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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137화 (69/489)

◈ 137화. 나를 믿어라 (1)

[최후의 모험가 : 아르카나 대륙에서 사망하지 않습니다. 사망 시, 즉시 현실로 귀환하며 일정 시간 동안 아르카나 대륙에 접근할 수 없습니다. - 쿨타임 : 24시간]

[세계수의 씨앗] 퀘스트 성공.

보상으로 개방됐던 칭호 시스템이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무려 월드 퀘스트의 보상이지만, 효과를 처음 확인했을 땐 계륵도 이런 계륵이 있나 싶었는데……. 어떻게 그 효과를 써먹을 날이 오긴 오는구나.

‘물론, [만물과 통하는 지도]가 유효할 때의 이야기지만.’

어느 정도 가능하다는 확신은 있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에픽 등급 아이템, 마왕의 전리품이니까.

무엇보다 [깨진 차원의 틈]에서 목격했던 광경이 근거였다.

[???]

이름 모를 악마도 맨손으로 균열에 진입했었는데.

마왕의 전리품을 제물로 바치는데.

그 정도는 가능해야 수지타산이 맞겠지.

“시간은 누구도 기다려 주지 않는다.”

그래.

간만에 말 한번 잘했다, 호열아.

시간은 제한되어 있었다.

‘마르셀로가 한계에 다다른 상태.’

아르나카 대륙 땅을 밟는다라…….

내 생각보다 이른 감이 없지 않아 있긴 하다만.

절대 미룰 수 없는 일이라는 거겠지.

그러니까 내게 필요한 건 짧은 시간, 만반의 준비였다.

이른바 초심으로 돌아가 발버둥을 쳐야 한다는 거지.

그런 내가 준비할 건 간단했다.

“그대의 출탑 신청서는 보류다.”

우선, 절차에 따라서 수석의 업무를 마무리하는 것.

하여튼 이놈의 격식과 절차……!

이럴 시간이 있나, 싶었지만.

내가 하지 않으면 마르셀로가 떠맡게 될 게 뻔한 일이다.

숱한 사회 경험에서 깨닫지 않았던가?

남이 떠넘긴 일을 처리할 때보다 스트레스 받는 게 또 없거든.

되려 마르셀로의 수명을 깎아먹는 일이 될 수 있다는 거지.

“유감이군. 벨리에 유시아 선임.”

벨리에의 출탑 신청서를 제쳐둔 이유?

간단하다.

아르카나 대륙엔 나 혼자 갈 수밖에 없었으니까.

‘생지옥이 따로 없겠지.’

결전병기 퀴른베르크 기계탑이 가동되고, 새로운 세계수의 씨앗이 부화하고, 마왕 압살로 악마들의 활동이 뜸해졌다 하더라도. 아르카나 대륙은 이미 악마 소굴이나 다름없었다.

‘마탑의 선임이라고 해도 위험한 장소다.’

마탑이 통째로 옮겨가는 거라면 또 모를까.

“열등한 족속의 영역이라. 당장이라도 짓밟아 주고 싶구나.”

항상.

평소처럼 지껄이는 나의 주둥이.

[최후의 모험가] 칭호의 효과가 없었다면 정말 엄두조차 내지 못할 정도로 무모한 행동이었겠지.

설령 선임 마법사들의 능력이 내 상상 이상이라서 벨리에에게 악마 따윈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한들.

‘돌아올 방법이 없어.’

아이템에 명시된 효과.

거기엔 여러 명이 순간이동할 수 있다는 말도.

또 다시 돌아올 수 있는 방법도 적혀 있지 않았으니까.

게다가 순간이동 효과가 발동되는 순간, [만물과 통하는 지도]는 모든 효과를 상실한다.

이번만큼은 빽을 아니, 보험을 들고 싶어도 불가능하단 뜻이다.

어쨌든, 만반의 준비를 시작하자.

‘일단, 청렴결백이고 뭐고…….’

닥치는 대로 본전을 뽑아야 한다!

그랑펠은 몰라도, 아직 무소유 정신을 깨닫지 못한 나는 [만물과 통하는 지도]를 최대한 써먹지 못하면 억울해 돌아가실 것 같았으니까.

‘물론, 어디까지나 최우선 목적은.’

[퀘스트 : 시무아르드 가문의 의뢰].

퀘스트에 성공하는 것.

