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143화 (75/489)

◈ 143화. 화려하게 (3)

귓가에 하르콘의 목소리가 맴돈다.

-“……생과 사를 오가는 전장에서 검기는 더욱 짙어지고, 그 고유의 색을 띠는 법이니까.”

내가 정말 생사의 갈림길에 서긴 했나 보다.

이전까지는 이해가 될까 말까 했던 그 말이.

단번에 깨달아지는 걸 보면 말이야.

나는 느려진 시간 속에서 검을 바라봤다.

스스스─

검기의 윗 단계, 검강.

칠흑처럼 짙은 먹색으로 변한 날붙이.

그런 칠흑의 검신을 휘감아 오르는 은색의 기백.

사용자 고유의 색이라고 했었나.

……흑역사에 은발 머리를 형상화라도 한 건가, 뭔데.

어쨌든.

누가 봐도 나, 이호열의 검강이구나 싶다.

그러나 그보다 중요한 건 검기가 아닌 검강이라는 것이다.

이 또한 그랑펠의 재능 덕분이겠지.

마법의 경지를 단번에 파악했던 것처럼. 검기와 검강이 얼마나 다른지도 자연스럽게 깨달을 수 있었다.

검강의 반열이 얼마나 도달하기 힘든 곳인지도.

왜, 지금 상황만 봐도 알 수 있잖아?

그랑펠의 재능으로도 빈사 상태가 돼서야 도달할 수 있는 영역이란 뜻이었으니까.

마음 같아서는 느긋하게 이 엄청난 성장을 느껴보고 싶었는데 말이야.

[상태이상, ‘출혈’이 발생합니다.]

[주의 : 생명력이 너무 낮습니다.]

[주의 : 생명력이 너무 낮습니다.]…….

아까부터 반짝거리는 메시지가 워낙 번잡스러워야지.

스슥─

악마를 베는 검강도.

푸슉─

쏘아져 나가는 석궁 볼트도.

이전과 다르게 느릿하다.

정말로 육체가 한계에 다다랐다는 게 느껴진다.

항상을 고집할 수밖에 없는.

그랑펠의 긍지로도 무리다, 이건.

그러나 아르카나 대륙에 진입하기 전에도 짐작했던 것처럼.

푹─

스와아악─

나는 한순간도 사냥을 멈추지 않았다.

움직임이 느려졌다면 느려진 대로.

기운이 남아있다면 한 마리라도 더 악마를 사냥하기 위해.

비명을 질러대는 육체를 윽박지르고 있었다.

억지다.

억지도 이런 억지가 없다, 그랑펠.

정말이지, 흑역사답다.

죽음이고, 뭐고.

무엇하나 두려울 게 없던 질풍노도 시기의 망령답구나. 그러나 그렇기에 감사하다.

그 시절의 내가 아니었다면, 이건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전장이었으니까.

파지지지지직─!

소음과 함께.

허공에 흩어지는 마력.

한계에 다다른 마력의 용이 산화한다.

인벤토리로 되돌아온 [사악한 지룡의 송곳니].

이제 지상에는 나 혼자뿐이군.

수십, 수백만 악마의 시선이 오직 나에게로 쏠렸다.

[Lv.900 : 방랑의 거대 지옥견]

[Lv.950 : 절망의 전도사]

[Lv.1,000 : 마계 서부의 패자, 락시오로스]…….

하나같이 지랄…….

아니, 범접할 수 없을 정도로 아득한 레벨들이시다.

그러나 수치보다 나를 더욱 두렵게 하는 건, 이 수많은 악마 가운데서 상위 마왕은 한 녀석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는 것.

뭐, 나 하나 잡는데.

높으신 분들까지 나서실 필요는 없다는 거겠지.

나는 읊조렸다.

“귀빈을 맞이하는 태도가 미흡하구나.”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와중에도 말은 잘도 나온다.

허나, 놈들에게도 나의 한계가 보이는 걸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역시 천하의 악크샨, 최후의 생존자답구나! 나, 서부의 패자 락시오로스가 그대를 인정한다. 그대는 마지막까지 미련할 정도로 용감했다. 비겁한 인간들과 같은 취급을 하기엔 아깝군!”

마계 서부의 패자, 락시오로스.

거대한 짐승형 악마 위에 올라탄 녀석이 지껄였다.

