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4화. 친히 어울려 주마
질문에서 알아차렸다.
‘아직 깨닫지 못했구나.’
시무아르드가의 대모를 자칭하던 악마가 사냥당했다.
시한부의 저주도, 상태이상도 사라졌을 텐데.
벨리에는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눈치였다.
현실과 아르카나 대륙.
균열을 거치지 않고서는 연결될 수 없는 두 세계라서? 뭐, 그게 아니라면 상태이상의 효과가 흐릿했던 만큼 해제됐을 때의 반동도 적다는 거겠지.
이유야 어찌 됐든 상관없다.
율라 시무아르드, 그녀의 이름을 언급하는 순간.
시무아르드가의 사용인들처럼 자초지종을 알게 될 테니까.
하지만, 그럴 필요가 있을까?
물론, 마르셀로도 포함이다. 이제 와서 진실을 알게 된다고 한들, 바뀌는 것은 없다. 어째서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자책감만 심해질 뿐이겠지.
악마 사냥꾼이기에 알 수 있다.
악마는 인간의 후회조차 악용하는 족속이라는 것을.
그러니까 그저 가만히 입을 닫고 있는 게 상책이었거늘.
그렇다고 이놈의 긍지가 그냥 넘어가려고 들지를 않았다.
“당한 게 아니다. 수백만의 악마를 사냥하고 왔다.”
“……!”
내 뻔뻔한 자랑에 벨리에가 흠칫했다.
언제까지나 아르카나 대륙에 진입한 목적은 시한부 저주 해금의 실마리를 찾기 위함이었으니까.
굴러가던 벨리에의 녹색 동공이 휘둥그레졌다.
“수백만……! 이런! 마르셀로 수석 걱정에 잠시 간과하고 말았습니다. 아르카나 대륙이 결코 안전하지 않았을 텐데. 그렇다면 역시 저 옷가지에 묻은 피는 이호열 수석님의……!”
벨리에가 곧장 마력을 끌어올렸다.
“역시 상처가 남아있으시겠죠? 수석님께서 내어주신 여신교단 성물 덕분에 마르셀로를 지금까지 보살필 수 있었습니다. 제게 부디 은혜를 보답할 기회를 주시겠습니까?”
여신교단의 성물(聖物)?
아, [악에 물든 의식용 로브]를 말하는 거구나.
구마의식을 통해 정화하자 진짜 이름과 효과가 드러났었지.
[여신교단 대사제의 비단옷].
무려 700레벨 제한이 걸린 걸로도 모자라서 [치유] 관련 스킬 보유자만 착용할 수 있다는 추가 제한까지 걸려있던 아이템.
어차피 나는 써먹지도 못하는 거.
혹시라도 벨리에에게 도움이 될까, 건넸거늘.
그래도 도움이 됐다니 다행이네.
그러나.
“그대의 마음만 받겠다.”
“부상이 번지기 전에 어서 치료를……!”
“아니, 부상 따윈 없다.”
말 그대로 다친 곳이 있어야지.
한 번 죽은 것치고는, 심하게 멀쩡히 현실로 돌아와서 말이야.
벨리에는 여전히 이해가 안 되는 눈치였다.
하긴, 의문투성이겠지.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좀.’
두 시간 만에 아르카나 대륙에서 돌아와서는.
피에 젖어 갈가리 찢긴 옷부터 갈아입었다.
그런데 의아하게도 또 다친 곳은 없단다.
시무아르드 가문은 어떻게 하고, 수백만의 악마를 사냥하고 돌아왔다는 것인가? 행보가 의문스러울 수밖에 없는데……. 또 마르셀로는 멀쩡하게 깨어난 상태였으니까.
“……하하.”
어이가 없어서 웃는 건가.
그런 거라면 얼마든지 웃어도 좋다, 벨리에 선임.
원탁회의에서 그 난리를 치고 두 시간 만에 복귀라니.
뭘 하고 왔든 웃음이 나올만도 하지.
특별히 폭소를 허가한다.
그러나 이내, 벨리에의 손이 눈가를 향했다.
눈망울에 맺힌 눈물을 훔쳤다.