그를 통해 마르셀로의 시한부 저주를 해주하는 것이다.

가능한 일인가.

우려는 되지 않았다.

나는 이 성격을, 그랑펠의 심오하고도 복잡한 긍지를.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으니까.

[위대한 가문의 후계자였으나 악마에게 그 가문이 몰락.

가문의 유일한 생존자인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 이하 그랑펠은 그 악마에게 복수하기 위해 악마 사냥꾼의 길을 걷게 됐다.]

마탑의 희생은 세니오스, 그 하나로 충분하다.

그랑펠의 긍지가 고조되는 것이 느껴졌으니까.

그러니까 내가 할 일은 언제나와 같았다.

“두뇌 회전에 앞서 간단한 몸풀기는 도움이 되는 법이지.”

─나약해진 육체를 단련하라. (반복) ▲

●35KM 달리기 (성공)

●팔굽혀펴기 2,500회 (진행 중)

●턱걸이 1,500회 (성공)

●버피 테스트 700회 (성공)

자, 발버둥 시작이다.

*

부유 정원.

흑색과 녹색.

어울리지 않는 한 쌍이 테이블에 마주 앉아 있었다.

먼저 입을 연 건 녹색 머리칼, 벨리에였다.

“제 출탑 신청은 보류 처리되었더군요.”

잘근─

벨리에는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스스로도 출탑 목적이 적합하지 못하다는 것쯤은 자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호열 수석이라면 사태의 심각성을 이해해 주실 줄 알았다.

“……해주 방법 따위 모르니까요. 구체적인 목적을 제시할 수 있을 리가 있나요.”

시무아르드가(家) 시한부의 저주.

해주가 목적이었지만.

저주의 정체가 무엇인지도 알지 못하는 게 당연하다.

그러나 자책할 거리조차 되지 못했다.

시무아르드가라고 시도해 보지 않았을까.

그럼에도 벗어날 수 없던 시한부의 저주였으니까.

“그대의 책임이 아닙니다. 벨리에 선임.”

흑마도학의 창시자, 마티스.

일부 지역에선 마법이 아닌 저주라고도 불렸던 게 정립 이전의 흑마법이었다.

덕분에 마티스 또한 시무아르드가 시한부의 저주에 관해 들어본 적이 있었다.

그걸 넘어서 마탑에 입성하기 전, 시무아르드의 혈육과 대면한 적도 있었다.

“그건 마법도 흑마법도 아니었습니다.”

적합한 마력에 감응하는 마도구.

마티스는 반지를 매만졌다.

그때 반지의 색은 변하지 않았었다.

그 저주가 흑마법이 아니란 증거였다.

“얼굴만 봐도 알 수 있어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겠죠.”

“벨리에 선임의 치유 마법이라면…….”

“제 치유 마법이요?”

절레절레─

벨리에는 고개를 저었다.

“그저 숨이 붙어있게 하는 것 정도는 가능할지도 모르죠. 하지만 근본적인 문제, 시한부의 저주를 해결하지 않는 이상. 그건 강령술과 다를 바 없을 거예요.”

마티스는 찻잔을 바라봤다.

차는 식어버린 지 오래.

잔잔한 찻잔의 수면이 야속하게만 느껴졌다.

“?”

그 순간.

문득, 들려오는 코웃음 치는 소리.

마티스가 고개를 들어 올리자 벨리에가 웃고 있었다.

더없이 쓴 표정으로.

“바보 같아요, 그는. 사실 새삼스러운 것도 아니죠. 마르셀로는 유년 시절부터 한결같았으니까. 곁에서 지켜보면 짜증 날 정도로 미련했어요. 그는.”

“마르셀로 수석께서 무서울 정도로 미련하시다니……?”

“마티스 선임께서는 시무아르드가의 연례행사가 무엇인지 알고 계시나요?”

“글쎄요. 연례행사라고 하면…….”

매년 벌어지는 일일 터.

마도 가문에서 매년 벌어지는 일이라면…….

고민하던 마티스에게 벨리에가 말을 덧붙였다.

“추도식.”

“……!”

“시무아르드 가문에선 해마다 혈육들이 사망하니까요.”

“이런.”

간과하고 말았다.

시한부의 저주는 예외가 없는 혈족 단위의 저주.

해마다 저주의 희생자가 나오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겠지.

마티스가 의아함에 물었다.

“그런데 그것과 미련함이 무슨 연관이 있는 겁니까?”

