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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142화 (74/489)

◈ 142화. 화려하게 (2)

대모(大母).

언제부터 시무아르드가의 어머니를 사칭하고 있던 걸까.

빙의에서 해방된 그녀의 육체에서 빠르게 생기가 사라졌다.

구마의식이 발동된 상태.

빙의된 인간의 육체는 피해를 받지 않았을 텐데.

그녀는 시신으로. 백골으로. 가루로.

악마와 함께 흔적도 남기지 않고 허공으로 흩어져 버렸다.

‘인간의 육체가 버틸 수 없는 기간 동안.’

녀석은 시무아르드가를 기만한 것이었다.

슬슬 납득이 되는군.

마르셀로, 벨리에처럼 뛰어난 정신력을 가진 이들이 어째서 악마의 상태이상에 걸려있던 것인지 말이야.

‘대대로 내려져 오는 상태이상이었던 거야.’

말 그대로 ‘저주’였다.

이내, 완전히 사라진 율라 시무아르드의 흔적.

나는 떠오르던 메시지의 끝을 붙잡았다.

─율라 시무아르드에 빙의한 악마를 처치하고 저주의 계약을 파기하라. (성공)

[조건을 충족하셨습니다.]

[보상이 지급됩니다.]

……보상?

반가우면서도 낯선 메시지였다.

클래스 퀘스트를 포함.

악마 사냥꾼 관련 퀘스트를 진행하면서 보상다운 보상을 받았던 게 손에 꼽을 정도였으니까.

물론, 꾸준하게 상승하는 스탯만 하더라도 어마어마한 보상이긴 했다만.

‘거악을 잡아도, 마왕을 잡아도 말이야.’

고생했다는 말 한마디 없었던 메시지였으니까.

물론,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이건 어디까지나 악크샨이 존재하던 시절의 의뢰가 아니던가?

역시나, 기대하지 않은 덕분이었다.

[악크샨과의 관계도가 상승합니다.]

[악크샨에서 영향력이 상승합니다.]

뭔데.

이거.

일단, 실망은 크지 않았다.

……그나저나 진짜 뭔 소리냐, 이거?

[악크샨의 절멸].

클래스 퀘스트에서도 알 수 있듯.

존재 자체가 사라져 버린 악크샨이었다.

그런데 악크샨과 관계도, 영향력이 상승했다……?

모순적인 메시지가 의미심장하게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들, 긍지는 이어지는 법이다.”

나는 한마디로, 복잡한 머리를 깔끔하게 정리했다.

그래, 현시점에서 악크샨에 대한 정보를 유추하긴 무리겠지.

그럴 상황도 아니고 말이야.

어쨌거나 첫 번째 목적은 달성한 셈이다.

‘계약 파기. 시한부의 저주도 사라졌을 거야.’

균열도 아니고 아르카나 대륙.

현실에 있는 마탑의 상황을 실시간으로 파악할 순 없었지만, 믿음을 가지자. 그쪽까지 머리를 굴리기엔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이 너무 급박하다.

‘아니, 급한 걸 넘어서 절망적이지 않나?’

하늘에 걸린 악마의 눈동자.

마왕, 율라의 말에 따르면 악마들은 저걸 마안(魔眼)이라고 칭하는 모양이었다. 과연, 보는 것만으로도 용도를 알 법하다.

아득히 높은 하늘에서 아르카나 대륙의 동태를 파악하는 거겠지.

지금 눈을 부릅뜨고 나를 노려보는 것처럼.

그러나 모든 것엔 절차가 존재한다.

나는 긍지에 따라 순서를 지켰다.

“이제 그대는 편히 잠들어도 좋다.”

무엇 하나 남지 않은 허공을 향해 나는 그렇게 말했다.

율라 시무아르드, 아니 이름 모를 시무아르드가의 아득한 조상에게 건네는 말이었다.

그랑펠의 긍지가 위로하지 않고는 지나칠 수 없다는 거겠지. 악마에게 빙의 당했다고 한들, 자신의 육체로 자신의 후손을 해치는 꼴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그녀를.

