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124화 (56/489)
  • ◈ 124화. 먹구름

    [텟퍼른 울타리]

    [적정 레벨 : Lv.450]

    균열의 정보가 떠오르고.

    플레이어들이 움직일 때만 하더라도.

    [텟퍼른 울타리]의 주인공은 천하통일.

    혹은 샤이닝이 될 것이라 예상한 이들이 많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현재 두 길드의 위상을 위협하는 신흥 세력.

    가온, 이나즈마, 버서커.

    거대 연합은 며칠째 다른 균열을 공략 중인 상태였으니까.

    “텟퍼른 울타리는 포기하지.”

    “우리도 마찬가지. 들러리가 되긴 싫다고.”

    “가이버의 회복이 우선이야.”

    다른 거대 길드들이라고 다를 건 없었다.

    괜히 천하통일과 샤이닝 사이에 꼈다가는.

    레벨업은커녕 경험치를 건지기조차 힘들 게 뻔했으니까.

    그런데.

    “이호열. 아니지, 호열 님이 왜 이런 누추한 균열에……?”

    [텟퍼른 울타리] 균열에 호열이 나타난 것이었다.

    그것도 어마어마한 정령 군단과 함께!

    뭐가 어떻게 된 건지는 몰라도…….

    넷튜버 플레이어들의 얼굴엔 화색이 돌았다.

    “미친. 뭔 상황인지는 몰라도 장난 아닌데요. 저거?”

    “아르카나에서도 한 번도 구경 못 해본 게 정령들인데!”

    “호열 님 덕분에 제대로 눈 호강 하네요.”

    호열의 등장만으로도 말로 설명할 수 없이 반가웠건만.

    그런 호열도 모자라서 정령들이라니.

    천하통일과 샤이닝의 경쟁을 능가하는 볼거리가 아닌가?

    이내, 시청자들의 채팅이 쏟아졌다.

    -ㅁㅊㅋㅋㅋㅋㅋㅋㅋ

    -다 좋은데 괜히 가까이 가서 초지지 마라 진짜 ㅡㅡ

    -ㄹㅇ 다른 플레이어는 괜찮아도 이호열은 건들지 말자

    -ㅇㅈ 존중해줘야지 우리가 얼마나 덕을 보고 있는데

    눈치로 먹고 사는 넷튜버 플레이어들이었다.

    게다가 미쳤다고.

    허락도 구하지 않고 호열에게 다가갈 간 큰 이는 없었다.

    “물론이죠. 가장 중요한 게 바로 격식 아니겠습니까?”

    더군다나 지금은 그럴만한 상황도 아니었다.

    수십의 정령 앞에서 꼿꼿하게 선 호열의 모습.

    그건 멀리서 바라보는 게 더욱 그럴싸한 그림이었으니까.

    넷튜버 플레이어들은 순수하게 감탄을 뱉어냈다.

    “……뭣 때문에 이 균열을 찾으신 걸까요?”

    “저 옆에 로브를 뒤집어쓴 분들은 역시 마탑의 마법사들이겠죠? 정령을 소환할 수 있는 건 그들밖에 없을 테니까요.”

    “호열 님 레벨에 사냥하러 오신 건 아닐 테고.”

    물론, 그와 별개로 의문은 여전했다.

    그러나 궁금증은 오래가지 않았다.

    이내, 일행과 떨어져서 움직이기 시작한 호열.

    그가 [텟퍼른 허수아비]에게 접근했으니까.

    “엥? 그냥 사냥하러 오신 걸까요?”

    향간에 떠도는 호열의 추정 레벨은 무려 900레벨.

    그에 반에 [텟퍼른 허수아비]는 겨우 450레벨에 불과했다.

    막말로 수십만 마리를 사냥해도 레벨은 오르지 않을 텐데…….

    호열은 어째서 [텟퍼른 허수아비]를 사냥하려는 걸까?

    -……시작부터 검?

    -오오, 평소랑 전투 패턴이 다르시네?

    -아아, 뭐야 그런 거였나???

    챙─

    호열이 검을 치켜들고 나서야.

    그 이유를 짐작하는 이들이 나타났다.

