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5화. 악룡 사냥꾼
[이름 :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
[칭호 : 최후의 모험가]
[클래스 : 악마 사냥꾼]
[레벨: 440]
[능력치]
근력 : 71 / 민첩 : 76 / 마력 : 387 / 행운 : 6 / 심미 : 下
[보유 포인트 : 15]
15레벨 상승.
400레벨대에 진입한 뒤 극적인 레벨 업은 없었거늘.
그래도 압도적인 경험치 앞에서 장사는 없는 모양이다.
깨워선 안 될 존재의 레벨은 무려 900레벨.
텟퍼른 흑의 계약자는 물론.
플레이어들과 처치 기여도를 나누고도 이 정도의 경험치라니.
“내게 숫자놀음은 무의미하다.”
……지금은 우쭐댈 때가 아니라 기뻐해야 할 때 아닌가?
어쨌거나 포인트부터 투자하자.
나는 언제나처럼 마력에 포인트를 올인하려다가 멈칫했다.
‘……좀 다사다난했지?’
미신 따윈 믿지 않겠노라.
하나하나가 소중한 포인트 낭비를 하지 않겠노라.
울며 겨자 먹기처럼 행운을 외면해 오던 나였다.
그 결과가 어땠는가?
마왕이 우르르 쏟아져 나오지를 않나.
미궁인 줄 알고 들어갔더니 용족 몬스터랑 마주치질 않나.
하여튼, 긍지에 가라앉을 뻔한 게 한두 번이 아니었지.
[행운 : 7]
그래, 딱 1포인트만.
행운의 7이잖아, 보기도 좋네.
아까워하지 말자, 호열아.
정신 건강 차원에서도 이게 훨씬 나을 거야.
합리화도 잠깐, 나는 찻잔을 들었다.
달칵─
“단순히 차를 즐기는 게 아니다. 흘러가는 시간을 함께 즐기는 것이지.”
비약초로 잔뜩 도핑해 온 내가 할 말이 아니거늘.
혼잣말이기에 다행이지.
나는 퀘스트창으로 시선을 옮겼다.
[클래스 퀘스트 : 악크샨의 절멸]
[퀘스트 : 마르셀로의 연구]
[퀘스트 : 마탑의 재건]
[월드 퀘스트 : 세계수의 씨앗]
[퀘스트 : 마왕, 플라우로스 vs 드워프]
[10대 불가사의 퀘스트]
[월드 퀘스트 : 악룡(惡龍) 사냥꾼]
많기도 하네.
다른 플레이어들은 하나 수행하기도 힘들다는 퀘스트가 무려 7개나 진행 중이다. 물론, 그중 몇 개는 이미 퀘스트 목표를 달성한 상태였고.
‘완전히 끝난 퀘스트는 하나인가.’
드워프와 마왕 플라우로스의 전쟁 퀘스트.
자연스럽게 쌓아둔 공적치가 떠오른다.
보자, 어떻게 써먹을 수 있으려나?
일단, 유스라 왕국이나 프로스트 때와는 상황이 다르다.
드워프들과 나의 관계도는 이미 최대치에 다다른 수준이었으니까.
‘맹약으로 이어진 사이지.’
그러니까 다른 보상이 주어지지 않을까?
물론,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드워프들과 만나서 까보기 전까지는 모르는 일이다.
다른 퀘스트 중에서 다시 확인할 만한 건…….
역시 새로운 퀘스트겠지.
[월드 퀘스트 : 악룡(惡龍) 사냥꾼]
사악한 용의 일족을 사냥한 자여.
산맥의 전설이 그대를 부르고 있다.
─제로 산맥 최정상에 도달하라. (진행 중)
‘다른 플레이어들이 받은 퀘스트는 [드래곤의 흔적].’
내게 떠오른 퀘스트는 그 이름부터 달랐다.
유달리 높은 처치 기여도를 기록한 덕분이겠지.
그리고 당시엔 긍지에 정신이 팔려서 몰랐는데…….
[악룡 사냥꾼]은 무려 월드 퀘스트였다.
세계수의 씨앗 퀘스트에 맞먹는 퀘스트라는 거겠지.
퀘스트 내용을 보면 과연 그럴 법하다는 생각이 든다.
‘사악한 용의 일족이라.’
깨워선 안 될 존재.
역시, 나쁜 자식이었네. 그거.
내가 눈 그렇게 부릅뜰 때부터 알아봤다니깐?
