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140화 (72/489)
  • ◈ 140화. 아르카나 (2)

    시간은 촉박했지만, 그래도 준비는 철저하게 끝마쳤다.

    긍지에 짓눌려 아르카나 대륙에서 객사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그중 하나가 드워프들과 합을 맞추는 것이었다.

    -“크신 뜻을 알아들었습니다.”

    시기를 조율한 건 역시나 뻔뻔…….

    아니, 믿음직한 하이엘이었다.

    누굴 닮아서 일 처리는 확실하니까.

    절차에 어긋남은 없었다.

    그나저나, 이런 메시지까진 미처 생각하지 못했었는데.

    [멸망을 향해가는, 아르카나 대륙에 진입하셨습니다.]

    진입 알림 아래.

    연달아 떠올랐던 메시지들.

    [조건을 충족하셨습니다.]

    [보상이 지급됩니다.]

    일단, 첫 두 줄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퀘스트 관련 메시지다.

    클래스 퀘스트를 포함.

    현재 수행 중인 퀘스트는 여러 개였지만 보상이 지급될 퀘스트는 하나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마왕, 플라우로스 vs 드워프].

    백만의 공적치를 쌓았던 그 전쟁 퀘스트가 분명하다.

    어떠냐, 정답 맞지?

    [해당 세력과의 ‘맹약’이 유효합니다.]

    [해당 세력과의 관계도가 이미 최대치입니다.]

    [해당 세력에서의 영향력이 이미 최대치입니다.]

    과연, 정답이다.

    우쭐댈 새도 없이 메시지를 살폈다.

    해당 세력은 당연하게도 드워프.

    맹약은 악크샨과 드워프 사이의 맹약일 터.

    여기까진 짐작했던 메시지였다.

    그래서 그 대신 어떤 보상을 주는 걸까.

    남 몰래 김칫국까지 마셨었단 말이다.

    그런데.

    [비행 기계성, 아이언 캐슬 호에 대한 지휘권을 획득하셨습니다.]

    ……이건 잔뜩 부푼 기대를 능가하는 보상이었다.

    몇 차례, 지휘권을 획득해 본 나였다.

    그러니까 호들갑을 떨 수밖에 없었다.

    ‘내가, 드워프의 결전병기를 지휘할 수 있다고?’

    나, 이호열에게도 양심이 있다.

    아무리 최후의 악마 사냥꾼이라고 한들.

    알지도 못했던 악크샨의 맹약을 우려먹을 정도로 철면피는 아니다, 내가.

    기껏해야 드워프제 무기나 방어구 하나 정도.

    보상으로 기대했던 나였거늘.

    이런 보상을 쥐여주면 나의 양심이 흔들린단 말이다……!

    드워프들이 누구던가.

    마탑과 방향성은 다르지만 마탑에 버금갈 정도의 기술력을 보유한 이들. 그 기술력의 집약체인 ‘아이언 캐슬’. 하늘을 나는 배가, 내 뒷배가 되어준다는 뜻이다.

    ‘진짜 다 덤벼.’

    악마고, 몬스터고.

    [천적관계]가 발동되고 말고를 떠나서.

    악천후만 아니라면 아이언 캐슬 호를 막을 수 있는 건 없지 않을까? 왜, 지금만 하더라도 일당백 이상.

    땅부터 하늘까지. 악마로 가득한 아르카나 대륙에서도 유유히 비행 중인 아이언 캐슬 호였으니까.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이 피곤한 성격.

    빌어먹을 청렴결백을.

    ‘긍지에 어긋나게 활용할 순 없겠지.’

    이 올곧다 못해서 뻣뻣한 성격이.

    ‘맹약’과 관련되지 않은 일에 아이언 캐슬 호를 써먹을 수 있을 리가.

    그러나 오늘, 이 순간만큼은 괜찮다.

    ‘결국, 목적은 악마 사냥이니까.’

    이 또한 성전(聖戰)의 연장선과도 같았으니.

    “자, 도착했습니다.”

    부지런히 머리를 굴리는 도중.

    드디어 저택의 입구에 다다랐다.

    역시나 스케일이 크군.

    제국, 수도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위치에 이런 대저택이라니.

    마르셀로, 굉장히 잘사는 집 도련님이었구나?

