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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145화 (77/489)
  • ◈ 145화. 긍지를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1)

    [권한] 기능이 막대하긴 하다만 만능은 아니다.

    내 멋대로 퀘스트를 띄울 수 없다는 말이다.

    뭐, 사소한 퀘스트 정도는 가능할 수 있긴 하겠지. 웬만한 플레이어들이라면 어렵지 않게 수행할 수 있는 심부름 퀘스트 같은 것 정도라면.

    ‘물론, 이놈의 긍지가 허락하는 선에서 말이야.’

    게다가 지금 이 순간처럼.

    유스라 왕국, 프로스트, 뮤온에 있는 플레이어. 모두에게 메시지로 떠오를 정도의 퀘스트를 내어주는 건 아무리 권한을 들먹여도 불가능하다.

    나는 간만에 진심으로 입을 열었다.

    “그대들과 함께할 수 있어 기쁘군.”

    정말, 군소리 한번 하지 않아 줘서 감사하다……!

    사실 큰 걱정은 하지 않았다.

    하쿠나, 하르콘, 탈림까지.

    그랑펠 정도까지는 아니겠다만, 다들 악마와는 악연이 있었으니까.

    특히 의욕적인 건 하르콘이었다.

    “무뎌진 검을 가다듬을 때가 왔군, 그래.”

    프로스트에 머물며 적성에 맞지 않는 영주 대행 역할을 수행하던 하르콘이다.

    벌써부터 몸이 근질거리는 모양이었다. 물론, 그보다 중요한 건 제국에 대한 충심 때문이겠지.

    “경, 다시 한번 대륙의 상황을 말해줄 수 있겠나?”

    하르콘이 물어왔다.

    하쿠나와 탈림도 나의 입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는 눈치.

    나는 가감 없이 진실을 말했다.

    아르카나의 밤하늘을 장식하고 있는 건 은하수 따위가 아니라 무수한 악마의 눈동자, 마안(魔眼)이라는 것부터. 내가 쓰러트린 수백만 악마는 새 발의 피에 불과하다는 사실까지.

    “은인이시여, 무사히 귀환하셔서 다행입니다.”

    하쿠나가 안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한 번 죽었는데, 무사히 귀환했다고 할 수 있나?

    어쨌든, 하르콘과 탈림은 기사의 관점에서 상황을 파악했다.

    “수천 개의 마안이 하늘에 떠있다……. 전황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겠군.”

    “사실상 대륙에 사각지대는 없다고 봐야겠군요.”

    “어디에 숨어도 악마의 손바닥 안이라는 것인가?”

    “그리고 경의 말씀에 따르면 수백만의 악마들이 수십 분 만에 집결했다는 것인데……. 수백만이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는 게 과언이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알려달라고 해서 알려줬다만.

    괜히 들었나, 싶을 정도로 암울한 상황이겠지.

    세 사람이 심각하게 대화를 나누는 이유야 간단했다.

    막막하거든.

    퀘스트를 통해서 모험가, 플레이어를 모집한다고 하더라도 그 숫자가 얼마나 되겠으며. 아르카나 대륙을 차지한 악마들과의 격차는…….

    멀리 갈 것도 없이 현실에 마왕이 출현했을 때만 봐도 알 수 있다.

    ‘최하위 마왕, 데카라비아조차 쓰러트리기 벅찼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또 한 번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달랑, 석궁과 검 한 자루를 쥐고.

    수백만의 악마들 사이로 뛰어들었다니.

    겁대가리를 상실해도 얼마나 상실한 거냐, 그랑펠.

    역시, 질풍노도의 시기.

    내가 바로 세상의 중심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시절답다.

    하지만 덕분이다.

    내가 아르카나 대륙에 진입하고, 더없이 절망적인 대륙을 목격했음에도, 항상의 자세로 다음의 수를 생각할 수 있는 건. 전부 네 덕분이다.

    “그러나 괜찮네.”

    물론, 이놈의 입방정도 전부 너 때문이지만.

    “?”