나의 뻣뻣한 인사가 심심한 위로라도 됐다는 것일까.

스스스─

찰나지만, 나니아 호수에 잔물결이 일었다.

나는 그제야 고개를 치켜들었다.

하늘을 바라봤다.

“내 시선을 치켜들게 한 것까지. 처분에 반영하겠다.”

항상.

언제나처럼 오만하게 말을 이었다.

근데 지껄인 말과는 별개로 진짜 암울하다.

‘마왕 압살의 효과가 있었던 게 신기할 정도인데.’

고작 마왕 셋을 짓밟았다고.

기세가 누그러진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아르카나 대륙의 야경은 마경(魔景), 그 자체.

번뜩─

숙면에 방해라도 됐다는 것인가?

기껏해야 수십 개에 불과하던 마안이 점차 늘어나기 시작했다.

수십에서 수백으로.

아니, 이제는 숫자를 헤아리기조차 힘들 정도로 가득하다.

[스킬, ‘천적관계’가 발동됩니다.]

상승한 레벨.

덕분에 날카로워진 악마 사냥꾼의 감각.

넓은 감지 반경으로 몰려드는 악마들의 기척이 느껴졌다.

대체 목청이 얼마나 컸던 거냐.

새삼스럽게 원망스러울 정도의 물량이다.

밤하늘도 모자라서 땅끝까지 목소리가 닿은 건가, 진심.

비유나 과장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아르카나 대륙의 모든 악마가 나를 주시하는 감각이다.

그걸 넘어서 최후의 악마 사냥꾼.

최후의 천적인 나를 죽이기 위해서.

몰려들고 있다는 게 느껴진다.

나는 짧게 소감을 뱉었다.

“절체절명.”

나는 일단, 현재 상태를 확인했다.

율라 시무아르드, 녀석과의 전투에서 소모한 마력은 대략 30퍼센트.

마왕, 플라우로스와 악룡을 쓰러트리기 전이었다면.

지금쯤 마력 탈진에 호수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을지도 몰랐겠지.

‘1포인트 차이는 갈수록 커진다.’

거기에다 세계수의 축복 버프까지 활성화된 상태니까.

그래도 정말 성장했구나, 호열아.

그러나 자화자찬할 여유는 없다.

남은 마력은 7할.

‘떡칠한 마력 재생력 아이템을 고려해도…….’

내게 몰려드는 악마에게 맞설 정도의 마력은 아니었다. 아니, 마르셀로. 반신, 세니오스나 카림제바가 와도 그건 불가능하지 않을까.

“어림잡아 수백만.”

이것만큼은 허세가 아니다.

당장 육안으로 보이기 시작하는 악마들만 하더라도 세어볼 엄두가 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각오하고 있던 바였다. 아르카나 대륙으로 진입을 결심했을 때부터 말이야.

“허나, 큰 위기는 곧 큰 기회인 법이다.”

아르카나 대륙.

모든 악(惡)이 나를 주시하고 있다.

천적, 악크샨의 생존자, 최후의 악마 사냥꾼인 나를.

그러나 나는 물러나지 않았다.

하찮은 하급 악마, 임프의 앞에서도.

악마들의 왕, 마왕의 앞에서도.

거악, 그리고 하늘에 떠오른 마안의 아래서도.

나는 언제나처럼 바로 섰다.

그래, 이 꼿꼿한 자세야말로 항상.

가라앉지 않기 위해서 발버둥 치던 나였으니까.

그러니까 나는 발버둥, 만반의 준비대로 움직였다.

“오거라. 오늘만큼은 어울려 주마.”

만반의 준비라고 해도 별거 있나.

그냥 죽을 때까지 악마를 사냥하는 거지.

그래, 그게 그랑펠의 긍지는 물론.

나, 이호열의 생각과도 일치하는 결론이었다. 그야 경험치와 레벨이 그랑펠에겐 숫자에 불과할지 몰라도, 내게는 더없이 중요한 수치들이었으니까……!