“저는 그가 슬퍼하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

“……!”

“어린 시절부터 그와 관련된 기억만큼은 하나도 빠짐없이 선명하게 남아있는데 말이죠.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을 때에도, 가깝게 지내던 이들이 세상을 떠났을 때에도. 마르셀로는 단 한 번도 눈물을 보인 적이 없었으니까요.”

벨리에는 과묵하던 마르셀로가 싫었다.

언젠가 다가올 자신의 차례를 얌전히 기다리는 착한 아이 같아서.

벨리에가 다시금 코웃음을 쳤다.

“보세요. 지금도 마찬가지잖아요. 그런 몸으로 무슨 회의를 하겠다는 건지.”

크리스탈 홀.

마르셀로는 원탁회의를 진행 중이었다.

그러는 둘은 어째서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느냐고 묻는다면.

쇠약해진 마르셀로의 모습을 차마 볼 수 없을 것 같았으니까.

‘우려가 되는군.’

마티스는 입안이 말라왔다.

결국, 어떠한 방법도 없단 말인가?

그가 텁텁한 마음에 찻잔에 손을 뻗으려던 순간이었다.

“……?”

또르르─

잔잔한 찻잔 속에 파문이 일었다.

찻잔이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점차 커지는 진동.

진동의 근원이 가까워졌다.

“벨리에 님!”

치유학파 숙련 마법사, 클레.

우다다─

다급하게 달려오던 클레가 흠칫했다.

마티스 선임과 대화를 나누고 계셨을 줄이야.

“대화 중에 끼어들어서 죄송합니다……!”

“사과할 것 없네.”

“이야기는 끝난 참이었어요. 괜찮답니다, 클레. 무슨 용건이죠?”

“아, 그게!”

치유학파 내부에 급한 사정이라도 생긴 걸까.

남의 사정을 귀담아듣는 건 좋지 않지.

마티스가 슬슬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찰나.

“아무래도 크리스탈 홀, 원탁회의에 관해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원탁회의?

원탁회의는 현재도 한창 진행 중일 터.

벨리에가 궁금한 마음에 물었다.

“계속 이야기하세요, 클레.”

흐읍.

가쁜 숨을 고르고.

이내, 클레가 말을 이었다.

“……뭐라고요?”

그런데 그게 상상도 못 한 말이었다.

“……이호열 수석께서 아르카나 대륙에 진입하신다고요?”

벨리에와 마티스.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마주 봤다.

어떻게 아르카나 대륙에 진입한다는 것일까.

그 방법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이유는 짐작해 볼 수 있었다.

“설마, 이 수석께서 보류 판정을 내리신 이유가…….”

마르셀로와 관련되어 있는 걸까?

짐작만 할 때가 아니었다.

세 사람이 다급히 크리스탈 홀로 향했다.

.

.

.

원탁회의.

나는 크리스탈 홀, 마법사들 앞에서 선언했다.

“나는 아르카나 대륙에 진입할 생각이네.”

아주 당당하게 말이지.

마탑을 지켜야 하는 수석의 자리다.

그런데 개인사정으로 자리를 비우게 됐으니.

마탑, 모든 일원에게 양해를 구하는 것이 적절한 절차.

그랬다.

모든 건 격식과 절차를 중시하는 그랑펠의 긍지 탓에 벌어진 일이었다. 다만, 이 말을 굳이 원탁회의에서 할 필요가 있었을까?

‘연차 쓴다고 사원들 앞에서 자랑하는 꼴이잖아. 이거.’

양피지로 주고받아도 충분했거늘.

게다가 난 아직 [만물과 통하는 지도]의 효과가 유효한지도 확인하지 못했단 말이다. 이러다가 아르카나 대륙으로 순간이동할 수 없게 된다면?

‘정말, 그때의 뒷수습은 상상하기도 싫군.’

그러나 속내가 드러나는 법은 없었다.

“자리를 비우는 시간은 길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출탑 신청을 비롯한 나와 관련된 요청들은 며칠 동안 자제해 주면 좋겠군. 그대들의 양해를 바란다.”

……양해를 바란다니.

그랑펠, 너 이런 말도 할 줄 알았구나?

철들었네, 이거.

새삼스럽게 감탄하기도 잠깐.

나는 흐르는 침묵 속에서 깨달았다.

