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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141화 (73/489)
  • ◈ 141화. 화려하게 (1)

    [퀘스트 : 시무아르드 가문의 의뢰]

    마도 가문 시무아르드.

    그들은 자신들에게 내려진 시한부의 저주.

    그 저주의 근원을 파헤치길 원한다.

    ─시무아르드 저택을 방문하라. (성공)

    ─시무아르드 백작 부인과 마주하라. (성공)

    ─율라 시무아르드에 빙의한 악마를 처치하고 저주의 계약을 파기하라. (진행 중)

    갱신된 퀘스트 목표.

    이 순간을 위해서 만반의 준비를 한 나다.

    펄럭거리는 [백색의 겉날개]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벼락 맞은 나뭇가지 완드]까지.

    [명품-벼락 맞은 나뭇가지 완드]

    [등급 : 유니크]

    [제한 : Lv.380]

    [효과 : 속성 마법 발현 시, 마력 소모량이 30퍼센트 증가하는 대신 그 파괴력이 30퍼센트 상승.]

    효과는 양날의 검.

    가뜩이나 마력 소모량이 극심한 속성 마법이다. 겉날개에 저장된 일백 개의 속성 마법을 쏟아냈다간 마력 탈진에 시달릴 게 뻔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악마에게 뒤덮인 아르카나 대륙.

    생지옥 속에서 더욱더 드높아지는 그랑펠의 긍지.

    『어쩌면 악마가 가장 경계해야 할 건 악마 사냥꾼이란 그랑펠의 클래스가 아니라 그랑펠이란 인간,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그랬다.

    내게 있어서 아르카나 대륙은 오히려 홈그라운드나 다름없었으니까. 상급 악마가 됐든, 마왕이 됐든. 목숨을 걸고 한 녀석쯤 쓰러트리는 건 무리가 아니란 말이다.

    그런데.

    [첫 세계수가 당신의 존재를 알아차렸습니다.]

    [첫 세계수가 당신을 축복합니다.]

    [생명력과 마력 재생력이 대폭 상승합니다.]

    ……이건 나도 예상하지 못했는데?

    내가 마력을 발산하기 무섭게 세계수의 축복이 발동된 것이었다. 당연하게도 이건 만반의 준비가 아니었다. 그저 예기치 못한 행운에 불과할 뿐.

    [행운 : 7]

    과연, 귀중한 1포인트를 행운에 투자한 보람이 있구나……! 그나저나 세계수, 이름값처럼 효과가 장난이 아니다. 당장만 하더라도 적잖은 마력을 소모하고 있는데.

    ‘마력이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지 않아.’

    비약초 버프 효과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는 수준.

    웬만한 마도구, 아이템도 이정도의 효과는 낼 수 없겠지.

    그런 세계수의 축복은 내 자신감의 근거가 됐다.

    한 발자국─

    호수.

    나는 마법을 발현, 수면 위를 걸었다.

    마력에 쪼들릴 때엔 상상도 못 할 짓이다.

    그러나 [천적관계]도 모자라 세계수 버프가 더해진 지금.

    이 정도 수준의 마법 발현은 마력량에 조금도 영향을 주지 않았다.

    그러니까 흔치 않은 기회가 온 만큼 조금 걸어보자.

    그래, 물 위를 걷는 게 이런 기분이었구만.

    하지만 악마와의 거리는 좁혀지지 않았다.

    “……!”

    내가 한 발자국 다가가면.

    녀석이 한 발자국 물러났기 때문이었다.

    구마의식은 이미 발동된 상황.

    의식 속.

    나와 녀석 사이의 정신력 싸움은 아까부터 시작된 것이나 다름없겠지. 그러나 걱정할 건 없다. 그랑펠의 드높은 긍지가 악마 앞에서 꺾인다고?

    나의 흑역사를 우습게 여기지 마라.

    있을 수 없는 일이란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니까.

    “……보고만 있을 것인가? 마계여!!”

    문득, 녀석이 하늘을 향해 소리쳤다.

    “마왕이여, 거악이여! 그가, 녀석이 우리를 찾아왔다!”

    아주 그냥 동네방네 소문을 내는구나.

    보다시피 놀란 기색이 역력하군.

    하긴 놀랠만도 하다.

    ‘내 존재를 어느 정도 알고 있는 게 당연해.’

    악마 사냥꾼에게 사냥당한 악마는 존재 자체가 사라져 다시는 부활할 수 없었으니까.

