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121화 (53/489)

◈ 121화. 덧씌워져 가는 역사 (1)

[악에 물든 일각의 지휘봉]

[등급 : 에픽]

[제한 : 없음]

[효과 : 봉인됨]

[설명 : 악마의 저주가 깃들어 그 효과가 봉인되었다. 제대로 된 효과를 알기 위해선 반드시 정화해야만 한다.]

서열 67위, 암두시아스.

녀석이 떨어트린 전리품은 짐승의 뿔을 깎아 만든 것 같은 지휘봉이었다.

그나저나 지휘봉이라니. 딱히 레벨 제한이 없는 걸 보면 효과가 평범하진 않겠지.

“열등한 족속치고 나쁘지 않은 안목이군.”

일단, 그랑펠의 심미안에는 합격점이다.

뭐, 등급부터가 에픽이었으니까.

어떤 효과를 가지고 있을지 조금은 기대해도 되겠지.

[피로 그려진 망각의 지도]

[등급 : 에픽]

[제한 : 없음]

[효과 : 봉인됨]

[설명 : 악마의 저주가 깃들어 그 효과가 봉인되었다. 제대로 된 효과를 알기 위해선 반드시 정화해야만 한다.]

서열 66위, 키마리스.

녀석은 지도를 뱉어낸 모양이었다.

지도라, 가장 먼저 보물지도가 떠오르긴 했다만.

지휘봉과 마찬가지로 정화하기 전까지 효과를 짐작하긴 어려웠다.

‘그나저나.’

……그래서 내가 이걸 받아서 챙겨도 되는 건가?

무려 [에픽] 등급 아이템.

내가 요란을 떨어가며 설명한 것처럼 등급만 봐도 귀하신 아이템이란 말이다.

무엇보다 [정순한 지식의 오망성]의 효과를 알고 있는 나였다.

‘같은 급의 사기템을 날로 챙기는 거잖아, 이건.’

암두시아스, 키마리스를 처치한 건 내가 아니었다.

전리품들도 각각 [운율의 마왕성], [방종의 마왕성]에 진입했던 선임 마법사들이 입수한 것.

그래, 그런 전리품을 마탑은 내게 건네온 것이었다.

이유는 더없이 간단했다.

-“활용법은 이호열 수석께서 가장 잘 알고 계시겠지요.”

이게 단순한 아이템이었다면…….

나는 청렴결백하신 성격 탓.

절대 전리품들을 받아서 챙기지 못했겠지.

그러나 악마의 아이템이었다.

그것도 마왕의 전리품.

더없이 부정한 기운을 띠고 있기에.

[구마의식]을 통해 반드시 정화할 필요가 있다는 뜻.

“그대들의 기대에 보답하지.”

그랬다.

대의(大意).

그랑펠의 대의에 비하면야, 나의 물욕은 태산 앞 티끌과도 같았으니. 나도 뻔뻔하게 받아들였다.

그래, 성의를 무시하는 것도 격식에 어긋나는 일 아니겠어?

암, 그렇고말고.

물론.

[악의로 불타는 눈동자]

[등급 : 에픽]

[제한 : 없음]

[효과 : 봉인됨]

[설명 : 악마의 저주가 깃들어 그 효과가 봉인되었다. 제대로 된 효과를 알기 위해선 반드시 정화해야만 한다.]

서열 64위, 플라우로스.

녀석을 처치하고 습득한 이 전리품만큼은 정말 오롯이 나의 힘으로 쟁취한 거니까. 적어도 이건 조금 뿌듯한 시선으로 바라봐도 되지 않을까?

“미관상 흉측하군. 더없이 형편없다.”

……생각한 게 무색하게도 내 입으로 흥을 깨는구나.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생김새는 눈알 그 자체였다.

그러니 심미안으로 살피고 어쩔 것도 없다는 거겠지.

나는 인벤토리에 전리품들을 챙기고 시선을 옮겼다.

상태창으로.

[이름 :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

[칭호 : 최후의 모험가]

[클래스 : 악마 사냥꾼]

[레벨: 425]

[능력치]

근력 : 67 / 민첩 : 73 / 마력 : 350 / 행운 : 6 / 심미 : 下

[보유 포인트 : 35]

착용했던 아이템을 해제한 덕분에 심미는 하향됐고.

