 되는 거잖아요?”

    거대 연합의 참전을 시작으로 기류가 바뀌었다.

    길드는 물론이요, 각자 활동하는 플레이어들까지.

    유스라 왕국, 프로스트, 뮤온.

    각 지역으로 향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런 플레이어들의 동향을 단번에 파악할 수 있는 마탑으로 인파가 몰려들었다.

    “현재 마탑 포탈은 플레이어들로 인산인해입니다!”

    퀘스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포탈로 진입하는 플레이어들.

    그 모습이 전파를 타고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지켜보는 이들에겐 확실히 낯선 그림이었다.

    “참나. 플레이어들이 저러는 건 또 처음 보네.”

    일반인들에게 플레이어란?

    단지 플레이어라고 영웅으로 추앙받던 시절은 한물간 지 오래였다. 애초에 플레이어들부터가 영웅보다는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활동하곤 했으니까.

    하지만 이번엔 상황이 달랐다.

    “득 볼 게 없는데 목숨을 건다고? 진짜?”

    “다들 무슨 바람이 분 거야?”

    “긍지가 뭔진 몰라도……. 뭔가 좀 낭만 있어 보인다?”

    무엇보다 이호열이 있었으니까.

    “막말로 류오쥔춘이 퀘스트에 관련됐다고 생각해 봐.”

    퀘스트에 보상과 전리품이 존재하지 않는 이유?

    긍지고 나발이고, 자기가 보상과 전리품을 가로채기 위한 개수작이 아닌가? 의심이 드는 게 당연했으니까. 굳이 류오쥔춘이 아니어도 마찬가지였다.

    단 한 명, 이호열만을 제외한다면.

    그는 부와 명예를 좇지 않았으니까.

    그동안 호열은 행동으로 보여줘 왔다.

    유스라 왕국.

    황금 궁전을 들이미는 거악의 유혹 앞에서도.

    -“어리석지 않은가? 눈을 감는 순간, 가져갈 수 있는 것은 오직 가슴 속의 긍지뿐인 것을.”

    그 어떤 길드도 진입할 엄두를 내지 못하던 프로스트에 꼿꼿한 자세로 진입했던 것도.

    정기 업데이트였던, 긴급 업데이트였던.

    인류에게 위협이 되는 균열이라면 묵묵히 클리어해 왔던 호열이었으니까.

    그러니까 의심은 없었다.

    우려는 있더라도.

    “……그래, 다 좋아. 이해할 수 있어.”

    “하씨, 또 뭐가 문젠데?”

    “그래서 이 성전에 승산이 있느냐는 거야.”

    그건 객관적인 걱정이었다.

    “이호열, 유스라 왕국, 프로스트, 성지 뮤온. 그리고 우리 같은 플레이어들이 전부 성전에 참전한다고 쳐도. 상대는 아르카나 대륙 전체를 쑥대밭으로 만든 악마들이라고!”

    그러나 그러한 우려 또한 기우에 불과했으니.

    마탑의 로비.

    포탈에서 머뭇거리던 플레이어들에게도 메시지가 떠올랐다.

    [퀘스트 : 끝나지 않은 성전(聖戰)]

    퀘스트가 떠오른 것.

    “……!!!”

    그 말이 뜻하는 바는 간단했다.

    자타공인 아르카나 최강의 무력 집단.

    그렇기에 단 한 번도.

    공식적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던 마탑.

    그들이 성전에 참여한다는 뜻.

    “……잠깐, 이러면 말이 완전히 달라지잖아?!”

    가능성이, 승산이, 희망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

    원로 마법사, 유그위드 뤼펭이 입을 열었다.

    “우리는 얼마 전에 뼈아픈 교훈을 얻었습니다.”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까짓 규율에 얽매여 소중한 것을 다시금 잃을 순 없겠죠?”

    인자한 미소였지만, 악마들에겐 저것보다 섬뜩한 미소도 없겠지. 유그위드의 말인즉슨, 아르카나 최강의 무력 집단인 마탑이 성전에 참전한다는 뜻이었으니까……!

    솔직하게 털어놓겠다.

    ‘이제야 좀 안심이 되네.’

    그랬다.

    마탑의 마법사들이야말로 최소 일당백의 전력들이었으니까.

    아르카나 대륙을 포함해도 마탑보다 뛰어난 아군은 찾을 수 없겠지.

    물론, 용마대전의 승자였던 드래곤들이 있긴 하다만…….

    ‘그쪽과는 되도록 엮이고 싶지 않다.’

    아군인지, 적인지도 모르는 최종 콘텐츠와 엮이기엔.

    아직은 내 레벨은 한없이 빈약했으니까.

    원탁회의 종료.

    그와 동시에 내 시야에도 [퀘스트 : 끝나지 않은 성전(聖戰)] 퀘스트가 떠올랐다. 나뿐만이 아니라 마탑에 있는 다른 플레이어들에게도 떠올랐겠지.

    ‘모두가 알게 될 거야.’

    마탑이 성전에 발을 담갔다는 사실을.

    그런 마탑을 믿고 참전을 결정하는 플레이어들도 적지 않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나는 곧장 유스라 왕국으로 향했다.

    마탑이 합류하기 전.

    그러니까 승산이라곤 쥐뿔도 없어 보이는 퀘스트를 보고도 참전 의사를 밝힌 고마운 이들이 있었으니까.

    [속보 : 거대 연합, “긍지를 지키기 위해 참전 결정.”]

    처음 속보를 확인했을 땐.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지.

    설마 이것도 [행운]에 포인트를 투자한 덕분인가, 말도 안 되는 고민을 진지하게 해보기도 했었다. 그러나 이유가 뭐가 중요하겠는가?

    ‘든든하다.’

    가온, 이나즈마, 버서커의 거대 연합!

    앙숙이던 가온과 이나즈마가 어떤 계기로 협력을 하게 됐는지 나야 모르는 일이었지만, 굳이 알 필요는 없지 않을까.

    나는 그저 누구보다 먼저 성전에 함께해준 게 고마울 따름이었으니까.

    “과연, 긍지를 아는 이들이다.”

    무엇보다 그 이유가 긍지를 지키기 위해서라는데.

    나보다 그랑펠이 흡족해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은 일이겠지.

    그러니까 고마운 만큼 성대한 환영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물론, 청렴결백.

    내 기준에서 환대라고 해도 별건 없었지만.

    황금 궁전의 상징.

    황금의 원탁.

    이내, 문이 열리고 반가운 얼굴들이 보였다.

    “호, 호열 씨? 여기 계셨어요?!”

    “간만입니다, 호열 상. 계신 줄 몰랐습니다.”

    “……헉.”

    휘둥그레진 세 사람의 눈동자.

    그렇게 놀랄 것까지 있나.

    나는 언제나처럼 평온하게 입을 열었다.

    “이야기에 앞서 차부터 한잔하겠는가?”

    차라고 해도 300원짜리 녹차에 불과하거늘.

    “……넵! 주세요! 아니, 주십시오?! 드디어!”

    레오니의 격한 대답에 나는 생각했다.

    ‘과연, 티백 녹차에도 급이 있구나.’

    괜히 만족도 별 다섯 개짜리 녹차가 아니었다고.

    .

    .

    .

    덜커덕!

    누가 먼저랄 것도 없었다.

    찻잔을 들고 있던 세 사람이 화들짝 놀라서 켁켁거렸다.

    ……우리가 지금 무슨 소리를 들은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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