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6화. 마왕성 (2)
확실한 승전보.
그를 위해 내게는 착실한 준비가 필요했다.
아니, 착실하게 준비할 수밖에 없었다.
하르콘 휘하 라이언 하트 기사단.
그림자 용병단.
여신교단.
마탑.
이유를 불문하고, 나를 따르는 아군에게 밑천을 보이지 않기 위해서라도 말이야.
그런 의미에서 간만에 마탑, 가넷 홀에 들렀다.
비로소 390레벨.
받는 과대평가에 비하면 아직 한참 부족하겠다만.
‘몇 달 전에 비하면 성장했지.’
가넷 홀의 마도구를 둘러보고 있자니.
처음 가넷 홀에 들렀을 때가 떠오른다.
레벨 제한 때문에 군침만 질질 흘리다가 결국, 100레벨 제한짜리.
이 [육망성 브로치] 하나를 챙겨서 나온 게 고작이었지.
그래,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은 선택지가 많아졌다.
“이호열 수석님께서 마지막이시군요.”
가넷 홀을 관리하는 숙련 마법사.
그가 내게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건네왔다.
그러더니 한마디를 덧붙였다.
“부디 수석님의 안목에 맞는 마도구가 남아있길 바랍니다.”
가넷 홀의 마도구야.
내게는 여전히 그림의 떡이 대부분이거늘.
하지만 나는 곧장 그 말의 뜻을 알아들었다.
‘목적은 마왕을 압살하는 것.’
나는 마르셀로를 포함한 마탑의 선임 마법사들에게 그 계획을 전달했다.
내 뜻은 정확하게 전달됐는지. 그 이후로 양피지엔 [마도구 대여]에 관한 글줄이 끊임없이 떠올랐었다.
‘다들 어마어마한 마도구를 빌려 가셨군.’
[환상의 황금상].
[소형 마력 태양].
[대현자의 지팡이]까지…….
대충 둘러봐도 굵직한 마도구들이 보이지 않았다.
선임 마법사들이 대여해간 거겠지.
분명 사용할 수 있어서 대여한 걸 텐데 말이야.
나는 보이지 않는 스무 점의 마도구를 대충 떠올렸다.
‘그중 레벨 제한이 가장 낮은 게 800레벨이었으니까.’
선임 마법사들의 레벨은 최소 800레벨이라는 거겠지.
새삼스럽게 또 한 번 격차를 깨닫는다.
나름대로 성장했다고 생각했거늘.
‘하늘과 땅 차이구나.’
더군다나 나는 카림제바와 세니오스.
그리고 그들조차 범접할 수 없는 상위 마왕의 존재까지 짐작하고 있었으니까.
하늘과 땅. 그리고 그런 하늘과도 비교할 수 없는 천외천(天外天)의 존재들까지.
‘……아직도 갈 길이 멀었군.’
원대해도 너무 원대한 목표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사기가 떨어질 법도 하겠지.
그러나 내가, 그랑펠이 어디 평범한 사람이던가.
“나쁘지 않군.”
천외천의 하늘조차 찌를 수 있을 듯한 드높은 긍지!
덕분에 나는 태연하게 대여할 마도구를 고를 수 있었다.
어차피 선임 마법사들이 대여한 마도구들은 390레벨에 불과한 나로서는 착용조차 할 수 없는 아이템이었으니까.
“이걸로 하지.”
나는 내 수준에 맞는.
그나마 착용이 가능한.
총 세 점의 마도구, 아이템을 대여했다.
[돌개바람의 증표]
[등급 : 유니크]
[제한 : Lv.350]…….
[명품-백색(百色)의 겉날개]
[등급 : 유니크]
[제한 : Lv.350]…….
[명품-벼락 맞은 나뭇가지 완드]
[등급 : 유니크]
[제한 : Lv.380]…….
반지, 의복, 그리고 완드.
그랑펠의 심미안에도 부합하며 내가 사용할 수 있는 레벨 제한의 아이템은 그렇게 셋 정도였다.
내가 선택한 마도구에 숙련 마법사는 흠칫한 눈치였다.