    거악과 마왕들의 존재가 사라졌다는 걸.

    악마들도 나름대로 눈치를 채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내가 아르카나 대륙에 나타날 줄은 생각도 못 했을걸.’

    악마의 상식이 어떨진 모르겠다만.

    상식적으로 누가 생각이나 하겠냐고.

    최후의 악마 사냥꾼이 악마로 가득한 아르카나 대륙에 제 발로, 그것도 단신으로 쳐들어오리라고 말이야.

    당사자인 나조차도 며칠 전까지만 하더라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었거든.

    고오오─

    그러나 예정에 있었든, 없었든.

    다른 것도 아니고 마르셀로의 목숨이 걸린 일이었다.

    그랑펠의 긍지는 물론.

    내가 수석의 업무에 파묻혀 과로사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나는 아르카나 대륙에 진입할 수밖에 없었겠지.

    “두 번 말하게 하지 말거라.”

    냉랭한 선언.

    그와 동시에.

    쩌저저적─!

    순식간에 빙결되어 가는 호수.

    나는 녀석을, 사냥감을 향해 말했다.

    “내가 네게 허락한 말은 시무아르드가를 향한 사죄밖에 없다.”

    [『기이』], 절대영도 발현.

    “……!!”

    녀석의 얼굴이 그대로 얼어붙었다.

    .

    .

    .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걷잡을 수 없는 한기가 엄습한다.

    이대로는 안 된다……!

    “큿!”

    율라는 빠르게 판단했다.

    푸확─!

    한기가 전신을 타고 오를 수 없도록.

    살갗 아래 감춰뒀던 손톱을 꺼내 자신의 발목을 잘라버렸다.

    육체는 재생이 된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손으로 자신의 발목을 자르게 될 줄이야.

    율라가 가쁘게 심호흡했다.

    ‘……이게 구마의식이란 말인가?’

    율라는 성전(聖戰)에 직접적으로 참전하지 않았다.

    우둔한 마왕, 악마들과 같은 취급을 받기는 싫었으니까.

    그저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악크샨의 최후를 감상했다.

    그보다 좋은 볼거리가 없지 않겠는가?

    인간 주제에.

    악마를 업신여기던 악크샨의 악마 사냥꾼들.

    녀석들이 아군에게 배반을 당하고, 되려 악마들에게 사냥당하는 꼴이라니.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황홀한 광경일 것 같았으니까. 그러나 성전의 전개는 율라의 예상과 달랐다.

    -“빌어먹을 새끼들이……!!”

    아군에게 배신당하고, 악마, 마왕, 거악에게 포위를 당한 위기 속에서도. 악크샨은 끝까지 악마를 사냥했다.

    압도적인 머릿수의 차이에도 불구. 자신들에게 승산 따윈 없는 걸 알면서도.

    그들은 최후의 최후까지 꺾이지 않았었다.

    그 결과.

    악크샨은 십여 마왕을 처치했다.

    그것도 모자라서.

    -“이대로 죽을 순 없다. 이럴 바엔 차라리……!!”

    거악, 칠죄종 탐욕을 자결하게 만들었다.

    악마 사냥꾼 손에 죽었다간 존재 자체가 지워지게 됐으니까.

    그래, 악마 사냥꾼.

    그들은 거악조차 공포에 질려 자결하게 만들 정도의 존재들이었다.

    -“그러나 이제 우리를 막을 수 있는 건 없다.”

    그런 천적, 악크샨의 절멸.

    다른 악마들과 마찬가지로 율라는 가슴을 쓸어내렸었다. 더 나아가 성전에 참전하지 않았던 자신의 판단에 또 한 번 감탄했다.

    하지만 그 판단이 부메랑이 되어서 되돌아올 줄이야.

    ‘어째서. 어째서 다른 게 보이지 않는 것이냐?’

    마왕의 공석을 차지하는 것도 모자라.

    서열전을 우려할 필요가 없을 정도의 힘을 가지게 됐지만, 율라에겐 경험이 부족했다. 더 나아가 천적, 악마 사냥꾼과 마주한 경험은 전무했다.

    그런 율라의 시야?

    어둠 속에서 보이는 것은 오직 호열.

    정확하게는 호열‘들’뿐이었다.

    호수 위라는 특수한 공간.

    똑바로 선 호열.

    거꾸로 선 호열.

    율리의 정신을 더욱 거세게 흔들었다.