    쥐뿔도 없는 우리 그랑펠이랑은 다르게 말이야.

    “정원 관리가 철저하군.”

    “하하. 저희의 노고를 알아봐 주시다니 영광입니다. 시무아르드가를 위해서. 저, 세오를 비롯한 사용인들은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나, 이호열.

    그랑펠의 긍지에 시달리며 매일같이 대청소를 했다.

    주부 습진에 걸리는 게 아닐까, 걱정하던 무렵.

    깨달은 게 하나 있다.

    ‘집안일을 제대로 하는 건 보통 일이 아니라는 걸 말이야.’

    원룸에 집무실 정리정돈만 해도 그렇게 귀찮았는데.

    이런 저택을 관리하는 사용인들의 수고를.

    내가 또 그냥 넘어갈 수가 없다.

    “그대들의 긍지를 내가 알았다.”

    “이런, 과찬이십니다.”

    내 말에 기분이 좋아진 걸까.

    세오의 시선이 호숫가를 향했다.

    “나니아 호수의 풍경 또한 정원 못지않게 아름답습니다. 손님께서 괜찮으시다면, 호수의 풍경이 잘 보이는 객실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아름다운 호수의 풍경이라.

    그러니까 하늘에서 끔뻑거리는 악마의 동공이 비치는, 저 호수 말하는 거지? 아무것도 몰랐더라면 흠칫했겠지. 나랑 같은 걸 보고 있는 게 맞나, 싶어서.

    ‘상태이상, 환각.’

    하지만 그 이유를 알고 있다.

    그 원흉이 악마라는 것 또한 알고 있다.

    세오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단 말이다.

    “그렇군.”

    그런 나의 입에서 튀어나온 건 적당한 대답이었다.

    그와 동시에.

    세오가 저택의 문에 손을 얹었다.

    “그럼 시무아르드가를 방문하신 걸 환영합니다.”

    끼기기긱─!

    문이 열리자 악마의 기운이 느껴졌다.

    악마 사냥꾼이 아니더라도 멈칫할 수밖에 없겠는데?

    일단, 저택 내부가 지나치게 어둡잖아.

    불빛 하나를 찾기가 힘들다.

    활동에 무리가 있을 정도로.

    “수고가 많군요. 엠마 양.”

    “아, 집사장님. 곁에 계신 분은……?”

    “손님이십니다. 식사 자리를 하나 더 마련해 주세요.”

    그러나 세오를 비롯한 사용인들은 자각하지 못하는 눈치.

    역시나 상태이상이라면 이상하지 않은 일이겠지.

    악마의 뱃속.

    직접 들어와서 그 풍경을 확인하니 살짝 우려가 된다.

    ‘최소 상급 악마.’

    마도 가문 하나를 통째로 집어삼킨 녀석이었다.

    벨리에는 물론, 마르셀로 또한 상태이상에 빠진 상태란 걸 감안하면……. 상급이 뭐냐, 마왕급은 되겠는데? 진짜 [최후의 모험가] 효과가 아니었으면 엄두도 못 냈을 짓을 했구나, 나는.

    그러나 깨달았다고 한들.

    나의 당당한 태도에 변함은 없었으니.

    나는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환대에 감사하네.”

    “아닙니다. 곧 가주님께서 내려오실 시간이니…….”

    세오가 안내하듯 손짓했다.

    “괜찮으시다면 먼저 착석하시겠습니까?”

    그의 권유에 따라서.

    나는 식탁에 착석했다.

    가지런히 놓여가는 식기들.

    어둠 속에서도 격식에 어긋남 없이 움직이는 사용인들. 악마의 아가리로, 제 발로 걸어 들어온 이런 상황에 이런 말을 하기는 뭣하지만…….

    어째서냐.

    나는 이 순간 심히 흡족하다.

    아니, 흡족한 것을 넘어서 마음이 편안할 정도다.

    『위대한 가문의 후계자로 태어나 풍요로움의 끝을 맛보았던 그…….』

    그래, 그놈의 설정 때문이겠지!

    그 탓에 현대인이라면 낯설어야 마땅할 중세풍 저택을.

    무슨 우리 집 안방처럼 편안하다고 느끼고 있는 거야.