“……정말 이 마도구들만으로 괜찮으시겠습니까?”
다른 걸 고르고 싶어도 레벨이 부족해 어쩔 수 없다.
물론, 자신의 부족함을 고백하는 것?
가슴 속에 긍지가 있는 한 불가능한 일이었으니.
나는 뻔뻔하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으로도 충분하다.”
“……!”
이내, 내게 쏟아지는 존경 가득한 시선.
어떻게든, 오해한 게 분명하거늘.
그 시선조차 당연하게 여기는 내가 있을 뿐이었다.
심히 민망하구나…….
.
.
.
그러나 그 수치심과 별개로.
그랑펠의 안목은 대단했다.
그 증거가 상태창에 나타나고 있었다.
[이름 :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
[칭호 : 최후의 모험가]
[클래스 : 악마 사냥꾼]
[레벨: 390]
[능력치]
근력 : 67 / 민첩 : 73 / 마력 : 350 / 행운 : 6 / 심미 : 中
[보유 포인트 : 0]
[심미] 스탯이 상승했다.
아마도 [명품] 아이템을 추가로 두 점이나 착용한 덕분이겠지. [下]에서 좀처럼 변하지 않던 스탯이 상승해서 좋기는 하다만…….
그를 체감하기란 제대로 된 마법을 발현하기 전까지는 불가능하겠지.
그러나 안달 낼 필요는 없었다.
──────
신규 균열, ‘마왕성’이 추가됩니다.
신규 균열, ‘마왕성’이 추가됩니다.
신규 균열, ‘마왕성’이 추가됩니다.
──────
예상했던 그대로.
업데이트 내역에서 마왕이 모습을 드러냈으니까.
그것도 셋씩이나.
뭐, 이런 최악의 상황조차 예상했기에 놀람은 없었다.
나는 곧장 행동에 돌입했다.
깃털펜을 들어 양피지에 휘갈겼다.
스스슥─
──────
지금부터 절차에 따라 마왕을 압살한다.
──────
*
[마왕성] 균열.
붕괴 진행도는 실시간으로 치솟고 있었다.
평범한 균열이 기껏해야 0.1퍼센트씩 붕괴도가 상승하는 시간에 마왕성 균열은 그 10배인 1퍼센트씩 붕괴도가 상승하고 있는 탓이었다.
“……이런 붕괴 속도는 본 적이 없습니다.”
“저 속에서 얼마나 날뛰고 있다는 거지?”
“균열조차 감당하기 힘들 정도의 힘이라는 건가?”
수많은 우려 속에서.
떠오른 추가 업데이트 내역.
거기엔 마왕성 균열의 적정 레벨이 명시되어 있었다.
[운율의 마왕성]
[적정 레벨 : Lv.800]
[방종의 마왕성]
[적정 레벨 : Lv.800]
[수렵의 마왕성]
[적정 레벨 : Lv.850]
“……!!!”
그 내역이 잘못된 건 아닐까.
그게 아니면 내 눈이 헛것을 보고 있는 게 아닐까.
쓸데없는 의심을 하게 만드는 수치였다.
“800레벨짜리 균열이라고? 저런 걸 대체 어떻게……?”
[깨진 차원의 틈] 균열과는 상황이 달랐다.
긴급 업데이트와 정기 업데이트의 차이.
확실히 버그 같은 게 아니란 소리였으니까.
그러나 경악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적정 레벨에 이어서 마왕성의 주인.
마왕들의 레벨까지 떠오른 것이었다.
[마왕, 암두시아스 : Lv.800]
[마왕, 키마리스 : Lv.820]
[마왕, 플라우로스 : Lv.850]
“이런 미친.”
그야말로 마왕(魔王).
그 강림만으로도 세계를 공포로 몰아넣는 존재들.
셋 중 레벨이 가장 낮은 암두시아스가 모습을 드러냈다고 해도 인류는 마땅한 해결책을 제시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녀석이 세 명의 마왕 중 최약체에 불과하다니.
“……선배, 지부장님?”
성현준.
윤수겸.