“……아니요. 아무래도 좋습니다, 이호열 수석님. 무사히 돌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마르셀로 수석. 아니, 마르셀로를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슥─
벨리에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둘러댈 거리를 떠올릴 필요는 없었나.
하긴 이유가 뭐가 중요하겠어? 마르셀로, 우리 마탑의 진짜 수석님께서 무사하시다는 게 중요한 일이지. 감정을 추스른 벨리에가 입을 열었다.
“마르셀로 수석은 아직 별실에서 안정을 취하고 계십니다.”
어떻게 그래도 늦게나마 병문안을 가는 게 맞지 않나.
도의적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건만.
나는 정 없게도 말했다.
“마르셀로의 안부는 회의에서 확인하도록 하지.”
“……회의라면? 혹시 원탁회의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렇네.”
그랬다.
나는 목격하고 말았으니까.
처참한 아르카나 대륙의 모습을 내 두 눈으로.
자, 가정해 보자.
굳이 상위 마왕까지 갈 필요도 없었다.
당장 [마계 서부의 패왕, 락시오로스], 그와 비슷한 수준의 악마가 균열에 업데이트된다면? 여태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세계는 또 한 번 충격에 마비될 수밖에 없으리라.
‘악마들의 활동은 마왕 압살로 둔해진 게 아니었어.’
바로 잡을 건 바로 잡아야겠지.
마왕 압살은 ‘계기’에 불과했다.
데카라비아를 포함, 내가 마왕을 넷이나 사냥한 덕분에 마왕의 자리에 공백이 생겼고.
악마들 사이에서 공백의 왕좌를 차지하기 위한 [마왕 쟁탈전]이 열리는 모양이었으니까.
-“그리하면 나, 락시오로스와 동등한 위치에서 함께 마왕 쟁탈전에 참여할 영광을 하사하겠노라!”
그래, 악마들이 잠잠했던 이유는 마왕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
서로가 서로의 눈치를 보던 것뿐이었다.
나야 쟁탈전이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는지까진 알 수 없다.
그러나, 한 가지는 장담할 수 있다.
‘수백만 그다음엔 수천만, 수억이다.’
폭풍전야.
쟁탈전이 시작되든, 끝나든.
무언가 사건이 일어나는 순간.
악마들의 공세는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이 거세지리란 것을!
그래, 그에 대비하기 위한 원탁회의였다.
그러나 이 복잡한 사정을.
벨리에에게 조곤조곤 설명할 수는 없었으니.
나는 한 줄로 요약해 말할 수밖에 없었다.
“비로소 마탑이 움직일 시간이 왔으니.”
“……!”
물론, 나도 발 빠르게 움직여야 한다.
말했다시피 이건, 나는 물론, 마탑 수준에서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으니까. 그러니까 오랜만에 권력을……. 아니, ‘권한’을 사용할 때가 왔다는 말이다.
*
정신은 또렷했거늘.
마르셀로는 침대에 누워 얌전히 이불을 덮은 상태였다.
절대 안정.
벨리에의 신신당부 때문이었다.
문 너머에서 외면할 수 없는 대화가 들려온다.
“정말, 정말 다행입니다 흐흑.”
“……뱅그릿 선임, 우는 건 너무 과한 거 아닙니까?”
“벤쉬 윌리엄, 당신이 할 말입니까?”
“네? 제가 뭘요?”
“별실문에다가 귀를 바짝 대고서는 하여튼 호들갑을……!”
……우리가, 수석과 선임이 서로를 걱정해 주는 관계였나?
‘아직은 낯설군.’
마르셀로는 작게 웃었다.
그래도 변화가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모험가들의 세계에 떨어지고, 마탑은 정말 많은 사건을 겪었으니까.
“경쟁으로 엮인 우리조차 단합하게 만든 거겠죠.”
“수석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이런, 마티스 선임? 계신지 몰랐습니다.”
과연, 괜히 흑마도학의 선임이 아닌가.
별실의 구석.
그늘에 앉아있던 마티스가 마르셀로의 혼잣말에 대답했다.
마르셀로가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켜 세웠다.
“무리하지 않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마르셀로 수석?”