“악룡에게 지나치게 친절했군.”
……그게 친절했던 건가?
어쨌든, 텟퍼른이 자신들을 희생하면서까지 녀석을 미궁에 봉인해 둔 이유가 있었다. 그나저나 퀘스트 내용만 봐도 어째 전개가 짐작되는데.
‘제로 산맥.’
아르카나 대륙의 마천루.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
광고 영상에서도 단골 출연하던 제로 산맥이었다.
말 그대로 하늘을 뚫을 것처럼 치솟은 제로 산맥.
보는 것만으로 가슴을 웅장하게 만드는 위엄이 있었지.
게다가 산맥 최정상엔 드래곤이 산다는 전설까지!
그건 플레이어라면 모를 수 없는, 가슴이 설렐 수밖에 없는 설정이었으니까.
다만, 문제는 정작 제로 산맥 최정상에 도달한 플레이어가 없다는 거겠지.
적정 레벨이 말도 안 되는 수준이었거든.
정상은커녕.
초입에서부터 나가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소리였다.
제로 산맥, 이렇게 무시무시한 곳인데 말이야.
뭐, 첫 번째 퀘스트 목표가 최정상에 도달하라고?!
이걸 깨라고 만든 게 맞냐, 진짜.
다시금 깨닫게 된다.
‘월드급’ 퀘스트가 아니라 진짜 ‘월드’ 퀘스트는 시작부터 차원이 다르다는 걸……! 물론, 같은 월드 퀘스트인 [세계수의 씨앗]을 꼼수로 깨버린 경험이 있긴 했지만.
요행은 언제까지나 요행일 뿐.
“산이 그곳에 있기에 오르는 것뿐이다.”
쓸데없이 좋아진 기억력.
어디서 주워들은 명언을 내뱉어 본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겠지.
‘균열로 떠올라야 오르든 뭐든 하는 거니까.’
허나, 틀린 말이 아니라서 더 열이 받는 때도 있는 법.
이럴 땐 내 주둥이지만 얄밉다니까?
나는 애써 찻잔을 기울이고는 아이템을 확인했다.
먼저 높은 처치 기여도로 획득한 전리품부터.
[사악한 지룡의 송곳니]
[등급 : 유니크]
[제한 : Lv.800]
[효과 : 없음]
[설명 : 용이 되지 못한 지룡의 송곳니로 만든 검. 지룡의 태생적 한계로 특별한 효과는 가지고 있지 않지만, 그 파괴력은 어떤 무기와 비교해도 뒤처지지 않는다.]
……심히 난감해지는 전리품이 아닐 수 없다.
일단, 그 레벨 제한부터 보자.
800레벨.
앞으로 마왕을 몇이나 더 사냥해야 도달할 수 있는 수치인지 알 수 없을 정도의 격차.
하지만 나도 짬밥이 있는데, 짐작하고는 있었다.
애초에 이런 상황이 하도 많았어야지. 왜, 내 레벨 대보다 훨씬 높은 악마족 몬스터를 사냥해 얻은 전리품들. 대다수가 레벨 제한이 어마어마했으니까.
문제에 이미 직면해 봤으니까.
나름대로 우물을, 살 구멍을 파놨던 나였다.
그게 바로 마법부여학이었고.
‘근데, 정작 추출할 효과가 없다니!’
청렴결백.
물질에 연연하지 않는 성품.
그게 아니었다면 정말 억울해서 징징거렸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애써 차분하게 설명을 보고 있자니 이해는 된다.
‘효과가 없는 대신 파괴력이 상당하다는 거겠지.’
시스템창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파괴력이 어떤 무기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다니까.
정말 그런 거겠지.
그런 의미에서 약 올리는 것처럼 느껴졌을지도 모르겠는데.
파괴력이 이렇게 대단한데.
레벨 제한 때문에 써보지도 못해서 어쩌나.
아니꼽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하지만 말했다시피 나는 한 우물만 파지 않았다.
검이라고 해서 굳이 착용하고 써먹을 필요는 없잖아?
나는 [사악한 지룡의 송곳니]를 인벤토리에서 꺼냈다.
그리고 마력을 끌어올렸다.
“무엇이든 활용하기 나름이다.”
검을 휘두르는 데엔 여러 방법이 있다는 말씀.
두둥실─
나는 마력으로 지룡의 송곳니를 움직였다.