그리고 AAU 한국 지부장, 박민재.
그들 또한 그 절망적인 업데이트 내역과 마주했다.
성현준이 간신히 말을 이었다.
“그, 그래요! 뭐, 이번 마왕성은 어떻게 핵폭탄을 투하해서라도 막아낸다고 쳐요. 그다음은요? 그 다음 마왕은 어떻게 해야 하는 건데요, 저희?”
마왕, 데카라비아.
녀석을 통해 알아냈던 마왕에 관한 정보.
마왕의 모티브는 72 악마이며.
마왕들 사이에도 서열이 존재한다.
서열에 따르면 데카라비아는 최하위권에 속한다.
그 정보는 이번에 등장한 세 마왕에게도 유효했다.
그 사실을 알기 때문에.
두 사람은 성현준의 말에 뭐라고 대답할 수 없었다.
박민재가 허탈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 괴물들이 고작 67, 66, 64위에 불과하다는 거잖아.”
67위, 암두시아스.
66위, 키마리스.
64위, 플라우로스.
그랬다.
녀석들 또한 넓게 보자면.
데카라비아와 마찬가지로 72 마왕 중에선 약체에 속했다.
“지부장님…….”
불과 며칠 전, AAU는 주제 파악이란 걸 끝마쳤다.
과거처럼 모든 위협을 예측할 순 없겠지만, 아르카나로부터 인류를 보호하기 위해 지금처럼 전력을 기울이겠다고.
그런데.
“……이래서야 저희가 뭘 할 수 있을까요?”
최소 800레벨, 최대 850레벨.
저 마왕들이 약체라면.
대체 상위 마왕들의 레벨은 어떤 수준이란 말인가?
저건 말 그대로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위협이었다.
간신히 끝낸 주제 파악조차 부정당하는 현실이었다.
“빌어 처먹을.”
박민재는 침음을 삼켰다.
절망, 컴컴한 어둠 속에 처박힌 느낌.
그래서일까.
며칠 전, 자신이 떠올렸던 유일한 살 구멍.
희망인 이호열에게 생각이 닿았다.
‘이호열의 예상 레벨은 대략 900레벨.’
플레이어는 플레이어가 더 잘 알아볼 테니까.
록스를 비롯한 랭커들의 평가와 그동안 보여준 행보를 종합해 예측한 이호열의 레벨이었다. 박민재는 아르카나가 게임이던 시절의 상식을 끄집어냈다.
‘일반적인 몬스터였다면 상대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레벨을 앞세워서 말이다.
그러나 네임드 몬스터만 하더라도 레벨을 능가하는 강함, 까다로운 패턴이 존재한다. 그 사실을 [포식자의 늪지대] 균열에서도 확인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상대는 마왕이었다.
업데이트 내역에도 명시되어 있듯 보스 몬스터란 말이다.
‘제아무리 이호열이라고 해도…….’
게다가 레벨이 50에서 100이나 앞선다고 하더라도.
보스 몬스터를 홀로 사냥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니, 보스 몬스터에게 도달하는 것부터가 어려운 일이겠지.
‘시스템상, 네임드 몬스터가 열댓 마리는 붙어있을 테니까.’
잘근─
박민재는 마른 입술을 깨물었다.
데카라비아 때의 광경이 떠올랐다. 네임드 몬스터, 악마 군단장은 물론. 어마어마한 물량을 자랑하는 마왕군도 빼놓고 생각할 수 없었다.
‘그 포위망을 뚫고 마왕에게 도달한다고?’
하나라면 모를까.
마왕성 균열은 총 셋이었다.
심지어.
‘프로스트 때와는 상황도 달라.’
당시 프로스트는 완전히 데카바리아의 영역이 되지 않았었다.
플레이어들에게 떠올랐던 탈환 퀘스트가 그 증거였다.
그러나 이번엔 마왕성, 마왕의 본진에 쳐들어가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공략의 난이도가 차원이 다르리라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니까 머리를 굴릴수록 나오는 건 한숨뿐이었다.
“지부장님. 이호열 플레이어가 움직였다고 합니다.”