    율라는 정신을 다잡았다.

    그동안의 고생을 떠올렸다.

    ‘참고 참고 또 참아왔다.’

    이제 와서 이렇게 허무하게 사라질 순 없단 말이다.

    율라는 다시금 소리쳤다.

    “보아라. 악마들이여. 이곳에 악마 사냥꾼이 있다. 방치한다면 우리를 파멸로 몰고 갈 존재가 이곳에 있단 말이다!!”

    모든 것은 환각에 불과하다.

    마안(魔眼)이 보이지 않는다고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어둠 속에 녀석만 존재하는 게 아니다.

    나는 그저 착각하고 있는 것뿐이다.

    율라는 머리를 굴린 끝에 생각해 냈다.

    ‘……그래, 시간을 끌자.’

    아무리 천적이라고 해도 녀석은 인간에 불과하다.

    인간의 마음을 가지고 노는 것?

    자신에겐 더없이 쉬운 일이었다.

    율라가 입을 열었다.

    “우습구나, 악마 사냥꾼이여. 이제 와서 성전의 복수라도 하겠다는 것이냐? 악크샨, 너의 동료들이 처참하게 죽어나갈 때. 너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단 말이냐?”

    최후의 악마 사냥꾼.

    저 녀석과 악크샨 사이에 무슨 사연이 있는지 알 수도 없고 관심도 없다. 그러나 나약한 인간이라면 흔들릴 수밖에 없겠지. 율라는 말을 덧붙였다.

    “네놈 정도 되는 악마 사냥꾼이 있었더라면 성전의 결과는 달라질 수도 있었겠지. 그러나 너는 그 자리에 없었다. 그 결과가 어떠한가? 수십의 마왕을 척살하고, 거악을 자결로 몰고 갔지만 악크샨은 결국 패배했다. 전멸했다!”

    나약한 인간이라면.

    죄책감을 느낄 수밖에 없겠지.

    그렇다면 정신력도 흔들릴 수밖에 없을 터.

    ‘그 틈을 노린다.’

    그러나 바람이 무색하게도.

    돌아온 것은 여느 때와 다를 것 없는 목소리.

    “몇 번을 좋게 타일러도 조금도 발전이 없다니.”

    “……뭣?”

    “과연, 짐승과 비교하기에도 짐승에게 미안해지는구나.”

    ……대체 어떻게?

    녀석에게선 일말의 동요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수고를 덜어줬으니 어울려 주겠다.”

    저 오만한 시선은 무엇이란 말이냐?

    오히려 자신을 내리깔아 보고 있지 않은가?

    게다가 수고를 덜어줬다니?

    그러니 나와 어울려 주겠다니.

    이유를 물을 새도 없이 사내는 말을 이었다.

    “악크샨을 동정하는 것은 그들의 긍지에 대한 모독이다.”

    “동정하는 것이 모독이라고? 웃기지 마라!”

    “또한 그들의 희생을 가엾이, 또 가벼이 여기는 짓이다.”

    “……!”

    흔들림 없는 눈빛.

    진심이다.

    녀석은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천적.

    어째서 악마 사냥꾼, 그들이 악마의 천적이라 불리는지를 알 것 같았다.

    놈들의 사고방식은 나약한 인간의 것이 아니다. 저 사고방식은 고장 나도 단단히 고장 난 게 분명하다.

    천적이 말을 끝마쳤다.

    “추악함에 익사할 시간이다.”

    .

    .

    .

    ……그러니까 어떤 심정으로 성전(聖戰)을 들먹인 건지는 짐작하겠는데 말이지. 그게 나한테 효과가 있겠냐? 현생을 사느라, 10년이 훌쩍 넘는 아르카나 공백기를 가진 나한테 말이야.

    그래도 성전에 관한 정보는 상당히 고마운데?

    덕분에 머릿속에 남아있던 의문 하나가 풀렸으니까.

    왜, 거악 칠죄종 탐욕에게서 느꼈던 위화감.

    거악이나 되면서 구마의식을 모르는 게 말이 되나, 싶었던 거.

    칠죄종, 탐욕이 자결한 거라면 말이 된다.

    어딘가 모르게 어리숙한 악마의 냄새가 났던 것도.

    마왕, 데카라비아와 레벨이 비슷하던 것도.

    악마는 성장형 몬스터.

    거악도 예외는 아닐 테니까.