    식기를 내려놓을 때도 달그락, 소리를 내는 법이 없다.

    작은 꼬투리 하나 그냥 넘어가지 못하는 내 주둥이가 가만히 있는 걸 보면……. 시무아르드가의 사용인들에겐 정말로 무엇 하나 흠잡을 곳이 없다는 말이겠지.

    물론.

    [스킬, ‘천적관계’가 발동됩니다.]

    그쪽은 제외고.

    위층에서 느껴지는 기척.

    시무아르드 가문을 집어삼킨.

    시한부 저주의 원흉.

    악마가 다가오고 있었다.

    녀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손님께 저택 소개는 해주셨나요, 세오?”

    “자세한 사항은 식사가 끝난 뒤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그래요. 그대가 편하실 대로 하세요.”

    나의 존재를 알고 있었군.

    하긴 세오가 마중을 나온 것부터 내 접근을 알아차렸단 소리겠지.

    허나, 내가 악마 사냥꾼이라곤 상상도 못 할 거다.

    [구마의식]을 발동하기 전까지는 말이지.

    이내, 식탁에 가까워진 그림자.

    시무아르드 백작 부인.

    악마가 나를 향해 인사를 건네왔다.

    “이런, 소개가 늦었군요. 율라 시무아르드입니다. 본의 아니게 시무아르드 가문의 가주 역할을 맡고 있답니다. 그런데……. 낯선 의복을 걸치고 계시는군요?”

    낯선 의복이라 하면.

    나에게선 빼놓을 수 없는 정장을 말하는 거다.

    그래, 현실에서도 이상한 눈초리를 받는 게 내 차림이다.

    아르카나 대륙에서야 말할 것도 없겠지.

    그러나 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이유?

    간단하다.

    나는 사냥감과 불필요한 대화는 하지 않는다.

    “……?”

    침묵─

    갑작스런 정적을 사용인들도 알아차린 것인가.

    잔을 채우는 손이 잠시 멈칫했다.

    그러나 노블레스 오블리주.

    사용인들의 노고엔 또 감사해야 하니까.

    “고맙네.”

    나는 침묵이 무색하게도 인사를 건넸다.

    “……아, 아닙니다.”

    부인의 물음에는 대답하지 않고는 자신에겐 감사하다니.

    사용인은 당황한 눈치였지만, 한번 터진 입이 가만히 있을 리가.

    척─

    나는 잔을 들어 올린 뒤 허공에 휘저었다.

    찰랑찰랑.

    오묘한 붉은빛을 내뿜는 포도주.

    내 평생 와인이라곤 몇 번 마셔본 적도 없었거늘.

    나는 뻔뻔하게도 지껄였다.

    “묵직하면서 끈적임 없는 향이군.”

    포도 주스 냄새와 무엇이 다른지 나는 모른다.

    “모자라지도 과하지도 않은 숙성 기간.”

    당연하게도 이게 몇 년 산 와인인지도 모른다.

    “만찬에 더없이 적합한 포도주로군.”

    ……소믈리에야, 뭐야.

    내가 뱉은 말이지만 의심이 될 수밖에 없다. 고작, 하나에 몇백 원짜리 녹차 티백을 마시면서도 온갖 미사여구를 덧붙이는 나였으니까.

    나는 잔을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마시지 않아도 훌륭하리라는 것을 알겠네.”

    “……가, 감사합니다.”

    사용인은 물론, 이번엔 집사장 세오까지 당황한 기색이다.

    정작 중요한 말은 무시한 채 재잘재잘 떠들어 댄 나였으니까.

    그런 내게 다시금 율라 시무아르드.

    아니, 악마의 질문이 날아왔다.

    “……포도주에 대한 지식에 상당히 해박하시군요. 혹시나 남부에서 오시는 길이신가요?”

    그러나 이번에도 대꾸하지 않는다.

    말했잖아?

    노블레스 오블리주.

    나는 그저 마르셀로의 시무아르드 가문을 섬기는 사용인들을 위해서. ‘절차’를 지킬 뿐이라고. 그러니까 열등한 족속 주제에 선을 넘지 말라는 말이다.

    다시금 흐르는 냉랭한 침묵─

    나는 내 앞에 음식이 나오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훌륭한 원물에 걸맞은 조리 방식이로군.”