    넷튜버 플레이어이자 탐험가.

    “아, 그렇구나!”

    유스라 왕국.

    황금 궁전 광장 앞 모퉁이, 황금 송아지 주점.

    스크린으로 중계를 지켜보던 박휘강도 그중 하나였다.

    “텟퍼른 허수아비는 카운터형 몬스터거든요!”

    아르카나 대륙 곳곳을 누볐던 탐험가의 지식!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서 그 상대에게 가장 까다로운 타입으로 변신할 수 있는 특성을 가지고 있어요. 물론, 한 번에 한 타입으로만 변신할 수 있어서. 파티만 잘 짜서 상대한다면 그렇게 까다로운 상대는 아닌데…….”

    보다시피 호열은 혼자였다.

    물론, 레벨 격차가 어마어마하니까.

    허수아비 하나를 상대하는 데 무리는 없을 터.

    실제로 호열의 움직임엔 여유가 넘쳤다.

    꿀꺽─

    꿀렁이는 목울대.

    락키드는 맥주 통을 단숨에 비웠다.

    자리에 모인 애송이들은 알아볼 수 없어도.

    자신은 알아볼 수 있었다.

    한층 더 고고해진 호열의 검기(劍氣)를.

    그런데, 저런 검기를 구사하는 것도 모자라서.

    괴물 같은 마탑 놈들 중에서도 수석?

    반칙이잖아?

    저런 건 무규칙 콜로세움에서도 반칙이라고.

    “쳇. 멋진 거는 자기 혼자 다 하는구만. 저거.”

    락키드가 괜한 심술을 부릴 정도의 성장.

    타들어 가는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박휘강은 더욱 상기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 텟퍼른 허수아비가 떼로 몰려들면 이야기는 달라지죠. 플레이어가 어떻게 행동하든, 허수아비 중 하나는 완벽하게 플레이어의 공격을 받아칠 수 있을 테니까요!”

    말했다시피.

    텟퍼른 허수아비는 카운터형 몬스터였다.

    한 마리를 상대해야 할 때도 파티 사냥이 권장되는데.

    그런 녀석들에게 오히려 둘러싸이게 된다면?

    “레벨을 떠나서 상당히 피곤해질 수 있단 거죠.”

    아니, 호열은 이미 피곤한 상황에 빠진 것 같았다.

    어느샌가 호열의 주변으로 몰려든 텟퍼른 허수아비들.

    락키드의 입꼬리가 그제야 올라갔다.

    ‘그래. 고생도 해보시고. 그 똥폼도 좀 구겨보셔야지.’

    전투에 있어서만큼은 머리 회전이 빠른 락키드.

    박휘강의 해설을 듣고 있자니.

    제아무리 호열이라고 해도 쉽지 않겠단 견적이 나왔다.

    “멀끔한 얼굴에 얼룩 좀 묻히시겠군.”

    크하하!

    그러나 호탕하게 웃는 락키드는 모르고 있었다.

    호열이 그동안 얼마나 많은 우물을.

    살 구멍을 파놓았는지를.

    카운터형 몬스터가 잔뜩 몰려들었다 한들.

    호열이 쏟아내는.

    『마법』, [스킬], {자연} 능력의 가짓수를 넘어설 순 없다는 말.

    “저, 저런 말도 안 되는!”

    [{『기이』}]를 제외하고 고려하더라도 말이다.

    덕분에 무수한 텟퍼른 허수아비에 둘러싸여서도.

    호열에게 배어든 품위는 조금도 구겨지지 않았으니.

    -와씨 그냥 차원이 다르네ㅋㅋㅋㅋㅋ

    -뭐임? 텟퍼른 허수아비를 스파링 상대처럼 쓰는 거임??

    -ㅁㅊ 450레벨짜리를 연습 상대로 쓴다고ㅋㅋㅋㅋㅋ

    덜커덕!

    결국, 락키드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고 말았다.

    생긴 것부터 능력까지.

    “불공평한 것도 정도가 있지. 저런 재수 없는……!!”

    .

    .

    .

    ……놀라게 하는 것도 정도가 있지!