마왕, 플라우로스를 처치하면서 상승한 레벨은 35레벨인가.

어마어마한 상승이었지만, 아쉬운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도 그럴 게 플라우로스는 무려 850레벨의 보스몹이었으니까.

‘100레벨마다 벽이 존재하는 느낌이야.’

날마다 체감이 되는데?

필요 경험치가 급격하게 상승하는 게.

200레벨 대에서 300레벨 대로 진입했을 때도 느꼈던 바.

이젠 400레벨 대에 진입하는 바람에 레벨 상승 폭이 대폭 꺾인 거겠지.

나와 엇비슷한 레벨 대의 랭커들이 듣는다면.

배가 불렀다고, 만족하는 법을 모른다고.

역정을 낼지도 모르겠지.

‘어디 내 입장이 돼봐라. 안 그러게 생겼나.’

그러나 내게는 최상위 랭커에 버금가는 레벨도 부족하다.

쏟아지는 과대평가를 현실로 만들기 위해선 아직도 갈 길이 멀었으니까.

그런 의미에선 희소식이었다.

“비로소 주제 파악이 되는 모양이구나.”

악마들의 활동이 잠잠해졌다는 소식은.

물론, 악마 사냥꾼이기에.

나는 악마들이 얼마나 영악한지 잘 알고 있다.

지금은 단지 눈치를 보는 것뿐.

언제라도 다시 마수를 뻗쳐올 수 있는 게 악마란 족속이었다.

“그렇게 엎드려 있는 모습이 너희에겐 어울린다.”

그러니까 나는 이 짧은 평화를 제대로 써먹어야만 한다.

그동안은 밑 빠진 독에 물을 붓기에만 급급했다면.

이젠 빠진 밑부터 제대로 복구할 시간이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내실을 챙겨야 한다는 말이지.’

그나저나…….

파놓은 살 구멍, 우물이 워낙 많아서 말이야.

어디부터 손을 대야 할지, 막막하군.

그러나 시작이 반이라는 말도 있으니.

무엇이든 그 첫걸음이 중요한 법.

또각─

그 사실을 알기에.

나는 우선 긍지가 이끄는 곳으로 향했다.

갈 길이 멀다면서 어디를 가느냐 묻는다면.

어차피 마탑에서 벗어나지 않을 거라 큰 문제는 없다…….

보글보글.

나는 끓는 물을 보며 읊조렸다.

“물이 식기 전에 돌아오지.”

*

가넷 홀.

반출된 최상급 마도구의 반납은 신속하게 이뤄졌다.

몇몇 선임 마법사들은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특히나 아쉬워 보이는 건 화염마법학, 벤쉬 윌리엄이었다.

“뭔가 금방 끝나버렸군요.”

“오히려 잘된 거 아닌가요?”

“맞는 말씀이지만, 이거 묘하게 아쉬운 마음이…….”

쩝.

벤쉬는 멀어져 가는 [소형 마력 태양]을 바라봤다. 제아무리 선임 마법사의 요청이라고 해도, 최상급 마도구의 반출은 쉽게 허락되지 않는다.

최상급 마도구로 무장한 선임 마법사.

그 자체만으로도 마탑을 제외한 모든 이들의 우려를 살 수 있었으니까. 애초에 벤쉬도 저 정도의 마도구를 다뤄본 건 처음이었다.

“……말 그대로 화룡이 된 기분이었는데.”

감질맛에 입맛을 다시는 벤쉬.

물론, 그 아쉬움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의 천적 아닌 천적.

마티스가 가넷 홀에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마티스는 청력까지 좋았다.

“그렇다면 유감이군, 벤쉬 윌리엄 선임.”

“……네, 네?”

“나는 화룡이라면 이를 가는 사람이라 말일세.”

“아니, 저는 그런 뜻이……. 카림제바를 말한 게 아니라!”

“됐네. 그에 관한 이야기는 추후 면담에서 나누도록 하지.”

“……추, 추후? 며, 면담이라뇨?!”

마티스 선임과 면담이라니!

상상만으로도 압박감에 속이 메슥거렸다.

일단, 피하고 보자.

벤쉬가 창백해진 얼굴로 가넷 홀을 빠져나가던 순간.