    내 선언에 세 사내가 말을 멈췄다.

    짧은 정적 속에서 나는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우리만의 싸움이 아니니까.”

    “……?”

    하지만 정말, 우리만 있는 게 아니거든.

    아르카나 대륙, 드워프를 포함해서 그쪽도 온 힘을 다해 발버둥 치고 있으니까. 죽음의 순간, 나는 떠올랐던 메시지를 잊을 수 없었다.

    [아르카나 대륙에 당신의 업적이 울려 퍼집니다.]

    [아르카나 대륙의 생명들이 당신의 희생을 이야기합니다.]

    그래, 새로운 세계수의 출현이 본격적인 반격의 시작이었다면.

    나의 희생은 반격의 양분과 다름없는 역할을 했을 것이다.

    물론, 다시 살아난 마당에.

    희생이라고 말하기는 거창하긴 하지만…….

    ‘뭐, 양분을 한 번 주라는 법은 없잖아?’

    원래 한 번이 어렵지.

    두 번째부터는 쉬운 법이거든.

    [최후의 모험가] 효과가 유효하다는 것을 알았으니까. 아르카나 대륙에 접근할 방법만 알게 된다면, 양분 정도야 매일매일 줄 수도 있다는 말씀이시다.

    ‘내 한 몸 바치는 게 생각보다 훨씬 남는 장사였거든.’

    막대한 아르카나의 사망 페널티를 떠안았다고 하더라도.

    그것보다 얻어낸 게 훨씬 많았단 말씀이시다.

    그 보상에 관해서 이야기하려면 또 한세월이다.

    게다가 지금은 보상보단 세 사람의 의문을 풀어주는 게 우선 절차.

    나는 말을 이었다.

    “아르카나 대륙에도 성전에 참전한 이들이 있다네.”

    “……!”

    “드워프. 악크샨의 긍지를 잇는 결전병기 퀴른베르크 기계탑. 그리고 절망 속에서도 긍지를 관철하며 악마에 맞서 싸우는 대륙의 모든 이들. 그들 모두가 성전에 참전 중이라고 봐도 무방할 테니.”

    “……과연, 그렇군.”

    “경의 말씀이 옳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생각해 보면 오히려 늦은 것은 우리 쪽인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늦게 성전에 뛰어든 만큼 본격적으로 전황을 뒤흔들어 줘야 하겠지.

    그걸 위한 퀘스트였다.

    “그대들도 알다시피 성전 끝에 물질적인 보상은 없다.”

    빌어먹을 청렴결백 때문이 아니다.

    보상과 전리품 때문에 일어난 전쟁이었다면.

    결코, 성전이라는 이름이 붙지 않았을 테니까.

    이것은 빼앗는 것이 아닌 대륙과 현실.

    두 세계를 지키기 위한 전쟁.

    “그러나 긍지가 남는다.”

    동시에 긍지를 지키기 위한 전쟁이었으니까.

    이쯤에서 입장을 바꿔보자.

    지극히 현실적인 플레이어의 관점에서 보자고.

    과연, 보상조차 걸리지 않은 퀘스트를 흔쾌히 시작할 이들이 얼마나 될까?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의 전쟁도 아니고, 목숨을 걸어야만 하는 진짜 전쟁이다.

    글쎄, 기대하지도 않았지만 기대보다도 적지 않을까.

    그러나 한 가지는 장담할 수 있었다.

    “그 어떤 시련에도 꺾이지 않는 긍지가.”

    보상도 없는, 이따위 성전 퀘스트에 동참한 이들이라면.

    그 어떤 악마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으리라고.

    왜, 별다른 보상도 없는 악마 사냥꾼 클래스 퀘스트를 누구보다 성실하게 수행하고 있는 나처럼 말이지.

    그러니까 내가 할 일은 간단하다.

    그저 나 같은 플레이어가 얼마나 될까.

    지켜보며 기다리면 되는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여유를 가지자.

    달칵─

    황금 원탁 위.

    나는 높여진 찻잔을 들며 입을 열었다.