    퀴른베르크 기계탑부터.

    새로운 세계수의 등장.

    마왕 압살까지.

    모든 사건에 호열이 관련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미 충분히 놀랐다고 생각했거늘.

    아직도 놀랄 일이 남아있을 줄이야.

    화륵─

    숨구멍에서 뿜어져 나오는 불길.

    파이어 드래이크 콧방귀를 내뿜었다.

    “얼마나 놀랐으면. 배고프단 소리도 못하고 있군, 페이얀.”

    파이어 드래이크의 말이 맞았다.

    뱃속에 든 거지도 놀라서 기절한 덕분일까.

    쉴 새 없이 꼬르륵거리던 배가 잠잠했다.

    ‘그나저나…….’

    페이얀은 호열을 바라봤다.

    『마법』과 정령을 통한 {자연} 능력의 활용이야, 놀랄 일이 아니었다.

    호열은 엄연한 마탑의 수석 마법사였으니까.

    페이얀이 놀란 건 역시나 검술 때문이었다.

    ‘보는 눈이 없다고 해도 알 수 있어.’

    텟퍼른.

    아르카나 대륙 10대 불가사의 중 하나.

    탐험가 연맹조차 탐사를 끝마치지 못한 지역.

    무엇보다 등장하는 녀석들이 하나같이 기괴했다.

    텟퍼른 최외곽 울타리에 등장하는 허수아비만 하더라도.

    ‘꽤 까다로운 면이 있으니까.’

    어중간한 검술로는 텟퍼른 허수아비한테 생채기조차 입힐 수 없다는 말. 바꿔 말하자면 호열의 검술이 보통 수준이 아니란 소리였다.

    “내가 말했지? 그 소문 사실이라니까!”

    “위대한 가문, 그거?”

    “맞아!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저러실 수 있겠어?”

    ……삐약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되는 건 왜일까?

    페이얀, 본인의 생각도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이겠지.

    무엇보다 페이얀은 재능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다.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그래서 혈통이 중요하지.’

    대륙, 각 지역에서 이름을 날리는 마도 가문의 후손들.

    마탑에 입성한 마법사들 대다수가 그러했다.

    간혹가다 뱅그릿 선임처럼 예외적인 이가 있긴 했다만…….

    그 숫자는 지극히 적었다.

    ‘마르셀로 수석의 능력도 가문의 내력에서 비롯된 거니까.’

    하지만 그 혈통의 힘이란 것도 한계가 있단 말이다.

    마도 가문에서 검기를 다룰 수 있는 검사를 배출해 낼 순 없는 것처럼.

    또 그 반대의 경우도 불가능한 것처럼……!

    그 사실을 알기에.

    호열에 관한 의문은 더욱더 커질 수밖에 없었다.

    “……너무 지나치게 다재다능하지 않으신가?”

    저래선 마치 좋은 건 다 가지고 계신 것 같잖아?

    *

    ……최근 들어 귀가 자주 간지럽다.

    그러나 너그럽게 이해할 수 있다.

    다들 내가 뭔 짓을 하나 싶겠지.

    ‘900레벨? 내가?’

    하여튼 소문이 문제였다.

    당사자인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말이야.

    어느샌가 내 레벨은 최소 900레벨이 되어있었으니까.

    심히 부담스러운 과대평가.

    아니, 최근 들어서 경험치가 오르는 속도를 보면.

    저게 가능한 수치인지 의심이 들 정도의 수치였다.

    ‘물론, 내 입으로 진실을 말할 순 없다.’

    피곤한 성격 탓이라 둘러대도.

    누군가는 끈질기게 묻겠지.

    그럼 그냥 랭킹 정보를 공개하면 되는 거 아니냐고.

    그럼 나는 대답 대신 상태창을 내밀어 주리라.

    [이름 :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

    [칭호 : 최후의 모험가]

    [클래스 : 악마 사냥꾼]

    [레벨: 425]

    [능력치]

    근력 : 70 / 민첩 : 75 / 마력 : 385 / 행운 : 6 / 심미 : 下

    [보유 포인트 : 0]

    비공개 상태인 랭킹 정보를 세상에 공개하는 것?