마르셀로와 치유학 선임, 벨리에가 그와 마주쳤다.

“얼굴이 창백하시네요. 좋지 않은 곳이라도 있으신가요?”

벨리에의 따뜻한 물음에 벤쉬는 애써 웃어 보였다.

“……조만간 심장이 좋지 않아질 예정입니다. 하하.”

“?”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마르셀로와 벨리에가 시선을 교환하기도 잠깐.

두 사람의 시야에 마티스가 들어왔다.

먼저 인사를 건넨 건 벨리에였다.

“간만에 뵙네요. 평안하셨나요?”

“문제 될 것은 없었습니다.”

“마왕성 균열에서는 두 분 다 고생하셨습니다. 마티스 선임, 그리고 벨리에 선임. 본의 아니게 두 분에게 중책을 떠넘기고 말았군요.”

호열과 마르셀로.

본의 아니게 두 수석이 같은 균열에 진입했었으니까.

나머지 두 균열의 책임자는 마티스와 벨리에가 될 수밖에 없었다.

마티스는 고개를 저었다.

“고생은 제가 아닌 이호열 수석께서 하고 계시겠지요.”

마탑에도 세간의 소식은 전해진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마탑의 로비에서 모험가들이 나누는 대화만 듣더라도 세상이 어떻게 굴러가는지 정도는 알 수 있다.

“고마웠어요.”

벨리에가 반출한 마도구를 반납하고는 몸을 돌렸다.

그녀의 옥빛 눈망울엔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저는 그동안 관심이 없어서 몰랐는데. 이 세계 사람들은 남에게 굉장히 관심이 많더군요? 정말, 이호열 수석에 관한 이야기가 끊이지 않는 게…….”

물론, 이번 마왕성 균열에서는 정식으로 마탑이 움직였다.

자신들에게도 적잖은 관심이 쏟아지게 됐다는 것이다.

벨리에는 소름이 돋은 팔뚝을 쓸어내렸다.

“저는 지금 받는 관심만으로도 부담스러운데.”

이호열 수석은 대체 어떻게 그 위치를,

막대한 부담감을 견디고 있는 걸까?

궁금한 걸 넘어서 존경스러운 마음이 들 정도였다.

저벅.

세 사람은 가넷 홀에서 빠져나와 계단을 올랐다.

마르셀로가 아까의 화제를 이어갔다.

“저 또한 그 무게를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기에. 조금이나마 짐을 나눠서 지고 싶었는데. 경께서는 그조차도 쉽게 허락하지 않으시더군요.”

“마르셀로 수석께서 부족하셔서 그러시는 게 아닐 겁니다.”

“자신만의 기준이 확고하시니까요. 이 수석께서는.”

호열만의 기준.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누구의 시선도, 평가도 의식하지 않는다는 건 확실했다.

“덕분에 마탑에 새 바람을 몰고 오셨죠. 몇 번씩이나요.”

굳이 설명할 것도 없이 정기 학회, 사전 검증에서 벌어졌던 일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은가? 그 어떤 선임 마법사, 학파의 체면도 고려하지 않고 불합격을 쏟아내던 호열이었다.

마티스와 벨리에.

두 선임의 호열에 대한 평가에 마르셀로는 작게 웃었다.

“두 분께서 그리 말씀해 주시니 안심이 됩니다.”

제삼자가 듣기엔 별다를 것 없는 인사치레.

그러나 마티스와 벨리에는 흘려들을 수 없었다.

“…….”

마르셀로의 말에 어떤 뜻이 담겨있는지 알고 있었으니까.

마티스는 앞서가는 마르셀로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전보다 야위었군.’

많은 생각이 들었지만, 마티스는 떨쳐냈다.

그러고는 입을 열었다.

애써 화제를 전환했다.

“공교롭게도 저희 모두 행선지가 같은 모양이군요.”

딱히 맞춘 것은 아니었거늘.

셋은 같은 곳을 향해 계단을 밟고 나아가고 있었다.

이내, 세 사람이 그 행선지에 다다랐다.

마르셀로가 말했다.

“영원히 기억하고, 기억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나아가기 위해서 잊어야 하는 것도 있는 법이니까요. 그러나 적어도 이번만큼은 반드시 인사를 드리고 싶었습니다.”