‘잊지 말자, 사망 페널티.’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 아르카나의 사망 페널티는 악명이 높기로 유명했다. [최후의 모험가] 칭호 효과에서 알 수 있듯, 24시간 동안 아르카나에 접속할 수 없는 건 물론.

추가로 하락하는 경험치도 장난이 아니었으니까.

그러니까.

‘이 고생을 했는데 본전은 남겨야 할 거 아니야.’

사망 페널티를 만회할 수 있도록.

최대한 많은 악마를 사냥하고 사망하겠노라.

그것이 나의 본심이었다.

속내는 몰라도 간만에 결론이 맞아서 다행이군.

덕분일까.

행동에 머뭇거림은 없었다.

챙─

나는 허리춤에서 검을 치켜들었다.

생사의 전장에서 더욱더 선명해지는 검기(劍氣).

말했다시피 어차피 죽어야만 하는 전장이다.

경험치는 물론, 검기부터 본전을 남길 수 있는 건 전부 꺼내 들어야 한다.

“그대 또한 비로소 이빨을 세울 적을 만났군.”

……맙소사.

진짜, 누구 보는 눈이 없어서 다행이다.

이젠 혼잣말도 아니고 아이템에게 말을 거는 경지라니. 그래도 잊지 않아서 다행이다. 나는 마력으로 허공에 이빨, [사악한 지룡의 송곳니]를 띄워 올렸다.

그리고 전장을 응시했다.

쿠궁─

쿠구궁─

엄청난 진동.

그동안 현실에서, 균열에서 봐온 악마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무엇보다 거대하다.

마왕이 아니면서도 그에 버금가는 악기(惡氣)를 내뿜는 짐승형 악마족 몬스터들. 직면하니까 납득이 된다.

어째서 아르카나 대륙이 저항다운 저항을 하지 못하고 무너졌는지가 말이야.

“걸음에 교양이라곤 눈곱만큼도 보이지 않는군.”

교양을 떠나서 말도 통하지 않게 생겼다, 저건.

하지만.

나는 오히려 대군을 향해 나아갔다.

“더 이상의 소란은 내가 허락하지 않겠다.”

호수 인근, 시무아르드 저택.

저택 안에는 시무아르드의 사용인들이 있다.

기나긴 상태이상에서 벗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태.

상황을 파악하기에도 바쁘겠지.

그들을 전투에 휘말리게 할 순 없다.

단거리 텔레포트 연속 발현.

호수로부터 거리를 벌렸다.

과연, 목적은 오로지 나 하나라는 것인가.

데구르르─

마안들의 동공이 굴러가더니 금세 나를 포착했다.

보자, 호수 위가 아니니까.

이제부터는 불필요하게 소모되는 마력도 없겠다…….

정말 전면전을 치러야 할 순간이 왔다.

[현재 저장된 속성 마법의 수 : 31개]

백색의 겉날개, 저장된 속성 마법의 개수는 대략 서른 개.

전부 발현해 봤자 몇 마리 쓰러트리지도 못하겠는데.

그렇다면 [『기이』]로 승부하는 수밖에 없다.

[심미 : 中]

복사, 붙여 넣기처럼.

복잡한 간섭 과정을 단순화할 수 있는 효과.

심미의 마력 효율엔 마탑의 선임 마법사들조차 놀라움을 금치 못할 정도. 그래, 나는 그런 심미를 더한 [『기이』]를 내가 가진 최강의 무기에 발현했다.

[사악한 지룡의 송곳니]

[등급 : 유니크]

[제한 : Lv.800]

[효과 : 없음]

[설명 : 용이 되지 못한 지룡의 송곳니로 만든 검. 지룡의 태생적 한계로 특별한 효과는 가지고 있지 않지만, 그 파괴력은 어떤 무기와 비교해도 뒤처지지 않는다.]

지지지지직─

물고 물리는 속성 마법과 다르게.

파괴력 하나로 승부하는 순수마력학.