    그나저나 음주는 하지 않아도 식사는 할 필요가 있다.

    ‘왜, 먹고 죽은 귀신이 때깔도…….’

    아니지, 같은 말을 해도 순화해서 하자.

    격한 활동 전후.

    단백질 섭취는 선택이 아닌 필수인 법이니까.

    .

    .

    .

    시무아르드 가문.

    대모(大母), 율라 시무아르드.

    그녀가 언제부터 시무아르드 가문의 어머니를 자처했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는 이는 없다.

    심지어는 가문의 구성원들조차도.

    그러나 율라를 의심하는 자 또한 없었다.

    시무아르드 가문의 대를 내려오며 새겨진 상태이상.

    ‘악마의 저주’란 그런 것이었으니까.

    창 너머로, 율라는 호수에 비친 밤하늘을 바라봤다.

    “황홀한 경치야.”

    마계에서만 보던 풍경이 아르카나 대륙에도 펼쳐질 줄이야.

    과연, 수십 년을 하찮은 인간의 몸에서 썩은 보람이 있었다.

    “앞으로도 지금처럼 유유자적하게.”

    율라에게 섣불리 나설 생각 따윈 없었다.

    아둔한 마왕들이나 가엾은 거악, 탐욕처럼 지옥에 처박히고 싶은 생각은 없었으니까. 어리석은 그들과 달리 자신은 나서지 않아도 힘을 키우는 방법을 알고 있었으니까.

    “너도 머지않았구나, 마르셀로.”

    인간은 어리석다.

    그것이 마법사라 불리는, 인간 중에서는 그나마 영특한 이들이라고 해도 예외가 아니다.

    수명을 담보로 재능을 개화시켜 주는 거래라니.

    “신도 아니고. 그런 게 가능하겠어?”

    속임수였다.

    거래가 진실이며 정말로 효과가 있다고 믿게 하는 상태이상 덕분이었다. 알량한 자신감과 수명을 맞바꾸다니. 율라는 웃음을 흘렸다.

    “나약한 인간. 뭐, 덕분에 나는 이렇게 성장했지만.”

    율라는 알고 있었다.

    제물의 양만큼 중요한 게 질이라는 것을.

    그런 의미에서 시무아르드 가문의 핏줄은 최상급의 제물이었다.

    그 제물 중에서도 마르셀로 시무아르드, 녀석은 황홀할 정도의 먹잇감.

    ‘그의 수명을 거두어들인다면 나는……!’

    비로소.

    마왕의 서열을 뒤바꿀 힘을 거머쥐게 되겠지.

    인간의 살가죽을 뒤집어쓰고 있는 짓 또한 관둬도 될 터.

    그간의 세월에 비하면 찰나에 가까운 시간만 남았을 뿐이었거늘.

    “운 좋게도 유희거리가 굴러들어 오는구나.”

    가주를 연기하면서 손님을 맞이하는 이유?

    말한 것처럼 단순한 유희였다.

    공포에 질린 인간을 바라보는 건 언제나 즐거운 일이었으니까.

    그래서 하찮은 수족을 부렸다.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서.

    그리고 지금이었다.

    ‘……무엇이냐?’

    율라는 위화감에 휩싸인 상태였다.

    은발, 사내의 반응이 더없이 이질적이었다.

    자고로 평범한 인간이라면 자신이 모습을 드러내기 전.

    이미 공포, 그게 아니더라도.

    동요하는 기색 정도는 보여야 했다.

    어둠에 파묻힌 저택. 그런 저택에 위화감을 느끼지 못하는 수족들. 거기에서 오는 분위기에 압도당하는 게 인간에게 어울리는 반응이란 말이다.

    그런데 이런 저택에서 저렇게 자연스럽게 행동하다니?

    ‘낯선 차림새야.’

    율라는 머리를 굴렸다.

    현재 아르카나 대륙은 마계 지각 변동으로 뒤틀린 상태.

    지각 변동의 여파로 먼 지역에서 떠밀려 온 사내일까?

    그래서 상황파악조차 하지 못하는 건가.

    사내의 심정을 떠보기 위해서 율라는 말을 걸었다.

    “……낯선 의복을 걸치고 계시는군요?”