“……그래? 진짜 한결같네.”
“호열 씨한테는 두려움이라는 게 없는 건가.”
그렇기에 이호열, 그가 움직였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에도 마냥 기뻐할 수가 없었다.
들뜬 매스컴과 다르게 자신들은 이미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돌려보지 않았던가?
“젠장.”
이호열.
그가 사지로 걸어 들어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할 수만 있다면 말리고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 불편한 감정은 오래가지 않았다.
속속들이 정보가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바, 박 지부장님?!”
프로스트, 라이언 하트 기사단.
유스라 왕국, 그림자 용병단.
성지 뮤온, 성기사단.
그리고 마탑까지.
그들이 마치 이호열의 발걸음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것처럼 동시다발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박민재는 헛웃음을 뱉었다.
내가 지금 뭘 보고 있는 거지……?
“이게 무슨 치트키를 쓸 수 있는 게임도 아니고.”
플레이어로서는 움직이는 게 불가능한 세력을.
“동시에 넷이나 움직이고 있다고?”
그래, 백번 양보해서 그림자 용병단까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이해관계가 일치하면 목숨도 거는 게 아르카나의 용병들이었으니까.
“말도 안 돼…….”
하지만 나머지는 설명할 수 없다.
설령 관계도와 영향력이 최대치에 도달했다고 하더라도.
저들은 자신들의 신념을 최우선으로 움직이는 이들이란 말이다.
“대체,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설마, 이호열이 저들의 신념조차 움직이게 하였다는 것인가?
설마 하는 생각이 점점 커졌다.
성현준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가능하지 않을까요? 마왕성 균열 클리어.”
물음에 박민재와 윤수겸, 두 사내는 침묵했다.
라이언 하트 기사단과 뮤온의 성기사들.
그들의 수준은 짐작할 수 있었다.
분명 이호열에게 큰 전력이 되겠지.
‘하지만 그걸로도 부족할지 몰라.’
역시나 하나라면 모를까.
마왕은 셋이었으니까.
그러니 마왕성 공략의 행방은 그림자 용병단과 마탑에게 달린 셈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수준은 아르카나의 개발진이었던 자신들조차 짐작할 수 없었다.
‘하나는 흑막. 하나는 대륙 최고의 무력 집단.’
부디 그 호칭에 걸맞은 활약을 보여주기를.
간절히 빌면서 지켜보는 게 고작이었다.
물론, 불편한 감정과 마찬가지로.
그 기도도 오래가지 않았지만.
.
.
.
[운율의 마왕성]
[적정 레벨 : Lv.800]
[균열 붕괴도 : 17.9%]
[보스 몬스터 : 마왕, 암두시아스]
▶ Lv.800
[네임드 몬스터 : 악마 군단장, 블랙혼 및 28마리]
▶ Lv.650
[몬스터 : 악마 군단장 휘하 대략 100,000마리]
▶ Lv.500
[진입자 명단]
[마탑 : 흑마도학 선임, 마티스 딘 카를 / 화염마법학 선임, 밴쉬 윌리엄 / 환각마법학 선임, 나스로우]
[그림자 용병단 : 2석, 울프 사카린 / 6석, 이자벨마를 / 7석, 알카리]
[여신교 : 성기사단장, 탈림 에베르 휘하 18,000여 명]
지켜보는 이들이 그 자세한 면면까지는 알 수 없었다.
마탑과 그림자 용병단에 관해 알려진 정보 또한 극히 일부에 불과했으니까.
그러나 장담할 수 있었다.
펼쳐진 건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결과였다.
“……!”
허공에서 소멸하는 균열.
균열이 클리어 됐다는 뜻.
믿을 수 없는 건 그 시간이었다.
“이, 이거 꿈 아니죠. 선배?”
그들이 마왕성 균열에 진입하고.
채 10분도 지나지 않았을 무렵.
벌어진 광경이었으니까.
그 모습을 모니터로 지켜보던 박민재가 중얼거렸다.
“……짐작은커녕 상상조차 못 한 수준이었어.”
말 그대로.
마왕성이 짓밟힌 것이었다.