“무리가 아닙니다.”
마르셀로는 멋쩍게 웃었다.
“가만히 누워있는 게 민망할 정도로 멀쩡하거든요.”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그나저나 벨리에 선임은?”
“들를 곳이 있다며 잠깐 자리를 비웠습니다.”
“아, 그런가요?”
시한부의 저주가 사라졌다고.
마르셀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애초에 기절해서 필름이 끊기듯 쓰러졌던 그였으니까.
“저 때문에 많은 고생을 한 듯싶은데…….”
벨리에가 자신의 치료에 힘을 썼구나, 짐작하는 게 고작이었다.
마티스는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는 마르셀로가 깨어나기 직전.
벨리에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벌써 무언가 실마리를 붙잡으신 것 같아요!”
-“저주의 문양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믿을 수 없어.”
모든 게 해가 저물기도 전에 벌어진 일.
마티스의 머릿속엔 물음표가 가득했다.
이호열 수석께선 아르카나 대륙에서 어떤 실마리를 붙잡으신 걸까?
어디까지 알고 대륙에 진입하기로 결정하셨던 걸까?
그러나 마티스는 침묵을 지켰다.
무엇이 됐든.
자신의 입으로 전할 소식이 아니었으니까.
“아, 그러고 보니 이호열 수석께서는 예정대로 아르카나 대륙에 진입하셨습니까? 아니, 그전에 마티스 선임. 저는 며칠 동안 쓰러져 있던 거죠?”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순수한 표정.
이걸 무어라 대답해야 하는가?
채 한나절도 지나지 않았다고.
솔직하게 대답해야 하는 건가?
“몸에 피로가 조금도 남아있지 않은 걸로 봤을 땐……. 못해도 닷새는 정신을 잃고 잠만 잔 것 같습니다. 아, 이렇게 누워있을 때가 아니라……!”
밀린 업무를 처리해야 하는데…….
중얼거리는 마르셀로를 지켜보던 마티스는 이마를 짚었다.
하루도 지나지 않았는데, 밀린 업무가 있을 리가 있나.
“저기, 마르셀로 수석. 그 업무는…….”
물론, 마티스의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철컥─
벨리에가 다시금 별실로 돌아왔으니까.
“이호열 수석님께서 복귀하셨습니다.”
뜻밖의 소식과 함께.
“……보, 복귀하셨다고요?!”
살짝 열린 문틈에서 들려오는 호들갑.
벤쉬의 달싹거리는 입술이 보였다.
곧 의문 가득한 목소리들이 이어졌다.
“아니, 이 수석께서 벌써 복귀하셨다고요?!”
“믿으라고 하셨으니까. 의심하진 않았는데…….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나 금방?”
“그럼, 지금 이 수석께선 마탑에 계신 겁니까?”
평소 같았으면 벤쉬의 호들갑에 질색을 했을 마티스조차 침묵했다.
무엇보다 이호열 수석에 관한 소식이 우선이었으니까.
다른 반응을 보이는 건 오직 한 사람.
“……벌써 복귀하셨다니요?”
시간 감각이 흐릿해진 마르셀로밖에 없었다.
벨리에는 후우, 숨을 골랐다.
아르카나 대륙에서 벌어졌던 일이야, 당사자이신 이호열 수석께서 원탁회의에서 어련히 밝히실 테니까…….
“이호열 수석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벨리에가 답해줄 수 있는 건 한마디밖에 없었다.
“수백만의 악마를 사냥하고 왔다.”
“……자, 잠깐만! 뭐, 뭐라고요?”
“수, 수백만?! 제 귓구멍이 잘못된 거죠? 네? 벨리에 선임!”
우당탕─
이젠 아예 문을 열고 들이닥치는 선임 마법사들.
벨리에는 모두의 앞에서 다시금 확실하게 선언했다.
“아닙니다. 제대로 들으셨습니다. 이호열 수석께서는 고작 두 시간 남짓한 시간 만에 아르카나 대륙에서 수백만에 이르는 악마를 사냥하고 마탑에 무사히 복귀하셨습니다.”
“!!!”