    탐욕이 자결했다가 부활한 것이라면 앞뒤가 맞는다.

    그런 의미에선 안도와 경악, 두 가지 마음이 공존하는군.

    새로 태어나자마자 650레벨이라니.

    그렇다면 원래 탐욕은 대체 몇 레벨이었다는 거야?

    그리고 그런 거악을 어떻게 자결하게 만든 걸까, 악크샨은.

    ‘……동정할 게 아니라 칭찬해도 부족하잖아.’

    마탑과 여신교단을 포함, 아직 밝히지 못한 세력들이 악크샨을 배반했다. 악크샨은 그런 불합리한 성전에서 탐욕을 자결하게 만들 정도로 몰아붙였다는 소리였으니까.

    그러니까 나는 진심으로 말할 수 있었다.

    “악크샨을 동정하는 것은 그들의 긍지에 대한 모독이다.”

    주고받음도 끝났겠다, 나는 경악하는 녀석을 향해 완드를 겨눴다. 구마의식에 허우적거리는 녀석에게 일백의 마법을 버텨낼 재간은 없겠지. 장담할 수 있었다.

    녀석과 달리 나한테는 경험이 있었으니까.

    “끝이다. 하찮은 악마여.”

    무거운 긍지에 가라앉아 익사하지 않기 위해서.

    있는 힘, 없는 힘을 다해 발버둥을 치면서.

    적정 레벨의 몇 배나 되는 거악, 마왕과 싸워온 나란 말이다.

    [中]급에 다다른 [심미]의 효과.

    속성 마법의 기폭제로 활용하기 위해 흩뿌려 둔 『라이트』가 찬란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마치 밤하늘에서 자취를 감춘 아르카나의 별을 대신하려는 것처럼.

    화려하게.

    별 하나하나가 겉날개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법에 감응한다. 순수한 마력 구체가 속성 마법의 기폭제가 되어 저장된 마법의 파괴력을 극한으로 끌어올린다.

    말 그대로 백 가지의 색(百色).

    헤아리기도 힘들 정도의 속성 마법이 호수 위에 펼쳐졌다.

    약간 불꽃놀이 같기도 하고.

    호수가 빛을 반사하는 탓일까.

    최소 배는 더 장관이다, 이거.

    “비로소 아르카나의 밤하늘 같군.”

    오죽했으면 그랑펠의 심미안조차 흡족하게 여기고 있을까.

    그러나 장담할 수 있었다.

    구마의식에 빠진 녀석에겐 이보다 더한 공포도 없겠지.

    그 추측을 뒷받침하듯 녀석이 비명을 질렀다.

    “아아아아!! 이대로, 이대로 죽을 순 없단 말이다!!”

    마지막 발광인가.

    녀석의 몸에서 악의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허공에서 일렁이던 악기가 문양의 형태로 변해갔다.

    “마르셀로……. 녀석의 수명만 거머쥔다면 나는……!!”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럴 일은 없다.

    나는 냉랭하게 선언했다.

    “기대하지 않았거늘. 정도를 지나치는구나.”

    “……!”

    “더 이상 듣고 싶지 않다. 다물어라.”

    흑마법, 『흑관』.

    정신이 무너진 녀석이 중급 흑마법에 저항할 수 없을 터.

    증명하듯 메시지가 떠올랐다.

    [마왕, 율라에게 ‘침묵’이 발생합니다.]

    그런 녀석에게 별이 쏟아졌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어지럽게 떠오르는 메시지도 잠깐.

    나는 시선을 느꼈다.

    구마의식이 끝나고 나서야 비로소 마왕의 죽음을 알아차린 것인가?

    밤하늘에 떠있는 거대한 악마의 눈들이 일순간, 나를 노려다 봤다.

    그와 동시에 [천적관계]가 반응했다.

    수백.

    아니, 수천.

    수만.

    근방의 있는 모든 악마들이 나를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그래, 당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겠지.

    [최후의 모험가] 효과가 없었다면 말이야.

    그러나 이 또한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러니까 말했잖아.

    그렇게 고래고래 떠들어 준 덕분에 수고를 덜었다고.

    나는 시선을 옮겼다.

    밤하늘의 마안(魔眼)에서 나의 뒷‘배’로.

    [비행 기계성, 아이언 캐슬 호 : 명령 대기 중]

    [비행 기계성, 아이언 캐슬 호 : 공격 대기 중]

    진짜 불꽃놀이를 시작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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