    그래, 어려운 일이 아니다.

    아니, 오히려 좋다.

    불필요한 오해는 일찍 일찍 바로 잡는 게 서로에게 좋으니까.

    그러나 플레이어 랭킹에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란 이름이 떠올라있는 꼴은 나는 죽어도 볼 수 없단 말이다……!

    ‘진짜 쪽팔려서 죽을지도 몰라.’

    그래, 이건 그랑펠의 긍지가 아닌.

    나, 이호열의 긍지가 걸린 문제.

    ‘그럴 바엔 차라리 900레벨을 찍고 말지. 내가.’

    그 사실을 알기에.

    나는 달려드는 [텟퍼른 허수아비]를 사냥했다.

    [천적관계]는 발동되지 않은 상태.

    온전한 전력 테스트를 위해 비약초 도핑도 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검을 꺼내 들기 잘했다, 호열아.

    역시, 나사 빠진 클래스.

    악마 사냥꾼.

    ‘빠르다.’

    클래스 퀘스트를 통해 근력과 민첩 스탯을 최대한 끌어올렸건만.

    레벨업으로 획득한 포인트를 전부 마력에 투자해 온 나였다.

    [텟퍼른 허수아비 : Lv.450]

    순수하게 스탯만으론 녀석을 따라가기 벅차단 소리.

    그것도 모자라 이 녀석, 듣던 대로 상대하기 까다롭다.

    ‘카운터형 몬스터. 공격에 따라 그에 대한 내성을 갖춘다.’

    스와악─

    검기를 발산.

    공격력을 극대화한 검격을 맞고도 버텨내다니.

    “칭찬해주마.”

    잘나신 그랑펠 님께서 그렇게 평가할 정도였으니까.

    과연, 10대 불가사의 텟퍼른.

    아르카나 대륙에서도 정체가 밝혀지지 않은 미지의 지역이라고 할만하군.

    그러나 내게는 이보다 적절한 상대도 없었다.

    “막아내는 재주는 있구나. 그러나.”

    고오오─

    검격과 동시에 발현하는 마법.

    하나를 막아내면 동시에 둘을 쏟아내면 된다.

    만약, 한 마리가 더 달려든다면?

    “이 또한 막아낼 수 있겠는가.”

    거기서 하나를 더 쏟아내면 그만이거든.

    그동안 내가 파놓은 우물이 몇 갠대.

    수십 마리 정도야 [{『기이』}]를 들먹일 필요도 없단 말이다.

    ‘상대할 만하다.’

    제아무리 나사 빠진 악마 사냥꾼이라고 하더라도 절대적인 스탯의 우위가 있었다.

    나는 동레벨 대의 플레이어보다 스탯의 총합이 100포인트가량 앞섰으니까.

    ‘클래스 퀘스트, 비약초빨이라는 거지.’

    어떠냐, 나의 발버둥의 결과가.

    후두둑─

    나는 무너지는 텟퍼른 허수아비를 향해 읊조렸다.

    “몸풀기 상대론 나쁘지 않았다.”

    벅차오르는 감정과 다르게 담담하게 내뱉는 말.

    다른 사람들.

    “몸풀기 상대, 그 말씀대로였습니다.”

    또 하이엘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해도.

    내가, 스스로 알고 있다.

    정말 눈물이 앞을 가리는 발전이다, 호열아……!

    이제 적어도 동레벨 대의 몬스터 앞에서는 구질구질할 필요는 없겠구나.

    벅찬 마음 같아서는 이 성취감을 조금 더 즐기고 싶었거늘.

    뒤통수가 따가웠다.

    뒤를 돌아보니 페이얀을 비롯한 마법사들이 보였다.

    간만에 정령과 교감하라니까.

    왜 날 뚫어지라 쳐다보고 있는 건지.

    그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됐다.

    언제까지 기다리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겠지.

    슬슬 마탑으로 복귀하자.

    쿠르릉─

    어째서인가.

    순식간에 먹구름이 드리운 균열의 하늘.

    나는 옷매무새를 다듬으며 나아갔다.

    “하늘이 울부짖는군.”