나는 순수마력학 선임, 뱅그릿의 마법을 떠올려 발현했다.

순수한 마력이 허공을 부유하던 지룡의 송곳니를 휘감았다.

그 순간, [심미]의 효과 발동.

[『기이』]의 발현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건, 살아있는 듯 꿈틀거리는 마력의 용(龍)이었다.

마력의 잔량은 70퍼센트에 불과.

물론, 내 모든 마력을 쏟아부어도 ‘깨워선 안 될 존재’만큼 거대한 크기로 발현하는 건 무리였겠지만.

저기 보이는 짐승형 악마와 견줄 정도의 크기는 됐다.

나는 이빨을 드러낸 용의 목줄을 놓았다.

“마음껏 날뛰거라.”

파지지직─!

파괴력 더하기 파괴력.

[『기이』]까지 더해진 지금, 그 상승효과는 단순한 더하기 이상이었다.

뻗어 나간 마력의 용이 훑고 지나간 자리에 악마는 남아있지 않았다.

급이 떨어지는 악마는 순수마력의 파괴력에, 버텨낸 녀석들에겐 지룡의 송곳니가 파고들었다.

쉴 새 없이 메시지가 떠올랐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물론, 태평하게 감탄할 여유는 없다.

이로써 마력은 탈진 직전까지 사용한 상황.

당분간, 더 이상의 마법 발현은 불가능해졌다.

그러나 괜찮다.

나는 마법사가 아니니까.

나는 누구보다 너희가 두려워한 천적.

악마 사냥꾼이니까.

오른손에는 검을 쥐고, 왼손은 인벤토리를 향해 뻗었다.

그런 내가 꺼내 든 건 다름 아닌 석궁.

[전설적인 암살자의 석궁]

[등급 : 유니크]

[제한 : Lv.300]

[효과 : 공격 시, 상대에게 높은 확률로 상태이상 ‘출혈’ 발동.]

[설명 : 전설적인 암살자가 애용하던 오래된 석궁. 사용자의 기운이 깃들어 격이 상승했다.]

경매장에서 구매한 아이템이 아니었다.

이정도 아이템이면 경매장에 등록되는 일도 없겠지.

레벨 제한도 그렇고, 등급도 그렇고.

원거리 클래스 플레이어라면 누구나 군침을 흘릴 아이템일 테니까.

그랬다.

이건 그림자 용병단의 2석, 울프 사카린에게서 받은 석궁이었다. 그와의 인연을 거슬러 올라가자면 마왕 압살 직후, 첫 만남까지 거슬러 올라가야겠지.

-“함께 이런 위업을 달성해서 영광입니다. 경.”

어째 키치보다 더욱 단장 같은 면이 있었던 그였다.

만반의 준비 과정에서 울프와는 또 한 번 대화를 나눴었다.

-“……물론, 사격이 제 전문이긴 하지만 그런 곳에 흥미가 있으셨습니까? 슬슬 다른 의미로 경이 두려워지는……. 아닙니다. 제가 아는 선에서 도움을 드리겠습니다.”

살 구멍을 하나 더 파두기 위해서 말이지.

태생적으로 단출한 악마 사냥꾼의 스킬창이었거늘.

마력이 바닥난 상태에선 몇 안 되는 스킬도 아쉬운 법이다.

《Skill》

은 마스터리 (91%)

사격 마스터리 (78%)

스킬 숙련도와 별개로.

울프는 감탄을 금치 못했었다.

-“이렇게 먼 거리에서 모두 적중이라니……!”

-“이 정도면 제가 딱히 가르쳐 드릴 게 없는 듯싶습니다.”

-“혹시 괜찮으시다면 받아주시겠습니까?”

-“대단한 게 아니라 제가 미숙하던 시절 사용하던 석궁입니다. 그렇다고 남에게 팔기도 뭣하고, 어떻게 해야 하나 곤란하던 차에 좋은 주인을 찾은 것 같습니다.”