물론, 파괴력은 온전히 착용했을 때보다 훨씬 떨어지겠지.
왜, 손에 쥐지 못한 검에 검기를 불어넣을 순 없었으니까.
그러나 충분하다.
“단점이 있으면 장점도 존재한다.’
『반전 마법』이 존재하는 이상.
형태 따윈 얼마든지 변형시켜도 상관없다.
쩌저적─
나는 지룡의 송곳니를 여러 조각으로 나눴다가 다시 원상태로 반전시켰다.
무려 800레벨 제한 아이템, 파괴력 하나는 어떤 무기에도 뒤지지 않는다고 했겠다…….
위력을 확인해 보고 싶어 손가락이 근질거리는군.
“때와 장소를 가릴 줄 알아야 하는 법이지.”
물론, 고풍스런 마탑의 집무실에서 소란을 피울 순 없는 노릇.
위력을 확인하는 건 다음 균열로 미뤄야겠군.
나는 미련을 접고 다음 전리품을 확인했다.
데스퀴.
플레이어에게 빙의했던 진명의 악마.
녀석을 구마의식으로 처치하며 정화한 마왕의 전리품을.
[악에 물든 일각의 지휘봉].
[피로 그려진 망각의 지도].
[악의로 불타는 눈동자].
그전에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자.
어떤 마왕의 전리품을 우선적으로 정화하는 게 옳은가?
세 개의 전리품 모두 착용 제한은 없었다.
다만, 드롭한 마왕들에겐 명백한 레벨 차이가 존재했다.
‘그런 관점에선 [악의로 불타는 눈동자]가 우선이겠지.’
그게 세 마왕 중 가장 서열이 높은 플라우로스의 전리품이었으니까. 그러나 나의 선택엔 그랑펠의 까다로운 심미적 관점이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었으니.
“중도를 지키는 것은 중요하지.”
그냥 흉측해서 손도 대기 싫었던 것뿐이거늘.
변명은 잘한다, 진짜로.
그랬다.
내가 정화한 전리품은 중도, [피로 그려진 망각의 지도]였다. 그래, 그저 순서의 차이라고 생각하자. 어차피 다른 마왕의 전리품도 정화할 거니까.
나는 진정하고 정보를 확인했다.
[만물과 통하는 지도]
[등급 : 에픽]
[제한 : 없음]
[효과 : 누군가 몰래 감춰둔, 누군가 잃어버린, 어딘가에 숨겨진 무언가의 위치를 알 수 있다. 또한 단 한 번, 무언가의 위치로 순간이동 할 수 있다.
단, 순간이동 효과 발동 시 모든 효과를 그 즉시 상실한다.]
[설명 : 사용하기에 따라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가진 마도구.]
긴 효과를 설명이 한 줄로 요약하고 있었다.
‘……진짜 무궁무진한 가능성이잖아. 이거.’
사실상 원하는 ‘무언가’의 위치를 알 수 있다는 거잖아?
순간, 머릿속을 스쳐 가는 수많은 가능성.
전설이라 여겨질 만큼 희귀한 비약초의 위치도.
원하는 아이템의 위치도 특정할 수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물론, 한계가 있긴 하다.’
현실과 아르카나 대륙은 완전히 다른 세계였으니까.
그 위치를 안다고 해도 당장 찾아 나설 순 없겠지.
물론, 단 한 번만 사용할 수 있다는 순간이동 능력을 사용한다면 가능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만.
굳이 그럴 필요는 없겠지.
“고고하게 흐르는 시간은 모든 것을 해결하곤 하지.”
일단, 위치만 알아둔 다음.
훗날, 해당 균열이 떠오를 때 행동에 돌입해도 되는 일이었으니까.
순간이동 효과까진 웬만해선 사용할 일이 없겠지.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니까…….
어째 좀 뿌듯해진다.
무엇보다 과연 마왕의 전리품이다.
‘정순한 지식의 오망성 이상으로 유용할지도 몰라.’
그런 의미에서 다른 두 전리품의 효과도 기대해볼 만하다.
그러나 김칫국 마시는 것도 거기까지.
이젠 버릇이 되어버린 빠듯한 일과가 남아있다.
그래, 점멸하던 메시지도 전부 확인했으니까.
이젠 수석의 책임을 다할 시간이라는 것이다.
일단, 출탑 신청서부터 확인하자.
달칵─
내려놓는 찻잔.