“좋다. 그대에게 죽어서도 이 몸을 섬길 기회를 하사하겠다. 누구라도 좋다! 저 악마 사냥꾼의 육체를 차지해라! 빙의해라! 그리하면 나, 락시오로스와 동등한 위치에서 함께 마왕 쟁탈전에 참여할 영광을 하사하겠노라!”

마왕의 자리를 두고 쟁탈전까지 벌이시나 봐?

악마들 팔자가 아주 좋구나.

우리는 하루하루 균열에서 어떤 몬스터가, 악마가 들이닥칠지 모르고 살고 있는데 말이야.

거기에다가 뭐?

내게 빙의하겠다고?

‘진짜 할 말은 많지만, 내가…….’

사냥감과는 불필요한 대화는 섞지 않는다.

나는 말 대신 손가락을 움직였다.

철컥─

락시오로스, 녀석은 손바닥을 들어 볼트를 막아냈다.

먹힐 거라곤 기대도 안 했다.

역시 간지럽다는 표정이군.

놈이 꿰뚫린 손바닥을 바라보곤 낄낄 웃음을 뱉었다.

“하하하!”

녀석의 동공이 검게 물들었다.

“이것이 최후의 발악인가? 악크샨 최후의 생존자여!”

부장님 말장난까지……?

가지가지 하는구나, 너도.

그러나 됐다.

척─

나는 검과 석궁을 쥔 양손을 늘어트렸다.

“드디어 깨달았나? 악마 사냥꾼이여! 끝났다! 모든 게!”

꼴깍─

악마들이 군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온다.

킬킬킬─

희열과 조롱이 절반씩 섞인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오만하다. 인간답지 않게 오만하구나. 마왕과 거악을 사냥해서 무엇이라도 되는 줄 알았더냐? 혼자서 이곳에 찾아올 줄이야! 오만한 것을 넘어서 어리석다!”

그 선언에 밤하늘의 마안이 움찔거렸다.

보름달에서 초승달로.

밤하늘에 가득한 마안이 눈웃음을 지었다.

아르카나 대륙에 떨어져서일까.

문득, 악크샨이 떠오른다.

‘악크샨의 악마 사냥꾼들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긍지를 관철하기 위해서.

최후의 최후까지 악마들과 맞서 싸웠지만.

돌아오는 것은 악마들의 조롱뿐이었겠지.

“어떤가? 이제 울부짖을 마음이 생겼는가? 어디, 먼저 뒈져버린 악마 사냥꾼들처럼. 네놈도 한번 울부짖어 보거라. 그 오만한 낯짝을 일그러뜨려 보란 말이다!”

락시오로스, 놈의 말대로.

죽음의 문턱에선 철벽같던 정신력이 무너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다물어라.”

유스라.

프로스트.

텟퍼른.

악크샨.

경험이 있었기에.

몰랐어도 이젠 알 수밖에 없단 말이다.

인간의 긍지란 끝없이 이어지는 것이라는 것을.

악크샨의 절멸?

몇 번이나 말했다시피 공백기에 벌어진 일이다.

나와는 관계없는 일이라고 봐도 무방하겠지.

그러나 악크샨의 긍지를 알게 된 이상, 나는 가만히 있을 수 없다.

악마의 농간에 놀아났든, 뭐든.

결국, 아군에게도 버림을 받았던 그들을.

언제까지고 외면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래.

이 피날레는.

악크샨을 향한 나의 애도다.

스윽─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구름 뒤편에서 흐릿하게 보이는 거함.

나의 뒷배, 아이언 캐슬 호.

지상에선 나 혼자였지만.

저 하늘 위엔 나도 너희처럼 띄워둔 게 있거든.

발광.

아이언 캐슬 호의 포신(砲身)이 이전과 다르게 반짝였다.

흐릿한 시야에서 메시지가 떠올랐다.

[비행 기계성, 아이언 캐슬 호 : 마력 광선 사출포 장전 완료]

어차피 죽을 수밖에 없다면.

본전을 건지는 건 물론.

화려하게.

또 가치 있게 죽어야 하지 않겠어?

그랬다.

이 또한 만반의 준비 일부.

나는 아르카나 대륙, 수백만의 악마와 함께 사라진다.

지이이이이잉─!

드워프 기술력의 정점, 아이언 캐슬 호.

그런 아이언 캐슬 호가 전력으로 뿜어내는 공격이었다.

다르게 말하자면 저 광선포는 내가 여태껏 봐온 그 어떤 마법, 스킬보다도 강한 위력을 가졌단 소리다.