    “다들 식기 전에 드는 게 좋겠군.”

    “……아, 잊고 있었군.”

    “저, 초록색 차는 처음 봅니다.”

    언제나처럼 300원짜리 녹차 티백이 흔들거렸다.

    *

    [퀘스트 : 끝나지 않은 성전(聖戰)]

    아르카나 대륙에서 현실로.

    악마와의 성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 전쟁의 끝엔 보상도, 전리품도 존재하지 않는다.

    남는 것은 오직 긍지뿐.

    스스로의 긍지를 증명하라.

    ─해당 지역에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라. (진행 중)

    해당 지역.

    유스라 왕국, 프로스트, 뮤온에서 떠오른 퀘스트.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에도 전쟁 관련 퀘스트는 흔하지 않았다.

    그런 전쟁 퀘스트가 세 지역에서 동시에 떠올랐다?

    당연하게도 떡밥이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ㅁㅊ 괜히 악마족 몹들이 쏟아지던 게 아니었네;;;

    -아니;; 우리가 성전이 벌어지고 있다는 걸 어떻게 알겠냐고

    -레이먼 션 슬슬 떡밥 회수 시작하는 거임???

    -그나저나 이런 스케일 퀘스트는 첨 본다ㅋㅋㅋㅋㅋㅋ

    비정상적으로 쏟아지던 악마족 몬스터들.

    아르카나 대륙에서 성전이 진행 중이었다면 그 의문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어째서 플레이어들에게 성전 관련 퀘스트가 떠올랐는지도.

    AAU 긴급회의.

    “영국 측은 오늘도 불참입니까? 뭐, 됐습니다.”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안부 인사는 생략이다.

    회의는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성전이랍니다, 성전! 우리는 알지도 못하는 성전이요.”

    “다들 짐작 가는 게 있으십니까?”

    “……글쎄요.”

    “조금이라도, 아니 뭐라도. 꼬투리라도 좋습니다.”

    흐르는 침묵 속 누군가 입을 열었다.

    “일단, 여신교단이 관련된 건 확실해 보이죠?”

    “그렇겠죠. 그러니까 뮤온에서도 퀘스트가 떠오른 걸 테니까요. 뭐, 프로스트까지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마왕한테 완전히 집어삼켜질 뻔했으니까요. 원수라는 거겠죠. 그런데 유스라 왕국?”

    유스라 제도는 몰라도, 유스라 왕국은 현실에서 부활한 고대 왕국이 아니던가? AAU 대한민국 지부장, 박민재는 꾹 입을 다물었다.

    ‘이번에도 이호열이겠지.’

    다들 머리가 돌아간다면 어렵지 않게 유추해 낼 수 있겠지.

    이호열, 그는 유스라 왕국에서 [권한] 기능을 활성화한 플레이어였으니까. 유스라 왕국이 성전에 참여하기 위해선 반드시 이호열의 동의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더더욱 모른 척을 할 수밖에.’

    박민재는 모니터를 한 차례 둘러봤다.

    AAU.

    아르카나의 침식에 대응하기 위해 설립된 국제 협력 기관.

    그러나 그것은 대의적인 목적에 불과할 뿐.

    그 이면에는 각 국가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있다.

    “박민재 지부장님 생각은 어떠십니까?”

    덕분에 물음에 담긴 의도도 짐작할 수 있었다.

    ‘떠보는 건가?’

    내가 이호열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멋대로 착각하는 거겠지.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자기네들 관계를 일반화하고 있군.

    ‘빌어먹게도 그러고 싶어도 그럴 수가 있어야지.’

    박민재는 깨끗한 척 따윈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기엔 자신은 사회란 흙탕물에서 굴러도 너무 오랜 세월을 굴렀으니까. 그러나 그 더러운 물을 이호열에게 튀기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그에겐 애초에 내 도움 따위 필요하지도 않았으니까.’

    자신만이 아니었다.

    AAU의 정보력보다도 앞서나가던 호열이 아닌가?