    듣는 사람이 없어서 망정이지.

    하늘이 우는 것보다 내가 우는 게 빠르겠다.

    어쨌거나 서두르자.

    [온기] 버프가 만능이라 해도 비까지 막아주지는 못한다…….

    .

    .

    .

    가장 먼저 낌새를 알아차린 상위 화염 정령.

    파이어 드래이크였다.

    엎드려있던 파이어 드래이크가 몸을 일으켜 세웠다.

    “페이얀. 심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진다.”

    그 말에 페이얀은 뒤늦게 주변을 살폈다.

    그리고 알아차렸다.

    주변에 맴도는 ‘이질적인 정령’의 기척을.

    페이얀의 동공이 잘게 흔들렸다.

    ‘……이 기척은?’

    ……어둠의 정령!

    그건 정령학 선임 마법사인 페이얀조차 단 한 번도 목격한 적이 없는 정령.

    그러니 페이얀이 떠올릴 수 있는 건 선임으로서 지닌 정령학에 관한 지식밖에 없었다.

    ──────

    어둠의 정령은 그 태생부터가 다른 속성의 정령들과 다르다.

    ──────

    어둠의 정령은 특정한 조건이 갖춰져야만 모습을 드러내는 존재.

    페이얀이 그 조건을 떠올리다가 흠칫했다.

    호들갑을 떠느라 잊고 말았다.

    “이런……!”

    이곳이 텟퍼른의 영역이라는 것을.

    ──────

    어둠의 정령은 짙은 어둠에서 태어난 존재들. 그들이 출몰하는 곳은 아직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지역뿐이다. 출처가 밝혀지지 않은 곳, 그런 장소야말로 그들의 근원이었으니…….

    ──────

    아르카나 대륙 10대 불가사의이자.

    탐험가 연맹조차 탐사를 끝마치지 못한 [텟퍼른].

    그 첫 번째 조건을 충족시키는 지역이었다.

    거기에다 까다로운 두 번째 조건 또한.

    ──────

    ……해당 지역이 교감력으로 충만해야만 한다.

    ──────

    교감력.

    페이얀, 자신을 비롯한 마법사들이 소환한 정령들 덕분에.

    [텟퍼른 울타리] 균열 안엔 충분한 교감력이 넘실거렸다.

    페이얀이 소맷자락에 손을 집어넣었다.

    “머저리 같았어.”

    군것질거리 따위를 꺼낸 게 아니었다.

    그녀가 꺼내 든 건 마도구, 완드였다.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려 위험 변수를 간과했다.

    페이얀은 잘근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이래서야 정령학 선임으로서 실격인데.”

    파이어 드래이크와 마찬가지로.

    심상치 않은 낌새를 알아차린 정령들.

    숙련 마법사들은 마음의 준비를 한 모양이었지만.

    견습 마법사들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페이얀은 책임감을 느꼈다.

    ‘적어도 모험가들이 휘말리는 것만은 막아야 한다.’

    다른 걸 떠나서 마탑의 명성만은 실추시킬 수 없었다.

    소란을 일으키긴 싫었지만, 피할 순 없겠지.

    말했다시피 어둠의 정령은 ‘이질적인 정령’.

    ‘평범한 이들은 교감 자체가 불가능한 존재…….’

    그랬다.

    이질적인 마력.

    흑마도학에서 말하는 ‘적합한 마력’을 다룰 수 있는 자만이 어둠의 정령과 교감을 시도할 수 있었다. 그 정도 수준의 ‘적합한 마력’을 갖춘 자는…….

    ‘내가 아는 사람 중엔 마티스 선임밖에 없어.’

    하지만 이 자리에 마티스는 없었다.

    그러니까 페이얀은 이를 악물었다.

    “역시, 몰아내는 수밖에 없겠어.”

    “알아들었다. 페이얀.”

    “전력을 다해. 모험가들이 휘말리는 건 막아야 해.”

    그러나 페이얀의 비장한 각오가 무색하게도.

    이 자리엔 마티스를 대신할.

    아니, 능가하는 ‘적합한 마력’의 보유자가 있었다.

    또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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