‘……잠깐, 나의 위치를 잊고 있었다.’

문득, 떠오르는 과거.

부장이 사원들에게 양해를 바란다고 말할 땐 분명 지랄맞은 이유가 뒤따랐었지. 그러나 빌어먹을 계급 사회. 까라면 깔 수밖에 없었던 그 경험.

이건 말로만 양해를 구하고 있었지, 사실상 일방적인 선언에 불과했다.

그래, 내가 웬일이냐 싶었다. 긍지 빼면 시체, 꼰대 같은 성격에 양해란 단어를 뱉을 수 있을 리가…….

“그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이 수석님.”

정적을 깬 건 마르셀로였다.

그래도 계급장이 같다는 건가.

마르셀로는 의문이 남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

“자리를 비우신 기간 동안 업무는 제가 대신…….”

아니, 그래선 내가 아르카나 대륙을 찾는 이유가 없어진다.

“거절하지.”

“……네? 거절하신다니.”

“다시 한번 말하겠다. 나의 공석은 누구도 대신할 수 없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말이야.

입이 삐뚤어져도 이렇게까지 삐뚤어질 수 있을까, 싶다.

그냥 복귀해서 처리하겠다는 말을.

이렇게 거창하고 까칠하게 뱉어내다니.

그래도 덕분에 내 의사는 확실하게 전달된 모양이었다.

“알아들었습니다.”

마르셀로의 대답에 다시금 흐르는 정적─

그러나 침묵은 오래가지 않았다. 새로운 원탁회의가 시작되고 악마의 존재를, 아르카나 대륙의 현황에 대해 알게 됐던 마탑이었으니까.

웅성웅성─

애써 귀를 기울이지 않아도 들려오는 소리들.

“……어떻게 아르카나 대륙에 진입하신다는 거야?”

“뭔가 새로운 방법을 발견하신 건가?”

“근데 그게 가능하다고 해도 너무 위험하잖아!”

세계수조차 위협을 느껴 새로이 씨앗을 뿌릴 정도.

절멸의 위기를 맞이한 아르카나 대륙.

나는 그런 생지옥에 진입하겠다고 말한 것이었으니까.

우려를 보내오는 것이 당연하다.

“아무리 이호열 수석님이라고 하셔도…….”

소란 속에서 누군가 손을 들어 올렸다.

익숙한 얼굴이군.

순수마력학 선임 뱅그릿 톰이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격식을 갖췄군.

역시 뭐든 한번 배울 때 엄하게 배우는 게 효과적이다.

나도 모르게 흡족해서 고개를 끄덕이자 뱅그릿이 말했다.

“수석님의 능력을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혼자서 괜찮으시겠습니까? 누구보다 수석님이 잘 알고 계시겠지만 아르카나 대륙은 현재…….”

뱅그릿의 질문에 내게 시선이 집중됐다.

끼익─

심지어는 뒤늦게 크리스탈 홀에 입장한 마티스와 벨리에의 시선까지도. 정말 혼자 아르카나 대륙에 진입한다는 건가. 간이 배 밖으로 나온 건가.

각자 생각들 하는 거겠지.

“말했듯 나는 단신으로 아르카나 대륙에 진입한다.”

그러나 그런 나를 불쌍하게 쳐다볼 필요는 또 없다.

그랑펠 말로는 ‘안배’라고나 할까.

내가 이래 봬도 말이야.

‘아르카나 대륙에 든든한 지원군들이 조금 있거든.’

하이엘. 그리고 어둠의 정령.

아르카나의 상공에 날고 있을 드워프들의 비행정.

마지막으로.

악크샨의 결전병기, 퀴른베르크 기계탑까지.

[결전병기 퀴른베르크 기계탑에 경험치가 축적됩니다.]

[결전병기 퀴른베르크 기계탑에 명성이 축적됩니다.]

[축적된 경험치와 명성에 대한 습득 권한을 획득합니다.]

퀴른베르크 기계탑에 축적됐을 경험치와 명성도 잊고 있지 않았단 말이다.

그러니까 아르카나 대륙에 진입할 땐 고독해도, 진입해서는 혼자가 아니었단 뜻이었다.

그러나 이놈의 말버릇.

구체적인 상황을 설명할 정도로 친절하지 않았으니.

“그러나 그대들이 걱정할 건 없다.”

나는 단호하게 덧붙이는 게 전부였다.

“나를 믿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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