거대한 마력의 응축.

그 탓에 구름이 걷히고 기체의 모습이 드러난다.

데구르르─

짓고 있던 눈웃음이 무색하게도.

마안들의 초점이 다급하게 굴러간다.

늦게나마 상황 파악을 한 거 같은데.

유감스럽게도 늦었어.

“……!!!”

텔레파시처럼.

마안에게서 정보를 전달받는 모양이었다.

락시오로스, 놈의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진다.

“……제정신이 아니구나, 악마 사냥꾼이여! 발악에 불과하다! 네놈이 목숨을 내던져 봤자 바뀌는 것은 없다. 이 자리에서 수백만의 악마를 쓰러트린다고 하더라도, 수천만, 아니 수억의 악마가 새롭게 태어난단 말이다!”

한결같지 못하군.

혀가 길어진 게 아까의 기세는 조금도 보이지 않잖아.

불필요한 대화는 하지 않지만, 할 말은 또 해줘야 한다.

나는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수억의 악마 또한 사냥하면 되는 일이다.”

“……뭣?”

이해가 안 되는 눈치겠지.

그럴 만도 하다.

다 죽어가는 마당에 어떻게 수억의 악마를 사냥한다는 건지, 마력 폭격에 같이 휩쓸리게 생긴 마당에, 도저히 이해가 안 될 거야.

그런데 멋대로 착각하지 마라.

죽기는 누가 죽는다고 그래?

[최후의 모험가 : 아르카나 대륙에서 사망하지 않습니다. 사망 시, 즉시 현실로 귀환하며 일정 시간 동안 아르카나 대륙에 접근할 수 없습니다. - 쿨타임 : 24시간]

아르카나 대륙.

다시 진입할 방법만 찾으면.

얼마든지 네놈들 앞에 다시 나타나 줄 테니까.

정말, 수억의 악마를 처치할 때까지……!

누가 뱉은 말을 지키지 않고는 못사는 성격이어서 말이야.

그러나 오늘은 여기까지다.

나는 말을 이어나갔다.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

“나는 악마 사냥꾼.”

“……!”

“내가 바로 너희의 천적이자 공포다.”

태연하게 내뱉을 수 없는 말을 끝마쳤다.

그러고는 굳게 입을 다물었다.

그래, 침묵이야말로 사냥에 임하는 나의 자세.

신호탄이란 소리다.

[비행 기계성, 아이언 캐슬 호 : 마력 광선 사출포 발사]

슈오오오오─!

이내, 가공할 만한 위력의 마력 광선이 시야를 뒤덮었다.

악마들의 처절한 비명 속에서 메시지가 떠올랐다.

셀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양의 메시지가.

[……에 대한 처치 기여도가 인정됩니다.]

[……에 대한 처치 기여도가 인정됩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사망하셨습니다.]

[사망 페널티가 적용됩니다.]

[획득한 경험치가 하락합니다.]…….

[아르카나 대륙에 당신의 업적이 울려 퍼집니다.]

[아르카나 대륙의 생명들이 당신의 희생을 이야기합니다.]

[칭호, ‘숭고’를 습득합니다.]

[칭호, ‘최후의 모험가’ 효과가 발동됩니다.]

[즉시 현실로 귀환합니다.]

[쿨타임 : 23시간 59분.]

*

아이언 캐슬 호.

“……빌어먹을!!”

드워프 지도자, 체인워커 하드록이 울분을 토해냈다.

“정녕, 이 방법밖에 없었단 말인가!”

모든 것은 예상대로 흘러갔다.

악크샨의 생존자.

최후의 악마 사냥꾼을 처치하기 위해 악마들이 몰려들었고, 그런 악마들을 쓸어버리기 위해 아이언 캐슬 호 비장의 무기를 사용했다.

정령, 하이엘을 통해서 계획을 전해 들었을 땐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아이언 캐슬 호의 최대 출력이다.

제아무리 마법에 능통한 호열이라고 하더라도, 피해 없이 막아내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나를 믿어라. 호열 님께서는 그렇게 전하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맹약이 무엇인가?

그저 따를 수밖에 없는 것.

더욱이 악크샨과의 맹약은 절대 거스를 수 없었다.

우려하면서도 그의 계획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게 정말 예정된 수순이란 말인가?

체인워커를 비롯한 드워프들은 모든 상황을 목격했다.

“……저건 혼자서 감당할 수 있는 물량이 아니야!”