숙련 등급 이하의 마법사들에게는,

아직 알려지지 않은 장소.

『만년설이 잠든 곳』

그 앞에서 마르셀로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처음으로 해낸 반격이나 다름없으니까요.”

고작 마왕 셋을 쓰러트렸을 뿐이었다.

악마에게 농락당한 마탑의 복수라고 하기엔 턱없이 부족하겠지.

그러나 이건 엄연한 첫걸음이었다.

“……들어갈까요?”

침묵을 지키던 벨리에가 물었다.

세 사람이 『만년설이 잠든 곳』으로 진입했다.

그리고 마주했다.

“……!!!”

이곳에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인물과.

.

.

.

흑역사란 잊고 싶어도 잊지 못하는 것.

덕분에 나는 그랑펠의 설정을 선명하게 기억한다.

그 설정들이 내게 끼치는 영향 또한 알고 있다.

그러니까 내가.

나의 긍지가.

세니오스가 잠든 『만년설이 잠든 곳』을 찾은 이유 또한.

나는 짐작할 수 있다.

『위대한 가문의 후계자였으나 악마에게 그 가문이 몰락.

가문의 유일한 생존자인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 이하 그랑펠은 그 악마에게 복수하기 위해 악마 사냥꾼의 길을 걷게 됐다.』

그랑펠은 혼자다.

클라우디 가문의 유일한 생존자이며.

동시에 악크샨 최후의 악마 사냥꾼이니까.

그런 그랑펠에게 마탑이란 새로이 몸을 담은 곳.

그런데 그 일원인 세니오스가 악마에게 목숨을 잃었다.

세니오스의 죽음이 스스로 바라던 죽음이었든.

설령 긍지가 넘치는 최후였든.

악마가 관련된 이상.

그가 마탑의 원로 마법사인 이상.

그랑펠에게는 절대 가볍지 않은 죽음이라는 거겠지.

그랬다.

마왕 압살.

거기엔 세니오스에 대한 애도도 포함되어 있었단 말이다.

『그랑펠이 차기 가주로서 가장 먼저 몸에 익힌 건 사사로운 것에 일희일비하지 않는 것이었다.

클라우디 가문의 가주의 자리는 조금의 동요도 용납되지 않는 그런 자리였다.』

그랑펠식 애도가 얼마나 전해질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쨌거나 이것이 나의 최선입니다.

“세니오스 원로 마법사…….”

하여튼, 님이라는 호칭은 애를 써도 나오지 않는구나.

나는 세니오스가 잠든 관을 바라보다가 몸을 돌렸다.

그리고 마주했다.

……뭔데, 그 눈빛들은.

마르셀로, 마티스, 벨리에.

어째서인가.

상당히 감성적인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세 사람과.

*

톡.

“……?”

웬수가 괜히 웬수가 아니다.

3호, 이예림은 기척에 잠에서 깼다.

톡톡.

무언가가 창문을 두들기는 소리.

이젠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진짜아…….”

더듬더듬.

이예림은 간신히 눈을 뜨고 스마트폰을 집어 들었다.

일요일.

새벽 다섯 시 오십 분.

이예림이 베개에 얼굴을 파묻으며 신음했다.

“이호열, 하나뿐인 내 동생아. 너는 잠도 없냐……?”

스팸 메시지도 이 정도는 아니다.

매일 아침 부모님을 향해 날아드는 안부 편지.

덕분에 이예림은 상대적 불효자가 된 기분이었다.

오죽했으면 우리 최 여사님께서도, 플레이어인 호열이보다 네 혼삿길이 더 걱정이란 말씀까지 하셨을까?

벌떡─!

그러니까 이예림은 이불을 박차고선 소리쳤다.

“아니, 그냥 톡으로 좀 보내면 안 되냐?!”

드륵─!

창문을 여는 순간 날아드는 편지.

그 편지가 이예림의 얼굴에 찰싹─ 달라붙었다.

이예림은 부글부글 끓는 속에 참을 인을 새겼다.

“너어어어어……. 이것도 마법이지?!”

나이를 먹었든, 철이 들었든, 뭐든.

웬수는 웬수다.

“……그래도 고생했으니까. 이 누님이 봐준다, 짜식.”

가족은 가족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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