    ……허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내 말을 듣지 못한 건가, 싶었거늘.

    그런 것도 아니었다.

    “!”

    무시였다.

    “묵직하면서 끈적임 없는 향.”

    “모자라지도 과하지도 않은 숙성 기간.”

    “만찬에 더없이 적합한 포도주로군.”

    놈은 건방지도록 꼿꼿한 자세로 잔을 흔들며 지껄이고 있었으니까.

    그것도 한 번이 아니었다.

    하찮은 종놈들과는 잘만 대화를 나누면서.

    자신의 말은 노골적으로 무시하고 있었다.

    마치 자신과는 말조차 섞지 않겠다는 것처럼.

    ‘감히 인간 따위가. 나를.’

    순간, 분노가 치밀어 올랐지만.

    율라는 억눌렀다.

    ‘오히려 잘됐어.’

    저런 인간을 망가뜨리는 건 오랜만이었다.

    그런 의미에선 오히려 흥미가 생겼다.

    저 오만한 얼굴이 어떻게 구겨지고 무너질지를 상상하면.

    “내 자리는 치워도 좋아요. 엠마.”

    율라는 식기를 내려두고 사내를 바라봤다.

    이번엔 노골적으로 악기를 발산했다.

    평범한 인간이라면 버틸 수 없는 수준으로.

    그러나 사내는 기어코 접시를 말끔히 비워냈다.

    “세오, 주방장에게 훌륭한 식사였다고 전해줄 수 있겠나?”

    심지어는 인사까지 잊지 않았다.

    ‘……대체?’

    위화감은 점점 커져갔다.

    율라 또한 언제까지고 감정을 숨길 순 없었다.

    자신의 불편한 심기를 알아차린 것일까?

    “저희는 잠시 자리를 비켜드리겠습니다.”

    하찮은 수족들이 모두 물러갔다.

    더 이상 연기는 필요 없겠지.

    율라가 입을 떼려던 순간이었다.

    “연기는 끝났다.”

    오히려 냉랭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와 동시에 고개를 들어 자신을 바라보는 은발의 사내.

    뿜어댔던 악기가 무색하게도.

    “……!”

    사내의 눈빛에선 일말의 흔들림조차 보이지 않았다.

    “적합한 장소로 옮기도록 하지, 열등한 족속이여.”

    ……열등한 족속이라고?

    말의 뜻을 헤아리기도 전에.

    율라의 시야가 바뀌었다.

    “!!!”

    마도 가문에 있었기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건 마법, 포탈이었다.

    그러니까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한순간도 방심하지 않았는데……?!’

    그런데 어느 틈에 포탈을 발현한 거지?

    율라는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봤다.

    다행히도 익숙한 장소, 저택 인근의 나니아 호수 위였다.

    그런데…….

    그 황홀했던 경치가 뒤바뀌어 있었다.

    밤하늘의 마안(魔眼)이 비추고 있어야 할 수면.

    그러나 그 위에 떠오른 것은 오직 은발의 사내뿐.

    “……마안이 사라졌어?”

    아니, 그럴 리가 없다.

    설령 마안이 눈을 감았다고 한들, 호수에 비치는 게 사내 하나뿐이라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내가 환상을 보고 있다는 말인가……?

    “설마?”

    그와 동시에 율라는 알아차렸다.

    그것은 직감.

    천적의 앞에 놓인, 잊고 있던 사냥감으로의 본능.

    “……악마 사냥꾼!!”

    그러나 돌아온 건 긍정도 부정도 아닌 질문이었다.

    “할 말은 끝났는가? 추악한 악마여.”

    냉랭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 시간부로 네가 뱉을 수 있는 말은 시무아르드가를 향한 사죄밖에 없을 테니까.”

    “……!!”

    이내, 사내에게서 솟구치는 마력.

    율라는 그제야 제대로 알아차렸다.

    ……놈이다!

    저 녀석이 바로.

    하나의 거악과 넷의 마왕을 지옥으로 보낸 악크샨의 생존자다.

    .

    .

    .

    [첫 세계수가 당신의 존재를 알아차렸습니다.]

    [첫 세계수가 당신을 축복합니다.]

    [생명력과 마력 재생력이 대폭 상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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