그게 상식적으로, 마법적으로 말이나 된단 말인가?
아르카나 대륙 최고의 무력 집단.
마탑의 수석, 선임 마법사 얼굴에 경악이 서렸다.
*
유스라 왕국, 프로스트, 성지 뮤온.
굳이 지역을 구분할 필요도 없었다.
악마족 몬스터의 활동이 잠잠해진 지금.
어떤 곳을 찾아도 플레이어들로 가득했으니까.
“내가 말했잖아. 악마, 그 자식들만 없어도 할만하다니까?”
“진짜 내가 잠자기 전에 호멘, 호멘, 중얼거리면서 잔다.”
“아, 그나저나 스칼은 어떻게 됐대?”
적정 레벨 균열에서 구르고 돌아왔어도.
이렇게 잡담을 나눌 힘이 남아있는 플레이어들이 말이다.
화제가 화제이니만큼 수다는 쉽게 끝나지 않았다.
“뭐, 당사자들이 이야기가 없으니까 추측에 불과하겠지만. 꼼짝이라도 하겠어? 이호열이 누군데. 공손하게 존댓말을 해도 모자랄 판에 말이야.”
“그렇지? 이름도 아니고 악룡 사냥꾼이라고 불렀잖아!”
“근데 스칼도 고집 장난 아니네. 나 같으면 지난번엔 말실수했다고, 미안하다, 다시 한번 정식으로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다. 몇 발자국이라도 물러날 텐데.”
시답잖은 기싸움이 아니라 호열이 자신의 히든 클래스, [용기사]와 관련됐으니까.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냈을 게 뻔한 스칼이었다.
그러니까 더더욱 이해가 되지 않았다.
“빌어도 모자랄 판에 자존심 세울 때가 맞나? 난 모르겠다.”
“근데 희한하지 않냐?”
“뭐가?”
“스칼, 그거 딱 봐도 관종인데. 어떻게 지금까지 조용히 살아온 걸까?”
“어휴, 이젠 뭐 관상까지 보시게? 스칼 관상 볼 시간에 몹 면상이나 좀 잘 봐라. 아까 전에도 어그로 튀어가지고 나한테…….”
물론, 플레이어들에게 중요한 건 세간의 소식보다 눈앞의 경험치와 아이템이었지만. 그렇기에 플레이어들은 일제히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땡─
정각을 알리는 종소리.
뿌우─
그와 동시에 나팔소리가 울렸다.
그것도 유스라 왕국, 프로스트, 성지 뮤온에 일제히.
서로를 마주 보는 플레이어들.
종소리는 몰라도 나팔소리가 울린다……?
흔치 않은 일.
아니, 대격변 이후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던 일이었다.
직감적으로 깨닫는 게 당연하다.
“……야, 큰 거 온다.”
“형님들. 아무래도 뭔가 뜰 것 같은데요?”
“하씨. 뭔데, 뭔데.”
꼴깍.
뿌우─
나팔소리가 길게 이어질수록 커져가는 기대감.
누군가 누누이 말해오지 않았던가?
기대감이 크면 실망도 큰 법이라고.
“……!!!”
그러나 이번만큼은 아니었다.
커진 기대만큼.
아니, 그 기대를 아득히 뛰어넘는 전개가 펼쳐졌으니까.
그 무엇보다 직관적인 방식으로.
플레이어들의 눈앞에 메시지가 떠오른 것이었다.
[퀘스트 : 끝나지 않은 성전(聖戰)]
“……미친, 이게 무슨 퀘스트냐?!”
척 봐도 범상치 않은 퀘스트가.
.
.
.
유스라 왕국.
황금의 원탁.
나는 자리에 앉은 이들을 바라봤다.
유스라 국왕, 하쿠나.
프로스트의 영주 대행, 하르콘.
뮤온의 성기사단장, 탈림 에베르.
“드디어, 시작이군요.”
“성전, 이날만을 기다리고 있었네.”
“여신의 가호가 함께하기를.”
비장감이 깃든 그들의 시선이 일제히 나를 향했다.
수억의 악마라고 했겠다…….
이쪽도 머릿수 정도는 맞추고 시작해야 되지 않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