    고작 AAU 지부장에 불과한 자신의 협력이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하는 건 자신에 대한 과대평가겠지. 하지만 그걸 인정했다고 해서 말이야.

    ‘또 가만히 보고만 있겠단 소리는 아니거든.’

    그쪽들이 이호열한테 구정물 튀기는 꼬락서니를.

    내가 가만히 보고 있을 것 같아?

    말했다시피 자신의 옷은 이미 구르고 굴러서 더러워졌다.

    흙탕물 몇 방울 더 튀기는 거?

    아무런 타격도 없다.

    아니, 대놓고 땅바닥을 구를 수도 있었다.

    ‘제발, 방해하지 말란 말이야.’

    이호열, 그는 다른 플레이어들과 달랐다.

    물질을 추구하지도, 명예를 추구하지도 않았으니까.

    그가 걸어온 길은 오직 하나의 길.

    ‘인류를 위해 걸어온 길에 끼어들지 말란 말이다.’

    [깨진 차원의 틈] 균열을 시작으로.

    [마왕성] 균열까지.

    AAU는 물론, 어떤 강대국조차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하던 균열들을 고독하게 해결해 왔던 그였으니까.

    그래, 이호열이 걸어온 길이야말로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숭고한 영웅의 길이었다.

    그러니까 박민재는 다짐했다.

    ‘함께 걸을 수 없다면 방해꾼이라도 쳐내야겠지.’

    그게 내 역할이니까.

    그런 박민재가 입을 열었다.

    대놓고 정곡을 찔렀다.

    “아는 바도, 짐작이 가는 바도 없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

    “이호열 플레이어, 그가 걷는 길엔 끼어들지 않으시는 게 좋으실 겁니다. 도움을 주는 거라면 몰라도 혹시라도 발목을 붙잡을 생각을 하신다면…….”

    그건 명백한 경고였다.

    “마찬가지로 발목을 내놓을 각오도 하셔야 할 테니까요.”

    .

    .

    .

    AAU 회의 종료.

    “많이 컸구만.”

    대격변 이후.

    대한민국 수도, 서울에 마탑 출현.

    그걸 기회로 급성장한 대한민국이었다.

    행운도 모자라서 이호열이라는 규격 외 플레이어의 등장까지. 덕분에 국제 사회에서 대한민국의 영향력은 미국이나 중국과 비교해도 밀리지 않을 정도로 치솟았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단단히 착각하고 있군.”

    박 지부장, 발목을 내놓을 각오를 하라고 했었나?

    유감스럽게도 발목을 붙잡을 필요도 없었다.

    이번 퀘스트엔 기브 앤 테이크(Give and Take).

    이해관계가 없었으니까.

    “인간이란 동물을 과대평가하고 있군, 그래.”

    스읍─

    사내는 연기를 머금었다.

    인간이란 어리석으면서 영악한 족속이다.

    플레이어도 마찬가지다.

    보상도 전리품도 없는 일에 목숨을 건다?

    긍지고, 인류의 평화고, 움직일 이유가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후우─

    “긍지라고? 하, 웃기지도 않은 소리.”

    비웃음 사이로 연기가 흩어져 나왔다.

    .

    .

    .

    “……?!”

    그러나 사내의 비웃음은 담배 하나를 태울 때까지도 이어지지 못했다.

    모니터에 떠오른 속보.

    마치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는 것처럼.

    모습을 드러낸 건.

    미국의 자랑, 샤이닝을 위협하는 신흥 세력.

    가온, 이나즈마, 버서커의 거대 연합.

    “거대 연합이 성전에 참전하는 건가요?”

    “빠른 결정을 내리셨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으십니까?”

    “보상도, 전리품도 없는 퀘스트에 참전한 이유가 뭡니까?”

    쏟아지는 무수한 질문 속에서.

    가온의 길드 마스터, 남태민이 주먹을 치켜들었다.

    툭툭─

    주먹으로 가슴을 두들겼다.

    뭘 그리들 당연한 걸 묻느냐는 사람처럼 말했다.

    “가슴 속 긍지를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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