“체인워커! 지금이라도 그에게 합류하는 게 옳다!”

“이대로 악크샨의 생존자를 잃을 순 없다네!”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칼과 석궁을 늘어트린 호열을 포착했다.

누가 봐도 궁지에 몰린 상황이거늘.

정말 방법이 있단 말인가?

끊임없이 의문이 들었지만 체인워커는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배신은 한 번으로 충분하다. 우리는 그저 악크샨을 믿을 뿐.”

철컥─

발사.

수백만의 악마를 집어삼킨 마력 광선포.

폭발의 후폭풍을 추진력으로 삼아 아이언 캐슬 호가 움직였다.

당연하게도 후퇴 또한 호열이 세웠던 계획의 일부였다.

체인워커가 빠득, 이를 갈았다.

“……우리가 그대에게 걱정을 받을 자격이 있단 말인가?”

상념에 빠지기도 잠깐.

“!”

하이엘.

정령에게 생각이 닿았다.

하이엘은 호열의 계약 정령.

호열이 살아있다는 증거나 다름없었으니까.

그리고 목격했다.

어째서인가.

우아함을 넘어서 ‘숭고’한 빛을 내뿜고 있는 하이엘을.

“하이엘, 호열 경은……?”

체인워커의 물음에 하이엘이 대답했다.

“우려할 것 없답니다. 무사하시니까요. 언제나처럼.”

그 어느 때보다도 인자한 목소리로.

.

.

.

……마탑에서 가장 가까운 균열을 선택한 게 무색하게도.

‘뭐지.’

육체의 상태가 더없이 멀쩡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설명하자면…….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

VR 캡슐에 누워있다가 일어난 정도.

딱 그 정도의 피로감이다.

‘밤부터 새벽까지.’

쉴 새 없이 치고받고 싸웠는데 말이야.

시간을 확인하니 정말 두 시간밖에 지나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마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마르셀로가 멀쩡한지부터 확인하는 게 절차였으니.

그런데 원탁회의에서 온갖 폼을 잡았던 게 떠올랐다.

그 난리를 쳐놓고 고작 두 시간 만에 복귀하는 것도 좀 민망한 일 아닌가……? 나는 그런 의미에서 균열을 둘러봤다.

역시, 떠올랐던 메시지도 살펴볼 겸. 겸사겸사 천천히 복귀하는 게…….

“!”

그러나 나는 확인하고 말았으니.

그건 갈기갈기 찢긴 나의 재킷, 셔츠, 슬랙스였다.

상처는 남지 않았지만, 핏자국은 남는 법.

속살이 훤히 드러나잖아, 이거.

나도 민망한데.

그랑펠이 이런 넝마와 같은 차림새를 용납할 수 있을 리가.

곧장 포탈 발현.

두 시간 외출이고 나발이고.

일단, 옷부터 갈아야 입어야 한다.

나는 절제가 넘치는 동작으로 환복했다.

‘갈아입고 다시 외출하든가 해야지.’

그러나 나의 다짐이 무색하게도.

똑똑─

다급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없는 척 좀 하면 어디 덧이라도 난단 말이냐?

나는 기다렸다는 듯 답했다.

“잠깐.”

일단, 단추부터 채우고.

“들어와도 좋다.”

나의 허락에 곧장 열리는 문.

문을 열고 들어온 건 벨리에였다.

스왈린 공작의 애장품을 착용하던 내게 벨리에가 말했다.

“이렇게 빨리 복귀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나도 몰랐다.

“마르셀로. 아니, 마르셀로 수석이 깨어났습니다……!”

그럴 줄 알았지만.

그래도 깨어났단 소리를 들으니까 안심이 되네.

“……?”

소식을 전해온 벨리에의 시선이 이내 의자에 가지런히 걸린 넝마로 향했다. 갈가리 찢기고 피에 물든 의복에 고정되었다. 내가 무어라 입을 열 새도 없었다.

“……이호열 수석님? 저 옷들은?”

벨리에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어왔다.

“대체……? 아르카나 대륙에서 무슨 일을 당하신 건가요?”

……이놈의 성격.

틀린 말이라면 가만히 듣고 있을 수가 없다.

나는 옷매무새를 다듬으며 뻔뻔하게 말했다.

“당한 게 아니다.”

“……?”

“수백만의 악마를 사냥하고 왔다.”

“……네?!”

왜, 뭐, 같이 죽긴 했어도 틀린 말은 아니거든?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