하르콘이나 마티스보다는 덜했지만 역시나 격한 반응이었었지. 멋진 거, 좋은 거라면 다 때려 박은 그 시절의 설정 덕을 또 한 번 본 것이었다.

철컥─

나는 울프의 석궁에 볼트를 장전했다.

당연하게도 촉이 은으로 된 은제 볼트였다.

과거, 은 화살 하나에 쩔쩔매던 내가 아니란 말이다.

청렴결백하다고 돈이 없다는 뜻은 또 아니니까.

오히려 돈을 대수롭지 않게 쓰는 것을 경계해야 할 정도로.

지갑 사정에 걱정은 없었으니까.

“다투지 말거라. 나눠주기에 부족함은 없을 테니.”

볼트가 바닥날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다.

나는 전투 자세를 취했다.

“……!”

빈틈 하나 보이지 않는 라이언 하트 기사의 자세.

달려들던 악마들이 찰나의 순간, 멈칫했다.

그 틈을 타 석궁을 연달아 발사했다.

푹─

한 손으로 재장전까지는 무리.

푹─

그러나 실시간으로 재생되는 소량의 마력이 있다.

푹─

거창한 마법을 발현하긴 무리지만 장전 정도는 가능하다.

사격의 위력은 민첩 스탯에 비례한다.

[천적관계]로 전투력이 상승했다고 하더라도.

동레벨의 궁수 클래스 플레이어들과 비교하면 파괴력이 떨어지는 게 당연하겠지.

그러나 내겐 [은 마스터리]가 있다.

[천적관계]과 더불어.

대악마전 최고의 효율을 지닌 스킬 말이야.

그 숙련도 또한 극한에 가까워지고 있단 말이다.

“끄아아아아악!!”

“죽이겠다, 죽여버리겠다!”

“인간 주제에!”

제아무리 상급 악마라고 하더라도 치명타, 비틀거리게 할 수 있을 정도는 된다는 것. 나는 틈을 놓치지 않았다. 악마들 사이로 쇄도해서 검기를 발산했다.

스와아악─!

빌어먹을.

사방, 시야 모든 곳이 악마다.

내가 진짜 소드 마스터도 아니고.

모든 공격을 회피할 순 없는 게 당연하다.

옆구리.

뺨.

등.

허벅지.

육체 곳곳에서 통증이 느껴진다.

몬스터한테 맞는다는 게 이런 기분이었구나.

젠장, 남태민과 레오니 같은 근접 클래스 플레이어들이 존경스러워지는데. 그러나 속내와 마찬가지로 고통 또한 티를 낼 수 없다.

격통에도 구부러지지 않는 자세.

그랑펠의 긍지란 그런 것이었으니까.

물론, 나 이호열에게 악으로 깡으로 모든 걸 온전히 견뎌낼 생각은 죽어도 없다. 그걸 위해 착용해 온 아이템들이 있단 말이다.

[정순한 에메랄드 반지].

피격 시, 생명력 회복 효과.

[숭고한 약속의 목걸이]

마찬가지로 피격 시, ‘중급 보호’ 효과 발동.

구질구질하다고?

어쩔 수 없다.

이 순간만큼은 최후의 최후까지 구질구질해야 한다.

끝까지, 최대한 많은 악마를 붙들어 두고 있어야만 한다.

그래야만 화려한 피날레를 장식할 수 있을 테니까.

……내가 아까 뭐라고 그랬더라.

시간의 흐름 따위 내겐 상관없다고 했었나.

그 말이 현실이 된 것 같은 느낌이다.

주마등.

극한의 극한.

모든 것이 느리게 보이기 시작했다.

죽음을 각오하고 뛰어든 전장.

덕분일까.

“……!”

육체의 감각이 한 꺼풀, 눈을 뜬 듯한 느낌이 들었다.

착각이 아니었다.

바닥나는 생명력과 반대로.

언제부터인가.

검기는 더욱 선명해지고 있었으니까.

‘……검기가 아닌 검강(劍罡)이다.’

하르콘의 검이 그랬던 것처럼 짙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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