나는 꼿꼿한 자세로 하나둘 양피지를 넘기기 시작했다.
언제나처럼 깃털펜을 휘갈겼다.
“여전히 쓸데없는 출탑 목적이다.”
스스슥─!
“불합격이다. 벤쉬 윌리엄 선임 마법사.”
*
[퀘스트 : 드래곤의 흔적]
그건 [텟퍼른 미궁] 균열을 클리어했다는 훈장이나 다름없었다.
그 내용만 봐도 당장은 수행할 수 없는 퀘스트였거늘.
플레이어들에게 아쉬움은 없었다.
“솔직히 깰 수 있을 거라 생각은 안 하는데……. 왜, 기분이라는 게 있잖아. 괜히 퀘스트창 한 번씩 바라보기만 해도 배부르고 그런 거.”
“일단, 드래곤이라고 박혀있으니까. 내가 막 랭커가 된 것 같기도 하고. 그치?”
“난 그런 것보다 호열 님이랑 함께 전투했다는 거. 또 그게 영상으로 고스란히 남아있다는 게 더 좋더라고. 진짜 영상 녹화해서 가보로 대대로 물려줘야지.”
……그 영상을 가보로 남긴다고?
누군가 듣는다면.
경악을 금치 못할 대화가 오가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드래곤’이 등장한 현재.
플레이어를 비롯한 전 세계는 동향에 집중하고 있었다.
다름 아닌 플레이어 공식 랭킹 1위, 스칼의 움직임에.
445레벨, 스칼!
랭킹을 포함한 호열의 플레이어 정보는 비공개 상태.
덕분에 스칼은 단 한 번도 공식 랭킹 1위에서 내려오지 않은 상태였다.
세간이 호열의 레벨을 최소 900레벨이라 예측하고 있기에 스칼을 향한 관심은 이전보다는 줄어든 상태였지만.
“저는 지금 뉴욕에 나와 있습니다!”
말했다시피 이번만큼은 이야기가 달랐다.
센트럴 파크.
거대한 빌딩 앞에 몰려든 취재진.
세계 각국 특파원들이 카메라를 향해 열변을 토해낸다.
“그동안 신비주의를 고집하던 스칼이 모습을 드러낸 건 이례적인 일입니다.”
“대격변 이후, 스칼이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낸 건 처음입니다.”
“하지만 플레이어를 비롯한 거대 길드들의 대응은 담담합니다. 스칼의 이런 움직임을 예상하고 있었다는 반응입니다.”
플레이어라면.
스칼을 알고 있는 플레이어라면.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그래, 스칼의 클래스는 바로 기사 계열 히든 클래스.
[용기사]였으니까.
웅성웅성─
이내, 스칼이 모습을 드러냈다.
선글라스로도 감춰지지 않는 서구적인 이목구비.
그간의 신비주의가 무색하게도.
스칼은 카메라 앞에 거침없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고는 다짜고짜 기자들이 들이대는 마이크를 낚아챘다.
툭툭─
마이크를 건들고는 입을 열었다.
“아아, 용기사로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예상과 달라도 너무 다르다.
그동안 어떻게 신비주의를 고수하며 살아온 것인가?
고개가 갸웃거려질 정도로 대담한 언행.
그런 스칼의 목적은 더없이 분명해 보였다.
“떨거지들한테 용건은 없다. 이호열, 나는 그쪽과 대화를 나누고 싶다.”
“……?”
“대단하신 악룡 사냥꾼 씨.”
“……!!!”
.
.
.
한없이 깊은 어둠도 모자라서.
한없이 깊은 어둠 속 한 줄기 빛.
끝인 줄 알았더니 그걸로도 모자라서 이젠 악룡 사냥꾼?
스칼의 폭탄선언 덕분에 낯뜨거운 이명(異名) 하나가 추가된 순간이었거늘. 당사자인 호열은 마탑 집무실 책상에서 처음 자세,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 호열의 눈이 살피는 것은 출탑 신청서였다.
치유학파 선임 마법사, 벨리에 유시아의 출탑 신청서.
시선이 그 출탑 목적을 훑었다.
──────
수석 마법사, 마르셀로 시무아르드.
시무아르드 마도 가문에 전승되는 시한부의 저주.
그 해주(解呪)에 관한 연구.
──────
여느 때와 같았다.
일희일비하지 않았으며 고민 또한 길지 않았다.
호열이 자신의 집무실을 나섰다.
또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